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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을 의심한 순간, 더 큰 구멍은 외주 계약서 안에서 열렸다

운영실 천장 조명이 유리벽을 타고 번져, 방 안 사람들의 눈빛을 실제보다 더 차갑게 만들고 있었다.

정면 대형 스크린에는 경쟁사 협력사 캘린더 캡처가 떠 있었다. 회색 일정 칸 사이, 조금 전까지 우리만 알고 있던 문장이 검은 글씨로 박혀 있었다.

`비주얼 최종 확정 전 내부 공개 금지`

왼쪽 화면에는 한도겸이 띄운 외부 열람 로그가, 오른쪽에는 오민서가 정리한 역추적 버전 분배표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 두 화면 사이, 모두의 시선 끝에는 윤해원이 서 있었다. 검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였지만 손끝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팀은 이런 순간 두 번 무너진다.

처음은 정보가 샜을 때.

두 번째는 누가 샜는지 확정도 하기 전에 서로를 범인으로 보기 시작할 때다.

오민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해원 디렉터 라인에서만 나온 문구예요.”

한도겸도 곧바로 받았다.

“외주 검수 링크도 살아 있었고요.”

둘 다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나는 스크린을 끄지 않은 채 말했다.

“여기서 사람부터 확정하지는 맙시다.”

둘의 시선이 동시에 내 쪽으로 향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범인부터 만들면, 오늘 안에 테스트 준비보다 소문이 더 빨리 퍼집니다. 해원 디렉터.”

윤해원이 나를 봤다.

“네.”

“아트 라인, 외주 보드, 검수 링크. 지금 바로 다 열어 주세요. 숨길 게 없으면 제일 먼저 우리한테 보여 주면 됩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해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녀가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대신 애매하게 의심만 하진 맙시다. 제가 직접 다 까겠습니다.”

우리는 곧바로 아트실 옆 소회의실로 자리를 옮겼다.

작은 회의실은 블라인드를 반쯤 내린 상태였다. 좁은 창 틈으로 들어온 오전 빛이 테이블 위 계약서 묶음과 태블릿 화면 위로 길게 기울어져 있었다. 정면 벽에는 아트 시안 관리 보드가 띄워졌고, 왼쪽 화면에는 외주 협업 툴 권한 표가, 오른쪽에는 파일 링크 생성 이력이 떠 있었다. 네 사람이 한 테이블에 붙어 앉자 공간은 더 좁아졌고, 숨소리까지 또렷하게 들렸다.

윤해원이 가장 먼저 오래된 행사장 배너 프로젝트 보드를 열었다.

폴더 이름은 이미 끝난 일처럼 보였다.

`Orbit_Offline_Visual_Final`

하지만 안쪽 링크들은 전혀 끝난 상태가 아니었다.

“이게 문제 링크예요.”

해원이 화면 한쪽을 가리켰다.

“원래는 오프라인 행사장 배너 시안 검수용이었어요. 그런데 사전예약 비주얼이 급하게 바뀌면서 키비주얼, 랜딩 시안, 공지 문구 캡처까지 한 보드 안에서 같이 돌았습니다.”

오민서의 눈썹이 바로 꿈틀했다.

“운영 문구 캡처가 왜 아트 보드에 붙어요?”

“확인 속도 때문이죠.”

해원의 대답은 짧았고, 피하지도 않았다.

“배너 문구 길이, 예약 페이지 첫 화면 톤, 공지 썸네일까지 한 번에 맞추려고 했어요. 그때는 빨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도겸이 씁쓸하게 웃었다.

“빠르려고 만든 지름길이 지금 경쟁사 전용 통로가 된 거군요.”

해원은 그 말을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링크 권한 표를 훑었다.

관리자 6개.

편집 11개.

보기 전용 9개.

이미 끝났어야 할 보드 하나치고는 너무 많았다.

“실제로 살아 있는 외부 권한만 추려 보죠.”

한도겸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실사용 기준으론 둘입니다. 운영 쪽 옛 대행사 링크 하나, 그리고 여기 아트 보드 자동 동기화 계정 하나.”

“자동 동기화?”

오민서가 되물었다.

해원이 입술을 눌렀다.

“외주 PM이 행사 캘린더랑 검수 보드를 같이 보겠다고 만든 계정이에요. 원래는 오프라인 행사 일정 변경 때문에 썼고, 행사 끝나면 끊었어야 했어요.”

“왜 안 끊었죠?”

이번엔 내가 물었다.

해원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보드 한구석에 묻혀 있던 메일 스레드를 열었다.

거기에는 외주 PM 이름과 함께 낯설지 않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잔금 정산 완료 전까지 검수 보드 유지 요청`

오민서가 먼저 몸을 앞으로 숙였다.

“잔금?”

“행사장 배너, 영상 재편집, 추가 키비주얼 수정비.”

해원이 낮게 말했다.

“작년 말부터 밀린 금액이 있었습니다.”

순간 회의실 공기가 달라졌다.

정보 유출은 사람 문제라고 생각하면 화가 난다.

그런데 그 바닥에 돈 문제가 깔려 있으면, 화는 식지 않고 더 차갑게 가라앉는다.

나는 메일 날짜를 확인했다.

세 달 전.

두 달 전 재독촉.

지난주 마지막 안내.

한도겸이 낮게 중얼거렸다.

“이런 걸 왜 지금 봅니까.”

오민서가 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재무 쪽이랑 바로 연결해야 해요. 이런 미지급이면 외주사가 링크를 안 닫는 이유가 설명됩니다.”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민서 팀장, 재무 메일함하고 행사 정산표 전부 확인해 주세요. 도겸 씨는 이 자동 동기화 계정이 실제로 어디까지 복제했는지 로그 뜯고요. 해원 디렉터는 외주 PM 바로 연결합시다.”

윤해원이 망설임 없이 화상 통화 버튼을 눌렀다.

세 번 신호음 뒤에 화면이 켜졌다.

어두운 회의실 배경 앞에 외주 PM 최우진이 나타났다. 핏기 없는 얼굴에 이어폰을 꽂은 채였고, 뒤편 유리창에는 오전 햇빛이 흰 줄처럼 걸려 있었다. 그가 우리 넷을 한 화면에서 확인하자 표정이 바로 굳었다.

“무슨 일입니까?”

내가 먼저 말했다.

“남아 있으면 안 되는 검수 보드가 아직 열려 있습니다. 그 보드 문구가 경쟁사 협력사 일정표에 재등장했어요.”

최우진의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희가 넘겼다는 뜻입니까?”

“뜻은 나중 문제고, 사실부터 보죠.”

나는 한도겸 쪽 화면을 공유했다.

“오늘 7시 35분, 당신들 동기화 계정으로 외부 열람이 한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4분 뒤 경쟁사 협력사 캘린더 메모가 수정됐어요.”

최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윤해원이 차갑게 물었다.

“그 계정, 아직 누가 쓰고 있죠?”

“실무 담당이 하나 들고 있습니다. 행사 운영 때 쓰던 하위 협력사인데… 아직 보드 정리가 덜 끝나서.”

오민서가 곧바로 끊었다.

“하위 협력사 이름.”

“브릿지엣지요.”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오민서 표정은 바로 달라졌다.

“브릿지엣지면 강재현 쪽 퍼블리싱 행사 운영도 잡는 데예요.”

최우진은 더는 말을 쉽게 잇지 못했다.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캘린더를 보고 있었을 가능성.

같은 하청 구조 안에서 우리 문구가 저쪽 일정 언어로 번역되고 있었을 가능성.

윤해원이 정면으로 물었다.

“내 보드 링크를 브릿지엣지가 왜 계속 갖고 있죠?”

최우진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정산 끝나면 닫으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행사 쪽 추가 수정 요청이 남아 있어서… 빠르게 확인하려고 유지했습니다.”

“우리 허락 없이?”

“기존 진행 관행이었습니다.”

한도겸이 헛웃음을 냈다.

“업계에서 제일 무서운 말이네요. 관행.”

나는 책상 위에 손가락을 두 번 두드렸다.

“지금부터 그 관행 끝냅니다.”

최우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대표님, 저희도 악의는—”

“악의가 없으면 책임도 없어집니까?”

내가 잘라 말했다.

“남아 있던 링크, 하위 협력사 권한, 일정 문구가 섞인 보드, 경쟁사 라인과 겹치는 행사 캘린더. 네 가지가 한 번에 걸렸어요. 오늘 안에 권한 전부 회수하고, 하위 협력사 접근 기록 원본 넘기세요.”

최우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통화가 끊기자 소회의실은 더 조용해졌다.

진실이 시원한 건 아니었다.

윤해원이 직접 경쟁사와 손을 잡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라인이 구멍이었던 건 맞았다.

그리고 그 구멍 아래에는 회사가 덮어 둔 돈 문제가 있었다.

오민서가 재무 메일함에서 새 파일을 끌어와 띄웠다.

엑셀 표 안에는 행사, 배너, 홍보 영상, 시안 수정비가 줄줄이 붙어 있었다.

미지급 1억 2천.

추가 정산 대기 9천.

대행 선집행분 7천.

같이 묶인 외주 라인 확정 전표까지 합치자 숫자가 더 커졌다.

오민서가 말을 골라 꺼냈다.

“이거 행사 라인만이 아니에요. 같은 외주 결제 트랙에 묶인 홍보 자산까지 다 합치면… 4억 8천입니다.”

회의실 안에서 누구도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4억 8천.

테스트 대기열 3,200명보다 무거운 숫자였다.

CTR 2.43퍼센트보다 훨씬 잔인한 숫자였다.

이건 반등시키는 그래프가 아니라, 잘못 건드리면 회사를 바로 침몰시키는 바닥이었다.

“기한은요?”

내가 물었다.

오민서가 다음 시트를 띄웠다.

“가장 급한 게 3영업일입니다. 막히면 행사장 디지털 배너 송출본이랑 사전예약 리타게팅 크리에이티브 두 종이 보류될 수 있어요.”

한도겸이 얼굴을 문질렀다.

“좋네요. 우리는 유출 막으려다 홍보 자산 중단 폭탄까지 찾았군요.”

윤해원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 라인에서 시작된 구멍인 건 맞아요.”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런데 그 구멍이 왜 안 막혔는지는 이제 보이네요. 빨리 돌리고, 돈은 나중에 막고, 링크는 나중에 끊고. 다 그 방식이었어요.”

그녀가 나를 똑바로 봤다.

“대표님, 저는 빠지지 않겠습니다. 제 외주선, 제가 정리할게요.”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이번엔 감으로 안 갑니다.”

나는 화이트보드에 세 줄을 새로 적었다.

1. 오늘 안에 외부 링크 2개 전부 폐기.

2. 관리자 권한 6개 회수.

3. 외주 정산, 홍보 자산, 투자 설명 자료를 한 표로 묶기.

오민서가 마지막 줄을 짚었다.

“투자 설명 자료요?”

“이 정도 미지급이면 투자 미팅에서 안 나올 수가 없어요.”

“재무팀이 숨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봐야죠.”

말을 마친 순간, 시야 오른쪽 위가 번쩍였다.

처음에는 소회의실 조명이 반사된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익숙한 반투명 문서 창.

미래 패치 노트도, 장애 보고서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제목부터 달랐다.

`투자 미팅 사전 검토본`

검은 글자가 시야 위로 차갑게 떠올랐다.

`금요일 11:00`

`미지급 외주·행사 채무 4억 8천 공개`

`조건 변경: 브릿지 투자 철회 또는 지분 우선권 요구`

내 손이 무의식적으로 멈췄다.

미래 정보가 이제 계약과 투자 숫자까지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것도 우리가 방금 찾아낸 구멍과 정확히 같은 숫자로.

투자 미팅까지 남은 시간 46시간.

테스트 시간표 하나 지킨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이제는 회사가 숨기고 있던 부채의 얼굴까지,

내가 먼저 보게 됐다.

작가의 말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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