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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날의 숫자 일러스트

죽인 날의 숫자

014화 죽인 날의 숫자

죽음에서 돌아온 아침은 늘 멀쩡한 얼굴부터 거짓말을 했다.

뼈는 붙어 있었고, 숨도 정상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서도윤은 의자 팔걸이를 쥔 손끝이 아직도 차갑다는 걸 먼저 느꼈다. 하역장 기둥 사이에서 숨이 끊기던 공포가 손마디 안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한세린이었다. 밤사이 넘겨준 첫 묶음을 벌써 다 읽은 목소리였다.

`새로 들어온 묶음 봤습니다`

`서광 리커버리, R-417-2, 실행 확인 후 폐기`

도윤은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뜬 뒤에야 답을 눌렀다.

`어떻습니까`

잠시 뒤 답이 붙었다.

`이건 이름이 아니라 거래선 냄새예요`

`그런데 아직 한 줄 더 필요합니다`

`이 업체가 진짜인지, 돈이 어디서 멈추는지 확인돼야 해요`

도윤이 원한 답은 그 정도였다.

그녀는 냄새를 맡았지만 아직 확신하지 않았다. 도윤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그 지점이었다. 무턱대고 믿어 주는 칼은 오래 못 간다. 확인하고, 걸러 내고, 그래도 남는 것만 물고 가는 쪽이 더 아프다.

도윤은 메모 앱을 열었다.

`서광 리커버리`

`R-417-2`

`실행 확인 후 폐기`

`집행 확인본`

글자를 다시 보는 순간, 어젯밤엔 그냥 흩어진 조각처럼 보이던 줄들이 이상하게 정리됐다.

`R-417-2`

이건 사건 번호에 붙은 하위 항목이 아니었다. 비용을 한 번 흘려 보내는 중간 허리처럼 먼저 보였다. 위에서 바로 못 받는 돈을 한 번 눌렀다가 옆으로 빼는 자리. `서광 리커버리`는 그 허리 뒤에 매달린 얼굴 없는 손이고, `실행 확인 후 폐기`는 그 손이 일 끝난 뒤 흔적까지 같이 지운다는 뜻이었다.

계정 감각.

이 능력은 숫자를 많이 아는 감각이 아니었다. 끊긴 줄 사이에 어떤 계정이 진짜 허리고, 어떤 명목이 겉포장인지 먼저 튀어 오르게 만드는 감각이었다.

단순히 굵은 돈줄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정산표 맨 끝 네 자리, 대체 계정으로 밀린 사유, `검토`란 아래 숨어 있는 승인 순서가 먼저 갈라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슷한 숫자로 보이던 것들이 오늘은 한 줄로 이어졌다. 누가 겉포장을 만들고, 누가 허리를 잡고, 누가 마지막에 지우는지 감각이 먼저 순서를 세웠다.

숫자가 많아지는 느낌도 아니었다. 같은 날 안에서 누가 먼저 돈을 숨기고, 누가 뒤늦게 이유를 붙였는지가 분리돼 보였다. 계정 감각은 장부가 숨기려던 순서를 먼저 드러내는 쪽에 가까웠다.

도윤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사내 결재 시스템을 열었다.

어제까지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표들이 오늘은 달랐다. `비용`, `후처리`, `외부 대응` 같은 둥근 말들이 먼저 안 들어왔다. 대신 어느 줄이 같은 계좌 꼬리를 두고 도는지, 어디서 갑자기 명목이 갈라지는지가 눈에 먼저 박혔다.

한 줄이 걸렸다.

`대체 계정 B-19`

그 바로 아래 작게 붙은 메모가 더 노골적이었다.

`R-417-2 연동분`

도윤은 숨을 죽인 채 스크롤을 아주 조금만 더 내렸다.

승인란 한쪽에 낯익은 이니셜이 붙어 있었다.

`JHM 검토`

검토.

정현민은 늘 그런 단어를 썼다. 승인이나 지시처럼 피 냄새 나는 말을 안 쓰고, 확인이나 검토처럼 손 안 더러운 말로 줄을 묶는다. 하지만 오늘 도윤 눈엔 그 단어가 더는 깨끗하게 안 보였다. 검토란 이름으로 돈을 눌렀고, 그 돈으로 사람과 문서를 같이 지웠다.

도윤은 스크롤을 조금 더 내렸다. 같은 화면 아래 지난주 정산 목록이 짧게 붙어 있었다. `긴급 외주 선지급`, `사후 증빙 보완`, `실사 면제 승인`. 따로 보면 평범한 실무 말이었다. 그런데 계정 감각이 켜진 상태에선 전혀 다르게 읽혔다. 같은 계좌 꼬리가 한 번 더 보였고, 다른 명목으로 갈라진 줄 밑에 다시 `B-19`가 걸려 있었다. 겉으로는 외주비, 실제론 회수비, 그 밑에선 흔적 지우는 돈. 하나를 덮을 때마다 다른 이름으로 다시 올라오는 구조였다. 정현민은 장부를 복잡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복잡해 보이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화면을 통째로 캡처하지 않았다. 대신 `대체 계정 B-19`, `R-417-2 연동분`, `JHM 검토`가 한 화면에 걸리게만 잘라서 찍었다. 더 많이 가져가면 눈에 띈다. 필요한 건 한 줄 더였고, 그 한 줄은 지금 손에 들어왔다.

메신저가 또 울렸다.

차수빈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차수빈이 올린 내부 공지 수정 알림이었다.

도윤은 홍보실 공유 게시판을 열었다.

처음 제목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추가 문의 대응 문안 수정`

그런데 본문 첫 줄부터 이상했다.

`협력업체 등록 정보 재확인 중으로 관련 지급은 보류되었습니다`

도윤은 화면을 오래 보지 않았다. 오래 볼 필요도 없었다.

지급은 멈췄다.

아직 밖에서 아무도 그 말을 크게 하지 않았는데, 홍보실 대응 문안에 먼저 `지급 보류`가 들어왔다. 이건 홍보 문장이 재무 문장에 끌려가는 날이었다.

조금 뒤 차수빈이 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린트물을 들고 회의실 쪽으로 가다가, 복도 중간에서 한 번 멈췄다. 손에 든 문서를 내려다보는 눈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늘 문장을 고쳐서 회사를 살리는 쪽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반대였다. 회사 돈이 먼저 멈춰 버렸고, 그 사실을 가릴 문장을 자기가 만들어야 했다.

도윤은 탕비실 쪽에서 종이컵을 정리하는 척하며 그녀가 들고 간 문서 첫 줄을 흘겨봤다.

`서광 리커버리 문의 대응 금지`

문의 대응 금지.

돈이 정말 깨끗하면 그런 문장은 잘 안 붙는다. 떳떳한 거래선이면 설명하면 된다. 이름을 숨겨야 하고, 질문을 피해야 하고, 심지어 지급까지 멈췄다면 그건 이미 거래선 자체가 문제라는 뜻이었다.

차수빈이 회의실 문 앞에서 다시 종이를 넘겼다. 두 번째 장 맨 아래에 작은 주석이 붙어 있었다.

`실무 문의는 감사 대응 완료 후`

감사.

도윤은 그 단어를 보고 곧장 한세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지급 보류 들어갔습니다`

`감사 대응 문구도 붙었습니다`

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대신 일 분쯤 뒤 전화가 왔다.

도윤은 이어폰도 끼지 않고 바로 받았다.

"말 짧게 하시죠."

한세린 목소리도 짧았다.

"업체 주소부터 봤어요."

도윤은 말하지 않았다.

"사무실 등록은 있는데, 간판이 없습니다."

"전화도 세 군데 다 죽어 있어요."

"송금 계좌는 살아 있는데 업체는 안 보입니다."

그녀는 주소를 더 붙였다.

"건물 삼 층이라고 돼 있는데 문패가 없어요."

"우편함엔 다른 법인 이름만 겹쳐 있습니다."

"이런 데는 실체보다 등록 흔적만 남겨 두고 빠지는 쪽이 많아요."

도윤은 입술을 문 채 창밖을 봤다.

유령 외주.

이름이 괜히 붙는 게 아니었다.

도윤은 그 말을 들으며 정현민이 왜 이런 줄을 쓰는지 더 분명히 이해했다. 사람을 지우는 돈은 늘 실체보다 흔적만 남긴다.

"질문으로 밀 수 있습니까."

"지금 상태론 아직 절반입니다."

"업체가 빈 껍데기라는 것과, 그 돈을 누가 잡고 있는지는 다릅니다."

역시 그랬다.

도윤은 저장한 화면 조각을 다시 봤다. `JHM 검토`.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그는 화면에 있던 글자만 읽어 줬다.

"대체 계정 B-19."

"R-417-2 연동분."

"JHM 검토."

전화기 건너편이 잠깐 조용해졌다.

"그건 어디서 봤죠."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한세린은 바로 캐묻지 않았다. 대신 숨을 한번 고른 뒤 낮게 말했다.

"좋아요. 그 정도면 기사보다 먼저 금융 질문이 나갑니다."

"그리고 이 업체, 누군가 미리 손대고 있어요."

"어떤 쪽입니까."

"거래은행 쪽에서 확인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지급이 바로 안 나간다면 내부에서도 이미 걸렸을 수 있어요."

도윤은 짧게 답했다.

"안에서 멈추면 더 좋습니다."

"좋은 건 아니죠."

한세린이 잘라 말했다.

"그만큼 저쪽이 급하다는 뜻이니까."

전화가 끊기고 나서도 도윤은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지 못했다.

계정 감각은 계속 눈을 찔렀다. 시스템 화면에서 벗어난 뒤에도, 그는 전자결재 목록 몇 줄만 봐도 어디가 껍데기고 어디가 진짜 허리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 한 번 눌렀다가 돌리는 돈, 회수된 문서와 같이 묶여 움직이는 비용, 같은 날 안에 결재선이 이상하게 짧아지는 항목. 정현민은 그런 줄을 만들고 있었다.

오후 세 시 반.

회계 지원팀 쪽에서 급한 발걸음 소리가 났다.

한 직원이 프린트룸 쪽으로 뛰어가듯 지나가며 중얼거렸다.

"왜 지급이 안 풀리지."

다른 쪽이 더 낮게 받았다.

"거래처 쪽 연락도 안 됩니다."

도윤은 몸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유리창 반사로 두 사람 입 모양만 봤다.

"오늘 안에 끊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감사실이 먼저 걸었습니다."

그 말 하나면 충분했다.

공개 자료 한 줄이 실제로 돈을 멈췄다.

복도 안쪽 공기가 한 번에 달라졌다. 아까까지는 기사 대응을 먼저 묻던 실무자들이 이젠 계정과 거래처를 먼저 찾았다. 누가 언제 결재했는지, 왜 같은 날 지급이 보류됐는지, 왜 업체 연락이 동시에 끊겼는지 같은 질문이 오갔다. 문장을 덮던 회사가 돈을 설명해야 하는 단계로 밀린 순간이었다.

도윤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복도 끝으로 걸었다. 회의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완전히 잠기진 않았다. 안쪽에서 목소리 두 개가 새어 나왔다.

"거래처가 왜 비는 겁니까."

강태준이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문장 끝이 날카로웠다.

정현민 쪽은 더 건조했다.

"빈 게 아니라 숨은 겁니다."

"질문이 먼저 들어갔고, 지급이 보류됐습니다."

"누가 먼저 손댔죠."

"아직 모릅니다."

짧은 정적.

그리고 정현민이 한 마디를 더 붙였다.

"그래도 승인선은 안 나갔습니다."

도윤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입술을 아주 조금만 비틀었다.

아직.

저 사람도 지금 그걸 기준으로 버틴다. 돈은 멈췄고, 업체는 사라지고, 감사실이 들어왔는데도 끝까지 붙잡는 건 승인선이 아직 바깥 이름으로 안 떠올랐다는 사실이다. 그 말은 반대로, 그 선만 끌어내면 정현민이 가장 크게 다친다는 뜻이었다.

복도 반대편에서 차수빈이 다시 나타났다. 아까보다 얼굴빛이 더 안 좋아져 있었다. 그녀는 홍보실 자리로 돌아와 새 문안을 띄웠다.

첫 줄이 또 바뀌어 있었다.

`협력업체 실사 진행 중으로 기존 답변 보류`

그 밑엔 더 짧은 문장이 있었다.

`감사실 요청 자료 우선 제출`

차수빈은 커서를 깜빡이는 화면을 한참 보고만 있었다. 손을 올렸다가 내리고, 다시 올렸다가 내리는 움직임이 불안했다. 회사 문장을 손보는 사람이 오늘 처음 보는 종류의 문장이었다. 누군가를 가리는 말이 아니라, 돈이 멈췄다는 사실을 최대한 늦게 적는 말.

잠시 뒤 회계지원 공용 메일 제목도 바뀌어 있었다.

`R-417 연동 외주 집행 경위 제출 요청`

문장 하나가 아니라, 실제 제출 기한과 첨부 대상까지 적힌 메일이었다. 감사실이 움직였다는 건 이제 누군가가 종이와 계정을 같이 내놓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메일 아래 붙은 첨부 목록은 더 노골적이었다. `거래처 등록 신청서`, `선지급 승인 근거`, `실행 확인본 보관 위치`, `대체 계정 사용 승인자`. 한 줄이라도 비면 그 다음 질문이 바로 따라붙는 구조였다. 감사실은 아직 누구 이름도 확정하지 않았지만, 이미 어디를 찌르면 피가 나는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차수빈이 그 목록을 본 뒤 입술을 깨물고 화면을 끄지 못하는 이유도 그거였다. 홍보실 문장으로 덮을 수 있는 단계를 훨씬 넘어섰다. 누군가는 실제 종이와 실제 계정을 같이 내놔야 한다.

도윤은 그 장면을 보며 확신했다.

피해는 이미 들어갔다.

회사 안에서 `지급 보류`, `실사`, `감사실 요청` 같은 말이 하루 안에 연달아 뜨는 일은 흔치 않다. 게다가 그 시작이 `서광 리커버리`라는 유령 외주 한 줄이었다면 더 그랬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한세린이었다.

`업체 주소 비었습니다`

`법인 등록 대행지만 남아 있어요`

`그리고 은행 쪽에서 지급 보류 확인됐습니다`

그 뒤에 한 줄이 더 붙었다.

`이 정도면 회사가 먼저 놀랐을 겁니다`

도윤은 짧게 답했다.

`감사실도 움직였습니다`

답은 조금 늦게 왔다.

`그럼 이제 돈이 기사보다 먼저 흔들리네요`

도윤은 그 문장을 오래 보지 않았다.

돈이 기사보다 먼저 흔들린다.

그게 정현민 라인엔 가장 아픈 말이었다. 이름을 가릴 수는 있어도 지급 보류는 숨기기 어렵다. 문장을 바꿔도 돈이 안 나가면 실무가 먼저 흔들리고, 거래처가 숨으면 감사가 먼저 달라붙는다.

그는 메모 앱을 열었다.

`서광 리커버리 = 유령 외주`

`R-417-2 = 중간 허리`

`JHM 검토 = 정현민 손`

`지급 보류`

`업체 잠적`

`감사실 착수`

여섯 줄 아래에 한 줄을 더 적었다.

`죽은 날의 숫자가 이제 살아 움직인다`

복도 끝 회의실 문이 다시 열렸다.

정현민이 먼저 나왔다. 얼굴은 여전히 무너져 있지 않았지만 걸음이 전보다 빨랐다. 강태준은 문 안쪽에 그대로 서 있었고, 시선은 사람보다 종이 묶음에 더 오래 머물렀다. 저 사람들이 지금 붙잡고 있는 건 서도윤이라는 사람보다, 안쪽에서 멈추기 시작한 돈이었다.

그게 도윤에겐 중요했다. 바깥에 기사 하나 더 뜨는 것보다, 저 두 사람이 지금 서로 다른 공포를 붙잡고 있다는 사실이 더 컸다. 강태준은 누가 이 안쪽 줄을 만졌는지 모른다는 공포에 서 있었고, 정현민은 돈을 다시 움직이는 순간 자기 승인선이 따라 뜬다는 공포에 서 있었다. 같은 패배처럼 보여도 결이 달랐다. 그래서 더 잘 갈라질 수 있었다.

도윤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통증 기억은 아직 가슴 안쪽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위로 다른 감각이 올라왔다. 숫자 줄이 끊긴 곳, 돌려 막은 흔적, 숨기려고 짧게 잘라 낸 승인선이 먼저 보이는 감각. 죽음은 공짜가 아니었고, 그 대가도 분명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 대가가 실제 돈을 멈췄다.

휴대폰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울렸다.

한세린이었다.

`이 업체 오늘 밤 안에 사라질 겁니다`

`그래도 이미 늦었어요`

도윤은 화면을 내려다본 채 숨을 한번 길게 뱉었다.

늦었다.

정현민 쪽에겐 그 말이 맞았다.

유령 외주 한 줄이 계정을 묶었고, 업체를 숨게 만들었고, 감사실 문까지 열어 버렸다.

도윤은 메모 마지막 줄에 천천히 덧붙였다.

`돈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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