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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 일러스트

정리해

001화 정리해

서도윤은 수요일 밤, 죽기 오십 분 전까지도 박성재 팀장이 자기 편이라고 믿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밤 열한 시를 넘긴 전략기획팀 사무실에는 형광등만 멀쩡했다. 사람들은 거의 다 빠져나갔고, 남은 건 모니터 열기와 종이컵 커피 냄새, 도윤 책상 위에서 눅눅해진 삼각김밥 하나뿐이었다.

휴대폰이 한 번 짧게 울렸다. 카드 대금 결제 예정 알림이었다. 도윤은 화면을 한번 내려다보다가 바로 뒤집어 놓았다. 금액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번 달은 병원비가 끼어 있었다. 어머니 무릎 주사값, 동생 학원비 밀린 것, 지난주에 겨우 막은 월세까지. 계산은 이미 끝나 있었다. 남은 건 모르는 척 버티는 일뿐이었다.

“서 대리.”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박성재 팀장이 코트를 팔에 걸친 채 도윤 자리 앞에 서 있었다. 피곤한 척은 했지만, 진작 퇴근해도 되는 사람만 가진 가벼움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이거 오늘 안에만 정리하면 돼. 급한 거라.”

책상 위에 USB 하나가 툭 떨어졌다.

`특별 자문비 집행 정리_최종`.

전략기획팀 대리가 법무 자문비 집행표까지 붙들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 회사에서 원래 자기 일만 하는 사람은 오래 못 버텼다. 밀린 일은 늘 가장 만만한 사람 앞으로 흘러왔고, 그게 대개 도윤이었다.

“지금요?”

말이 튀어나간 다음에야, 그게 질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박성재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지금이지 그럼 내일이냐. 위에서 아침 보고 들어간대.”

그러고는 늘 쓰던 말까지 붙였다.

“서 대리니까 믿고 맡긴다.”

도윤은 무심한 얼굴을 하려 했지만, 입꼬리가 먼저 비틀렸다. 저 말이 칭찬이 아니라는 건 오래전에 배웠다. 그래도 지난달 임원회의 때 도윤이 숫자 안 맞는다고 전무 앞에서 너무 세게 물고 늘어졌을 때, 박성재만 중간에 끊고 들어와 자기 선에서 정리하겠다고 받아냈다. 그 한 번 때문에 도윤은 아직도 이 사람이 적어도 뒤에서 자기를 버리진 않을 거라고 믿었다.

박성재는 USB를 도윤 쪽으로 더 밀었다.

“수정본이랑 원본 로그 둘 다 들어 있어. 이상한 거 있으면 맞춰서 예쁘게 정리만 해. 복잡한 건 윗선에서 다 본 거니까.”

예쁘게 정리. 그게 이 회사가 더러운 걸 부르는 말이었다.

도윤은 낮게 웃었다.

“숫자가 더러운데, 그게 예쁘게 됩니까.”

박성재는 그 말에도 웃지 않았다.

“입 좀.”

짧게 쏘아붙인 뒤 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가볍고 빨랐다. 오늘 밤 더는 자기 일이 아니라는 확신이 저 발걸음에 다 묻어 있었다.

도윤은 남겨진 USB를 한참 보다가 삼각김밥 포장을 뜯었다가 다시 덮었다. 입맛이 없었다. 대신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하고 쓰기만 했다.

USB를 꽂고 파일을 열자 숫자가 먼저 쏟아졌다.

자문비. 컨설팅비. 외주 검토비. 긴급 대응비.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익숙한 방식으로 포장된 돈들이기도 했다. 처음 십 분은 정말 평소처럼 지나갔다. 합계가 안 맞는 칸 하나 고치고, 날짜 형식 통일하고, 설명 문구 띄어쓰기나 정리했다.

이상한 건 수정 이력에서 시작됐다.

낯익은 업체명이 보였다.

`에이치브릿지 어드바이저리`.

도윤은 손을 멈췄다.

어제 낮, 팀장 대신 결재 첨부 하나를 옮기다가 권한 밖 문서를 잠깐 잘못 연 적이 있었다. 그때도 저 이름이 한 번 스쳤다. 보안 경고가 떠서 황급히 닫았고, 박성재는 별일 아니라며 잊으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이름이 다른 파일 안에서 다시 나왔다.

같은 업체명이 세 번 반복돼 있었다. 같은 계좌번호가 붙어 있었고, 설명란만 달랐다. 자문비, 긴급 대응비, 대외 협력비. 금액은 자문비라기엔 너무 컸고, 긴급 대응비라기엔 지나치게 정교하게 쪼개져 있었다.

사내 등록 시스템에 업체 번호를 넣었다.

결과 없음.

외부 사업자 조회를 다시 돌렸다.

결과 없음.

없는 회사였다.

도윤은 등받이에서 등을 뗐다. 수정 로그를 다시 열자 삭제된 원문 설명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장례 지원`.

`합의 진행`.

`보안실 요청`.

자문비 표 안에 들어갈 말이 아니었다.

마우스를 멈춘 채 화면만 보다가 숨겨진 시트를 눌렀다.

`7월 정리_수정전`.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짧은 알림이 번쩍였다.

`원본 대조 기록이 서버에 동기화되었습니다.`

도윤은 반사적으로 창을 닫았다. 오늘 알림은 어제처럼 노골적인 보안 경고가 아니었다. 그래서 더 나빴다. 어제 잘못 디딘 줄을 오늘 다시 정확히 밟고 있다는 뜻 같았다.

숨겨진 탭 안엔 더 노골적인 말들이 붙어 있었다.

`유가족 접촉 완료`.

`영상 확보 후 폐기`.

`M실장 검토`.

그리고 잘리다 만 메모 한 줄.

`최동식 건 2차 정리`.

도윤은 그 이름을 한참 쳐다봤다. 며칠 전 사내 게시판에 잠깐 올라왔다가 금방 내려간 사고 보고 제목에서 본 이름 같았다. 협력업체 직원 추락 사고. 조사 중. 대외 문의 금지. 그 짧은 공지 속 이름이 자문비 표 안에 숨어 있었다.

식은 기운이 등 뒤로 미끄러져 내려앉았다.

삭제 로그 옆 결재선도 다시 보였다. 대부분은 익명 처리돼 있었지만, 하나는 제대로 지워지지 않았다.

`강태준`.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심장이 세게 내려앉았다. 사내 인트라넷 메인에 늘 뜨는 얼굴이었다. 그룹 회장의 장남. 신사업 총괄. 차기 후계자 후보. 뉴스에선 세련된 경영인이라 쓰고, 사내에선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아야 할 이름이라고 배웠다.

이건 닫아야 했다. 못 본 척하고 로그 정리만 조금 하고 집에 가야 했다. 이렇게 큰 이름이 걸려 있으면 더더욱 그랬다. 이 회사에서 평범한 사람이 오래 사는 방법은 하나였다. 많이 알아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것.

그런데 손이 바로 닫기 버튼으로 가지 않았다.

`최동식 건 2차 정리`.

`장례 지원`.

자문비 표 안에서 보기엔 너무 사람 냄새가 나는 말들이었다. 누군가 사람 하나를 숫자 칸 안으로 밀어 넣고, 그 위에 자문비라는 라벨을 덧씌운 것 같았다.

도윤은 결국 박성재 메신저 창을 열었다. 짧게 한 줄만 묻고 끝낼 생각이었다. 박성재라면 적어도 이게 어느 선까지 위험한 일인지, 어느 쪽으로 덮어야 살아남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팀장님, 이거 자문비 아니라 사고 처리비 섞인 거 같은데요. 그대로 올립니까?`

보내고 나서야 심장이 늦게 떨어졌다.

메시지는 금방 읽음으로 바뀌었다.

답은 오지 않았다.

그 침묵이 더 나빴다. 모른 척 넘길 수도 없고, 물었다는 흔적만 그대로 남았다. 파일 닫고 집에 가면 될 일 같았는데, 문제는 이미 봤고 이미 물었다는 데 있었다.

도윤은 모니터 밝기를 낮추고 휴대폰을 꺼냈다.

딱 세 장만.

전체 파일을 빼돌릴 생각은 없었다. 그런 배짱도, 그런 재주도 없었다. 다만 정말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자기가 미친 게 아니라는 증거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손끝이 떨렸다.

첫 사진은 흔들려서 다시 찍었다.

두 번째는 삭제 로그가 잘려 나와 각도를 바꿨다.

세 번째엔 계좌번호 일부와 `강태준` 이름이 같이 보이도록 맞췄다.

개인 메일 임시저장함으로 보내려다가 멈췄다. 사내망에서 외부 메일 접속 기록이 남을 수도 있었다.

대신 오래전에 만들어 둔 개인 클라우드 메모 앱을 열었다. 제목도 없는 메모 하나를 새로 만들고 이미지를 올렸다.

업로드 바가 천천히 찼다.

구십 퍼센트에서 한 번 멈췄을 때는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

도윤은 자기도 모르게 모니터 오른쪽 아래를 다시 봤다. 더 이상 뜨는 보안 알림은 없었다. 그게 더 불길했다. 경고가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누군가는 이미 봤을 수도 있다는 뜻 같았다.

백 퍼센트.

짧게 숨을 내쉰 순간 휴대폰 진동이 다시 울렸다.

`박성재 팀장`.

도윤은 거의 반사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팀장님.”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낮고 피곤했다. 늘 그렇듯 차분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한 겹 얇았다.

“서 대리. 메신저에 그런 말 남기면 내가 곤란해.”

도윤의 손가락이 굳었다.

“팀장님, 이거 지금 그냥 덮을 일이 아닙니다. 최동식 건까지 들어가 있으면-”

박성재가 말을 잘랐다.

“길게 말하지 마. 전무님이 직접 확인하신대. 옥상 서비스 구역으로 잠깐 올라와. 내가 얘기해 놨어.”

순간 도윤은 말을 잃었다. 박성재가 예전 같았으면 적어도 한마디는 덧붙였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중간에서 막아 보겠다, 괜히 쫄지 마라. 그런데 지금 들린 건 그런 말이 아니었다. 문제를 덮는 말도, 보호하는 말도 아닌, 사람을 어딘가로 인계할 때 쓰는 목소리였다.

“팀장님도 오십니까?”

박성재는 아주 잠깐 침묵했다.

“나도 곧 올라가.”

거짓말 같았다.

그 직후 사내 메신저가 울렸다.

`보안실장 민재호: 서 대리, 아직 퇴근 전이면 옥상 서비스 구역으로 잠깐 올라오시죠. 전무님 확인하실 게 있습니다. 사본 문제입니다.`

도윤은 메시지를 세 번 읽었다.

사본 문제.

열람 기록만 간 게 아니었다. 사진까지 남겼을 가능성을 이미 보고받은 분위기였다.

그는 화면 속 정산 파일을 다시 봤다. 삭제 로그. 없는 회사. 최동식 건. 강태준. 그리고 방금 들은 박성재 목소리.

지금이라도 사진을 지우고, 로그도 정리하고, 아무것도 못 봤다고 하면 살 수 있을까. 마우스를 움직였다가 멈췄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면 박성재가 이 시간에 옥상 서비스 구역으로 오라고 할 이유가 없었다.

파일도 닫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는 비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 자기 얼굴은 퀭했고, 겁먹은 사람처럼 보였다.

옥상 서비스 구역 문은 일반 직원들이 거의 쓰지 않는 출입구였다. 계단 끝 방화문을 밀자 찬 바람이 바로 얼굴을 때렸다.

공조기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채웠다. 야경은 화려했지만 서비스 구역은 생각보다 지저분했다. 배관과 실외기, 안전 펜스, 바람에 흔들리는 경고 테이프가 전부였다.

문턱을 넘자마자 도윤은 출구와 카메라 위치부터 훑었다. 계단 쪽 복도엔 CCTV가 있었지만, 옥상 안쪽은 사각이 많았다. 덕트와 실외기가 시야를 잘랐고, 난간 가까운 쪽은 경고선만 어설프게 걸려 있었다. 보기엔 실수로 발을 헛디딘 사고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문 가까이에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민재호였다.

이름보다 분위기가 먼저 다가왔다. 사내 행사 사진에서 몇 번 본 적은 있었다. 늘 회장이나 임원 몇 걸음 뒤에 서 있던 사람. 표정이 없고, 필요할 때만 움직이는 얼굴.

“오셨네요.”

목소리도 지나치게 평평했다.

“박 팀장님은요?”

민재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시선만 옆으로 돌렸다.

실외기 뒤 그림자 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코트 자락이 바람에 조금 흔들렸다.

강태준이었다.

뉴스에서 보던 것처럼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저 지루한 표정으로 도윤을 한번 훑어봤다. 그 시선만으로 목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서도윤 대리.”

도윤은 자동으로 허리를 조금 숙였다.

“네.”

“파일 봤어?”

물음표가 붙어 있었지만 질문처럼 들리진 않았다.

“정리 중이었습니다.”

강태준은 고개를 아주 조금만 기울였다.

“박성재 팀장이 말은 맞게 했더군.”

도윤의 등이 식었다.

“맡기면 끝까지 본다고.”

그다음 문장이 더 낮게 떨어졌다.

“팀장한테는 왜 물었어.”

읽음으로 끝난 메신저 한 줄, 방금 전화 한 통, 박성재가 끝내 나타나지 않은 옥상이 한 번에 이어졌다. 도윤은 그제야 박성재가 자기 뒤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앞에서 선을 긋고 빠져나갔다는 걸 알아차렸다.

강태준은 표정도 바꾸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핸드폰에 남긴 거, 삭제했지?”

도윤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강태준의 시선이 아주 잠깐 도윤 주머니 쪽으로 내려갔다가 돌아왔다. 그 짧은 움직임만으로도 이미 뭘 알고 있는지 충분했다.

“수정 전 로그가 잠깐 열려서… 몇 줄은 봤습니다. 그런데 무슨 내용인지는-”

강태준의 표정이 아주 조금 식었다.

“사본은?”

그 짧은 침묵이면 충분했다.

강태준은 그걸로 다 안다는 얼굴을 했다. 실망도 분노도 없었다. 오히려 더 나빴다. 사람 하나를 지울지 말지 판단하는 표정이 아니라 이미 끝난 계산을 다시 확인하는 얼굴이었으니까.

“저 아무한테도 말 안 했습니다.”

목소리가 다급하게 튀어나왔다.

“정말입니다. 그냥 이상해서 본 것뿐입니다. 제가 뭘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강태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이 제일 안심이 안 돼.”

“많이 본 놈보다, 보고 입까지 댄 놈이 더 시끄럽거든.”

도윤은 본능적으로 뒤를 봤다. 방화문까지 뛰면 닿을 거리 같기도 했지만 민재호가 그보다 먼저 움직일 거라는 걸 직감했다. 문까지 가려면 민재호 옆을 스쳐야 했고, 난간 반대편은 막다른 배관 구역이었다. 소리쳐도 밑층 사무실까지 들릴지 알 수 없었다. 공조기 소리가 너무 컸다.

“서 대리.”

강태준이 낮게 말했다.

“조용히 살지 그랬어.”

도윤은 뭔가 더 말하려 했다. 실수였다고 해야 하나, 휴대폰부터 내밀어야 하나, 박성재 이름을 부르면 뭔가 달라질까.

그런데 어느 쪽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억울함이 먼저 올라왔다. 자기가 뭘 대단한 걸 훔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넘겨받은 파일을 정리했을 뿐이었다. 늘 하던 것처럼, 남이 떠넘긴 숫자를 맞췄을 뿐이었다. 믿고 맡긴다는 말이 이렇게 사람을 난간 앞으로 끌고 오는 문장이 될 줄은 몰랐다.

강태준이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정리해.”

민재호가 움직인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너무 빨라서 맞섰다는 말도 못 했다. 어깨를 밀린 건지 목덜미를 잡힌 건지 구분도 안 됐다. 발이 한 번 헛디뎠고, 안전 펜스가 옆으로 비틀렸다. 차가운 바람이 허리 아래를 통째로 비워 버렸다.

도윤은 난간을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손끝이 철제 모서리를 스쳤다. 미끄러운 물기만 묻고,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았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튀어 오르듯 움직였다.

그제야 몸이 먼저 깨달았다.

떨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이상하게 늘어졌다.

눈앞에 보이는 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옥상 난간, 검은 코트 끝,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민재호의 얼굴이었다. 강태준은 끝까지 앞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멀리 선 채 내려다보기만 했다.

왜 하필 나인지, 왜 박성재는 자기를 옥상으로 올려 보냈는지, 왜 사람 하나가 숫자 몇 줄 때문에 이 밤하늘에서 밀려 떨어져야 하는지만 목구멍 안을 맴돌았다.

억울함은 분노보다 무거웠고, 공포는 그보다 빨랐다.

바람이 폐 안으로 거꾸로 들어왔다.

손에서 힘이 빠졌다.

휴대폰이 주머니 밖으로 빠져나가 어딘가로 날아가는 감각이 스쳤다.

시야 한복판에 낯선 문장이 떠올랐다.

곧 문장이 하나씩 정렬됐다.

`[죽음 확인: 타살]`

`[살인지시자: 강태준]`

`[살인자: 민재호]`

`[획득자료: 확인 끝]`

`[공개 자료: 자동 공개]`

`[획득 능력: 위기 감지]`

`[회귀 시각: 전날 같은 시간]`

문장들은 바람 소리보다 또렷했다.

전날 같은 시간이라는 문장이 눈앞에 박히는 순간, 바닥이 올라왔다.

그리고 세상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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