
주점 이야기(수, #SF)
비가 궁상맞게도 내리는군요.
이렇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손님도 없고 바 앞에서 잔을 닦는 것도 질리기 마련입죠.
무료함을 달랠 겸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드릴까요?
아이구, 사양하지 마세요.
뭔가 이야기를 하지 않고선 입에 가시가 돋아날 지경이라니깐요.
보름 전에도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날도 덥고 습해 가만히 있어도 짜증이 나는 그런 날이었습죠.
오늘과 다른 점이라면 그날은 갑작스럽게 비가 와서 우리 주점 안 테이블이 빈자리 하나 없이 가득 차 있었다는 겁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죠.
무료한 것보단 바쁜 게 차라리 나아요.
맥주통에서 맥주를 따라 손님들에게 가져다주면 금세 동이 나버려 또 따르러 가야 했습죠.
그날따라 가게 안 손님들은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모여 세상의 축소판처럼 느껴졌습니다.
피부가 거무죽죽한 윰스인, 창백한 안색의 샤인네트워크인, 림페리온 연방에 속한 소국들의 사람들까지 전 행성 사람들이 모인 듯했죠.
사람들은 사소한 것으로도 쉽게 짜증을 내고 화를 냅니다.
좀 전문적으로 말하면 불쾌지수라고 하던가요?
아, 맞군요.
아직 나도 머리가 녹슬지 않았나 봅니다. 하하하.
손님들은 갑작스레 내린 비를 피해 가게 안으로 들어오긴 했지만, 옷도 흠뻑 젖고 내부 공기는 텁텁하여 구시렁거리기 시작했죠.
이런 말 아시려나 모르겠어요.
마른 똥보다 젖은 똥이 더 더럽다.
말 그대로 먼지에 찌든 여행자들이 섞여 있다 보니 물에 젖어 퀴퀴한 냄새가 주점 안에 진동하더라 이 말입죠.
노골적으론 티를 안 내도 너 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내뱉는 가운데 중앙에서 패거리를 짓고 술을 마시던 손님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더러운 윰스 놈들은 특별한 행사 때만 목욕해서 소똥 냄새가 난다고.”
라고 말이죠.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입니다.
윰스인들이 특별한 행사 때만 탕에 몸을 담가 씻는다는 말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불결하진 않거든요.
전 세계를 통틀어 봐도 윰스인처럼 청결한 민족도 없을 겁니다.
그들은 하루에 세 번 신께 기도를 드리는데 언제 어느 때라도 빼먹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행위입죠.
경건한 의식이니만큼 신체도 청결하게 닦아야 한다는 게 그들의 의식 수준입니다.
항상 가방 안에 물통과 수건을 가지고 다녀 기도 시간이 다가오면 몸을 정성스럽게 닦아 내리지요.
시선이 많은 길가에서야 얼굴과 손, 발 등을 닦을 뿐이지만 밤에 드리는 기도는 대부분 집이나 사원이기에 공들여 신체를 닦아 낸답니다.
그 사실을 어찌 아냐고요?
아이구 손님, 내가 벌써 이 장사를 45년째 하고 있습니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손님들을 대접하며 들은 귀동냥이 45년을 쌓였습니다.
더 이상 설명 안 해도 이해하셨겠지요?
아무튼 가게 안 손님들 대부분이 림페리온 연방에 속한 사람들이긴 했지만 두세 명 정도 윰스인이 섞여 있었습죠.
그들은 한눈에도 구별할 수 있어요.
항상 순례자 복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들에게 타국 땅은 불경한 장소입니다.
신의 보살핌이 닿지 않는 곳이라나 뭐라나요.
그들은 신성한 색으로 여기는 백금색 순례복을 입는데 치렁치렁 늘어뜨린 로브는 발까지 닿고 머리 위엔 두건을 덮어써서 얼굴을 살펴볼 수도 없지요.
윰스에서 온 손님들은 구석 끝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조용히 음료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죠.
눈에 띄는 복장만 아니었다면 존재감이 희박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손님들이었습니다.
무례한 발언을 한 손님이 아니었다면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사라질 손님들이었는데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셈이었죠.
모욕을 당하자 참을 수 없었던지 그중 한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그렇다고 의자를 뒤로 벌컥 제치면서 분노를 온몸으로 표현한 것도 아니었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아니, 이런 표현이 더 어울릴까요?
옥상에서 깃털을 떨어뜨리면 바람을 타고 둥실둥실 떠다니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 말이에요.
참으로 우아한 몸짓이었습니다.
시끌벅적하던 가게 안 분위기는 물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그 윰스인은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미끄러지는 움직임으로 모욕을 한 손님이 있는 테이블로 걸어갔지요.
백금색 두건을 걸친 그 이의 얼굴은 그늘져 살펴보기 힘들었습니다.
윰스인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키가 머리 하나 정돈 더 크지요.
훤칠한 키에 마른 체격을 지녔기에 흡사 허깨비를 보는 듯했습니다.
윰스인이 테이블 앞에 서자 모욕적인 발언을 한 손님의 얼굴에 흥미로운 표정이 감돌기 시작했어요.
그 또한 흑인이었죠.
헌데 미묘하게 틀려요.
윰스인들은 구릿빛에 가까운 피부를 지니고 있지만 그 손님은 콜타르를 바른 것처럼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었지요.
예, 맞습니다. 본퓨아낭에서 올라온 사람이죠.
대부분 그 나라 출신 사람들은 이곳에 오면 슬럼가에 정착하곤 합니다.
매우 고약한 부류들이죠.
일도 안 하고 불평들만 늘어놓으며 사회에 해악만 끼치는 몹쓸 놈들이에요.
내가 결코 그놈들에게 돈을 뜯기거나 행패를 당해서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툭 튀어나온 미간엔 눈썹도 밀어 흡사 한 마리 오랑우탄을 보는 것 같았습죠.
본퓨아낭인들은 대부분 곱슬머리이지만 그는 유달리 직모였어요.
군인처럼 빳빳하게 세워 각을 준 머리였지요.
네모난 사각 턱에 몸 골격이 탄탄한 게 여간 사나워 보이는 인상이 아니었어요.
호리호리한 윰스인 따윈 한 주먹에 나가떨어질 것 같아 보였죠.
윰스인은 흑인에게 말했어요.
숲속을 거닐다 보면 귓가로 들리는 산들바람 같은 목소리였죠.
“실례지만 방금 한 말이 진심이라면 거두어 주시겠습니까?”
시를 낭송하듯이 낭랑한 목소리의 말투는 매우 정중했습니다.
헌데 대답하는 흑인의 말투는 고약했지요.
“아, 이거 어디서 똥 냄새가 나네. 야, 얘들아. 똥 냄새 나지 않아? 어디서 파리가 왱왱거리는데 냄새나고 시끄러워서 살 수가 없잖아. 캬하하하.”
바로 앞에서 사과 요청을 하는데도 본 척 만 척하며 자기들끼리 농지거리를 하는 거예요.
보던 내가 화가 날 지경이었습죠.
그러나 윰스인의 음성 톤은 한결같았어요.
분노하는 기색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죠.
놈들이 대놓고 무시하는데도 그는 한층 더 정중하게 말했어요.
“타국에 온 여행자에게 관대하지 못하군요. 당신들과 언쟁을 벌일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윰스 전체를 비하한 발언을 거둬 주실 의향은 없으신지?”
놈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옳다구나 싶은 거겠죠.
놈들은 만만한 손님들을 물색해 먹잇감이 결정되면 탐욕스런 하이에나들처럼 물고 늘어집니다.
일부러 시비를 걸어 행패를 부리고 피해보상비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는 것입죠.
아니나 다를까 윰스인이 말을 끝내자마자 놈들은 한꺼번에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쌌어요.
단 한 명, 놈들의 대장인 흑인만이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거만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죠.
놈들 중 한 명이 윰스인의 어깨에 손을 대고 천박한 웃음소리와 함께 입을 열었습니다.
“이봐, 너한테서 나는 똥 냄새가 코에 진동을 한다잖아. 우리 형님께서 하신 말씀 못 들었어? 보아하니 귀가 먹었나 본데 내가 귓밥 좀 파내 주랴?”
그놈은 허벅지에 묶인 칼집에서 칼을 꺼내 윰스인의 면전에 대고 툭툭 건드려 보며 협박을 했습니다.
잠시 윰스인이 침묵을 지키자 그가 겁먹은 줄 착각한 깡패 놈들은 킬킬거리며 웃어댔지요.
그때였습니다.
윰스인은 입을 열었죠.
정말 싸늘한 목소리였어요.
말투는 정중했지만... 위스키 잔에 얼음을 넣으면 뿌옇게 서리가 서리죠?
마치 그런 음성이었어요.
“선지자 무하마드께서 이르시길 타인의 허물을 세 번까진 용서하라 하셨습니다. 당신들은 교양이 부족한 사람들이로군요. 더 이상 모욕을 하면 저도 가만있지는 않겠습니다.”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어요.
이미 윰스인에게선 미약하게나마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지요.
그걸 어찌 아냐고요?
아이고 손님께선 질문도 많으십니다그려.
나 같은 일반인들도 사이킥 에너지의 흐름은 볼 수가 있습죠.
네, 그 사이킥 말이에요.
윰스인들은 사이킥을 다루는 능력이 출중하지요.
놈들은 정말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고 만 거예요.
나처럼 능력은 없어도 흐름을 볼 줄 아는 눈을 지녔다면 그놈들은 윰스인의 경고를 무시하진 못했을 겁니다.
아, 흑인은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어요.
애들 장난을 지켜보듯 가벼운 눈길로 보다가 심상찮은 안색으로 바뀌었거든요.
만만한 상대가 기죽지 않고 대항하자 칼을 든 녀석이 윰스인을 공격했어요.
물론 죽일 생각은 아니었겠죠.
피라도 보이면 살려달라고 빌게 할 생각으로 칼을 휘둘렀을 거예요.
그러나 놈의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았습죠.
놀랍게도 은빛 칼날은 윰스인이 내민 손바닥 앞에서 멈춰 있었어요.
손바닥과 칼날 사이에는 반 뼘 정도 공백이 존재하였는데, 마치 그 안에 투명한 벽이라도 있는 마냥 녀석이 안간힘을 쓰는데도 조금도 파고 들어가지 못하는 거예요.
여드름이 잔뜩 난 녀석의 얼굴이 풀무처럼 잔뜩 상기되고 입에선 탁한 신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때였어요.
윰스인이 손바닥을 반대로 빙글 돌리자 녀석의 몸이 어린애 장난감처럼 가볍게 공중에서 360도 돌았습니다.
보름 정도 고기 맛을 못 보고 곯은 살쾡이처럼 비쩍 마른 녀석은 나무 의자에 곤두박질쳐져 버렸습죠.
덕분에 아까운 의자 하나만 박살 나 버렸어요.
난 반드시 수리비를 받아내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습죠.
뭐라고요 손님?
흥 떨어지게 이야기하지 말고 본론만 이야기하라고요?
흠. 뭐 알겠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야기 듣는 자세가 안 되었구먼.
아, 아니에요. 이야기를 계속합죠.
칼을 들이밀던 녀석이 바닥에 나동그라지자 놈들도 윰스인이 예사내기가 아닌 걸 깨달은 모양이었어요.
서 있는 놈들 중 눈빛이 매서운 녀석이 공격하라고 외쳤죠.
놈들은 삽시간에 윰스인에게로 달려들었어요.
건장한 건달 놈들이 자그마치 일곱 놈인데 윰스인이 아무리 신통방통한 능력을 쓰더라도 어디 당해내리라고 여겼겠어요.
근데 이게 웬일인걸요.
처음에 나가떨어졌던 녀석은 체격이 왜소해서 그렇다 치더라도 윰스인보다 배는 될 덩치들이 추풍낙엽처럼 산산이 떨어져 나가는 거였습니다.
덕분에 가게 안은 난장판이 되었습죠.
일반 손님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가게를 뛰쳐나가고, 좀 담력 있는 손님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어요.
윰스인은 마치 옷에 먼지라도 턴 듯 담담한 태도로 홀로 앉아 있는 흑인을 바라봤지요.
윰스인을 올려다보는 흑인의 시선은 한 마리 검은 재규어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사냥의 가치가 있는 먹잇감을 찾았을 때의 그 눈빛이었죠!
깍지 낀 손으로 턱을 괴던 흑인은 자리에서 일어섰어요.
그리고 말했죠.
“호우, 간덩이가 부은 녀석이라고 여겼더니, 제법 한따까리 하는구먼. 그러나 애석한걸? 이 세상에 사이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고 여긴다면 큰 오산이야. 어디 그 알량한 실력을 확인해 보실까!”
말을 마친 녀석은 양손의 엄지를 위로 세우고 검지 중지를 앞으로 내세워 서부의 총잡이 같은 포즈를 잡았어요.
녀석이 호쾌한 기합 소리를 내자 손가락 끝에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더니 총알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갔어요.
그저 3류 건달로 알고 있었던 흑인이 사이커란 걸 알게 되자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죠.
그런데 놀라운 건 이것만이 아니었어요.
흑인이 자신만만했던 것도 사이커란 힘을 믿어서였는데, 윰스인은 흑인의 실력을 뛰어넘는 강력한 사이킥 힘을 지닌 사이커였어요.
쉬운 일인 마냥 양팔을 벌리고 위아래로 반원을 그리자 붉은 막이 생겨났습니다.
흑인이 쏘아낸 푸른빛 탄환들은 바위에 던진 계란처럼 붉은 막에 닿자마자 비눗방울 터지듯 허공 속으로 사라져 버렸습죠.
눈이 좀 휘둥그레진 게 놀란 표정이었지만 아직 흑인의 얼굴엔 자신만만한 미소가 남아있었어요.
비장의 카드를 숨겨둔 것이죠.
“뭐야. 제법이잖아. 좋아, 한 단계 더 올려 볼까!”
흑인이 입고 있는 검은 가죽 점퍼가 부풀어 올랐어요.
어깨와 가슴에 엑스 자로 새겨져 있는 용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죠.
양주먹을 명치 부근에 댄 흑인은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상체가 미세하게 떨릴 정도였어요.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흑인은 양팔을 윰스인에게로 뻗었습죠.
그러자 이번에는 구체가 아니라 굵은 섬광이 윰스인을 덮쳤습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습죠.
맨몸으로 첨단 무기와 상응하는 힘을 쏟아 냈으니까요.
흑인이 힘을 모으고 있던 모습을 심상치 않게 여긴 윰스인도 미리 손을 쓴 모양이었습니다.
윰스인 또한 흑인이 쏘아낸 섬광에 맞먹을 자색 섬광을 쏘아내었지요.
두 사람이 발산한 두 가지 색으로 인해 지켜보고 있던 손님들은 눈이 부셔 손으로 눈을 가리거나 눈을 감았습니다.
예? 내가 어떻게 그걸 기억하느냐고요?
손님도 참 흐름 끊기게시리. 내 얼굴을 보세요, 손님.
선글라스 끼고 있는 게 보이시죠?
손님도 이해가 좀 느리시군요. 아, 알았어요 이야기를 계속합죠.
다른 사람들은 못 봤을지 몰라도, 나는 똑똑히 이 두 눈으로 봤습죠.
참으로 장관이었어요.
두 사람이 쏟아낸 사이킥 에너지는 팽팽하게 대립하였습니다.
흑인이 자신감 있어 하던 모습도 이해가 갔지요.
한 삼, 사 초 간은 대등한 대결을 벌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흑인은 정신을 집중하느라 못 느꼈을 테지만 나와 윰스인은 알고 있었어요.
조금씩 윰스인의 힘이 흑인의 힘을 밀어내고 있다는 것을.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려울 만큼 미세하게 밀리기 시작했던 섬광 대결은 한순간에 결정 나버렸습니다.
윰스인은 흑인의 몸을 상하게 하지 않을 틈을 노리느라 일부러 힘을 아끼고 있었던 것입죠.
안간힘을 다해 흑인은 버티려고 애써 보았지만 댐 벽 사이로 물이 새는 것처럼 이미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어요.
여담이지만 중급 사이커가 다루는 사이킥 에너지는 일반 총과 비슷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흑인이나 윰스인이나 내가 볼 땐 상급 사이커였어요.
그 위력은 총 따위완 비교가 안 되지요. 탱크나 전투기에서 발사하는 포탄과 미사일에 맞먹는 위력이에요.
나는 신을 믿지 않지만 그때만큼은 신에게 기도를 올렸죠.
제발 내 가게를 지켜주세요라고요!
흑인이나 나나 신보단 윰스인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했어야 했습니다.
윰스인들은 종교에 관련되면 비이성적으로 변해 광기를 보이기도 하지만 평상시엔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이성적인 이들이었지요.
그가 쏟아낸 섬광은 흑인을 산산조각 내버릴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닿기 전에 사이킥 에너지 출력을 멈춰버렸습니다.
흑인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분노하는 표정으로 바뀌었어요.
살았다는 안도감보다 치욕이란 감정이 앞서서였겠죠.
짐승이나 내뱉을 만한 포효를 내지른 흑인은 용이 새겨진 점퍼를 벗어 던졌어요.
점퍼 겉으로도 울룩불룩한 근육과 골격이 엿보였는데 완전히 드러낸 흑인의 상반신은 아주 위협적이었습죠.
사람들은 눈부신 와중에도 사위를 분간할 수 있을 만큼 시력이 돌아오자 흑인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그 괴물 같은 근육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걸 보고 기겁한 것이지요.
허나 나는 더 놀라운 것에 시선이 향해 있었어요.
그의 목덜미와 어깨, 등에 박혀있는 작은 전지 같은 물체였죠.
왜 놀라웠냐고요? 설명해 드립죠.
그건 보통 전지가 아니었어요. 사이킥 에너지를 담아두는 사이킥 전용 전지였죠.
이야기가 길어질지도 모르겠는데, 사이킥 에너지란 사람이나 동물부터 나무나 돌 같은 무생물까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지만 사이킥 에너지를 품고 있습죠.
사이킥 에너지란 건 자연스럽게 생기는 에너지지만 개인에 따라 갖고 있는 양의 차이가 있어요.
한계치 이상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이 말입죠.
그런데 흑인이 등에 박아둔 전지는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편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이킥 에너지는 몸 밖으로 나오면 전류와 비슷한 성질을 띠죠.
그 전류 에너지를 특별히 제작한 전지에 응축시켜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인체의 경락이라 불리는 사이킥 회로에 박아두고 개방한다면 댐 수문을 열듯이 한꺼번에 힘의 물결이 몸 안으로 들어와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죠.
일종의 편법 같은 행위입니다.
분노에 가득 찬 흑인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 윰스인에게 말했어요.
“이제부터가 본게임이야. 깔본 것은 사과하지. 하지만 내가 본 실력을 보이게 한 대가는 죽음으로 치러야 할 것이야.”
흑인의 살기 어린 눈빛은 그 말이 허세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어요.
윰스인이 흑인을 바라보다 멈칫하는 기색이 보였습니다.
그도 흑인이 사용하려는 사이킥 에너지를 발견한 것이었습죠.
“사이킥 에너지 대결은 내가 진 걸로 하지. 하지만 육탄전은 어떨까? 끝내주지 않겠어? 건물이 박살 나고 사람들 비명이 울려 퍼지는 환상적인 무대 말이야?”
흑인의 몸에서 푸른색 기운이 뿜어져 나왔습죠.
아까까지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고 짙은 푸른색이었어요.
짙다 못해 남색에 가까운 탁한 에너지였습죠.
윰스인은 팔을 들며 말했습니다.
“여기까지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 이상 우리가 대결한다면 주위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게 될 겁니다.”
흑인의 입가는 귀에 닿을 듯이 벌어졌습죠.
하얀 이가 푸른 기운으로 인해 사파이어처럼 빛났습니다.
“까짓것 알 게 뭐야. 남이야 죽든 말든 난 네놈과 결판을 내야겠다고.”
흑인의 말이 끝나자, 사태를 파악한 손님들은 앞다투어 가게를 나가려고 했어요.
완전 아비규환 그 자체였죠.
난 그때 속으로 내 가게는 끝장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완전 재난이었어요. 아마겟돈, 둠스데이였다고요!
소란스러운 가운데 윰스인의 목소리는 평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예의 낭랑한 목소리로 흑인에게 말했지요.
“당신은 주위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혹심한 피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겁니까? 육체가 강대한 사이킥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고 있는 것을?”
힘을 모으느라 집중하고 있던 흑인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코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죠.
몸에는 혈관이 주름처럼 튀어나오고 근육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습니다.
윰스인이 한 말은 사실이었어요.
그는 분노에 사로잡혀 자기가 컨트롤할 수 있는 한계를 망각해 버린 겁니다.
“닥쳐! 너만 죽여버리면 되는 거야! 다른 것 따위 알 게 뭐야!”
흑인에겐 멈출 의사가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습니다.
윰스인도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싸움이란 것을 깨달았습죠.
그는 머리에 쓴 두건을 벗었습니다.
첫눈처럼 새하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출렁거렸습죠.
가늘지만 이지적으로 생긴 두 눈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습니다.
둘 다 각오를 한 것이죠.
흑인과 마찬가지로 윰스인은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활활 타오르는 불? 아니, 그 정돈 부족할 것 같아요.
핏빛 같은 진홍색 힘의 물결이었습죠.
둘의 힘이 고조되어 일렁거리고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한도 끝도 없이 뿜어져 나오던 힘은 천장까지 닿아 뚫고 나갈 기세였죠.
멈출 줄 모르고 뻗어가던 기세는 실이 툭 끊어진 것처럼 사그라들기 시작했습니다.
윰스인이 먼저 그걸 알아차렸고 흑인도 뒤늦게서야 심상찮은 기색을 느끼고 실상을 파악한 것입죠.
밖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손님들이 신고를 한 모양인가 봅니다.
대 사이커 진압 특수부대는 철두철미하기로 유명하지요.
진압대에 걸리기만 하면 A급 사이커라 해도 쩔쩔맬 정도입니다.
사태를 파악한 흑인은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어요.
“쳇, 짭새로군. 너 두고 보겠다. 운 좋은 줄 알아.”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는 가게를 재빠르게 벗어났어요.
그가 사라질 때까지 윰스인은 아무 말 없이 문을 바라보고만 있었습죠.
일반적으로 행인의 호주머니를 터는 범죄와 사이킥 범죄는 죄질의 무거움이 비교가 안 될 만큼 무거워요.
게다가 내가 알기로 그 흑인은 유명한 놈입죠.
사이킥 전과도 있어서 이번에 걸리면 사형을 면키 어려웠을 거예요.
그래서 도망간 것이겠죠.
난 멍하니 서 있는 윰스인에게 귀띔해 주었습니다.
경찰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뒷문으로 도망치라고요.
사태를 파악한 윰스인은 내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수리비 명목으로 주먹만 한 사파이어 같은 크리스털을 건네주었습니다.
그건 바로 사이켈륨이었죠.
사이킥 에너지가 응축된 광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금이나 보석보다 더 귀한 가치인 광물이었습죠.
나는 낼름 받아 챙기고 그와 일행들을 뒷문으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는 문을 나서기 전에 나를 보며 나지막하게 말했습죠.
“정말 감사합니다 노인장. 그를 진정시켜 준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저 또한 그와 대결을 벌였으면 힘을 자제하지 못해 어떤 참극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언제나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그는 백금색 수도복을 펄럭이며 골목 뒤편으로 사라졌습니다.
어느새 비도 그쳐버렸습죠.
나는 뒤늦게 닥친 특수부대원들을 상대하느라 애먹었지만 묵비권 행사로 융통성 있게 사태를 무마시켰습죠.
기물 파손이 되고 돈도 제대로 안 내고 가버린 손님들이 태반이었지만 상관없었어요.
10년 치 매상에 가까운 수익을 얻었으니까요.
어떤가요 손님, 재미있지요?
예,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자자, 이제 문을 닫아야 할 시간입니다 손님.
특별히 이야기도 해드렸으니 계산을 치르시고 이만 집으로 돌아가시죠.
아니 뭐라고요? 돈이 없다고요?
이런 곤란한 손님이군요.
궁금한 게 있으시다고요?
아아, 윰스인의 마지막 말이 이해가 안 간다고요.
그럼 이해시켜드립죠.
자, 이걸 보십쇼 손님.
손님이 우리 가게 술을 축낸 양심 없는 술잔입니다.
내 손에 올려져 있지요?
셋을 세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겁니다.
하나, 둘, 셋.
아이쿠, 저 양반 간도 작구먼.
고작 컵 하나를 형체도 없이 분쇄시켰다고 도망가기는.
이제 가게를 닫아야겠습니다.
이 세상엔 힘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녀석들이 너무나도 적어요.
이까짓 힘을 다룬다고 해서 사는 데 도움 될 건 아무것도 없지만요.
힘 따윈 삶을 살아가는 데 오히려 독이 될 뿐이에요.
그렇고말입죠.
길고 가늘게, 조용히 살아가는 게 가장 좋은 삶입니다.
✦ 작가의 말
16년 정도 전에 친구와 게임 설정 대화를 나누다가 쓴 단편입니다. 다시 읽어보니 그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