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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님께서 약관은 꼼꼼히 확인하라 하셨다. 일러스트

마왕님께서 약관은 꼼꼼히 확인하라 하셨다.

성왕국 북부, 봉인의 폐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고, 대지가 비명을 내질렀다.

성왕국의 보물 창고에서 금단의 마도서 '알하자드'를 탈취한 사악한 대마법사 라디브.

그가 서 있는 제단 위로, 세상의 모든 빛을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암흑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크하하하하!! 늦었다, 용사여! 이미 지옥의 문은 열렸다!"

라디브가 피눈물을 흘리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라! 태초의 절망이자 종말의 화신, 대마왕 니드쇼브라스 님의 강림을! 이제 이 세상은 피와 비명으로 얼룩진 생지옥이 될 것이다!!"

라디브의 등 뒤로 거대한 마왕의 그림자가 대지에 드리워졌다. 공기가 무겁게 짓눌리고, 숨을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압도적인 마기가 일행을 덮쳤다.

"이, 이런 압도적인 마력이라니……! 이건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평소엔 냉철한 지성으로 파티의 브레인 역할을 했던 여마법사. 그런 그녀마저 공포에 질려 파리하게 창백해진 안색으로 주저 앉아 지팡이를 끌어안고 덜덜 떨고 있었다.

"아직 포기하면 안 돼요! 용사님,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가 여신님께 기도를……!"

여사제가 덜덜 떨리는 두 손을 모으며 억지로 분위기를 띄워보려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마저 절망에 먹혀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용사는 묵묵히 성검을 쥔 채,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그림자와 동료들의 절망 어린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무언가 결심한 듯 성검을 바닥에 꽂았다.

"……방법이 있어."

"용사님, 설마...?!"

여사제의 눈이 커졌다. 여마법사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너, 설마 그걸 쓸 생각이야?! 그걸 사용했다간 너는...!"

용사는 작게 웃었다.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웃음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잖아.”

여마법사가 소리쳤다.

“성급한 판단이야!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거야, 아니 내가 반드시 찾아낼테니 잠시만...”

“시간이 없어.”

용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두 동료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짧았지만 즐거운 모험이었다.”

여사제가 울먹였다.

“그런 마지막 인사 같은 거, 하지 말아요……!”

그러나 용사는 이미 결심을 굳힌 눈이었다. 그는 검을 땅에 꽂고, 손바닥에 피를 내어 마법진 위에 떨어뜨렸다. 곧바로 빛의 결계가 솟아올라 여마법사와 여사제를 가두었다.

“용사!”

“용사님!”

동료들이 결계를 두드리며 외쳤지만, 용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가 준비한 것은 용사 최후의 비기였다. 자신의 생명력과 마력, 혼과 존재마저 태워 한순간 초월적인 파괴를 일으키는 금단의 자폭 주문.

용사는 두 손을 맞잡고, 천천히 주문을 영창했다.

“나의 피를 태워 빛으로 삼고, 나의 혼을 찢어 창으로 삼으리.”

그의 몸에서 새하얀 광채가 터져 나왔다. 눈부신 마력이 폭풍처럼 소용돌이치며 제단을 휩쓸었다. 균열 너머의 거대한 그림자조차 그 빛 앞에서 일순 흔들리는 듯했다.

라디브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이 스쳤다.

“설마……! 네놈, 정말로 동귀어진을—”

용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두려움은 있었다. 죽고 싶지 않다는 본능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컸던 것은, 여기서 자신이 멈추면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확신이었다.

잘 있어라, 동료들.

잘 있어라, 나의 고향이여.

부디, 나의 희생이 가치 있기를.

그는 마침내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알티마 이그니션 익스플로전!!"

순간, 세계가 하얗게 터졌다.

천지를 뒤흔드는 섬광.

뒤이어 모든 감각을 찢어버릴 것 같은 폭음.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진동.

용사는 자신이 빛이 된 것처럼 느꼈다. 살이 타고, 피가 증발하고, 의식이 찢겨 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평온했다.

아아.

이걸로 끝이다.

그래도 마지막은 용사답게 살았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어째서 의식이 그대로 있지?

죽었다면 벌써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 아래로 뭔가 말랑하고 탄력 있는 감촉이 전해졌다.

뾰잉.

“……?”

뾰잉. 어디선가 느껴본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

용사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눈부신 햇빛이었다. 그다음은 짙은 은빛 머리칼. 그리고 검은 피부. 마지막으로 새하얀 백사장과 넘실거리는 바닷물 같은 현실감 없는 풍경이 보였다.

거대한 여인이 선베드에 누운 채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은발에 검은 피부, 조각처럼 매끈한 몸매. 그녀는 비키니 차림으로 한 손엔 색색의 과일 음료를 들고, 다른 손으론 태양빛을 가리듯 이마 위에 얹고 있었다. 그리고 용사는 그 거대한 여인의 몸 위, 정확히는 탄력 좋은 배 위에 엎어진 채 멍하니 굳어 있었다.

'……이 파렴치한 차림의 누님이 마왕?'

용사가 멍청한 생각을 할 동안, 거대한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붉은 눈동자가 귀찮다는 듯 반쯤 풀려 있었다.

“응?”

그녀는 손가락 두 개로 용사의 옷깃을 집어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용사를 눈앞에 대고 한참 내려다보더니, 혀를 차며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쯧쯧.”

“……”

“어린 것이 목숨을 소중히 여겨야지.”

용사는 얼빠진 표정으로 눈만 깜빡였다.

마왕 니드쇼브라스는 딱 꾸짖는 동네 어른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요즘 것들은 생각이 짧아가지고, 막무가내로 자폭부터 하려고 들고. 여가 죽겠느냐, 그런 걸로.”

“……”

“개죽음이다. 저기 네 동료들만 슬프게 만들었겠지.”

용사는 한동안 입을 벙긋거리기만 했다. 너무 많은 것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세상의 종말, 마왕의 강림, 자신의 장렬한 희생, 그리고 지금 눈앞의 이 비키니 차림 거인 누님.

“아니, 그…… 당신은 사악한 마왕이고, 나는 용사라서 막아야 했고…… 막으려면 자폭 주문을 써야 했고…… 그런데 소용이 없었고…… 아니, 잠깐만요. 진짜 아무렇지도 않으세요? 저거 전설로 내려오는 금단의 주문인데?”

니드쇼브라스는 피식 웃었다.

“떽.”

그 한마디가 묘하게 찰졌다.

“그딴 건 여에게 모기 물린 것보다 못하느니라.”

용사는 전설의 최종 비기가 모기 물림 취급당한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사이, 결계가 풀려나온 동료들과 라디브도 모두 이 광경을 올려다보며 굳어 있었다. 여마법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고, 여사제는 현실을 거부하듯 허공만 바라보았다.

반면 라디브는 그때까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옷깃을 여미며 앞으로 나섰다.

“크, 크흠. 마왕 니드쇼브라스여. 그렇다. 너를 소환한 것은 바로 이 몸, 대마법사 라디브다.”

니드쇼브라스가 귀찮다는 듯 시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네 새로운 주인이다! 마도서 알하자드에 적힌 고대 계약에 따라, 너는 소환자의 명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자, 당장 이 세계를 정복하고 나를—”

“각하.”

“어째서 말을 끊는—”

“유감이구나.”

니드쇼브라스는 선베드 옆 작은 테이블에서 알하자드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에 들리자 인간이 들 때는 무거워 보이던 마도서가 얇은 잡지처럼 보였다. 그녀는 책장을 슥슥 넘기더니 어느 한 페이지를 펼쳐 라디브 쪽으로 기울였다.

“자, 여기. 573쪽.”

“뭐?”

"펴봐."

라디브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마도서를 펼쳤다.

“그래그래, 거기서 밑에서 세 번째 단락. 아니, 거기 말고 더 아래. 어린 것이 눈은 게슴츠레 뜨고, 잘 안보이니? 돋보기 주랴?”

글을 읽는 라디브의 얼굴이 굳어져갔다.

용사 일행도 얼떨결에 함께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정말로, 눈을 가늘게 뜨고 집중하지 않으면 지나칠 법한 깨알 같이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본 마왕 소환 계약의 유효 기간은 발행일로부터 500년이며, 기간 만료 시 소환자의 명령권은 자동 소멸됩니다.]

"……."

"……."

잠시 정적이 흘렀다.

라디브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만료일이…… 언제지?”

니드쇼브라스가 손톱을 보며 대답했다.

“137년 전에 지났느니라.”

라디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보험 약관도 아니고 중요한 걸 왜 이따위로 적어 놨냐아아아아! 내가 이 책 찾으려고 30년을 바쳤는데에에에!!”

그의 절규가 폐허에 쩌렁쩌렁 울렸다.

니드쇼브라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알 바 아니니라.”

그리고는 검지 끝을 라디브 쪽으로 겨눴다. 손끝에 검은 빛이 조용히 모였다 싶더니...

파지직.

지독하게 가벼운 소리와 함께 쏘아진 ‘마왕빔’ 한 줄기에 라디브는 그대로 뒤집혀 나뒹굴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구른 그는 제단 기둥에 처박혀 축 늘어졌다.

모두가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니드쇼브라스는 다시 선베드에 몸을 기대며 하품했다.

“자, 이제 볼일은 끝났겠지? 용사여.”

“예?”

“여는 지상을 멸망시킬 생각 따윈 진작에 접었다. 옛날엔 좀 혈기왕성했지만, 요즘은 그런 거 귀찮더구나.”

그녀는 음료를 한 모금 마시고 덧붙였다.

“그저 조용히 여가를 즐기고 싶을 뿐이니, 앞으로는 여의 휴가를 방해하지 말도록.”

잠시 후 그녀는 용사를 손바닥에 올려 살짝 아래로 내려놓았다. 놀랍도록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네.”

“앞으로는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남은 생을 즐기며 살거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거대한 마왕의 몸이 안개처럼 흐려지기 시작했다. 은빛 머리카락과 검은 피부, 비키니 차림의 위압적인 존재는 햇빛 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하늘을 덮었던 거대한 그림자도 함께 걷혔다.

제단에는 거품을 물고 쓰러진 라디브와, 뻘쭘하게 서 있는 용사 일행만이 남았다.

휑한 폐허를 가로지르는 서늘한 바람만이 그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

"……."

긴 침묵 끝에, 여마법사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건조하게 말했다.

"돌아갈까..."

"……응. 밥이나 먹자."

용사와 여사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기절한 라디브를 마치 짐짝처럼 밧줄로 칭칭 동여맨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터덜터덜 고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 될 뻔한 가장 허무하고도 평화로운 하루였다.

작가의 말

후리 오치 개그 연습용 습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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