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그날 밤 이후, 페이지는 잠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별빛이 번쩍였고, 샘물을 들이켜던 순간이 떠올랐다.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라는 감각이 뚜렷했다. 머릿속에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생각들이 질서 있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에는 막연히 “왕국이 썩었다”는 분노만 있었다면, 이제는 그 썩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까지 보였다.
세금은 어디서 걷히고, 누구의 주머니로 들어가는지.
기사들이 왜 백성을 지키지 않는지.
성직자들이 왜 신의 이름을 팔아 금화를 모으는지.
그리고, 왕국이 왜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는지.
썩은 체제일수록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모두가 조금씩 그 안에 기대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페이지는 처음으로 그 사실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이해한 순간, 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피크는 다음 날 아침에도 여전히 허름한 술집 구석에 앉아 있었다.
밤새 술을 마신 듯했지만, 눈빛은 또렷했다. 그는 페이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그래서, 혁명가 양반.”
페이지가 자리에 앉았다.
“웃을 일이 아니야.”
“아니, 난 진지해.”
피크는 탁자에 놓인 빈 잔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말했다.
“왕국을 뒤집자고 한 건 나쁘지 않아. 문제는, 너 같은 애 하나랑 나 같은 실업자 하나가 뭘 할 수 있느냐는 거지.”
페이지는 조용히 말했다.
“사람을 모아야 해.”
피크가 웃었다.
“그래, 그건 나도 말했다.”
“그런데 아무나 모으면 안 돼.”
피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오.”
페이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기사만 모으면 귀족의 또 다른 군대가 될 거야.
농민만 모으면 오래 못 버텨.
도둑만 모으면 신뢰를 못 얻고,
상인만 모으면 끝내 돈 앞에서 갈라질 거야.”
피크가 점점 진지해졌다.
“그래서?”
“전부 필요해.”
피크는 한참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별을 마신 것 같네.”
페이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크는 의자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좋아. 그럼 처음부터 생각해 보자.”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첫째, 사람을 모을 장소가 필요해.
둘째, 믿게 만들 말이 필요해.
셋째, 우리가 단순한 폭도가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해.”
페이지가 말했다.
“장소는?”
피크는 씩 웃었다.
“그건 내가 알아.”
피크가 데려간 곳은 수도 레티아 남쪽 외곽의 버려진 마구간이었다.
예전엔 어느 귀족의 말 사육장이었다고 했지만, 주인이 도박으로 재산을 날린 뒤 방치된 곳이었다. 벽은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었고, 지붕은 빗물이 새었다. 하지만 바깥에서 보기에는 그냥 폐허였고, 안쪽은 생각보다 넓었다.
“여기다.”
피크가 팔을 벌렸다.
페이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오겠어?”
“오게 만들어야지.”
피크는 웃으며 말했다.
“사람들은 대단한 이상보다 당장 숨 돌릴 구석을 더 먼저 찾거든.”
그날부터 두 사람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페이지는 낮에는 도시를 돌아다녔다.
피크는 밤에 움직였다.
페이지는 광장, 시장, 훈련장 주변을 돌며 사람들의 얼굴을 보았다. 누가 억눌려 있고, 누가 분노하고 있으며, 누가 아직 체념하지 않았는지 읽어내기 시작했다. 전에는 그냥 지나쳤을 사람들의 표정이 이제는 하나의 언어처럼 보였다.
시장 구석에서 세금 때문에 짐을 빼앗긴 상인.
골목에서 기사들에게 맞고도 이를 악문 젊은이.
수도원 앞에서 병든 어머니를 두고 울던 소녀.
창녀촌 입구에서 술 취한 기사들을 저주하던 여자들.
그리고 허름한 여관 구석에서 “세상이 뒤집혔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리는 패배자들.
피크는 그런 사람들을 정확히 찾아냈다.
그는 페이지보다 훨씬 현실적이었다. 아니, 노골적으로 냉소적이었다.
“정의로운 사람만 모아선 못 이겨.”
그가 어느 날 밤 말했다.
“세상은 정의로운 사람보다 배고픈 사람이 훨씬 많아.”
“하지만 위험한 사람들도 많아.”
페이지가 말하자 피크는 어깨를 으쓱했다.
“혁명은 원래 위험한 사람들하고 같이 하는 거야.”
첫 번째로 마구간에 온 사람은 농부였다.
이름은 도란.
원래 수도 근교에서 조그만 밭을 일구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금과 벌금, 귀족의 사냥터 확대 때문에 땅을 빼앗기고 가족과 함께 도시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이었다.
도란은 마구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페이지를 노려봤다.
“너희가 뭘 할 수 있는데?”
페이지는 그를 마주 봤다.
“당장은 많지 않아요.”
도란은 코웃음을 쳤다.
“그럼 왜 왔겠나.”
“앞으로 할 수 있게 되려고요.”
도란은 잠시 말이 없었다.
피크가 끼어들었다.
“좋지? 최소한 귀족처럼 거짓말은 안 하잖아.”
도란은 그제야 실소를 흘렸다.
“미친놈들.”
하지만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
두 번째는 여자였다.
붉은 머리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여자인데, 이름은 마레였다. 창녀촌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정보와 돈의 흐름에 밝은 사람이었다. 귀족들의 술자리, 기사들의 허세, 성직자들의 거래를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었다.
그녀는 페이지를 보자마자 말했다.
“들었어. 기사 시험에서 또 떨어진 애라며.”
피크가 웃었다.
“유명인사야.”
마레는 페이지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물었다.
“왕국을 뒤집겠다고?”
“그래.”
“왜?”
페이지는 잠시 생각했다.
“지금 왕국은 너무 많은 사람들을 짓밟고 있어.”
마레는 비웃듯 웃었다.
“그건 모두가 알아. 중요한 건, 네가 왕국을 뒤집으면 뭐가 달라지느냐는 거야.”
마레의 질문에 마구간 안이 조용해졌다.
페이지는 천천히 대답했다.
“적어도,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는 세상은 끝낼 거야.”
마레는 한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말했다.
“그 말, 잊지 마.”
그녀도 남았다.
세 번째는 전직 기사였다.
이름은 카사르.
원래 변방 기사단에 소속돼 있었으나, 상관의 횡령을 고발했다가 되레 쫓겨난 사람이었다. 몸집이 크고 말수가 적었으며, 왼쪽 뺨에 긴 흉터가 있었다.
그는 페이지에게 목검 하나를 던졌다.
“왕국을 뒤집으려면 네가 직접 싸울 줄 알아야지.”
페이지가 목검을 받았다.
카사르는 말했다.
“덤벼.”
결과는 처참했다.
페이지는 세 번 만에 바닥에 쓰러졌다.
피크가 옆에서 혀를 찼다.
“혁명은 아직 이른가 본데.”
페이지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일어났다.
다시 덤볐다.
또 쓰러졌다.
다시 일어났다.
카사르는 그런 페이지를 한참 지켜보다가 목검을 내려놓았다.
“약하군.”
페이지는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알고 있어.”
카사르는 말했다.
“그런데도 포기 안 하네.”
“해야 하니까.”
그 말에 카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내가 가르치지.”
그날부터 그는 마구간의 첫 번째 검술 교관이 되었다.
사람들은 조금씩 늘어났다.
굶주린 농민, 쫓겨난 병사, 사기꾼, 마차꾼, 창녀, 도박사, 몰락한 하급 귀족, 떠돌이 광대, 심지어 어떤 수도사 지망생까지.
그들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벨로리아 왕국에서 밀려난 자들.
왕국이 필요 없다고 버린 사람들이었다.
처음에는 서로를 믿지 않았다.
농민은 건달을 싫어했고, 건달은 기사를 믿지 않았으며, 창녀는 수도사를 비웃었고, 몰락 귀족은 평민들 사이에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마구간 안은 자주 시끄러웠다.
도란은 늘 불만이었다.
“저 도둑놈들과 한패가 되라고?”
그러면 마레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네가 굶을 때 곡식 훔쳐 준 것도 그런 도둑이야.”
그러면 카사르가 한마디 했다.
“조용히 해. 싸울 힘도 없으면서.”
그러면 피크가 중간에 끼어들어 웃으며 말했다.
“좋아, 오늘도 아주 훌륭하게 망하기 직전이군.”
그럴 때마다 페이지는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는 알았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건 검도, 돈도 아니었다.
이유였다.
며칠 뒤, 페이지는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섰다.
마구간 안에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벽 사이로 바람이 스며들었고, 촛불은 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모두의 눈이 페이지를 향했다.
그는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원래 말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해야 했다.
페이지가 천천히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왕국에서 버림받았을 겁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땅을 빼앗겼거나, 자리를 빼앗겼거나, 존엄을 빼앗겼겠죠.”
도란의 눈썹이 꿈틀했다.
마레는 팔짱을 끼고 있었고, 카사르는 벽에 기대 서 있었다.
페이지는 계속 말했다.
“우리는 귀족이 아닙니다. 기사도 아닙니다. 신을 팔아 금을 버는 성직자도 아닙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왕국의 바닥을 지탱해 온 사람들입니다.”
촛불이 흔들렸다.
페이지의 목소리는 점점 단단해졌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계속 고개를 숙여야 하죠?”
누군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왜 기사 시험은 돈으로 결정되고, 세금은 약한 사람에게만 쏟아지고, 왕국은 우리를 사람으로 보지 않죠?”
도란이 고개를 들었다.
마레의 눈이 가늘어졌다.
피크는 처음으로 웃지 않았다.
페이지는 말했다.
“나는 왕국을 무너뜨리겠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는 잠시 멈췄다.
“나는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겁니다.”
마구간이 조용해졌다.
페이지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우리 손으로.”
긴 침묵 끝에, 카사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린 뭐가 되는 거지?”
그 질문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모두의 시선을 한곳으로 모았다.
페이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름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피크가 벽에서 등을 떼며 앞으로 나왔다.
그는 여유로운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런 모임엔 이름이 있어야지.”
마레가 물었다.
“뭐가 좋은데?”
피크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더니 페이지를 바라봤다.
“네가 해.”
페이지가 놀랐다.
“내가?”
“그래. 별 마신 놈이잖아.”
몇몇이 피식 웃었다.
페이지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가 지나갔다.
왕국, 검, 자유, 길, 바람.
그리고 그는 샘터에서 느꼈던 바람을 떠올렸다.
형태는 없지만 막을 수 없는 것.
낡은 성벽의 틈으로도 스며드는 것.
귀족의 창문도, 수도원의 문도, 기사단의 갑옷 틈도 지나갈 수 있는 것.
페이지는 천천히 말했다.
“우린 바람처럼 움직일 겁니다.”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았다.
“붙잡히지 않고, 멈추지 않고, 누구의 것도 되지 않는.”
피크의 눈이 반짝였다.
페이지가 말했다.
“우린 기사단이 될 겁니다.”
도란이 중얼거렸다.
“기사단?”
“귀족을 위한 기사단이 아니라…”
페이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을 위한 기사단.”
그리고 마침내 그 이름을 말했다.
“모스수스토.”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마레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인데?”
페이지는 대답했다.
“옛말로… 바람의 기사단.”
잠시 정적.
그리고 피크가 가장 먼저 웃었다.
“마음에 드네.”
카사르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적어도 겁먹은 이름은 아니군.”
도란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이라…”
마레는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난 귀족들보다 바람이 더 믿음직하거든.”
그날 밤, 마구간 안의 사람들은 처음으로 같은 이름 아래 섰다.
누군가는 아직 의심했고, 누군가는 아직 반쯤은 장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름이 생긴 순간, 그들은 더 이상 흩어진 패배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의 조직이 되었다.
그날 이후, 모스수스토는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사르는 사람들에게 창과 검을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도란은 외곽 농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마레는 귀족들과 기사들의 술자리에서 정보를 흘려 들었다.
피크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오가며 연결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페이지는 밤마다 깨어 있었다.
샘물의 힘이 그의 안에서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두려웠다.
왜 자신이 이런 힘을 얻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왜 별이 자신을 택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이제 뒤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
벨로리아 왕국은 여전히 화려한 척하고 있었지만, 이미 안쪽부터 갈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로, 아주 작은 바람 하나가 스며들고 있었다.
훗날 역사가들은 말할 것이다.
왕국은 거대한 군대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고.
처음에는 허물어진 마구간에서 모인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나눴던 이름 하나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모스수스토.
바람의 기사단.
그 이름이 처음 세상에 태어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