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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16번째 생일(수, SF) 일러스트

앨리스, 16번째 생일(수, SF)

우윳빛 몸체를 지닌 비행기는 매끈한 곡선이 머리 부분으로 갈수록 가늘어져 백조를 연상시켰다.

4미터 높이에 15미터 길이인 비행기는 여객기라 하기엔 작고 개인용 경비행기라 하기엔 큰 사이즈였다.

공작 이상 가는 계급만이 탈 수 있는 특권인 전용기로 샤인네트워크 국가 전체에서도 이 기체를 탈 수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적은 숫자에 불과했다.

엘리스가 센트럴 수석학교를 졸업한 지 3일째 되던 날은 16번째 생일이었다. 서부 outskirt를 통치하는 벨포드 공은 딸의 16살 생일을 맞이하여 전용기를 보내 직접 만나기로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센트럴하이브를 떠나본 적이 없었기에 아버지 벨포드 공을 처음으로 보게 되는 날이었다.

중앙문이 열리고 계단이 내려왔다. 엘리스는 전용기 안으로 들어섰다.

비행기를 타보는 것은 난생처음 겪는 일이었지만 두근거림은 없었다. 엘리스는 담담한 표정으로 흰색 시트를 씌운 좌석에 앉았다.

검은 슈트를 입은 수행원들은 오른쪽 귀에 꽂은 이어폰으로 무언가 연락을 주고받으며 이륙할 준비를 하였다. 엘리스는 그들을 보며 이질적인 감정을 느꼈다.

백색 공간 안에서 선글라스와 슈트, 구두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물들인 모습이 눈에 익숙지 않아서였다. 엘리스의 선홍색 눈동자는 천장으로 향하였다.

엘리스의 시선은 백색 형광등이 발산하는 빛을 받아 광택 나는 흰색 벽에 머물다 정면에 놓인 인조가죽 재질의 흰색 의자 시트에 고정되었다. 엘리스에게 백색은 보기만 해도 눈이 편안해지는 색이었다.

수도 센트럴하이브는 규격과 질서를 추구하는 통제된 사회였다. 샤인네트워크 수뇌부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개인은 전체를 위한 부품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색을 인정하지 않는 백색 세상. 귀족 집안 자제로 태어난 엘리스는 전체주의를 거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부모 품에서 떨어져 국가가 관리하는 영재 교육기관에 입양되면서부터 16년간 온통 흰색뿐인 환경에서 자라났다. 개인주의는 조직을 해치는 불안 요소에 불과했다.

엘리스는 단 한 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규격화된 의복, 규격화된 체형을 유지하기 위한 식단, 규격화된 색, 규격화된 문화.

대의라고 부르짖는 사상 아래 센트럴하이브 시민들은 전체가 이어지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지녔다.

그런 환경 속에서 자라온 엘리스에겐 검은색 슈트를 빼입은 수행원들의 모습이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엘리트 교육을 받았기에 다른 국가 문화라든지 샤인네트워크 지방 문화의 다양성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공부한 지식과 직접 체험한 지식은 받아들일 때 큰 차이가 있었다. 엘리스의 선홍색 눈동자는 이채롭게 빛났다.

인공지능이 조종하기에 전용기는 조종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륙을 알리는 안내 목소리는 억양 없는 여자 목소리였다.

전용기의 문이 닫히고 엘리스의 상반신을 투명한 점막 같은 것이 감쌌다. 작은 틈도 주지 않고 촘촘하게 감쌌기 때문에 거동이 불편하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얼마든지 평상시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륙합니다.”

전용기가 이륙하자 관성의 법칙을 받아 엘리스의 몸은 뒤로 쏠렸다. 중력이 사라져 몸 전체가 붕 뜨는 느낌, 썩 나쁘진 않았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몸은 비스듬한 채로 하늘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안정된 고도를 유지할 때까지 상승 곡선은 계속되었다.

고저 차를 적응하지 못해 고막이 웅웅거렸다. 불편한 심기가 무의식적으로 드러난 것일까? 앞좌석에 앉은 수행원 하나가 뒤를 돌아보며 안부를 물었다.

핏기 없는 흰 얼굴에 낀 검은 선글라스가 대조되는 느낌이었다. 7:3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긴 가르마와 검은 양복이 단조로운 억양과 어울려 사무적인 느낌을 강조하였다.

지극히 평범하게 공무를 충실히 하고 있는 그에게 지극히 사무적인 미소로 화답하였다. 부담스러운 검은 시선이 사라지고 나자 숨쉬기가 자유로웠다. 엘리스는 창밖을 내다봤다.

흰색 구름이 안개처럼 스쳐가는 가운데 거대한 백색 도시가 비춰졌다. 인간이 만든 건축물이라기보단 벌집 같은 모양이었다.

정육각형 한 개마다 셀 수 없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다. 엘리스는 센트럴하이브를 벗어났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아직도 저 백색 구덩이 안에서 센트럴하이브의 일부인 것만 같았다. 아쉬움? 아니다.

몸은 센트럴하이브에서 벗어났지만 영혼은 그 안에 남겨두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던 백색 배경에 초록 물결이 생겨났다.

엘리스의 선홍색 눈동자는 다시 한번 반짝였다. 센트럴하이브 식물관에서 인공적으로 만든 숲을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숲의 일부인 입장에서 울창한 나무를 올려다보는 느낌과 초월적인 존재처럼 숲 전체를 내려다보는 느낌은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그제야 엘리스는 센트럴하이브를 벗어난 현실을 깨달았다. 16년 동안 자신을 돌봐주었던 부모의 품을 떠나는 심정이었다.

엘리스는 센트럴하이브의 백색 기둥을 보며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하였다.

“안녕.”

꿈결에서 누군가가 엘리스를 불렀다.

아직 잠이 덜 깬 머릿속은 안개 낀 듯이 몽롱하였다. 무거운 눈꺼풀을 떠보자 검은 선글라스가 번쩍였다.

물속에서 부르는 것처럼 자신을 부르는 것인데도 엘리스는 쉽게 깨닫지 못했다. 검은색 소매가 엘리스의 어깨를 부여잡고 흔들어 대자 그때까지 반쯤 감겨있던 눈이 번쩍 떠졌다.

“수면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각하께서 아가씨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십니다.”

엘리스는 잠에 빠졌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다.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기에 정해진 시간 외에 잠이 든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무료하게 창밖의 풍경을 내다본 것까진 기억이 났다.

언제 잠에 빠진 걸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지우개로 지워진 듯이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잠이 든 거죠?”

“정확히 1시간 동안 주무셨습니다. 벨포드 공께서 수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수행원은 표정 변화 없이 딱딱한 억양으로 대답하였다. 엘리스는 정말 드문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 시간 동안이나 정신을 잃고 잠에 빠져들었다니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환경 변화에 긴장했던 것일까. 그녀는 수석학교에서 감정을 제어하는 방법을 배워 자기 관리를 할 줄 알았다. 이 정도 환경 변화에 감정이 흔들린다면 남들에게 비웃음당해도 마땅한 미숙한 상태였다. 엘리스는 살짝 분한 감정이 들었다. 주먹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가씨?”

“알았어요. 회선은 어떻게 되죠?”

“32b4367-95입니다.”

엘리스는 왼손으로 오른쪽 팔뚝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렸다. 창백한 살결 위로 직사각형의 파란 불빛이 떠올랐다. 왼손 검지로 붉은 아이콘을 누르자 선홍색 눈동자에서 광채가 일어났다. 순간 주위 모든 것들이 멈춰버렸다. 정지된 영상처럼 주위 풍경은 평면적인 화면으로 변해 점차 작아지기 시작했다. 기체 안 모든 사물들이 점으로 되어 사라져 버리자 엘리스는 검은 무공간 속에 홀로 남게 되었다.

‘32b4367-95.’

엘리스는 수행원에게서 들었던 발신 번호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수많은 별들이 엘리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검은 공간은 푸른 바닷속 세상으로 바뀌고 엘리스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되었다. 다양한 색을 지닌 기호와 문자들이 스쳐 지나갔다. 똑바로 보기 힘들 만큼 어지러운 광경 속에서 엘리스는 머릿속으로 외웠던 번호를 찾아냈다. 꿈에서 깨어나듯 현실적인 감각이 되돌아왔다. 먼저 푸근한 공기가 느껴지고 현란한 색이 아닌 안정된 색을 지닌 가구들이 보였다. 푸른색 창틀이 있는 창문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광활한 정보의 바다를 헤엄치던 엘리스는 고풍스러운 저택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검은 공간에서 보았던 현란한 광경들이 정신적 환각 상태에 가까웠다면 지금 방 안에 앉아 있는 느낌은 생생한 현실이었다. 꿈은 현실보다 선명하지 못하지만 때론 현실처럼

생생하게 기억이 남는 적도 있다. 마찬가지로 지금 방 안에 있는 것은 가상 공간에 불과했지만 창문 사이로 비치는 햇살에 피부가 포근해 오고 눈이 부셔 뜨기 힘든 건 실제처럼 느껴졌다. 엘리스는 햇볕을 가리기 위해 눈썹 부근에 손을 얹고 눈살을 찌푸린 채로 정면을 응시하였다. 진한 갈색 나무 탁자 너머 회색 슈트를 차려입은 중후한 노신사가 선홍색 눈동자에 비쳤다.

실크 재질의 회색 슈트는 은색으로 비칠 만큼 반짝이면서도 고급스럽게 보였다. 골격이 다부진 장신의 키에 걸친 슈트는 수사자 같은 기상이 엿보였다. 흰 와이셔츠 안에 회색 넥타이를 매고 중간에 은으로 만든 핀을 꽂았는데 3개의 정육각형이 뭉친 모습이었다. 샤인네트워크의 상징으로 수도 센트럴하이브를 가리키는 문장이었다. 턱선이 뚜렷해 남자다운 이미지가 물씬 풍기고 피부는 청년처럼 탄력이 넘쳤다. 이마와 입가의 주름, 하얗게 센 은발이

아니었다면 30대 한창나이로 착각할 만큼 정열적인 사내로 벨포드 가문의 당주인 조니 벨포드였다.

“어서 오너라, 엘리스. 아직 이르지만 16번째 생일을 축하한다.”

눈초리가 둥글어지지도, 입가도 올라가지도 않은 경직된 표정이지만 미약하나마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센트럴하이브 시민들은 타국 사람들에게 종종 사이보그라 조롱당할 만큼 냉정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아버지는 샤인네트워크 내부에서 냉혈인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이성적인 사람이었지만 엘리스는 누구보다도 그를 존경하였다.

냉철한 이성과 원숙한 지성을 지닌 아버지는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엘리스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6년 동안 만나 본 적 없는 아버지지만 가상 공간 속에서 매일같이 만나 담소를 나눠왔다. 고도로 발달한 샤인네트워크의 과학기술은 신체에 초고성능 바이오 컴퓨터를 장착하여 유비쿼터스를 현실로 이뤄내었다. ‘언제 어디서든 존재한다.’라는 라틴어 어원답게 생체 메커니즘은 현실적인 공간을 뛰어넘어 언제 어디서라도 타인과 생생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비록 센트럴하이브 시민만이 유비쿼터스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지만 이 시스템이 존재했기에

개인이 전체에 승화될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되어준 셈이었다.

엘리스는 아버지를 보며 살짝 웃어 보였다. 학교에서는 절제를 최선의 미덕으로 가르쳤지만 피를 이어받은 아버지에게만큼은 감정의 문을 열고 싶었다. 그 심정이 전해진 것일까, 벨포드 공의 표정도 한결 누그러진 것 같은 인상이었다.

“곧 outskirt에 도착해 아버님을 뵐 것인데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나요?”

“네가 오는 대로 성대한 생일 파티를 열려고 했는데 갑작스러운 공무로 널 바로 만나진 못할 것 같다.

짧은 통지로 네게 이 사실을 전하기엔 16년 만에 부녀 상봉인데 네가 서운해할까 봐 이렇게 보자고 한 것이다.”

갈수록 낮아지는 목소리 톤에선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비쳤다. 대외 이미지에 익숙한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봤다면 아연실색하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엘리스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그 심정을 충분히 헤아렸다.

“서운해하다뇨. 너무 심려치 마세요, 아버님. 저는 아버님을 뵙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척 기쁘답니다.”

“고맙구나, 엘리스.”

엘리스는 감정의 벽을 조금 더 허물어 본심이 드러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세인들이 얼음 피를 지닌 지도자라 부르는 벨포드 공도 그 미소엔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무탈한 모습으로 보자꾸나, 엘리스.”

“예, 아버님 곧 찾아뵙겠습니다.”

엘리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춤의 치맛자락을 잡고 살짝 고개를 숙이는 우아한 몸짓으로 인사를 하자 벨포드 공도 살짝 고개를 숙여 화답하였다. 엘리스가 고개를 들자 주위 사물들은 가로로 압축되어 얇은 선으로 줄어들더니 마침내 검은 무의 공간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몇 초가 지났을까, 엘리스는 감은 두 눈을 떴다. 익숙한 백색 공간. 총독 관저에서 총독 전용기로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일어서서 인사까지 했지만 현실 속에선 앉은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엘리스가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두 번 눈을 깜빡거릴 때 수행원은 outskirt 지역에 들어섰음을 알렸다.

“아가씨, 곧 서부 outskirt에 도달합니다.”

아버지가 다스리는 서부 outskirt에 다가서자 엘리스의 가슴은 미묘하게 두근거렸다.

그늘진 곳 없이 정오에 햇볕을 맞는 일은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활주로 아스팔트가 뜨거운 태양열을 받아 프라이팬처럼 지글거렸다. 스탠은 철망에 등을 기대고 앉아 녀석들이 만들어놓은 그림자에서 햇볕을 피했다. 구름이라도 저 빌어먹을 태양을 가려주면 좋으련만 화창한 하늘은 그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불쾌감이 치밀어 올랐지만 침을 뱉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녀석들은 찌는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신 시시껄렁한 농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제일 좌측에 서 있는 안경 쓴 녀석은 카릭이라는 녀석으로 제법 실력 있는 해커였다. 녀석은 누런 뻐드렁니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랑스럽게 내밀며 대화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다. 카릭이 옆에서 침을 튀겨대며 열변을 토하는데도 가운데 서 있는 뚱보 녀석은 실실 웃고만

있었다. 하마 몸집 같은 체구에 항상 배고파를 입에 달고 살며 배 위에 손을 얹은 녀석은 에일이라는 비교적 준수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맨 우측 레게 파마머리에 턱수염을 기른 녀석은 마커스란 녀석으로 셋 중에 제일 존재감이 없지만 가끔 불쑥 나서 의외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녀석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날씨는 더워지고 햇살은 꺼질 기미가 안 보였다. 스탠은 양손을 깍지 끼고 미간 위로 올려 햇살이 비치는 걸 막았다.

“카릭, 도착할 시기가 되지 않았나?”

“케이, 보스. 곧 도착할 거예요. 오차범위 5분 내외.”

카릭은 나이 든 영감같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배가 고팠던지 에일은 오른손은 배 위에 얹은 채 나머지 왼손으로 카릭의 어깨를 쳤다. 코끼리 다리 같은 육중한 손이 밀치자 왜소한 카릭은 마른 낙엽이 떨어지듯 휘청거렸다.

“야, 이쑤시개 나 배고프단 말이야. 네가 말한 시간은 이미 지났잖아.”

“이 돼지 새끼가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아까 내 핫도그까지 네가 뺏어 먹었잖아. 그러고도 배고프단 말이 나와?

한 번 더 내 몸을 건들면 얇게 썰어 베이컨으로 만들어 버리겠어. 앙!?”

“뭐 이 새끼야?”

카릭이 손톱 끝이 뾰족한 기계 의수를 들이대며 협박을 가하자 에일도 이에 지지 않고 얼굴보다 큰 강철 턱을 덜컹거리며 화를 냈다. 둘이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러운 욕만 주고받으며 치고받으려는 기색이 보이는데도 마커스는 히죽대며 지켜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모두 공항 경비원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세계 어딜 보더라도 이런 경비원들은 없을 것이다. 해괴한 외모를 지닌 흑인 3명에 백인 하나. 더구나 몸에 기계 의체를 지니고 입에 걸레를 문 이들을 보면 누구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고도 남았다.

스탠은 다른 시선을 의식해 부하들을 진정시켰다.

“그만둬. 계획이 코앞이다. 날이 덥다 보니 뇌가 상하기라도 한 거냐?”

스탠이 내뱉은 나지막한 몇 마디에 주위는 물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녀석들은 멋쩍어하는 기색으로 눈치를 살폈다. 스탠은 평상시 모습만 보면 성인인지 어린아이인지 구분 못 할 만큼 어수룩한 면이 다분했지만 할 때만큼은 확실히 해내는 녀석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스탠은 철망을 잡고 몸을 일으켜 녀석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번 일이 장난이 아니란 건 너희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한순간의 방심이 곧 죽음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이제 곧 목표로 삼은 벨포드가의 전용기가 착륙할 것이다. 작전은 잊지 않았겠지?”

“예. 보스.”

녀석들 답지 않게 긴장된 표정이었다. 오버된 긴장감은 거사를 치름에 있어 예고치 않은 실수를 불러오지만 느슨하다 못해 풀어헤쳐진 정신 상태보단 조금이나마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거사를 목전에 두고 계획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 스탠은 부하들에게 신뢰 담긴 미소를 보냈다.

“카릭, 정보는 확실한 거겠지?”

“물론이죠. 내 정보는 99.999%로 정확한 정보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총독의 딸이 공식적인 환영 행사 없이 은밀하게 총독 관저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이 정보가 틀릴 확률은 뚱보 에일이 끼니를 거르는 것보다 더 희박하다고요!”

카릭은 자부하는 해킹 실력을 건드리자 닭 모가지 같은 얇은 목에 힘줄이 서고 툭 튀어나온 뻐드렁니마저도 떨리는 것처럼 보였다. 스탠은 한 번이라도 그의 해킹 실력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카릭의 해킹 실력은 발군을 자랑할 만큼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다소 미안한 감정을 담아 옅은 미소로 카릭에게 사과하고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시곗바늘은 12시 13분을 가리켰다. 카릭이 말한 대로라면 총독 딸이 공항에 도착했어야 할 시간은 12시 10분이었지만 5분 정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했다. 이제 더는 노닥거릴 시간은 없었다. 시계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자 활주로로 통하는 공항 입구에서 검은 옷을 입은 무리가 나오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각자 위치로 간다.”

녀석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사전에 계획한 위치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계획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공항 경비들로 위장한 다음 총독 딸을 태운 전용기가 도착했을 때 납치한다는 것이었다. 옷을 뺏긴 경비들은 지금쯤 화장실 뒤편에서 재갈이 물린 채 정체불명의 습격범들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스탠은 의심받지 않도록 부하들을 분산시키고 준비해온 마이크 달린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족히 10명은 돼 보이는 검은 슈트 무리들은 질서 정연한 움직임으로 1번 활주로로 걸어갔다. 빈틈이 보이지 않는 몸가짐을 봐서 고도로 훈련된 프로들이 틀림없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던 스탠은 그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며 부하들에게 통신을 보냈다.

“에일은 축포를 쏠 준비하고 카릭은 무선을 교란하도록.”

“케이, 보스.”

스탠은 점점 작아져 가는 검은 등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좋아, 이제부터 시작이야.”

명령을 받은 에일은 손에 쥔 남색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지퍼를 끄르고 가방 안에 들었던 두 덩이 박스 더미를 꺼냈다. 둔해 보이는 몸집을 가지고도 제법 민첩한 움직임으로 박스 안에 물건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박스에서 연 40센티 정도 되는 긴 원통형 물건엔 조준경이 달렸었다. 두 번째 박스에서 연, 같은 크기 원통을 잡고 힘을 주자 두 배로 늘어났다. 두 개를 연결하자 로켓 런처가 완성되었다. 에일은 만족한 듯이 웃음을 터트리며 준비가 완료됐음을 알렸다.

“보스, 딱총이 준비됐어.”

“알았다.”

에일에게 회신하자 마커스에게 송신이 왔다. 마커스에겐 비행기를 발견하는 임무를 맡겼는데 총독 딸이 탄 비행기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보스. 백조가 도착했습니다. 지점은 상공 2천 미터 지점 위치는 x1942."

“알았다.”

“들었나 에일. 위치 파악에 들어가고 사냥할 준비를 하도록. 내가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 백조의 숨통을 끊지 않는다. 카릭, 카릭! 아직 준비는 멀었나. 대답하라.”

“오케이, 보스.”

“5초, 아니 4초만 있으면 됩니다. 보스.”

에일의 후덕한 목소리와 신경질적인 카릭의 음성이 동시에 들렸다.

계획이 실제로 다가오자 스탠에게도 긴장감이 감돌았다. 목에 건 망원경을 들고 마커스가 말한 지점을 살피기 시작했다.

푸른 창공을 바탕으로 구름숲이 우거진 가운데 반짝이는 기체가 포착되었다.

“케이. 완료됐습니다. 보스 명령만 내리십시오.”

“알았다. 교란 주파수를 가동해라.”

“에일, 듣고 있나. 아직 격추하기엔 고도가 너무 높다. 10초 카운트 후에 격추를 감행한다.”

“오케이, 보스. 10까지 셀 줄은 안다고.”

공중에서 시선을 돌려 200미터 앞에 서 있는 요원들에게로 향했다. 망원렌즈로 확대된 그들을 보자 카릭이 가동한 교란 주파수가 먹혀들었는지 서로에게 윽박지르며 당황하는 눈치였다.

에일만 실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스탠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앞으로 거닐면서 등에 꽂아 두었던 권총 두 자루를 각각 손에 하나씩 쥐었다.

“마커스. b작전으로 돌입한다, 준비하도록. 에일 이제 5초 남았다.”

“오케이, 보스.”

한 걸음씩 앞으로 거닐 때마다 발이 무거웠다. 권총 손잡이를 쥔 손바닥에 땀이 흘러 미끄러웠다.

스탠이 다섯 발걸음을 걸었을 때 하늘 위로 섬광이 번쩍였다. 스탠은 뛰기 시작했다. 수풀 속에서 웅크리고 있다 먹이를 덮치는 치타처럼 맹렬한 움직임이었다.

에일이 격추를 성공시켰는지에 대한 성공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녀석들을 신뢰하기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온몸에 정신을 집중시켰다.

묵직한 폭발 소리와 함께 경악하는 고함이 들려왔다. 에일이 격추에 성공시킨 모양이었다. 스탠은 속도를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몸을 숙였다.

총구는 30미터 전방에 있는 검은 슈트를 입은 요원들에게로 향해졌다. 요원들 중 하나가 다가오는 스탠을 발견하고 대응 사격 자세를 잡았다.

프로 요원답게 신속한 대응이었지만 스탠이 겨눈 총구가 먼저 불을 뿜었다. 서너 발 연속으로 사격해서 굉음에 익숙하지 않은 왼쪽 귀가 먹먹해졌다.

총알 세례를 받은 자는 뒤로 튕겨 나가고 허공으로 겨냥된 총구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요원들은 갑작스러운 총격 사태에 순간 당황하는 듯 해보였지만 곧 사태를 파악하고 대응 사격에 나섰다.

스탠은 몸을 옆으로 구르면서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스탠이 서 있던 아스팔트에는 벌집처럼 피탄 자국이 생겨났다.

첫 사격으로 요원 하나가 쓰러지고 이어진 사격에 두 명이 더 쓰러졌다. 요원들은 일정 간격을 유지하면서 흩어져 대열을 유지하였다.

뭉쳐있으면 총알에 맞을 확률이 더욱 높았기 때문이었다. 스탠은 능숙한 대응에 놀라면서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한순간이라도 멈추었다간 쓰러뜨린 적들처럼 싸늘한 시체로 변하게 될 것이다. 일 대 십의 대결이었지만 스탠은 벌써 4명 정도를 쓰러뜨렸다.

총탄 하나가 무릎 근처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스치기만 해서 별다른 상처를 입은 건 아니지만 엄폐물도 없는 환경에서 이대로 총격전을 계속하는 것은 불리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폐는 공기를 더 원해 자동차 엔진처럼 요동치고 얼굴에선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눈 한 번 깜빡거릴 시간이라도 멈칫한다면 분노한 적들이 발사한 총알 세례를 받고 벌집이 돼버리고 말 것이다.

방아쇠를 계속해서 당겼지만 탄은 발사되지 않았다. 탄창이 비어버린 것이다. 스탠은 짧게 혀를 찼다.

절체절명의 순간, 스탠은 요원들과 마주 선 상태에서 가로 선상으로 뛰기 시작했다. 탄창을 갈 시간 따윈 없었다.

모 아니면 도, 도박에 가까운 심정으로 마커스가 늦지 않기만을 바랐다. 직선상으로 뛰어 움직이지 않는 표적이 된다면 자기 목숨은 요원들 손끝에 맡겨진 셈이었다.

요원들은 방향을 틀어 스탠에게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총격을 받은 아스팔트에서 파편들이 발 주위로 튀어 올랐다.

더 이상 한 방향으로 달렸다가는 행운의 여신이 가호한다 하더라도 살 자신이 없었다. 녀석들은 지금까지 뭘 하고 있단 말인가.

스탠은 목이 쉬어라 울부짖으며 우측으로 몸을 굴려 두세 바퀴 굴렀다.

“마커스!”

빗발치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요원들이 난사한 총성이라고 생각했으나 연사되는 소리가 권총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스탠이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자 남은 6명의 요원들은 어느새 2명으로 줄어 있었다.

“헤헤헤, 보스 너무 엄살 떠는 거 아닙니까?”

스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한 차례 쏘아붙였다.

“망할 녀석, 이 일이 끝나고 넌 정신교육 좀 받아야겠다.”

“어이쿠, 보스 그것만은 제발 하지 말아주십쇼.”

능글맞게 받아치는 녀석이 밉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을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남은 두 요원은 서로 반대로 흩어져 뛰어갔다.

카릭이 교란 주파수로 통신이 두절되게 만들었는데 요원이 직접 뛰어가 도움 요청을 하게 되면 계획은 무산돼버린다.

스탠은 마음속으로 조바심이 일며 탄창을 갈기 시작했다. 두 자루 다 탄창을 갈고 몸을 일으켰을 때 스탠은 그것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공항으로 통하는 입구 근처에서 미리 지키고 있던 에일이 요원을 한 주먹에 쓰러뜨리고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고 오고 있었다.

에일은 기절한 요원을 스탠 앞에 팽개쳐 두고 무쇠 턱을 헤벌쭉 벌려 보았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장신이라 그늘진 녀석의 얼굴이 천진난만하게 느껴졌다.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카릭과 마커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마커스는 키만 한 머신건을 어깨에 메고 카릭은 가슴팍에 노트북을 껴안고 있었다. 둘 다 만면에 웃음을 띠고 치하하는 말을 건넸다.

“보스, 성공입니다. 저기 총독 전용기가 격추되어 있어요.”

에일은 어깨를 들썩이며 손가락으로 코밑을 쓰다듬어 보였다.

카릭과 마커스는 으스대지 말라며 남산만 한 배를 툭툭 쳐보지만 눈빛에는 믿음직한 기색이 가득하였다. 계획대로 전용기를 격추시켰지만 아직 방심할 상황은 아니었다.

기체 안에 몇이나 되는 요원들이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스탠은 총을 장전시키고 앞장서서 걸어갔다.

“방심하긴 이르다. 에일, 카릭 둘 다 무기를 들고 따라와.”

명령이 떨어지자 신속하게 무기를 들고 뒤를 따라 나섰다.

총독 전용기는 꼬리 부근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뛰어난 명사수인 에일은 엔진 부위를 쏘지 않고 불시착하도록 정확히 후미를 맞혔다.

언제 요원들이 뛰쳐나와 사격을 가할지 모르기에 조준한 상태로 가까이 다가섰다. 아니나 다를까 다가오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3명의 요원들이 뛰쳐나와 총구를 겨눴다.

요란한 소리가 고막을 울리고 요원들은 춤을 추듯 몸을 부르르 떨다가 힘없이 바닥 위로 쓰러졌다.

마커스가 든 머신건 총구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기체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정리되고 마커스가 올라가려 하자 스탠은 손을 들어 제지하였다.

“머리에 구멍이 송송 나기 싫거든 기다리는 게 좋을 거야.”

스탠이 고갯짓을 하며 신호를 보내자 에일이 가방 안에서 한 뼘 크기 되는 폭탄을 꺼내들었다.

폭탄을 건네받고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난 스탠은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가 난간을 잡았다.

안에 들어가지 않고 팔만 집어넣어 폭탄을 던지자 대여섯 방 정도 총성이 울려 퍼졌다. 아무런 폭발음도 섬광도 생기지 않았다.

스탠은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히 기체 안에서 처절히 대항할 사격에 대비해야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졌다. 스탠이 안으로 몇 발자국 들어서자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는 4명 정도 되는 요원들이 보였다.

비디오 화면을 정지시켜놓은 것처럼 멈춰있었지만 미세하게 몸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스탠은 주저하지 않고 요원들에게 총격을 가하였다.

피가 뿜어져 나와 흰 시트를 붉게 물들였다. 피 흘리는 시체를 밀쳐내자 차분하게 똑바로 앉아 있는 소녀가 보였다.

똑바로 응시하는 선홍색 눈엔 어떠한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무례한 침입자를 꾸짖는 대담한 긍지가 비치는 눈동자였다.

스탠은 16살짜리 소녀에게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겉으로 내색하진 않고 위압적인 표정으로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몇 초 뒤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여기 안경 쓴 친구의 특제품이지.”

칭찬을 받은 카릭은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스탠은 총을 허리춤에 꽂아 넣고 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사진 속 주인공은 눈앞에 앉아 있는 소녀였다.

윤기 나는 백금색 금발은 스트레이트로 어깨 아래까지 내려오고 피부는 알비노라고 착각이 들 만큼 창백하였다.

머리에 낀 푸른색 머리띠와 마찬가지인 푸른색 원피스 치마를 입고 앉아 있는 소녀는 피부만큼이나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얇은 백금색 눈썹, 가늘진 않지만 길게 찢어진 눈매. 스탠은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 앞에 앉아 있는 소녀와 대조해 보였다.

백금색 머리카락은 어깨 부근으로 내려올수록 웨이브를 줘 풍성해 보이는 헤어스타일 변화만 빼면 모든 것이 똑같았다.

핏빛 같은 선홍색 눈동자가 같은 인물이라고 강하게 주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진을 주머니에 넣은 뒤 스탠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엘리스 벨포드. 서부 outskirt에 온 것을 환영한다.”

시야를 가리던 천이 벗겨지자 엘리스는 천천히 눈을 떠보았다.

주위 사물들이 흐릿하게 보여 적응시키느라 몇 초간 눈을 깜빡거려야 했다. 시력이 완전히 돌아오자 못생긴 남자가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레게 파마 헤어스타일, 이마엔 검은 밴드를 두른 흑인은 어설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제 정신이 드는가 공주님?”

천박함이 철철 흐르는 목소리였다.

화면 속 영상에서 흑인을 본 적이 있지만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센트럴하이브에서 봐왔던 사람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듯이 창백한 피부에 붉은 눈동자를 지녔다.

흑발에 검은 피부, 흑색 눈동자를 지닌 사내는 엘리스가 보기에 신선한 충격이었다.

“곧 보스가 올 거라고. 그때까지 얌전히 있어 공주님.”

레게 파마머리 흑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걸친 검은 점퍼 사이에 흰색으로 적힌 6이라는 숫자가 보였다. 철문이 닫히는 부담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흑인이 빠져나가자 엘리스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10평 남짓한 방은 시멘트벽 위에 아무것도 칠하지 않아 음울한 회색빛이었다.

변변찮은 가재도구도 없이 보이는 것이라곤 작은 나무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 벽에 붙어 있는 낡은 고동색 가죽 소파가 전부였다.

창문 하나 달려있지 않은 방 안에는 환풍기 하나만 달려있는지 그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환풍기 그림자가 뱅글거리며 돌고 있었다.

팔과 다리는 의자에 묶여 있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묶인 곳이 아플 정도로 꽉 매어져 있었기에 연약한 엘리스가 끈을 푸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비로소 납치되었다는 실감이 들었다.

얼마나 기억을 잃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순 없었지만 머리를 집중하여 기억의 흐름을 거슬러 가보려고 노력하였다.

긴 어둠의 강을 흘러가다 비행기 안에 있었던 일들이 머릿속으로 영상화되었다.

기체가 크게 흔들리고 수행원들이 엘리스를 보호하며 비상 착륙한다는 긴급 방송이 흘러나왔다.

다행히 착륙에는 성공했지만 연기가 기체 내부에 가득히 스며들어 숨쉬기가 곤란하였다.

수행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밖으로 피신하려 할 때 피를 흘리는 요원 하나가 들어와 사태의 급박함을 알려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안에서 대기하였다.

요원들 몇몇은 소화기로 불을 끄면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창문을 깨기 시작했다.

엘리스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외부와 연락이 안 된다는 수행원들 간의 대화와 비행기가 피격당한 상황을 유추해 보았을 때 자기 신상에 급박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수행원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어 앞을 살펴볼 수 없었다. 몸을 뒤척거리려 했을 때 움직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은 멀쩡하였지만 가위눌린 것처럼 육신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행원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고 그 사이로 경비원 복장을 한 백인 사내가 나타났다.

짤막하게 몇 마디 한 뒤 부하로 보이는 안경 쓴 흑인이 남색 손수건으로 눈을 가리려 하자 백인 사내는 제지하였다.

엘리스의 팔을 만져보더니 부하들에게 그 물건을 가져오라고 했다. 30센티 정도 되는 곤봉 같은 기계였다.

기계에서 보라색 빛이 물결처럼 시야를 뒤덮었을 때 엘리스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모든 기억이 떠오르자 엘리스는 사태의 전말이 모두 이해됐다.

엘리스는 오른쪽 벽을 바라보았다. 벽에 붙은 거울에 비친 눈동자는 선홍색이 아닌 사파이어 빛 푸른 눈동자였다.

주도면밀한 범인들은 유비쿼터스 시스템으로 위치를 파악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emp발생기로 시스템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이상하게도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엘리스를 납치한 저들이 바라는 것이 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버지는 요구를 받아 주지 않으리라 확신하였다.

생사의 기로에 놓인 순간이었지만 엘리스는 침착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무심히 환풍기가 돌아가는 그림자를 바라보며 납치범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계속해서 도는 그림자를 몇 번이나 세었을까. 2천 번에 가깝게 세었을 것이다.

멍청히 숫자 세는 걸 포기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녹색으로 칠한 철문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엘리스도 똑똑히 기억하는 얼굴이었다.

푸른 눈동자를 지닌 백인은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형 얼굴이었다. 턱 골격이 발달 되고 아랫입술이 좀 두꺼운 게 희멀건 한 피부임에도 불구하고 남성다워 보였다.

검은 비니 모자를 쓰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가죽 점퍼를 입은 그는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엘리스는 그 뒤로 서 있는 세 명에게 눈길을 돌렸다. 한 명은 아까 봤던 레게머리를 한 흑인이고 안경을 쓴 흑인도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제일 우측에 선 뚱뚱한 흑인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는데 얼마나 빨지 않았는지 후줄근한 회색 티셔츠 위에 남색 점퍼를 걸쳤다.

육중한 체구를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아깐 실례가 많았어. 내 이름은 스탠이라고 한다. 여기 이 녀석들은 마커스, 카릭, 에일이라고 한다.”

자신을 스탠이라고 밝힌 백인은 뒤에 선 부하들을 소개했다. 그들은 자기 이름이 불릴 때마다 시시덕거리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날 납치한 이유가 뭐지? 내가 누구인 줄 알고 납치한 거지?”

엘리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어보자 스탠의 눈빛이 바뀌었다.

저들은 엘리스가 나이가 어린 걸 보고 요란하게 울면서 살려달라고 비는 상황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엘리스는 스탠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였다.

“물론 널 알고 있지. 서부 outskirt를 관할하는 총독의 딸 엘리스 벨포드. 16세. 부인을 잃은 총독의 금지옥엽. 장래가 촉망받는 수석학교 출신의 유망주. 더 듣고 싶은가?”

야유하는 듯한 목소리에 엘리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의자를 잡고 질질 끌고 온 스탠은 의자 등을 앞으로 세우고 앉아 그 위에 팔짱을 끼고 턱을 얹었다.

“Grasshoppers. 너희가 우리를 지칭하는 말이지. 모멸을 담고 내뱉는 그 말이 나는 싫지 않아. 왜냐하면, 베짱이는 놀 줄을 아는 녀석이니까. 샤인네트워크라는 거대한 기계의 일개 부품에 지나지 않는 너희에게 비교하면 우린 정말 축복받은 존재이지. 너를 납치한 이유는 간단해. 돈과 생존권 때문이야. 네 아버지는 슬럼가의 Grasshoppers를 무척이나 싫어하거든. 싫어하든지 말든지 그건 내 알 바 아니지만 생존에 관련된 문제라면 이야기가 틀려. 우리는 자치권을 얻어 낼 거야. 그래서 네가 필요한 거고 약간의 돈에 대한 요구는 총독 각하의 금지옥엽을 모셔두는 작은 서비스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해둬.”

Grasshoppers. 기억이 났다. 첨단 기계에도 언젠간 녹이 슬듯이 사회에서 낙오된 찌꺼기 같은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샤인네트워크의 대의를 부정하고 개개인 이익만을 추구하여 생산적인 일보다 소모적인 일에 치중하는 인간들. 가슴속에서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버러지 같은 삶을 유지하기 위해 납치라는 더러운 방법을 선택하다니 그들에게 어울리는 비열한 방식이었다. 분노라는 감정이 소용돌이칠수록 엘리스는 차갑게 더욱 차갑게 그들을 쏘아보았다.

“아버님은 너희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하지?”

스탠은 의자를 바싹 끌어당기며 흥미로운 눈길을 보냈다.

“아버님은 서부 outskirt 총독이자 샤인네트워크 중추에 속한 분. 공무에 사심을 쏟으실 분이 아니야. 나는 무수한 톱니바퀴 중 하나에 불과하고 국가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떤 희생이라도 치를 수 있어. 너희들 같이 틀에서 벗어난 인간들과 타협을 벌이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 나를 인질 삼아 아버님을 협박하겠다는 생각은 포기해.”

박수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다보는 스탠의 오른쪽 입가가 올라갔다.

“훌륭하군. 역시 위대한 총독 각하의 따님답군. 하지만 애석한걸. 이미 네 모습을 담은 영상을 총독 관저로 전송했는데. 과연 총독 각하께서도 너처럼 냉정하게 대처하실까?”

엘리스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 눈을 마주 보았다.

눈 한 번 깜빡거리지 않고 쏘아보는 푸른색 눈동자에서 경멸과 증오심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엘리스에게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 뼛속 깊은 샤인네트워크에 대한 증오가 느껴졌다. 한동안 엘리스를 쏘아보던 스탠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린아이니 묶어둘 필요 없다. 풀어주도록 해.”

“why? 보스. 그러다 도망가기라도 하면.......”

카릭이 왼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어보자 스탠은 녹색 문에 달린 은색 손잡이를 잡고 대답하였다.

“여긴 우리 구역이다. 저렇게 눈에 띄는 복장을 한 센트럴 출신 여자아이 하나 잡지 못할 것 같나?”

“그건 그렇지만....... 아아, 보스 잠깐만 기다려요. 이제 점심시간인데 식사는 어떡할 거예요? 여자애에게도 식사를 챙겨 주나요?”

카릭이 손을 내밀며 불러 세웠으나 스탠은 이미 문밖으로 한 발걸음 내디딘 상태였다.

“난 필요 없어. 2층에서 조금 쉬어야겠군. 너희들끼리 나가서 사 먹도록 해. 총독 딸에게도 음식을 주고. 같이 데려가서 슬럼가를 구경시켜주는 것도 좋겠군.”

뒤를 돌아보며 스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남기고 방을 나가버렸다. 회색 방 안에 남은 세 명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뻐드렁니가 튀어나온 카릭이었다.

“어쩌지?”

“어쩌긴 어째. 나 배고프다고. 얼른 여자애나 풀어주고 배 채우러 가자고.”

에일이라는 뚱보가 툭 튀어나온 배를 부여잡고 흔들면서 보채대자 문제는 쉽게 풀렸다.

엘리스와 마찬가지로 나머지 두 흑인도 무쇠 턱이 내는 요란한 쇳소리가 듣기 거북했나 보다.

마커스가 다가와 손목과 발목에 묶인 끈을 풀자 엘리스는 묶인 자국을 매만졌다. 밧줄 자국으로 인해 새빨개진 피부는 다시 피가 통해 평상시로 돌아오고 있었다.

엘리스는 몸이 자유로워진 걸 실감할 때 성미 급한 뚱보는 이미 밖으로 사라졌고 남은 카릭이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엘리스는 뜨거운 햇살이 피부에 내리쬐어 견디기 힘들었다. 16년 동안 센트럴하이브 실내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야외에서 직사광선을 여과 없이 받아내는 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엘리스는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손을 들지 않았다. 납치범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 때문이었다.

왼손은 은색 수갑이 채워져 흑색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의수와 연결되었다. 카릭이라 불린 안경 쓴 흑인은 엘리스와 제법 키 차이가 났지만 의수를 늘려 수갑을 채웠기에 비교적 편안한 상태로 걸어 갈 수 있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배려라고 여긴다면 납치범답지 않게 인간미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인질에게 쓸데없는 동정심을 가지는 일은 프로페셔널 하지 못한 아마추어리즘이라고 느껴졌다.

철두철미하지 못하고 어딘가 나사 하나 풀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게 과연 대담한 납치극을 벌인 인물들인지 의구심이 생겼다.

땡볕에 후끈 달아오른 공기보다 스쳐 가는 많은 인파들이 풍기는 열기가 엘리스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진한 사람 체취와 함께 풍겨오는 땀 냄새가 소독약 냄새에 익숙한 엘리스의 후각을 괴롭혔다. 검은 피부, 누런 피부, 덜 검은 피부.

불과 100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짧은 길을 걸어왔지만 각양각색 다양한 인종을 모아놓은 각축장이었다.

투명하다 할 만큼 창백한 피부를 지닌 엘리스는 슬럼가 행인들에겐 신기한 대상이었다.

지나가면서 호기심 가득한 눈길을 한 번씩 던져주고 가자 엘리스는 땅으로 시선을 내리박았다.

공작가의 자긍심 높은 영양으로 자라온 엘리스에게 동물을 보듯이 구경거리가 되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새로운 환경을 접하는 신선함과 호기심이 생겨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부담스러운 시선을 피하는 게 급선무였다.

습기가 부족해 누렇게 말라붙은 땅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엘리스가 실제 흙을 밟아보는 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정원을 제외하고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런 땅은 슬럼가 사람들처럼 천박하고 거칠었지만 딱딱하면서 차가운 느낌을 주던 센트럴하이브의 백색 길과 달리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말없이 땅만 보면서 걷자 카릭은 의수를 흔들며 말을 건넸다.

“Hey! 아가씨. 센트럴하이브의 인조 건축물에서만 살다 자연스런 흙을 밟아보니 신기한가 보지?”

멍청한 떠벌이로 생각했었는데 예리한 질문이었다. 그에게 대답하진 않았지만 신발 아래 느껴지는 흙의 감촉이며 여러 행인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뜨거운 피 같은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엘리스나 그들이나 똑같은 사람이지만 근본적으로 무언가가 달랐다. 엘리스는 그들보다 차가웠으며 자연적인 야성보단 인공적인 이성을 지닌 인간이었다. 무심코 걷다가 요란한 음악 소리가 귀를 울렸다.

난생처음 들어보는 멜로디였다. 엘리스에게 익숙한 여럿이서 조화를 이루는 교향곡이 아닌 빠른 템포로 들썩이는 멜로디에 맞춰 혼자서 부르는 노래.

수갑이 연결된 카릭이 멈추자 엘리스도 따라 멈추게 되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뚱보 에일과 마커스가 멜로디에 맞춰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신나는지 엘리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길을 걷다 말고 납치범들은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음악을 감상하는 법은 조용히 눈을 감고 선율을 음미하며 마음속으로 이미지를 구체화시키는 것인데 이들이 음악을 즐기는 법은 판이하였다.

그들은 뜻 모를 가사를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온몸으로 요란하게 리듬을 탔다.

“존나 좋군?”

가사에 맞춰 손을 올려 퍼덕거리는 춤을 추고 난 그들은 후련한 듯 감탄사를 연발하였다.

에일은 아직 흥이 가시지 않았는지 등을 비스듬히 뒤로 빼며 양손을 으쓱해 보이면서 헤벌쭉 웃어 보였다. 마커스와 카릭은 무엇이 좋은지 천진난만하게 웃어댔다.

“이야. 역시 J.J. 노래엔 소울이 살아있어.”

“맞아, 특히 다가와 다가와 줘 baby, 내게 와 내게 와줘 baby 이 부분은 소름이 돋을 정도라니깐.”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는 외계 언어 마냥 단 한 단어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뜻도 없는 가사에 천박한 반복되는 멜로디, 어디가 좋다는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세상엔 불가사의한 일이 많다지만 풀리지 않는 난제가 엘리스 앞에 존재하였다. 한참을 열이 올라 자기들끼리 J.J.

찬양 일색의 대화를 하다 화젯거리도 식었는지 에일이 무쇠 턱을 덜컹거리며 동료를 보채었다.

“아 한바탕 몸을 풀었더니 배가 고파 미칠 지경이야. 짜식들아 얼른 가자 쇠라도 씹어 먹을 것만 같아.”

카릭이 의수를 당기자 엘리스도 따라 움직였다. 10미터 앞 골목에서 어린아이 두 명이 째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녹색 민무늬 티셔츠, 때 탄 흰 반바지를 입은 남자아이와 빛바랜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였다. 둘 다 8살가량은 되었을까. 젖살로 볼이 통통한 흑인 아이들이었다.

남자아이가 툭 치고 지나가자 카릭은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들아 조심해야지!”

“닥쳐, 머저리.”

눈꺼풀 아래를 손가락으로 끌어 내리고 혀를 빠끔히 내미는 사내아이의 한 쪽 눈은 빨간 렌즈가 달린 의안이었다.

카릭이 씨근덕대며 쫓아가려 하자 수갑이 당겨지고 그제야 엘리스의 존재를 깨닫는 눈치였다. 엘리스의 몸이 쏠린 걸 보고 카릭은 혀를 한번 차더니 쫓아가는 걸 포기했다.

그녀는 몸을 추스르며 멀어져 가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분홍색 원피스 치맛자락 아래로 보이는 차가운 금속 다리가 보였다.

방금 전 스쳐 간 사내아이를 떠올려 보니 성인이 찰 법한 사이즈인 의안이었다. 소녀가 찬 의족도 가냘픈 왼쪽 다리와 비교해 보면 확 눈에 띌 만큼 굵은 의족이었다.

앞서간 에일이 빨리 오라고 보채자 카릭은 땅바닥에 침을 뱉고 돌아섰다.

카릭의 손에 이끌려 슬럼가 거리를 거닐며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들은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앞서와 별 다를 것 없는 광경들이지만 어딘가 결여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더위 속에서 손으로 부채질하며 걷는 행인들도 한 군데씩 평범함이란 범주 속에서 벗어나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태양빛이 미치지 않는 으슥한 골목길에서 쭈그리고 앉아 있는 세 명의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더위 먹은 것도 아닌데 초점이 풀려 있는 동공, 입가엔 침이 흐르고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엘리스를 쳐다보았다.

흐릿한 눈빛들이 쫓아오자 엘리스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엘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이곳은 불가사의함으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16년간 쌓아온 상식과 가치관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미지의 공간 안에 있다는 생각이 들자 두려움이란 감정이 밀려왔다.

에일과 마커스는 빨간색 천막이 둘러진 점포 앞에 앉아 뭔가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었다. 빨간 바탕에 노란색 글씨로 ‘M’자가 크게 써져 있었다.

점포 앞에 선 카릭은 먹는 데 여념 없는 에일의 등짝을 세게 내리쳤다.

“이 미련 곰탱이 녀석. 형님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먹고 있냐?”

에일은 육중한 등짝을 들썩이며 말 걸지 말라고 항거하는 듯해 보였다. 그 모습을 한심하다는 듯이 지켜보던 카릭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주문을 하였다.

“아 난 치킨버거 줘. 피클은 빼고 패티는 두껍게 에, 그리고 참 헤이 걸. 유는 뭘 먹을 거야?”

“난 필요 없어.”

“도도한 척 굴지 말고 배고프잖아. 이봐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리는걸? 킬킬 여긴 치킨버거가 끝내준다고. 한입 베어 먹어봐 뿅 가는 기분일걸. 어이 치킨버거 두 개 알았지?”

“예아. 치킨버거 두 개요.”

붉은 두건을 두른 점원은 시원스럽게 대답하고 패티를 꺼내 굽기 시작했다.

두건과 같은 색인 빨간 앞치마 양옆으로 난 노란색 레이스가 뒤집개로 패티를 뒤적일 때마다 앙증맞게 살랑거렸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점원에게서 흰 종이에 싼 빵을 건네받은 카릭은 종이를 풀어 헤치더니 흰색 튜브를 들고 빵 위에 듬뿍 뿌렸다.

코끝에서 고소한 냄새가 맡아졌다. 카릭이 양손으로 빵을 쥐고 입안에 우겨 넣자 엘리스의 손도 치켜 올려졌다.

수갑이 짤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자 묶여 있는 걸 깨달았는지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헤헤. 쏘리 리틀걸. 난 한 손으로 먹을 테니 편하게 먹으라고.”

그는 먹던 빵도 내려놓고 먹기 좋게 포장지를 열어주는 친절까지 베풀어 보였다. 엘리스가 볼 때 이해 가지 않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지방 함유량이 높다 못해 과다한 샌드위치 따위를 저렇게 맛있게 먹다니. 더군다나 마요네즈까지 듬뿍 뿌려 먹는 행위는 건강을 해치는 수명 단축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음식이란 몸에 필요한 영양분만 골라 하루를 생활할 최소 요구량만 섭취하면 그만이었다. 불필요한 영양분을 섭취할 뿐만 아니라 맛 밸런스도 붕괴시키는 그들의 식습관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 안 먹어? 맛있다구.”

엘리스가 묵묵부답으로 서 있기만 하자 카릭은 햄버거 홍보대사라도 된 듯이 한 입 베어 물고 우물거리며 먹기를 권하였다.

입가에 흰 마요네즈를 묻힌 채 바라보는 카릭의 눈빛은 왜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느냐라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이해가 가지 않아.”

“응? 이해?”

나지막한 음성은 카릭뿐만 아니라 벌써 한 개를 먹어 치우고 두 개째 빵을 먹고 있던 마커스까지 바라보게 만들었다.

“성분이 불분명한 잡고기를 모아 만든 패티. 빵 한 개에 시든 야채 몇 쪼가리. 달고 짠 소스. 어딜 봐도 정상적인 음식이 아니야.”

패티를 굽고 있는 점포 주인의 안색이 싸늘해졌다. 카릭은 당황했는지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고 마커스는 먹던 것을 내려놓고 등을 쫙 펴며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에일은 주위 공기가 달라진 것도 모르고 더럽게 소리를 내가며 먹는 것에 열중해 있었다.

“뭐라고?”

“음식뿐만이 아니야. 너희들은 이상한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야. 영양 밸런스가 맞지 않는 식사. 몸에 맞지 않는 의체, 이상한 음악. 모두 개인적인 기호에 맞춰진 것들뿐. 어째서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하지 않지? 자유라고 부르짖는 모든 행위들이 개인의 이기심을 불러오는 시작점이라고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나?”

날카로운 질문을 받은 카릭은 바 위에 놓인 의수를 바라보았다. 카릭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마커스는 몸을 일으켜 반대쪽으로 돌아앉았다.

“이기심이라. 자 이걸 보라고.”

마커스가 검은 바지자락을 끌어 올리자 쇳덩이로 이루어진 종아리가 드러났다. 그는 엘리스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난 사고로 다리를 잃었어. 저기 뚱보 녀석은 너무 먹을 것을 밝히다 턱관절이 습관적으로 빠져대서 기계 턱을 달았지. 카릭 녀석은 컴퓨터가 장착된 의수로 바꿨어. 너희 센트럴하이브 놈들은 모르겠지. 피부와 근육, 뼈를 그대로 유지하고도 첨단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가 신체를 소중히 여기지 않아 기계 의체를 단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야. 우린 너희들처럼 부유하지 못해. 생체 공학을 이용할 엄두 따윈 나지도 않지. 이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자 최적화된 상태야. 그런 상황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고른다는 게 잘못된 것일까? 나는 검은색이 좋거든. 기왕이면 크고 튼튼한 게 좋지. 안 그래?”

“난 녹색이 좋아.”

“나는 빨간색. 아 이제 좀 배부르다.”

카릭이 맞장구치자 에일도 한 마디 거들며 손에 묻은 소스를 점퍼에 닦아댔다. 컵에 든 음료수를 마시고 난 후 트림을 했다.

“꺼억. 이기심이 뭐 어때서. 난 식욕이 사라지면 아마 권총을 물고 자살해버렸을걸. 아가씨는 담백한 야채들로만 이뤄진 식단을 좋다 생각하나 본데, 이 햄버거를 먹고 나면 생각이 달라질걸? 한입 베어 먹어보라고. 고기의 기름진 맛과 스파이시한 소스가 혀를 자극하는 맛. 거기에 톡 쏘는 콜라 한잔 죽여주는 조합이지. 인생은 어차피 한 번뿐이라고 죽으면 산해진미가 쌓여있다 한들 어떻게 먹겠어. 인간은 살아 있을 때 즐겨야 한다고.”

에일은 평소보다 불룩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카릭은 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 말이 맞기도 해. 우리 슬럼가 사람들은 Grasshoppers라고 불리지. 놀고먹는 베짱이. 주류에서 떨어져 나간 패배자들이야. 어렸을 땐 센트럴하이브를 동경하기도 했지. 발달된 시스템 속에서 어디 하나 부족한 것 없이 공부할 수 있는 세상이 무척이나 부러웠어. 그러나 난 이 삶이 좋아. 여기 슬럼가가 좋고, J.J.의 노래가 좋고, 싸구려 햄버거가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럽지. 남들은 마요네즈가 느끼하다고 하지만 듬뿍 뿌려 먹을 때 난 행복함을 느껴. 진심으로 살아 있다는 걸 느끼게 되지. 아가씨는 자신이 살아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어?”

그들은 솔직했다. 특별하게 자제하려 하지도 않는 게 본능에 충실한 동물과 닮아 있었다. 살아 있다는 느낌.

엘리스는 16년 동안 살아 있다고 여겨본 적이 있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존재하고 있는데 존재 이유를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자긴 벨포드 가의 딸로 태어나 샤인네트워크 일원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특별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다르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샤인네트워크라는 거대한 벌집의 일부분이라고 여겼을 뿐 자기 존재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엘리스는 나무 바에 놓인 햄버거라는 빵을 바라보았다. 궁금해졌다. 살아있다는 감정이. 엘리스가 햄버거를 손에 들자 카릭은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먹어 봐.”

엘리스는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퍼석한 빵을 이빨이 뚫고 지나가 물기 없는 양상추가 아삭거리며 씹힌다.

달고 짜며 톡 쏘는 맛이 나는 소스와 기름지지만 농후한 맛이 나는 고기, 새콤한 토마토가 어우러져 복합적인 맛으로 재탄생되었다. 하나씩 떼어 놓고 보면 형편없는 음식 재료들이 하나로 합쳐지니 놀라운 맛을 이끌어 냈다.

센트럴하이브에서 이런 음식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센트럴하이브의 음식들은 신선한 재료와 뛰어난 영양 밸런스를 고루 갖추었고 맛에서도 훌륭했지만 이 슬럼가 음식은 근본적으로 다른 성질의 맛이었다.

파괴하는 맛, 분명 몸에는 좋지 않을 음식이었지만 저절로 입이 가고 혀가 원하는 맛이었다. 엘리스는 한 번으로 만족하지 않고 두 번 더 햄버거를 베어 먹었다.

세 명의 납치범들은 최고라 여기는 음식을 선보이고 난 후 시식 평을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가장 소중한 걸 남에게 보여주고 반응을 기다리는 마음, 엘리스는 순진무구한 그 마음이 이해가 갔다.

“역시 싸구려 음식이로군....... 그러나 맛있어.”

세 사람은 일심동체가 되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 모습들을 보며 엘리스는 보일 듯 말 듯 한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납치된 이후 처음으로 시장기가 느껴졌다.

처음 먹는 햄버거라는 음식을 더 맛보고 싶어졌다. 엘리스는 햄버거 하나를 깨끗이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후식으로 콜라를 마시는 것을 잊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자 그들은 박수를 쳐주었다. 햄버거 가게 주인도 앞치마 자락을 손에 쥐며 감동한 얼굴이었다. 그들에게 엘리스가 어떻게 비쳤는지 알 수는 없었다.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런 것은 별로 중요치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엘리스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발걸음을 내딛는 누런 땅이 낯설지 않았다. 작열하는 태양빛도 피부를 감아오는 뜨거운 열기도 한결 적응된 느낌이었다.

“너희들의 대장인 스탠이라는 자는 센트럴하이브 출신인 것 같은데 왜 슬럼가에서 살지?”

엘리스를 내려다보는 카릭의 표정은 그걸 어떻게 알았지라고 물어보는 표정이었다.

“그 사람은 유비쿼터스 시스템을 알고 있었어. 게다가 이곳에 오래 살면서 피부가 탔겠지만 유달리 흰 피부에 푸른 눈동자. 간단한 추측이지.”

카릭은 감탄했다는 표정이 되어 왼손으로 목덜미를 긁적거렸다.

“맞아. 보스는 이곳 사람이 아니지. 나도 자세한 건 몰라. 다만 성인이 되기 전에 센트럴하이브를 빠져나왔고 꽤나 유력한 집안의 자제였다는 것밖엔. 보스도 다른 이야긴 잘하지만 과거에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지.”

골목길을 돌아 그들 아지트에 도착하자 5층 이상 되는 건물이 태양을 가려 그늘이 져있었다.

어두운 입구를 들어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인간의 어두운 내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벨포드 공은 어이가 없었다.

정부 기관에서 양성한 요원이라는 것들이 두 눈 멀쩡히 뜨고 자기 딸을 납치해 가는 것을 저지 못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납치범들이 보낸 영상물을 보니 엘리스가 맞았다. 눈이 가려진 채 의자에 묶여, 기절했는지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보았는지 모른다.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샤인네트워크 사회 안에서도 냉혈인이라고 불리는 벨포드 공이었지만 딸이 납치된 화면을 보자 분노라는 불꽃이 피어올랐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거세지는 분노의 불길을 참지 못한 벨포드 공은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묵직한 소음은 집무실 안에 있는 다른 관료들에게도 벨포드 공의 감정을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너 나 할 것 없이 입을 다문 채로 있어 집무실 안에는 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폭발시킨 게 자신답지 않았다고 여겼다.

딸의 안위와 납치범에 대한 분노가 한데 엉켜 마음속은 어지러워 왔다. 검은 가죽 의자에 몸을 기댄 벨포드 공은 관자놀이 부근에 손가락을 대고 고심에 빠졌다.

“놈들이 원하는 게 45번가의 자치권과 금괴 1톤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각하.”

“흐음.”

간덩이가 붓다 못해 몸 밖으로 나온 당돌한 놈들이었다.

샤인네트워크 정부 수뇌들도 무시 못 하는 명문가 당주이자 서부 outskirt를 관할하는 총독인 벨포드 공이었다.

그런 벨포드 공의 외동딸을 납치한 범인이 슬럼가 쓰레기들인 Grasshoppers라니 만용에 가까운 그들의 용기가 가상하게 느껴졌다.

“신원파악은 됐나?”

“옛, 각하. 공항 폐쇄회로에 찍힌 화면을 분석결과 45번가에 사는 민간인이었습니다.”

갈색 양복을 입고 단정하게 7:3 가르마를 한 청년 관료는 손에 든 파일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벨포드 공은 파일을 들고 하나씩 딸을 납치한 범인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딸 엘리스의 16번째 생일인 오늘, 처음으로 상봉하는 기념적인 날에 특별한 선물을 안겨준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줄 것이다. 처절하고도 잔혹하게 응징하리라 마음먹었다.

파일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흰 종이는 구겨졌다.

“놈들은 지금 어디에 은닉하고 있나.”

“옛, 각하. 45번가에 숨어 있는 것은 확실하나 구역이 워낙 크다 보니 정확한 은신처 파악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죄송합니다, 각하.”

“죄송? 그걸 대답이라고 하나.”

질책을 받은 관료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켰다. 무능한 녀석들이었다.

누구도 아닌 최고 상관의 딸이 납치당했는데 신속한 대처법도 내놓지 못하다니 이놈들에게 일을 맡겨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벨포드 공은 보다 강력한 수단을 내리기로 결정하였다.

“찾지 못한다면 나오게 하면 되겠지. 길리엄 장군.”

“옛, 각하.”

키가 2미터에 가까운 노장군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골격이 발달된 얼굴 안에 번뜩이는 눈매는 적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 만큼 매서운 데가 있었다.

“군대를 동원하게. 사단급 병력을 파견해도 좋네. 녀석들을 숨겨준 45번가 주민들도 한패이니 사정 봐주지 말고 반란 분자를 섬멸하게.”

주위 공기가 술렁거렸다.

젊은 보좌관이나 다른 관료들도 동요하는 기색이었다. 보좌관은 은색 안경테를 매만지며 반론을 펼쳤다.

“각하. 외람되지만 너무 과격한 결단이 아니신지. 재고해 주십시오. 자칫하면 학살로 오해받아 중앙정부에 문책을 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더군다나 납치범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지 않고 군대를 동원한다면 엘리스 양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습니다, 각하.”

“학살? 문책? 놈들은 내 딸을 납치했어. 그리고 자치권을 요구했지. 이것은 단순한 납치가 아니라 정부에 노골적으로 반기를 드는 테러 행위다. 국가를 좀먹은 암적인 찌꺼기들은 청소해야 마땅하다. 샤인네트워크의 대의란 무엇인가, 보좌관?”

보좌관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간 침묵하였다. 은테 안경을 벗고 얼굴을 들자 안경 썼을 때와 달리 서글서글한 눈매가 아닌 매와 같은 날카로운 눈매로 변해있었다.

“전체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전체.”

벨포드 공은 만족하였다. 대의는 샤인네트워크 국민에겐 영혼과도 같은 신성한 신념이었다.

대의라는 거대한 탑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이라도 희생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었다.

부하들에게 대의를 상기시켰지만 벨포드 공 또한 딸의 목숨을 소홀히 여기는 것은 아니었다.

아내를 잃고 남달리 애정을 쏟아온 외동딸이었던 만큼 부하들에게 내색할 수 없었다. 마음속 한편이 쓰려왔다.

혈육에 대한 연민과 괴로움은 Grasshoppers들에 대한 분노라는 감정으로 변질되었다. 분노는 곧 폭력을 불러오고 폭력은 그들에게 곧 종말을 암시하였다.

시간은 오후가 지나 태양은 한풀 꺾였다. 행인들의 왕래가 적어져 비교적 한산해진 길에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이 있었다.

고물상에서 싼값에 사 온 것이 틀림없는 중고 자전거에 빨간 페인트칠을 해서 새것처럼 꾸며 놓았다.

흑발을 등까지 기르고 머리 위에 분홍색 핀을 꽂은 여섯 살 가량인 여자아이와 머리가 곱슬곱슬하고 구릿빛 피부인 비슷한 나이 대인 사내아이였다.

여자아이가 앞장서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자 오래 입어 낡았지만 깔끔하게 세탁된 분홍 원피스가 펄럭거렸다. 사내아이는 이에 질세라 페달을 밟는 속도를 올렸다.

일직선으로 길을 따라 달리는 게 아니라 현관 앞에 파라솔을 깔고 앉아 있는 어머니 시야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어제와 다를 것 없는 평화로운 일상, 여인은 아이들이 재밌게 노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였다.

아이들이 쥐와 고양이처럼 쫓기고 쫓는 모습을 보다가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관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이들 모습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릴로 땅을 파는 소리랑 흡사했다. 어디서 공사를 하는 것일까. 그녀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수백 미터 정도 앞, 바늘구멍처럼 작아져 가는 길목에서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땅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로 인해 흐릿하게 보이는 검은 그림자는 말없이 다가오는 사신처럼 조금씩 커져갔다.

그녀의 동공이 확대 되고 문고리를 잡은 손은 힘없이 떨어졌다.

계속 같은 자리를 도는 게 싫증 났던지 여자아이는 방향을 틀어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여자아이가 뒤에 있는 사내아이를 약 올리자 사내아이도 그 뒤를 따라붙었다. 여인은 아이들이 멀어져 가자 절규했지만 더욱 멀어질 뿐이었다.

“안 돼!.”

놀이에 몰두해 있는 아이들에게 절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자아이는 고개를 뒤로 향하고 자전거를 앞을 몰았다.

검은 고무바퀴가 흙길 위에 튀어나온 돌에 부딪히고 균형을 잃은 자전거는 엎어졌다. 땅에 엎어진 여자아이는 몸을 일으키지도 않고 아픔에 울음을 터트렸다.

사내아이는 여자아이를 달래기 위해 자전거에서 내려 남색 반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신사답게 숙녀의 눈물을 닦아주자 울음소리는 그쳤다.

그러나 귀를 울리는 소음은 그치지 않았다. 소년은 시끄러운 소리가 단지 울음소리라고 생각했으나 그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주위로 햇볕이 사라지고 그늘이 졌다.

소년은 손에 쥔 젖은 손수건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검은 쇳덩어리가 시야 전체를 가렸고 두려움에 빠진 소년은 움직일 생각도 못 하고 몸만 떨고 있을 뿐이었다.

멈춰 선 검은 쇳덩어리는 커다란 바퀴와 긴 코를 지니고 있었다. 소년은 그게 뭔지 잘 알고 있었다.

집안에 똑같이 생긴 게 몇 개씩이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소년이 느끼기엔 너무나도 크고 너무나도 두려웠다.

샤인네트워크 군의 표준형 전차인 쿼바디스는 다시 한 번 엔진 소리를 내며 몸체를 부르르 떨었다.

그때 아이들을 뒤쫓아온 어머니는 패닉 상태에 빠진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고 집을 향해 달렸다. 아이들의 등을 떠밀며 재촉하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의 검은 눈동자에 짙은 남색 군복을 입은 군인이 비춰졌다.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지고 여인의 몸에서 피가 눈보라처럼 뿜어져 나왔다.

달려가던 아이들은 총성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피에 물들어 쓰러진 채로 손을 들어 떠나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생명이 꺼져가는 여인의 눈엔 아이들 모습이 새겨있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녀는 싸늘해지는 여인의 몸을 붙들고 오열했고 소년은 어머니를 쓰러트린 탱크를 바라보았다.

분노에 찬 어린 눈동자는 자신들을 향해진 검은 총구로 향해있었다.

노인은 짜증이 났다. 어두침침한 두 눈은 코앞에 두고 봐야 분간이 될 정도였다.

편안히 죽음을 향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노인에게 가장 큰 인생의 행복은 침대에 누워 티비를 시청하는 일이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라디오 대용으로 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홀로 쓸쓸히 지내고 있는 노인에게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것은 오직 TV뿐이었다.

오후를 한가로이 뉴스를 시청하고 있는데 요란한 소음으로 티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인기 드라마 가우스의 결말 부분을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폭죽 소리와 많은 사람들이 구둣발로 뛰어다니는 소리가 유일한 행복을 앗아가 버렸다.

드라마는 끝나 버리고 티비에선 긴급 속보라며 앵커가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노인은 욕지거리를 하며 티비를 틀기 위해 고단한 노구를 이끌고 티비를 향해 걸어갔다.

티비 위에는 창문이 있고 열어둔 사이로 흰 커튼을 쳐두었는데 커튼이 펄럭거리며 검은 공 하나가 방 안으로 굴러 들어왔다.

“아니, 요즘 것들은 기본이 없어 기본이. 축제를 벌이려면 지들끼리 벌일 일이지 남에게 민폐를 끼치고 나 말이야. 창문을 열어뒀길 망정이지 하마터면 창문이 깨질 뻔했잖아. 내 이놈들을 그냥.”

노인은 움직이지 않는 허리를 숙여 공을 주워 들었다. 손에 쥔 검은색 공의 촉감이 이상했다. 말랑말랑한 고무가 아닌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이었다.

의아해진 노인은 공을 눈앞에 가져다 대 보았다. 그의 표정에 경악이 떠올랐을 때 한가롭게 티비를 시청하던 방은 삽시간에 불길이 치솟았다.

슬럼가라 불리는 45번가 전역은 전시를 방불케 할 만큼 처참했다. 건물 곳곳에선 폭발과 함께 시뻘건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도망가다가 사살당하는 자, 총을 들고 대항하다 진압당하는 자, 무장과 비무장을 가리지 않고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총독부에서 허가를 받은 군인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비정하게 살육 행위를 벌였다. 평화롭던 45번가는 총성과 포성, 비명소리만이 존재하는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작전 상황을 유심히 관찰하던 장교는 사령부로 송신을 하였다.

“45번가 A구역 완전히 제압했습니다. 곧 B구역으로 진입하겠습니다.”

“보스, 크......큰일입니다!”

꿈결 속에서 카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요란한 목소리는 실제였다. 실눈을 뜨고 보자 아직도 꿈을 꾸는 것처럼 녀석이 바닥에 엎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두 시간 전 스탠은 각성제를 복용한 다음 의자에 등을 기대고 탁자 위에 발을 올린 채 잠이 들었다.

요 며칠 동안 불면증에 시달려 수면이 부족했던 스탠은 간만에 단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아직도 약기운이 남아 있는지 몽롱한 머릿속을 깨기 위해 정신을 집중시켰다. 시야가 약간 선명해지고 비춰진 카릭은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속사포처럼 떠벌거리던 목소리는 떨렸고 얼굴에선 땀이 흘러내렸다.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스탠은 탁자에서 다리를 내리고 똑바로 고쳐 앉았다.

카릭은 노트북을 탁자 위로 내려놓고 전원을 켠 다음 오른쪽 의수를 치켜들었다. 곰 발톱 같은 뾰족한 손끝이 갈라지더니 젓가락 같은 쇠마디가 뻗어 나왔다.

카릭은 리드미컬한 빠른 템포로 키보드를 치고 난 후 노트북 화면을 스탠에게로 옮겼다. 스탠은 눈을 얇게 뜨며 모니터 화면을 주시하였다.

‘45번가 말살 작전 개시.’ 파란 바탕에 흰 글자로 써 있는 구절이 덜 깬 잠과 약기운을 깨끗이 날려버렸다.

스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카릭은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하죠 보스? 곧 군대가 들이닥칠 겁니다.”

스탠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화를 선택하지 않고 무력 카드를 고르다니. 놈들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를 앙다물자 턱 골격이 얼굴 피부에 그대로 드러났다.

스탠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총독의 딸을 데려와.”

“예? 아, 알았어요 보스.”

카릭이 나가고 스탠은 창가를 내다보았다.

창밖 풍경은 변함없이 평화롭고 따분해 보였다. 얼마 있지 않아 이 무료한 평화는 참혹한 전시 상태로 돌변할 것이다. 엘리스가 한 말이 맞았다.

그들과 협상을 하겠다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었다. 어리석음에 대한 대가는 감당하기 어려운 참혹한 결과로 돌아왔다. 스탠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애용하는 권총 두 자루가 보였다. 이 총으로 목숨을 위협하는 수많은 적들을 처리했다.

이번에도 총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자문해 보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스탠은 권총을 허리춤에 꼈다. 이번엔 살아남을 수 없다.

스탠은 죽음을 각오하였다. 살기 위해 총을 쓰진 않을 테지만 다른 용도로 쓸 일이 있었다.

곧 그 대상이 스탠 앞에 나타날 것이다. 얼마 안 있어 계단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두 명이 아닌가 보다.

쿵쾅거리며 크게 들리는 걸 보아 에일과 마커스도 올라오는 모양인가 보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자 모두 한데 모여 스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다만 한 명 엘리스만이 침착하고 냉정한 눈빛으로 스탠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스.”

에일이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고 스탠은 엘리스를 바라보았다.

“여자애만 남겨두고 너희들은 내려가 있어.”

에일이 뭐라 말하려고 하는 걸 카릭이 제지하고 문밖으로 데려 나갔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스탠과 엘리스 단둘만이 남게 되었다. 스탠은 책상 위에서 리모컨을 들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방 안에는 책상과 의자 벽에 놓인 오디오만이 전부였지만 그 오디오는 슬럼가에 어울리지 않게 꽤나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여성의 낮은 목소리. 아름답지만 음울한 음성이었다.

여자가 부르는 노래가 지나가자 남자가 부르는 부분으로 변했다. 귀에 친숙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바로 스탠의 목소리였다.

“어때 내 노래가?”

“왜 진작 내 경고를 새겨듣지 않았지? 너도 센트럴하이브 출신인데, 왜 우리들의 방식을 모르지?”

한 단어마다 비수가 되어 스탠의 마음속을 찔렀다. 그러나 겉으로 내색하진 않고 스탠은 책상 위에 손으로 짚은 채로 엘리스를 내려다보았다.

“난 노래를 물어보았어.”

“허무주의가 담겨 있는 노래군, 지금의 너처럼.”

그녀는 비난하려는 의도보단 느낌 그대로 말한 거겠지만 스탠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비난받은 기분이 들었다.

손뼉을 한 번 치고 웃으면서 기분을 역설적으로 표시하였다.

“하하, 그런가. 허무하단 말이지. 맞아 내 인생은 허무해. 나도 너처럼 센트럴하이브에서 태어나 대의를 이 세상 진리인 마냥 숭배하고 전체 속에 하나가 되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지. 그러나 커가면서 이질적인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어.”

스탠은 책상을 돌아 엘리스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게 뭔지 아나? 바로 내 자신이 다른 놈들보다 뛰어나다는 걸 깨달은 거야.”

엘리스 앞에 선 스탠은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었다. 그 눈빛은 태양처럼 쏘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난 누구보다도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녔어. 그러나 빌어먹을 학교는 항상 조화, 조화, 조화! 멍청이들에게 맞추라고만 하면서 나를 규격화시키려고 했지. 너는 남들이 자신을 틀에 박힌 인간으로 만들려고 할 때의 기분을 알아?”

“전체를 위한 조화가 왜 나쁘다는 거지? 네가 말하는 건 네 개인의 이기심에 불과해.”

스탠은 차가운 조소를 흘려보냈다. 자리에서 일어서서 엘리스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너 또한 센트럴하이브 시민들과 다를 게 없군. 이것 하나만은 말해두지. 예술이란 건 어중간한 놈들이 노력한다고 해서 이뤄지는 간단한 것이 아냐.”

노래는 끝났다.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스탠은 허리춤에 꽂은 권총을 꺼내들었다. 엘리스는 총구엔 관심도 없다는 듯 스탠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요구만 받아들여지면 넌 무사히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원치 않는 살인은 하지 않는 주의였으니까. 이젠 상황이 달라졌어. 네 목숨값으로 내 삶의 공간을 지켜내야겠다.”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군. 나가면 자살 행위라는 걸 모르나?”

“설령 죽는다 하더라도 널 죽여 총독에게 복수할 수는 있겠지.”

그때 문이 열리고 쏟아지듯 녀석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됩니다, 보스. 혼자 가면 개죽음이에요!”

“카릭 말이 맞아. 튀어서 후일을 기약해 보자고.”

녀석들은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출신도 다르고 피가 섞여 있지도 않았는데도 센트럴하이브에 두고 온 가족들보다 이놈들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스탠은 녀석들을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스탠이 먼저 주장한 계획이었고 마무리도 혼자 깔끔하게 지을 생각이었다.

“안 돼. 너희들은 슬럼가를 떠나도록 해. 너희들이 따라오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보스!”

카릭의 안경 너머로 작은 눈엔 눈물이 일렁거렸다.

그 맘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럴 때는 비정해져야만 했다. 스탠은 엘리스를 데리고 문을 나서려 했다. 등 뒤로 마커스의 음성이 들렸다.

“보스. 우린 Grasshoppers야. 놀고먹느라 곤충 사회에서 쫓겨난 베짱이지. 그러나 베짱이는 절대로 동료를 버리지 않아. 우린 보스를 친형제라고 생각해. 보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형제라는 단어 하나가 스탠의 발걸음을 떨어지지 않게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녀석들은 잘못된 선택을 군말 없이 따라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책임까지 함께 지려 했다.

어리석은 녀석들이었다. 정말로 어리석은 녀석들이었다. 이다지도 미욱하고 우직한 녀석들을 죽음으로 내몰아야 한단 말인가.

“보스!”

“바보 같은 놈들. 죽어도 내 원망은 하지 마라.”

말과는 다르게 목소리는 어딘가 떨리고 있었다. 녀석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반드시 녀석들과 함께 살아남을 것이다.

엘리스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불과 몇 시간밖에 같이 지나지 않아 그들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었지만.

다른 면을 발견해 냈다. 아니 발견했다고 믿었었다. 엘리스가 보기에 그들은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자기 욕망, 자유를 추구하겠다고 해놓고서 그들은 죽음을 향해 제 발로 걸어가고 있었다. 스탠의 선택은 옳았다. 무의미한 죽음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학교에서 배웠던 우정, 의리라는 게 이런 감정일까. 신념을 위해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칭송받아 마땅한 거룩한 행위였다.

하지만 그들이 가려는 길은 허무한 아무런 가치 없는 개인적 인연에 연연한 것들이었다.

엘리스도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를 원망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버지는 샤인네트워크의 수뇌부로서 이 지역을 다스리는 총독으로서 최선의 선택을 하였다. 아버지는 옳았고 엘리스에게 다가올 죽음도 당연한 것이지만 어딘가 마음속 한편으로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과 지내면서 개인주의가 물들어서일지도 몰랐다. 그들이 지내는 삶은 16년 동안 센트럴하이브에선 보지 못한 독특하고도 강렬한 이미지였다.

과연 내가 옳고 그들이 틀린 것일까? 엘리스는 내면의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보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늠할 수 없었다.

분명히 어리석고 틀린 행동이지만 인간적인 그들의 결속과 옳고 지혜로운 선택이지만 비인간적인 대의. 엘리스는 머리가 아파왔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몇 시간 전 센트럴하이브를 떠나기 전까지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다.

혼란은 더욱 커져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운데 엘리스가 탄 차량은 45번 구역 광장 한가운데에 도착하였다.

스탠은 엘리스에게 총구를 겨눈 상태로 차 안에서 나왔다. 사이렌 소리,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 군인들의 구호 소리가 한데 엉켜 이명 소리처럼 귀에 울렸다.

남색 계통으로 치장된 군복을 입고 검은 총을 파지한 채 일사불란하게 뛰어다니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육각면체 3개가 결합되어 있는 문양으로 샤인네트워크의 상징이었다. 육중한 몸체를 부르르 떨며 아스팔트 위에 상처를 내는 장갑차도 벌새의 날갯짓처럼 한 자리에서 저공비행을 하고 있는 헬기에도 모두 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정 육각면체 3개가 결합된 테두리 안에 속하지 못한 슬럼가 주민들은 백색 균형에 의해 소거되고 있는 중이었다.

비인간적인 잔인한 행동이었지만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비록 소수에 불과한 이들이 테러 행위를 벌였다 하더라도 개인이 저지른 일은 개인이 속한 단체가 책임져야 했다.

진압을 벌이던 움직임이 어수선해졌다. 엘리스가 납치범들에게 잡혀있는 모습을 발견한 듯한 모양이다. 건물에 가하던 포격이 멈추고 주민들을 소탕하던 군인들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엘리스는 오른쪽 어깨가 눅진해져 옴을 느꼈다. 어깨에 얹힌 스탠의 손에서 난 땀으로 옷이 젖은 것이다.

왼쪽 관자놀이에 닿아있는 차가운 쇠 감촉과는 달리 그 손은 뜨거웠다.

나머지 일행도 손에 무기를 하나씩 챙겨 들고 호위하듯 뒤로 섰다.

엘리스는 뇌리로 타국 속담이 떠올랐다. ‘당랑지부’ 사마귀가 도끼 같은 앞다리를 내세워서 지나가는 수레를 막아선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금 그들이 무기를 들고 군대 앞에서 맞서는 행위는 도끼 같은 앞다리만 믿고 서 있는 사마귀와 다를 게 없었다.

카릭에게서 확성기를 건네받은 스탠이 군인들을 향해 협박을 가했다.

“무고한 생명을 학살하는 행위를 즉각 중단하라. 여기 총독의 딸이 있다.

당장 45번 구역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소녀를 죽이겠다.”

그 경고가 유효했는지 남색 인파 사이로 군복 대신 제복을 입은 장교가 나타났다.

“무모한 행동 하지 말아라.

이 구역은 완전 봉쇄됐다. 도망칠 곳은 없으니 즉각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투항만이 더 이상의 희생을 막을 수 있다.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

주위를 둘러본 카릭은 스탠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속삭이듯 작게 들리는 목소리에는 공포라는 감정이 선명하게 묻어나왔다.

“보, 보스.

놈들이 새까맣게 몰려와 사방을 포위했어요.”

“시끄러워. 이미 예상한 일이야.”

호기로운 말투와는 달리 엘리스의 목덜미와 닿아있는 가슴에서 요동치는 심장 박동 소리가 느껴졌다. 스탠은 더욱 위협적인 목소리로 장교에게 대답하였다.

“잘나신 총독 각하께선 따님의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지.

빨리 군대를 철수시켜 어서!”

전방에 장벽처럼 둘러선 군인 무리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강도가 약했다고 느꼈는지 스탠은 총구를 빗겨 겨냥하고 허공에다 발포하였다. 화약이 폭발하는 고 데시벨 소음은 엘리스의 고막을 울려 귀가 먹먹해지게 만들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군인 무리들에게서 동요하는 기색이 보였다. 4명에 불과한 납치범들이 다수를 압도하는 상황이었다.

“다음 번 총알은 소녀의 머리통을 관통하게 될 거야.”

낮게 깔리는 목소리는 허세가 아니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장교는 부하들에게 뭔가 지시를 내렸다. 아스팔트 위에 군림하던 장갑차는 엔진 시동 소리를 내며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이제 만족하는가?”

“어림없어. 어서 모두 철수시켜.”

“완전히 철수하려면 상부에 허가가 떨어져야 한다. 기다릴 수 있겠는가?”

“쳇, 어서 상부에 허가를 받아 내 총은 인내심이 강하지 않아.”

“알았다. 최대한 노력해 보도록 하겠다.”

짧게 대답한 장교는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 전화기를 잡고 상부와 교신을 하기 시작했다. 엘리스는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들이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납치범들에게 일부나마 요구를 수용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을 하기 위해 시간을 끌고 있는 것일까. 머리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엘리스가 얼굴을 들어보니 스탠은 사우나에 있는 것처럼 얼굴에서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스탠도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철수명령은 아직 멀었나?”

장교는 아직도 무전기를 부여잡고 통신을 계속하고 있었다. 거듭되는 물음에 부관인 듯한 군인이 확성기를 들고 대답하였다.

“아직 상부와 협의 중이다.

조금 더 기다려 주길 바란다.”

“개수작 하지 마!”

총성이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분노에 가득 찬 포효 소리가 광장 전체로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 바람에 군인들뿐만 아니라 스탠 곁에 있는 부하들과 교신을 하고 있던 장교마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철수 확인은 일단 이 자리에서 뜬 다음에 확인하기로 하겠어.

5초. 5초의 시간을 주지. 당장 하늘에 떠 있는 헬기를 우리 앞에 대기시켜.

우리가 완전히 떠날 때까지 허튼수작을 부렸다간 이 소녀의 생명은 없는 줄 알아.”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는지 아파오기 시작했다. 협박하는 그의 목소리엔 절박한 심정이 담겨 있었다. 마지막 경고를 받은 장교는 무전기를 내려놓았다. 장교가 스탠을 노려보고 있을 때 군인 하나가 귓속말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5.”

“4.”

“3.”

“2.”

“1.”

“잠깐.”

엘리스는 긴장하느라 잔뜩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잔뜩 부푼 풍선에서 바람이 새어 나가는 모습이었다. 머리 위로 거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스탠도 부하들도 극도로 긴장돼 있는 상태에서 한 호흡 정도 쉴 틈이 생겼던 것이다.

“대답은 No다.

테러리스트들과 협상은 없다. 이것이 상부에서 내린 지시이다. 폭도들을 진압해라.”

“뭣!?”

“푸슝, 푸슝.“

입으로 바람을 부는 것 같은 작은 총성이 들렸다. 짧은 순간에 연쇄적으로 고깃덩이가 던져지는 소리가 났다.

“으아아아아!”

카릭이 오열하는 소리가 들렸다. 스탠은 엘리스에게 총구를 겨눈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살아있었던 두 사람은 싸늘한 시체로 변해있었다. 워낙 순간적으로 당한 일이라 두 사람의 얼굴엔 죽음을 예상한 흔적이 아무 곳도 없었다. 그저 긴장된 얼굴에 두 눈을 똑바로 뜬 채 관자놀이와 이마에서 시뻘건 피가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히 적실 뿐이었다. 카릭은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채로 슬픔과 분노가 가득한 함성을 질러댔다. 얼굴에 잔뜩 주름이 지고 쫙 벌려진 입안으로 누런 뻐드렁니가 부르르 떨렸다.

“이 개자식들아!”

마커스가 들고 있던 기관총을 들고 군인들을 향해 발사하려던 카릭은 몸을 쭉 펴기도 전에 머리에 총을 맞았다. 귀 위 머리 부분에 정통으로 총탄을 맞은 카릭은 옆으로 힘없이 고꾸라졌다. 머리에 쓴 노란색 비니 모자는 흘러내린 피로 인해 빨갛게 물들어졌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 피와 섞였다. 비통한 얼굴로 죽은 표정이 몇 시간 전 모습과 오버랩되었다. 햄버거를 건네주며 맛있냐며 미소 짓던 얼굴이 떠올랐다.

“하하하.

결국...... 결국....... 이런 거였군....... 이런 거였어.”

스탠은 실성한 사람 마냥 웃었다. 짧은 시간에 벌어진 충격적인 일들을 한꺼번에 감당하기는 무리였다. 자조하는 목소리는 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너희들이 내 형제들을 죽였으니, 나도 이 소녀를 죽이겠다.”

“허튼짓 하지 마라 스탠. 넌 센트럴하이브 시민이지 않나. 무기를 내려놓고 순순히 잡힌다면 재판에 회부돼 사형은 면할 수 있다.”

“닥쳐!

난 센트럴하이브 시민이 아니야. 난 Grasshoppers다.”

권총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철컥거리는 소리가 났다. 엘리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 앞에서 처연한 척했지만 죽음이 임박해 오자 본능적으로 두려운 감정이 생겼다. ‘살려줘.’ 엘리스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죽어라!”

총성이 들렸지만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왼쪽 볼과 어깨에 뜨끈한 액체가 느껴졌다. 엘리스는 감은 두 눈을 떴다. 스탠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가슴 부근에서 검은 가죽 재킷 위로 진홍색 피가 흘러내렸다. 스탠의 몸이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앞을 향해진 총구는 바람개비처럼 펄렁거리며 불꽃을 뿜어내었다. 스탠은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엘리스는 왼쪽 머리카락에 손을 가져다 대 보았다. 머리에서 뗀 손에는 빨간 피가 묻어 나왔다. 금발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스탠은 사지를 뻗고 바닥에 누워있었고 몸에는 경련을 일으켰다. 저격수가 쏜 탄환은 정확히 심장을 관통하였다. 관통당한 부위에선 아직도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원통함을 감추지 못한 눈빛에는 질기게도 생명의 끈을 부여잡고 있는 이유가 담겨있었다.

“왜 날 죽이지 않은 거지?”

생명의 불길이 꺼져가는 푸른 눈동자는 엘리스에게 향하였다. 들릴 듯 말 듯 한 꺼져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나......살인자가.......아니.....아티스트니까.......”

스탠의 마지막 말은 요란하게 들리는 군화 소리에 묻혀버렸다. 군인들은 엘리스에게 다가와 신상에 이상이 없는지 체크하였다. 그들에게 몸을 맡긴 엘리스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군인 하나가 흰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다. 흰색 수건에 핏자국이 새겨졌다. 그들은 엘리스를 의자에 앉히고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죽은 시신들을 치우고 부서진 파편들을 옮겼다. 엘리스가 앉아 있는 반경 10미터에 돌풍이 일었다. 엘리스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백색 헬기가 수직으로 착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엘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 묻은 금발은 바람에 일렁거려 자꾸 시야를 가려왔다. 엘리스는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총을 맞고 엎어져 죽어 있는 어린아이, 건물 벽에 회색 칠은 불에 그을려져 흉물스러운 검은색으로 변해있었다. 엘리스는 납치범들이 사살당한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들 시신은 군인들에 의해 흰 모포가 덮어져 운반되었다. 군인들이 비켜서자 엘리스 앞으로 넓은 공터가 생겨났다. 흰색 몸체에 은색으로 그려진 샤인네트워크의 문장. 총독 전용 헬기였다. 흰색 문이 열리고 아버지 벨포드 공이 몸을 드러냈다. 망연히 서 있는 엘리스를 발견한 벨포드 공은 안도한 기색을 띠고 엘리스에게로 다가왔다. 은색 넥타이에 맨 문장 배지가 눈에 각인되었다. 벨포드 공은 엘리스 앞에 서서 한쪽 무릎을 꿇고 상태를 살펴보았다. 어깨를 매만지는 손은 미세하게 떨려왔다.

“용서해달란 말은 하지 않겠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엘리스.”

아직도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앞에서 아버지가 용서를 비는 모습이 현실 같지 않고 물속 풍경처럼 흐릿하게 비춰졌다. 엘리스를 바라보던 벨포드 공은 심상찮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떨리는 목소리엔 놀라움이란 감정이 담겨있었다.

“엘리스.

우는 거니?”

눈물? 내가 울고 있는 건가. 엘리스는 믿기지 않았다. 얼굴은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아 무표정한 상태였다. 왜 마음속으로 슬픔이 이는지 모르겠다. 슬픔이란 게 과연 무엇일까.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웠지만 칼로 에이는 듯이 괴롭진 않았다. 16년 동안 슬픔이란 감정을 느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엘리스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엘리스는 슬프지 않았다. 아니 슬픔이란 감정을 몰랐다. 그런데도 눈에선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엘리스는 직접 확인하기 위해 손으로 눈매를 만져보았다. 촉촉한 물기가 만져졌다. 식어버린 눈물은 차가웠다. 멈춰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눈물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물은 빗줄기처럼 굵어졌다. 벨포드 공은 망연자실하게 딸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엘리스는 아버지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흰 구름이 많아진 푸른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하늘은

울지 않았지만 엘리스의 눈을 통해 구슬프게 울고 있었다. 6월 4일. 엘리스의 16살 생일이었다.

작가의 말

주점이야기와 마찬가지로 15년 전 쯤 친구와 게임 세계관 설정을 짜서 웹툰, 소설로 다양하게 만들어보기 위해 써본 단편 소설입니다. 단편 소설 주인공 앨리스 벨포드가 장편을 연재하기 전에 프리퀄 격으로 설정 쌓을 겸 쓴 습작인데 공모전에 올렸다가, 듀나한테 디테일이 부족하다고 까였던 기억도 나네요. 이 소설도 다시 읽으니 그립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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