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을 자리부터 고른다
013화 죽을 자리부터 고른다
한세린에게서 온 메시지는 짧았지만, 방금 겨우 바깥에 남긴 이름의 기세를 한 줄로 꺾기엔 충분했다.
`이름은 살았습니다`
`그런데 숫자는 아직 안 열렸어요`
서도윤은 휴대폰을 뒤집지 않았다.
기사 제목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회사 답변 첫 줄에 박힌 `최동식 관련 문의`도 아직 남아 있었다. 바깥에서 보기엔 분명 한 번 이긴 모양새였다. 하지만 도윤 눈에 먼저 들어온 건 기사 본문이 아니라 그 밑에 붙은 회사 추가 설명 두 줄이었다.
`개별 문의와 내부 운영상 비용 집행은 무관합니다`
`관련 비용 자료는 별도 확인 중입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R-417`이란 사건 번호 뒤로 비치는 비용선이 얇게나마 살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줄이 다시 `내부 운영상 비용`이라는 넓고 흐린 말로 덮여 있었다. 이름은 바깥으로 튀어나왔는데, 숫자는 오히려 더 안쪽으로 밀려난 셈이었다.
도윤은 메시지 창을 다시 열었다.
`추가로 못 갑니까`
한세린의 답은 금방 왔다.
`이름만으로는 여기까지입니다`
`누가 사인했고 어디로 흘렀는지 없으면 같은 질문만 반복돼요`
`유령 외주든 실제 집행선이든 안쪽 한 줄이 더 필요합니다`
그녀다운 답이었다. 기사는 살아남았지만, 거기서 더 깊게 들어가려면 다른 줄이 필요했다.
이름을 살린 기사는 회사 밖에서 칼이 되지만, 장부 안쪽 계정을 찢는 열쇠는 아니었다. 정현민이 숨어 있는 곳은 여전히 숫자 뒤였다.
승인선 이름이 붙은 돈은 기사 제목보다 늦게 나오고, 그래서 더 오래 숨을 수 있었다.
그 시간을 넘기면 줄은 다시 잠긴다.
오늘 안에 틈을 내야 했다.
도윤은 회사 답변 문장을 다시 읽었다.
`관련 비용 자료는 별도 확인 중입니다`
확인 중이라는 말은 아직 정리가 안 끝났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정리만 끝나면 더 안쪽으로 잠글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메모 앱을 열었다.
`이름 공개 성공`
`R-417 바깥 껍데기만 열림`
`정현민 승인선 미확인`
`집행선 필요`
마지막 줄 밑에 새 문장을 적었다.
`이제는 질문이 아니라 장전이다`
한세린이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회사 쪽이 기사 대응보다 숫자부터 거두는 분위기예요`
`같은 문장으로 한 번 더 가면 저쪽이 먼저 잠급니다`
그는 짧게 답했다.
`정리선부터 보겠습니다`
점심이 조금 지난 뒤, 사무실 공기는 전날과 달리 조용한 쪽이 더 나빴다.
누구도 `최동식`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같은 층에서 평소 오지 않던 재무전략실 직원 두 명이 오갔고, 보안실 출입증이 달린 사내 가방이 홍보실 앞 책상에 잠깐 놓였다가 사라졌다. 말이 적을수록 손이 먼저 움직이는 날이었다.
차수빈은 자기 자리에서 회신 문안이 아니라 전달 공지를 고치고 있었다.
도윤은 탕비실 정수기 앞에서 종이컵을 접는 척하며 그녀 화면 아래쪽을 흘겨봤다. 첫 줄은 평범했다.
`대외 질의 대응 관련 내부 안내`
그 아래가 이상했다.
`기존 회람본 회수 완료 후 정산 예정`
`외부 협력선 별도 송부 금지`
정산.
그 단어가 홍보실 공지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회수 완료 후 정산`이라는 순서는 숨긴 대가를 나중에 치른다는 뜻처럼 보였다.
차수빈은 그 문장을 한 번 지우더니 다른 표현으로 바꿨다.
`관련 외주 건 후처리 예정`
잠깐 뒤 그것도 지워졌다.
그녀는 주변을 한 번 훑고 나서야 세 번째 문장을 적었다.
`관련 자료 이동 후 별도 정리`
도윤은 그 손끝을 가만히 봤다.
숫자가 움직일 때 회사 문장이 같이 바뀐다. 정현민 라인이 흔들리면 홍보실 문장부터 이상해진다. 차수빈도 그 냄새를 몸으로 먼저 맡은 얼굴이었다.
문장을 두 번 갈아끼웠다는 건, 누군가 홍보 문장보다 정산 순서를 더 먼저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차수빈은 그 이유를 몰라도 지금 회사 안에서 돈이 먼저 움직인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조금 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프린트룸 쪽으로 가는 순간, 도윤도 반 박자 늦게 따라붙었다. 프린트룸 안쪽에는 인쇄본보다 봉투가 더 많았다. 두꺼운 회색 보안봉투 세 개가 바닥 카트에 실려 있었고, 맨 위 봉투 모서리엔 스티커가 반쯤 삐져나와 있었다.
`R-417-2`
그 밑에 더 작은 글자가 붙어 있었다.
`회수 후 파기`
도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대신 복도 유리문 반사에 비친 사람 수를 먼저 셌다. 차수빈 하나. 재무전략실 남자 둘. 보안실 쪽 한 명. 그중 한 명이 카트를 밀며 아주 낮게 말했다.
"하역장으로 바로 내리랍니다."
다른 쪽이 붙었다.
"정산은 오늘 끊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역장.
도윤은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메모 앱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R-417-2`
`회수 후 파기`
`하역장`
`정산 오늘`
그 조각만으로 기사 하나를 더 밀 수는 없을지 몰랐다. 하지만 정현민 라인이 지금 어디를 덮고 있는지는 충분히 가리켰다.
완성된 장부는 아니어도 충분했다. 어디서 회수되고, 어디서 돈이 끊기고, 어느 줄이 하부 집행선으로 이어지는지만 알면 돌아온 뒤 찌를 방향은 나온다.
도윤은 한세린에게 사진 없이 문장만 하나 보냈다.
`하역장 회수선 움직입니다`
`R-417-2`
한세린의 답은 짧았다.
`그건 겉선이 아니네요`
`그 안에 실제 집행선 있으면 다음 건 됩니다`
도윤은 그 답을 읽고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된다.
하지만 그냥은 안 된다.
오후 세 시를 넘기자 회의실 문이 한 번 열렸다. 강태준은 먼저 나오지 않았다. 먼저 나온 건 정현민이었다. 그는 늘 그렇듯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걸음도 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차분함이 오히려 더 나빴다. 일이 꼬였을 때도 얼굴부터 무너지지 않는 사람은, 대개 다른 걸 먼저 잘라낼 순서를 이미 정한 사람이다.
그가 복도 끝에서 전화를 받았다.
"네. 사본만 회수하면 끝나는 단계는 지났습니다."
도윤은 복사기 옆 빈 종이를 정리하는 척하며 손을 멈췄다.
"예. 문서보다 동선이 먼저입니다."
"그 직원도 포함해서 정리하겠습니다."
도윤은 눈을 내린 채 숨을 한 번만 삼켰다. 저 말은 사람을 사람으로 부르지 않는 말이었다. 문서와 함께 지워야 할 변수. 정현민은 역시 그렇게 움직였다.
그 뒤에 강태준이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표정은 차갑게 정돈돼 있었지만 시선이 바깥보다 안쪽을 훑고 있다는 점이 먼저 보였다. 어제까지만 해도 기사와 기자를 먼저 봤던 눈이었다. 오늘은 달랐다. 누가 움직였는지, 누가 넘겼는지, 누가 이 깊이의 줄을 건드렸는지를 먼저 세는 눈이었다.
강태준이 낮게 말했다.
"오늘 안에 끝내죠."
정현민은 고개를 한 번만 끄덕였다.
"문서도 사람도 남기지 않겠습니다."
도윤은 그 말이 지나가는 걸 듣고도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건 공포가 아니라 계산이었다. 지시선은 정현민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손은 따로 온다. 중요한 건 이번에 어느 선까지 직접 챙긴 뒤 죽어야 하느냐였다.
그는 회의실 유리문에 비친 정현민 옆모습을 잠깐 본 뒤, 하역장으로 내려가는 서비스 엘리베이터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다섯 시 십 분.
카트 이동 예정.
도윤은 메모 앱 새 줄에 적었다.
`정현민`
`문서보다 동선`
`오늘 안에 끝낸다`
`하역장 5:10`
그다음 줄은 한참 비워 두었다가 겨우 채웠다.
`여기서 죽는다`
손끝이 딱 한 번 멈췄다.
몸은 아직도 그 문장을 싫어했다. 돌아온다고 해서 죽음이 쉬워진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걸 피하는 쪽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서랍에서 예비 휴대폰 하나를 꺼냈다. 들키기 쉬운 본폰보다 차라리 이쪽이 나았다.
도윤은 퇴근하는 척 가방을 챙긴 뒤, 지하로 내려가기 전에 한 번 더 프린트룸을 돌았다. 카트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대신 파쇄 대기 박스 하나가 구석에 남아 있었다. 완전히 비워진 건 아니었다는 뜻이었다.
박스 맨 위 종이 한 장이 절반쯤 접힌 채 삐져나와 있었다.
`서광 리커버리`
`긴급 회수 외주`
회사명 밑에는 계좌번호 끝 네 자리와 짧은 메모가 있었다.
`회수 완료 후 당일 정산`
`R-417-2 연동`
도윤은 종이를 빼지 않았다. 대신 접힌 모서리만 펴서 화면에 다 들어오게 한 뒤 예비 휴대폰으로 두 장 찍었다. 두 번째 사진에는 아래쪽 작은 메모까지 담겼다.
`실행 확인 후 폐기`
그는 종이를 원래 각도대로 다시 눕혔다. 봤고, 찍었고, 직접 챙긴 조각이 생긴 순간부터 시스템이 쓸 수 있는 범위는 달라진다.
하역장 앞 복도는 저녁 여섯 시가 가까워질수록 더 비었다.
사람이 줄수록 소리가 먼저 살아난다. 화물 엘리베이터 체인이 당기는 소리, 바퀴 달린 카트가 바닥 홈을 타는 소리, 멀리서 후진하는 트럭 경고음까지. 사고처럼 꾸미기 좋은 소리들뿐이었다.
도윤은 하역장 입구 소화전 옆에서 숨을 고른 뒤 안쪽을 봤다. 회색 보안봉투가 실린 카트 두 대. 화물차 한 대. 보안실 인원 둘.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 하나.
정장을 입지 않았고, 사내 출입증도 없었다. 대신 작업 재킷 안주머니가 불룩했고, 사람보다 서류 봉투를 먼저 확인하는 눈이었다. 저건 돈으로 사람을 지울 때 붙는 손이었다.
민재호가 먼저 도윤을 봤다.
"서 대리."
낮고 짧았다.
"여기까지 왜 내려왔습니까."
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카트 맨 위 봉투의 스티커를 한 번 더 확인했다. `R-417-2`. 그 아래쪽엔 아까 못 본 작은 코드가 더 붙어 있었다.
`집행 확인본`
됐다.
도윤은 그제야 민재호를 봤다.
"회수하는 김에 제 것도 가져가시려는 줄 알았습니다."
민재호 눈빛이 아주 조금 굳었다. 옆에 선 처음 보는 남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시선이 도윤 가슴팍보다 손을 먼저 봤다. 사람이 아니라 사본 위치를 보는 눈이었다.
"핸드폰부터 주시죠."
이번에는 낯선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는 건조했고, 도윤 얼굴보다 주머니 모양을 먼저 훑었다.
도윤은 천천히 예비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야 저쪽도 더 빨리 가까워진다.
"정현민 이사가 보냈습니까."
그 말이 떨어지자 민재호는 답하지 않았고, 낯선 남자 쪽 입꼬리가 아주 조금만 움직였다. 부정도 확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일에선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정산부터 하시는 분답네요."
도윤이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문서보다 동선이 먼저라더니."
민재호가 그때 처음으로 한 걸음 들어왔다.
"그 말 어디서 들었습니까."
도윤은 더 물러서지 않았다. 뒤에는 트럭 후방 적재대와 콘크리트 기둥이 있었다. 돌아나갈 길이 없는 자리. 사고처럼 끝내기 가장 쉬운 자리.
공포가 늦게 올라왔다. 심장이 먼저 뛰고 손이 차가워졌다. 몸은 도망치라고 했지만, 머리는 지금까지 챙긴 조각을 다시 셌다.
`서광 리커버리`
`긴급 회수 외주`
`회수 완료 후 당일 정산`
`R-417-2 연동`
`실행 확인 후 폐기`
`집행 확인본`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충분해야 한다.
도윤은 예비 휴대폰 화면을 켠 채 낯선 남자를 봤다.
"당신이 직접 끝내는 겁니까."
그 남자는 짧게 손을 뻗었다.
"주십시오."
민재호가 그보다 반 박자 늦게 말했다.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도윤은 그 순간 시선을 민재호가 아니라 낯선 남자 손끝에 고정했다. 민재호가 맡은 건 통제와 회수였다. 진짜 끝을 내는 손은 저 낯선 남자 쪽에 있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낯선 남자가 아주 작게 혀를 찼다.
"늦었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손목이 움직였다.
휴대폰을 낚아채는 척 들어온 손이 도윤 어깨를 세게 밀었다. 뒤에서 트럭 경고음이 두 번 울렸고, 적재대 철문이 닫히며 기둥 쪽 공간이 순식간에 좁아졌다. 도윤은 일부러 마지막 한 걸음을 버티지 않았다. 버티면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면 오늘 본 줄은 여기서 끝난다.
그는 몸이 기둥과 적재대 사이로 꺾이는 순간까지도 휴대폰 화면을 놓지 않았다.
아프다는 감각이 먼저 온 게 아니었다. 숨이 한 번에 잘리는 공포가 먼저였다. 갈비뼈 안쪽이 무너지는 소리, 턱까지 올라온 쇳내, 시야 한쪽이 까맣게 잠기는 속도까지 이번에도 분명했다.
민재호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미친 새끼."
낯선 남자는 더 가까웠다.
"사고로 정리됩니다."
도윤은 입안 가득 찬 쇳맛을 삼키지 못한 채 생각했다.
그래.
이렇게 끝내야 한다.
그래야 돌아왔을 때 더 깊은 줄이 뜬다.
빛이 한번 접혔다.
곧바로 검은 바탕 위로 익숙한 문구가 떠올랐다.
`[죽음 확인: 타살]`
`[살인지시자: 정현민]`
`[살인자: 오기택]`
`[공개 자료: 더 크게 공개]`
`[획득 능력: 계정 감각]`
`[회귀 시각: 전날 같은 시간]`
도윤은 마지막 줄을 다 읽기 전에 기침부터 터뜨렸다.
숨이 확 들어왔다. 방금까지 부서졌던 몸은 멀쩡했지만 통증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의자 팔걸이를 붙잡은 채 눈을 떴다.
아직 하역장으로 내려가기 전이었다.
도윤은 곧바로 메모 앱을 열어 아까 본 줄들을 써 내려갔다.
`서광 리커버리`
`긴급 회수 외주`
`회수 완료 후 당일 정산`
`R-417-2 연동`
`실행 확인 후 폐기`
`집행 확인본`
`오기택`
마지막 이름을 적는 순간 묘한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숫자를 그냥 숫자로 읽는 감각이 아니었다. 어떤 계정이 중간 허리 역할을 하는지, 어느 메모가 표면이고 어느 메모가 실제 집행을 뜻하는지 감각이 먼저 갈라냈다.
계정 감각.
도윤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이제는 안다.
`최동식` 이름 공개만으로는 정현민 돈줄이 안 열린다.
질문만으로는 바깥 껍데기만 긁힌다.
정현민은 기사보다 먼저 회수선과 집행선을 거둔다.
그러니 그 회수선 한복판에서 죽어야만 다음 길이 열린다.
그는 휴대폰을 들어 한세린 대화창을 열었다. 다 던지진 않았다. 대신 지금 바로 냄새를 맡게 할 첫 묶음만 골라 보냈다.
`서광 리커버리`
`R-417-2`
`실행 확인 후 폐기`
도윤은 새 메모 마지막 줄에 천천히 적었다.
`다음은 유령 외주`
`다음은 R-417 안쪽 집행선`
그리고 그 밑에 한 줄을 더 눌러 적었다.
`장전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