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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이 또 나왔다 일러스트

같은 이름이 또 나왔다

007화 같은 이름이 또 나왔다

메모 앱은 비어 있었다.

서도윤은 눈을 뜨자마자 휴대폰 화면부터 확인했다.

`화요일 오후 11:06`

몸이 먼저 그 시간을 알아봤다. 목 안쪽이 홱 조여 들었고, 어깨 뒤편이 저절로 굳었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가 와이어를 죄어 오던 감각이 아직도 피부 바로 밑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려 하자 가슴 한가운데가 짧게 멎었다가 다시 움직였다.

그는 침대에서 상체를 세운 채 한동안 손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손등 위에는 아무 자국도 없었다. 목에도 멍은 없었다. 그런데 자국이 없는 쪽이 더 기분 나빴다. 분명히 죽었는데, 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와 있었다. 공포만 남고 흔적은 사라진 셈이었다.

도윤은 메모 앱을 다시 열었다. 어젯밤, 아니 정확히는 죽기 직전까지 쥐어짰던 문장들은 한 줄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난번에 찍었던 사진도, 마지막 순간에 덧붙여 적었던 짧은 욕설도, 모두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그는 아무것도 챙기지 않은 밤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에는 더 깊이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지난번처럼 끝까지 붙잡고 가다간 또 죽는다. 죽는 것보다 더 싫은 건, 죽고도 남는 게 없는 거였다. 그는 그 순서를 바꾸기로 했다. 끝까지 긁어모으다 죽는 대신, 딱 질문 하나를 박을 만큼만 챙기고 살아서 반응을 보기.

도윤은 빈 메모장에 네 줄만 적었다.

`최동식`

`21:12`

`원본 전달`

`살아서 본다`

그는 마지막 줄을 한 번 더 눌러 썼다. 살기 위해 물러난다는 뜻이 아니었다. 질문이 나간 뒤 회사가 어떤 순서로 움직이는지, 누가 제일 먼저 손을 더럽히는지, 그걸 자기 눈으로 확인하겠다는 뜻이었다. 지금 필요한 건 더 많은 설명이 아니라 더 정확한 반응이었다.

도윤은 그대로 세면대로 가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고개를 들자 거울 속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겁은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이제는 그 겁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는 수요일 하루를 다시 밟았다.

출근 시간은 평소보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게 맞췄다. 팀장 앞에서는 하품을 한 번 했고, 탕비실에서는 종이컵 커피를 두 번 내려 마셨다. 보안실 직원이 층 입구를 지나갈 때는 일부러 시선을 한 박자 늦게 거뒀다. 지난번처럼 움직이면 들키고, 너무 조심하면 더 먼저 찍힌다. 그는 회사 안에서 수상하지 않은 속도로만 움직였다.

오전에는 메일을 처리하는 척했고, 오후에는 회의실 앞을 두 번 지나쳤다. 누가 어떤 문서를 쥐고 드나드는지, 어느 시간이 비는지, 누가 야근 명단에 붙는지부터 다시 확인했다. 사람들 움직임의 속도는 이미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밤이 되자 회사는 낮보다 조용해졌고, 그 조용함이 오히려 더 날카롭게 느껴졌다.

수요일 밤 9시 27분.

도윤은 B2-3 앞 자동문 그림자에 몸을 붙였다. 지난번에 회수표 원본이 지나간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욕심을 줄이기로 했으니, 확인할 것도 줄어 있었다. 이름, 시각, 전달선. 그것만 있으면 됐다.

문이 반쯤 열릴 때 그는 카드키를 밀어 넣는 손목의 각도부터 봤다. 보안실 계약직 한 명이 서류 상자를 밀고 들어갔고, 그 틈이 닫히기 전 도윤도 안으로 미끄러졌다. 형광등 불빛이 낮게 울렸고, 종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한꺼번에 올라왔다.

그는 지난번처럼 깊은 구역까지 들어가지 않았다. 첫 번째 선반, 두 번째 이동식 캐비닛, 그리고 임시 결재함. 기억해 둔 위치만 훑었다. 손이 먼저 닿은 건 회수 대상 목록이었다. 맨 위쪽 표에는 이미 몇 개 이름이 붉은 펜으로 지워져 있었고, 그 아래쪽 좁은 칸에 `최동식`이 남아 있었다. 이름 옆에는 작은 별표가 하나 찍혀 있었다.

도윤은 휴대폰을 꺼내 그 칸만 빠르게 찍었다.

다음은 붙임 메모였다. 종이 한 장이 서류 집게 밑에서 반쯤 삐져나와 있었는데, 거기에는 시간이 먼저 박혀 있었다.

`최초 보고 21:12 / 박성재`

그 아래에는 더 짧은 메모가 달려 있었다.

`원본 전달 후 회수`

지난번엔 이 뒤를 더 쫓다가 회수 경로와 승인권자까지 긁어모으려 했다. 그리고 그 욕심 끝에서 죽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도윤은 두 번째 사진을 찍고, 세 번째로는 메모 윗부분의 전달 라인만 확대해 찍었다. 이름이 선명하진 않았지만, `박성재`와 `원본 전달`이 같은 프레임 안에 들어오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다.

복도 쪽에서 카트 바퀴가 끄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찔했다. 목 안쪽이 다시 따갑게 조여 왔다. 저 소리가 길게 이어지면, 그 다음엔 누군가 발소리를 죽이고 온다. 그는 그 순서를 이미 몸으로 알고 있었다.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더 볼 수도 있었다.

선반 하나만 더 넘기면, 지난번에 보았던 승인선 쪽 흔적이 있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그 한 칸이 다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도윤은 잠깐 눈을 감았다가, 그대로 몸을 뒤로 뺐다. 오늘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그는 9시 34분에 B2-3을 빠져나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동안 심장이 늑골 안쪽을 세게 두드렸다. 살았다는 안도보다, 이번에는 정말 여기서 멈췄다는 사실이 먼저 낯설었다. 그런데 손에 쥔 게 분명하니 다음 순서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도윤은 회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무인 카페로 들어갔다. 밤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간, 안에는 시험공부를 하는 대학생 둘과 노트북을 펼쳐 둔 남자 하나뿐이었다. 그는 구석 자리에 앉아 방금 찍은 사진 세 장을 천천히 잘랐다. 이름이 너무 많이 드러나는 칸은 지웠고, 불필요한 결재 라인은 날렸다. 한세린이 봐야 할 건 큰 그림이 아니라 찔러 넣을 질문 자리였다.

최종적으로 남은 건 두 장의 크롭 이미지와 네 줄이었다.

`최동식`

`21:12 박성재 최초 보고`

`원본 전달 후 회수`

`이 이름이 왜 빠졌는지 확인 바랍니다`

도윤은 외부 연락용 계정을 열어 한세린에게 파일을 보냈다. 보내고 나서야 숨을 참았다는 걸 알았다. 손끝이 아직 차가웠다. 그러나 이번엔 그 차가움이 지난번처럼 몸을 굳히지 않았다. 질문이 나가기 직전의 감각 같았다.

그는 전송함을 한 번 더 열어 첨부 파일을 확인했다. 몇 시간 전 B2-3에서 직접 다시 찍은 현재 시각의 사진 두 장, 그리고 방금 잘라 낸 전달선 한 장. 그 이상은 없었다. 지난번에 머릿속에 남은 장면은 많았지만, 바깥으로 내보낼 수 있는 건 오늘 손으로 다시 챙긴 것뿐이었다. 그래서 더 날카로웠다. 설명 대신 현재 시각의 흔적만 남겼기 때문이다.

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구죠`

`이 자료 출처 확인 가능합니까`

`왜 최동식 이름이 빠졌다고 보십니까`

문장 세 개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짧고, 날이 서 있었고, 불필요한 말이 없었다. 한세린은 믿지 않았고, 그래서 바로 물었다.

그는 설명을 길게 쓰지 않았다.

`출처는 지금 말 못 합니다`

`대신 회사에 이렇게 물어보면 됩니다`

`최동식이 누구인지`

`21:12 최초 보고가 맞는지`

`원본 전달 뒤 왜 이름이 빠졌는지`

잠시 뒤, 한세린의 답이 왔다.

`질문은 넣겠습니다`

`대신 회사 반응까지 확인해 주세요`

도윤은 화면을 오래 보지 않았다. 그 한 줄이면 충분했다. 한세린은 기사를 약속하지 않았다. 대신 질문을 넣겠다고 했다. 그게 더 중요했다. 기사보다 먼저 회사가 움직이고, 움직이는 쪽이 흔적을 남긴다. 그는 휴대폰을 뒤집어 놓고 차가 식는 속도를 가만히 바라봤다.

다음 날 오전, 회사는 평소보다 더 얌전했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큰소리는 없는데, 사람들 걸음이 유난히 짧았다. 팀장은 메신저 알림이 뜰 때마다 모니터를 몸으로 가렸고, 옆자리 대리는 복사기를 세 번이나 헛누른 뒤에야 종이를 챙겼다. 누군가가 크게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니라, 모두가 먼저 덜 들키는 쪽을 찾는 분위기였다.

도윤은 오전 열 시가 조금 넘어서야 이유를 봤다.

팀장이 급히 열린 메일창을 닫는 순간, 제목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세광경제 한세린 기자 질의`

그리고 바로 아래.

`최동식 관련 문의`

도윤의 시선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아직 답변이 아니었다. 아직 기사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회사 안에서는 그 이름이 `질의 제목`으로 올라와 있었다. 지워진 이름이 아니라, 답을 준비해야 하는 이름으로 바뀐 셈이었다.

팀장은 헛기침을 하고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 외부 문의 건 때문에 다들 자리 비우지 마."

평소 같으면 짜증부터 냈을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질문을 던졌는지도 모르는데, 그 질문이 어느 선까지 올라갔는지부터 따지는 표정이었다.

도윤은 모니터에 시선을 둔 채 귀부터 열었다. 보안실에서 올라온 전화가 한 번, 홍보실 연결 요청이 두 번, 그리고 조금 뒤에는 처음 듣는 내선 번호가 더 찍혔다. 재무전략실 쪽에서 쓰는 앞자리였다. 이름 하나를 물었을 뿐인데, 보안과 홍보를 넘어 숫자 라인까지 붙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 복도 쪽 공기가 한 번 바뀌었다.

강태준이 지나갔다.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고 걸음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가 지나가는 동안 복도에 서 있던 사람 셋이 동시에 한 걸음씩 비켜났다. 강태준은 회의실 앞에서 멈춰 서더니, 보안실 직원에게 짧게 한마디만 건넸다.

"답변선부터 잠가."

딱 그 정도였다.

그런데 그 짧은 말이 끝나자 움직임이 더 많아졌다. 보안실 사람 둘이 먼저 안으로 들어갔고, 잠시 뒤 홍보실 배지를 단 여자가 서류철을 안고 뛰어왔다. 그녀는 회의실 문 앞에서 한 번 숨을 삼킨 뒤 안으로 들어갔다. 도윤은 옆자리 대리가 툭 던진 말을 들었다.

"차수빈 대리까지 불렀네."

이름이 처음 붙었다.

도윤은 그 이름을 속으로만 굴렸다. 차수빈. 홍보실 실무자. 영웅처럼 움직일 사람은 아닐 것이다. 저렇게 급히 불려 올라오는 사람은 대개 누군가를 구하러 오는 게 아니라, 자기 이름이 어디까지 걸리는지부터 확인하러 온다.

점심도 지나기 전, 사내 공유 메일함에 답변 초안이 한 번 돌았다. 관련 부서 사실 확인 요청용이었다. 팀장이 모니터를 몸으로 가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도윤은 제목과 첫 줄을 읽었다.

`최동식 관련 문의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 중입니다.`

보낸 사람은 `차수빈 대리 / 그룹홍보실`.

도윤은 그 문장을 한 번에 외웠다. 회사가 처음 내놓은 문장은 대개 제일 솔직하다. 그 뒤부터는 누군가의 손이 닿는다.

예상대로 오래 안 가 두 번째 초안이 돌았다.

이번에는 첫 줄이 바뀌어 있었다.

`관련 문의에 대해 확인 중입니다.`

이름이 빠졌다.

하지만 제목은 그대로였다.

`최동식 관련 문의`

그 뒤로 메일이 한 번 더 붙었다. 본문 수정 요청이었다. 팀장이 다급하게 스크롤을 내리는 바람에 끝까지 읽히진 않았지만, 첫 줄만으로도 충분했다.

`제목 유지, 본문 표현만 정리 바랍니다.`

도윤은 입술 안쪽을 천천히 깨물었다. 저건 지우는 사람의 문장이라기보다, 이미 다 지울 수 없다는 걸 안 사람의 문장이었다. 질문선 자체가 바깥 기자 메일함에 남아 버린 이상, 이제 회사가 손댈 수 있는 건 답변 본문뿐이었다. 이름을 없애고 싶어도, 이미 제목에서 한 번 살아남은 이름은 다시 눈에 들어온다.

문장 본문에서는 지우려 들었는데, 메일 제목과 질의선에서는 이미 남아 버린 셈이었다. 더 우스운 건 두 번째 초안에서도 보낸 사람 이름은 그대로 `차수빈`으로 찍혀 있다는 점이었다. 도윤은 그걸 보고 차수빈이 어떤 표정으로 문장을 고쳤을지 상상했다. 자신이 쓴 문장에 이 이름을 남겨 두면 안 된다고 느끼면서도, 지금은 지우는 속도가 남는 속도를 못 따라간다는 걸 알아차린 얼굴.

그녀는 도윤을 돕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자기 손이 어디까지 묻는지 무서워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더 진짜 같았다.

오후 두 시쯤 한세린에게도 메시지가 왔다.

`회사 답변 초안 받았습니다`

`처음엔 이름을 넣었다가 지금은 빼려 하네요`

그리고 바로 아래, 캡처 한 장이 더 붙었다.

메일 상단 제목 칸이었다.

`최동식 관련 문의`

도윤은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사내 공유 메일함에서 본 문장과 똑같았다. 한세린이 던진 질문은 회사 안에서만 맴도는 게 아니었다. 이미 바깥 답변선과 안쪽 사실 확인선에 동시에 걸려 있었다. 이제 누가 문장을 갈아끼워도, 처음 박힌 이름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창가 쪽으로 걸었다. 아래 주차장에서는 검은 세단 한 대가 급히 멈췄고, 회의실 블라인드 너머로 그림자 셋이 겹쳐졌다. 누구 하나 소리를 지르진 않았지만, 저 안에서는 지금 문장 하나 때문에 라인이 갈라지고 있을 것이다. 보안은 묻으려 하고, 홍보는 바꿔 쓰려 하고, 재무는 비용부터 정리하려 들 것이다.

기사를 완성한 것도 아니었다.

속보가 뜬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미 첫 승리는 넘어왔다.

최동식은 더 이상 회사 안 삭제 목록에만 매달린 이름이 아니었다. 질문 제목에 올라갔고, 답변 초안 첫 줄에 박혔고, 누군가가 급히 지우려 든 흔적까지 남겼다. 그 이름을 덮으려고 손을 댈수록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그 이름을 읽게 되는 구조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휴대폰이 한 번 더 울렸다.

한세린이었다.

`이름은 살렸어요`

`이제 누가 저 이름을 지우려 했는지까지 가야겠네요`

도윤은 그 문장을 읽고 창밖을 봤다. 회의실 문이 열리자 강태준이 먼저 나왔고, 그 뒤로 차수빈이 서류철을 더 세게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걸어 나왔다. 그녀 뒤쪽에는 재무전략실 쪽에서 올라온 낯선 남자가 휴대폰으로 누군가와 짧게 통화하고 있었다.

이름 다음엔 돈이었다.

누가 저 이름을 빼라고 했는지, 누가 그 삭제 비용을 묶어 버리려는지, 누가 마지막에 자기 이름 대신 숫자를 올려두는지. 방금 살아남은 이름 하나가 그 줄 전체를 끌고 올라올 수도 있었다.

도윤은 휴대폰 화면 속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다.

`최동식 관련 문의`

이제 저 이름을 지우는 데 드는 값이 보일 차례였다.

그리고 그 값은 생각보다 빨리 튀어나올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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