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썩은 계약서 옆의 새 계약서
에릭이 펼친 양피지 위로 조나단이 준비한 새하얀 서류가 겹쳐졌다.
에릭의 서류는 원액 공급 연합의 붉은 직인이 찍힌, 누렇게 절은 계약서였다. 모퉁이는 닳아서 둥글게 말려 있었고, 여백마다 그간 연합이 일방적으로 올린 원액 단가와 강제 매입 의무 조항들이 지저분한 잉크 자국으로 덧붙여져 있었다.
그 옆에 놓인 조나단의 서류는 정갈하게 정돈된 흰 종이였다. 먹선 하나 흐려진 곳 없이 명확한 서체로 ‘퀘스트 전 한 그릇 1호 지점권 계약서’라는 제목이 박혀 있었다.
두 장의 종이는 여관의 기름때 묻은 나무 탁자 위에 올라앉아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좋아. 네 썩은 계약서 옆에 새 계약서 하나 놓지.”
조나단의 말에 에릭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는 조나단이 내민 종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카운터 옆에서 마른침을 삼키며 서 있는 여관 주인 보란을 향해 고개를 까딱했다.
“보란 여사, 저런 얼치기 장사꾼의 종이 쪼가리에 현혹될 필요 없소. 판은 간단하지. 당신이 우리 연합의 원액을 조달받지 않고 ‘스튜’를 조리해 손님들에게 팔았다는 거요. 이건 명백한 독점 계약 위반이고, 그에 따른 위약금은 금화 200닢이오.”
에릭이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위약금 산정 내역서의 숫자 ‘200’을 툭툭 쳤다.
그의 어깨 뒤에 버티고 선 덩치 큰 용병 둘이 품에 안은 대검과 철퇴의 자루를 만지작거렸다. 쇳소리가 스산하게 흘러나오자, 저녁 식사를 즐기던 모험가 몇몇이 고개를 숙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여관 안을 채우던 숟가락질 소리가 뚝 끊기고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침묵이 홀을 감쌌다.
“물론 우리 연합도 야박한 사람들은 아니니, 해결책을 가져왔소.”
에릭은 의자를 당겨 앉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지금이라도 저 정체 모를 이상한 국물 판매를 당장 중단하고 원액 계약을 갱신한다면, 저 위약금은 없던 일로 해주겠소. 거기에 더해, 앞으로 1년간 원액을 기존 가격의 반값에 공급하지. 초보자 마을에서 우리 연합과 등지고 장사할 수 있는 상인이 없다는 것쯤은 보란 여사도 잘 알잖소?”
금화 200닢 면제에 1년 반값 공급. 보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개척자의 여관이 일 년 내내 손에 쥐는 순수익의 절반에 달하는 큰돈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조나단과 에릭 사이를 불안하게 오갔다.
그때, 조나단의 등 뒤에서 페니의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 대박! 위약금 막아 주는 값부터 받아야겠네요! 보란 아주머니, 서류 봐드리는 값으로 은화 10닢 먼저 장부에 달아둘게요. 그리고 저기 칼 만지작거리며 겁주는 아저씨들 말이에요, 손님들 밥 먹는 속도까지 늦추고 있으니까 시간마다 은화 5닢씩 더 받아도 되죠? 밥 먹다 사레들리겠어요!”
페니가 허리춤에서 돼지가죽으로 감싼 얇은 장부를 꺼내 무언가를 신나게 적자, 에릭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 하는 꼬마냐?”
“꼬맹이라니요! 이 계약서의 작성 대리인이자 정당한 청구권자거든요! 서류 작성 수수료는 이미 보란 아주머니의 지출 대장에 청구해 뒀으니까 걱정 마시고요. 저쪽 연합 아저씨들이 우기는 위약금 청구를 날려버리는 날에는, 성공 보수율을 매출에서 떼어갈 거예요. 어우, 금액이 크니까 성공 보수도 꽤 짭짤하겠네요!”
페니가 동전 소리를 입으로 내며 콧노래를 부르자, 용병들의 험악한 표정마저 잠시 멍해졌다. 그 틈을 타 조나단이 두 장의 계약서를 탁자 한가운데로 밀어붙였다.
“자, 보란. 그리고 여기 장사 구경하러 온 양반들. 이제부터 하나씩 비교해 보지.”
조나단은 에릭이 가져온 낡은 계약서의 한 구절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누런 종이에 박힌 어두운 잉크 자국이었다.
“‘을은 갑의 원액, 혹은 원액을 물에 희석하여 조리한 스튜 외에, 동일하거나 유사한 상품군을 판매할 수 없다.’ 이거 맞나?”
에릭이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스튜’는 우리 연합이 독점 공급하는 품목이지. 당신들이 냄비에 잡뼈를 우렸든 약초를 넣었든, 국물 형태로 내는 것은 전부 유사 상품일 뿐이오.”
“스튜라는 이름 하나로 세상의 모든 국물을 네 원액 밑에 깔아뭉개겠다는 속셈인가. 국물에 색만 나면 전부 네 물건인가? 그럼 저기 마당의 우물물도 네 창고에 집어넣지 그래.”
조나단의 비아냥에 에릭이 눈썹을 꿈틀했다.
“궤변은 집어치우시오! 손님들이 저걸 뭐라고 부르며 주문하지? ‘새 스튜’라고 부르고 있잖소!”
그 말에 여관 구석자리에서 숟가락을 들고 있던 모험가 하나가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저, 저희는 그냥 ‘한 그릇’이라고 불렀는데요. 퀘스트 하러 나가기 전에 후딱 해치우는 밥이라고 해서….”
“맞아요!” 다른 테이블의 견습 마법사가 거들었다. “스튜랑은 속에서 느끼는 무게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건 국물이 맑고 기름기가 적어서, 먹고 나면 속이 부대끼지 않아 아침 훈련 시간에 지각할 일이 없단 말이에요.”
조나단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새 계약서에 첨부된 상품 구성표를 펼쳐 보였다. 구성표에 적힌 항목들은 일반적인 스튜의 요리법이나 구성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조나단은 종이 위에 적힌 세부 항목들을 손가락으로 짚어 내려갔다.
“계약서는 음식 이름에 돈을 지불하지 않아. 구성과 돈의 흐름을 보지. 보란, 주방 뒤편에 있는 식재료 대장 가져와 봐.”
보란이 쭈뼛거리며 가져온 손때 묻은 대장을 건네받은 조나단이 에릭의 눈앞에 펼쳤다.
“첫째, 베이스다. 너희가 납품하는 원액은 정체불명의 수입 액체에 물을 섞어 끓이는 방식이지. 하지만 우리가 쓰는 육수는 정육점에서 버려지는 잡뼈와 채소 가게에서 상품성이 없어 버리는 밑동을 모아 8시간 이상 푹 우려낸 맑은 국물이다. 여기에 너희 연합의 원액이 단 한 방울이라도 섞였나? 원재료 분류상 이건 육수지, 원액 희석물이 아니다.”
그는 대장을 한 장 넘기며 말을 이었다.
“둘째, 조리 방식이다. 너희 원액 스튜는 아침에 한 솥 가득 끓여놓고 하루 종일 불 위에 얹어두어 시간이 갈수록 짜지고 탄내가 난다. 반면 우리의 ‘한 그릇’은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화구에 불을 당겨 작은 냄비에 1인분씩 육수를 덜어 끓인다. 그리고 배식 직전에 소금과 후추로 손님의 식성에 맞춰 최종 간을 본다. 주방 화구 사용법과 조리 동선 자체가 겹치지 않는다.”
조나단은 쉼 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셋째, 흡수빵이다. 너희가 주는 건 길드에서 헐값에 받아온 굳고 딱딱한 호밀빵이다. 국물에 넣으면 밀가루 죽처럼 뭉개져 숟가락으로 겨우 떠먹어야 하지. 우리가 납품하는 흡수빵은 국물을 머금어도 형태가 무너지지 않도록 질감을 조정한 특수 마른 빵이다. 손님들이 국물을 흘리지 않고 빵과 함께 한 입에 베어 물 수 있도록 만들었지. 이건 식사용 빵이 아니라, 국물을 빠르게 흡수시켜 식사 시간을 단축하는 재료다.”
에릭의 안색이 서서히 굳어갔다. 조나단은 멈추지 않았다.
“넷째, 피클 두 조각. 소금과 식초에 절여 아삭하게 씹히는 오이는 손님의 입안에 남은 기름기를 씻어낸다. 텁텁함을 털어내니 손님이 다음 숟가락을 드는 속도가 빨라지지. 다섯째, 운영 방식이다. 우리는 이 음식을 하루 종일 팔지 않는다. 전날 저녁에 예약을 한 손님들에게만 팔고, 길드 훈련반이 출발하기 전 30분 동안 집중적으로 배식한다. 대기 줄에서 마냥 기다리며 손님들의 출발을 지체시키는 네놈들의 영업 방식과는 시간대 자체가 다르다.”
“이게 어떻게 네 물 탄 원액 국물과 같은 상품이지?”
조나단이 묻자, 여관 홀의 공기가 달라졌다. 손님들 역시 단순한 맛의 차이를 넘어, 이 음식을 둘러싼 조리와 배식의 원칙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었다.
그때 여관의 나무문이 열리며 길드 서기 한셀이 안으로 들어섰다. 옆구리에 두꺼운 서류 가방을 낀 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는, 홀의 싸늘한 분위기를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조나단 씨, 부르셨다고 해서 오긴 했습니다만… 주방장님도 계시고, 무슨 일입니까?”
“잘 왔어, 한셀. 지난 닷새 동안 길드 훈련반의 아침 식사 시간과 관련된 공식 기록 좀 읽어줘.”
한셀은 머뭇거리며 에릭과 용병들을 살폈다. 하지만 이내 조나단의 확신에 찬 눈빛에 한숨을 내쉬고는 서류 가방에서 양피지 두루마리를 꺼냈다.
“어… 길드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지난 닷새 동안 아침 훈련생들의 소집 시간 지각률이 기존 대비 70퍼센트 이상 감소했습니다. 식사 후에 배탈이나 속 쓰림을 호소하는 보고도 거의 사라졌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한셀이 기록장의 숫자를 손톱으로 짚으며 말을 이었다.
“여관에서 배출되는 잔반의 양이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예전 원액 스튜를 내던 시절에는 딱딱해서 못 먹고 버려지던 빵 부스러기와 남은 국물이 매달 수십 리터에 달해 쓰레기 처리비가 추가로 발생했는데, 최근에는 빵 한 조각,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식탁이 비워집니다.”
그는 다른 서류를 한 장 더 펼쳐 보였다.
“그리고 이건 보란 여사님이 길드에 제출한 다음 주 예약 접수 대장입니다. 이미 훈련 2반과 3반의 인원 대부분이 다음 주 아침 식사로 ‘한 그릇’을 예약했습니다. 훈련장으로 가져갈 보온 통 다섯 개를 미리 준비해 달라는 개별 요청서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손님들의 한마디, 길드 기록, 다음 주를 꽉 채운 예약 장부가 한데 겹치자 에릭의 억지는 더 버티기 어려워졌다. 보란도 그제야 조나단이 만든 음식의 쓰임을 눈으로 확인했다.
에릭은 입술을 깨물며 침묵했다. 그러나 그는 쉽게 물러설 장사치가 아니었다. 그는 조나단의 서류를 비웃으며 보란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럴싸한 장부 놀음이오. 백번 양보해서 그게 스튜가 아니라고 칩시다. 그런데 말이오, 보란 여사. 이 여관이 앞으로 식재료 없이 장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소?”
에릭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 잘난 흡수빵을 굽는 제빵사 조합은 우리 연합과 오랜 독점 거래처요. 육수를 낼 잡뼈를 파는 정육점과 시든 채소를 대는 상인들 역시 전부 상인조합의 영향 아래 굴러가지. 내가 오늘 여기서 이 낡은 계약서를 찢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순간, 내일 아침 당신 여관 주방에는 밀가루 한 홉, 소금 한 꼬집도 들어오지 못할 거요. 주방 가득 거미줄이나 치며 굶어 죽고 싶소?”
위약금보다 더 직접적인 압박이었다. 식재료가 끊기면 여관은 며칠도 버티기 어려웠다.
보란의 얼굴이 다시 흙빛으로 변했다. 그녀의 두 손이 앞치마를 꽉 움켜잡은 채 바르르 떨렸다. 흰 계약서와 에릭의 차가운 눈동자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그녀의 모습은 벼랑 끝에 선 듯 아슬아슬했다.
조나단은 그런 보란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낮게 말했다.
“보란.”
그의 음성은 낮았으나 칼날처럼 예리했다.
“무서우면 저놈 원액을 도로 받아라. 대신 문 밖에 붙은 다음 주 예약 장부는 전부 네 손으로 찢어버려. 그리고 다시 저놈들이 주는 물 탄 원액 국물이나 손님들 앞에 던져 줘라. 모험가들이 아침마다 배를 쥐어짜며 네 가게를 욕하든, 다시는 발걸음을 하지 않든 상관없다면 말이다.”
그는 여관 안의 손님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었다.
“이 여관의 진짜 대장은 종이에 적힌 글씨가 아니다. 저기 앉아 있는 손님들의 입이고, 내일 아침을 예약한 이들의 예약 이름이다. 원액 통을 지키겠나, 아니면 네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을 지키겠나?”
“당연히 한 그릇이지! 아주머니, 내일 아침 내 몫도 무조건 남겨 줘요!”
구석에 있던 모험가가 탁자를 쾅 치며 소리쳤다.
“우리 파티 다섯 명도 예약금 여기 있소!”
“나도 은화 두 닢 먼저 내겠소!”
여기저기서 은전이 탁자 위로 떨어지며 짤랑거리는 맑은 쇳소리가 여관 홀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보란의 귓가를 두드렸고, 마침내 그녀의 흔들리던 어깨가 꼿꼿하게 펴졌다. 그녀는 한 걸음 다가와 조나단 앞의 테이블 위에 놓인 하얀 ‘1호 지점권 계약서’ 위로 손을 올렸다. 에릭의 턱밑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보란의 손이 서류 위에 얹히자, 조나단은 기다렸다는 듯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계약 조항들을 선명한 목소리로 낭독했다.
“제1조, ‘개척자의 여관’을 ‘퀘스트 전 한 그릇’의 공식 1호 지점으로 임명한다.”
“제2조, 메뉴명은 ‘퀘스트 전 한 그릇’으로 제한하며, 가격은 은화 2닢으로 고정한다. 원액 공급 연합의 어떠한 원자재도 조리 과정에 들이지 않는다.”
“제3조, 핵심 식자재인 ‘흡수빵’은 본점에서 전량 납품하며, 납품 대금은 매주 정산한다.”
“제4조, 예약금 제도를 실시한다. 예약금의 대리 보관 및 관리는 본점이 맡아 예약 불이행으로 인한 지점의 손실을 방지한다.”
“제5조, 본점이 규정한 위생 기준 및 조리 매뉴얼을 준수하지 않을 시, 지점 권한을 즉각 회수한다.”
조나단이 에릭을 차갑게 쏘아보며 덧붙였다.
“마지막 부칙. 원액 공급 연합이 제기한 위약금 금화 200닢에 대한 모든 법적 분쟁 비용은 본점이 전액 부담하며, 방어에 성공할 시 발생하는 성공 보수료는 향후 지점 수수료에서 차감한다.”
“와!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네요! 수수료 잔치가 벌어졌어요!”
페니가 양손을 마주치며 소리쳤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깃이 빳빳한 거위 펜을 꺼내 보란에게 쥐여주었다.
“자, 아주머니! 여기에 서명하시면 돼요! 1호 지점권 계약 수수료에 예약금 보관 대행비, 위약금 방어 보증까지! 이름만 들어도 은화들이 주머니 속에서 짤랑짤랑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아요!”
보란은 침을 꿀꺽 삼키며 펜대를 쥐었다. 그리고 서류 하단에 자신의 이름, ‘보란 아르웰’을 정성스럽게 썼다.
그녀의 마지막 서명이 맺어지는 순간, 길드 서기 한셀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앞으로 다가왔다.
“보란 여사님,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으니 길드 훈련 4반의 다음 주 아침 식사 15인분을 정식 예약하겠습니다. 선금은 여기 있습니다.”
한셀이 묵직한 가죽 주머니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은전 삼십 닢의 무게가 탁자를 눌렀다. 여관이 원액 연합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기 이름으로 받은 첫 매출이었다.
보란의 시선은 더 이상 구석에 쌓인 누런 원액 통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녀는 새로 바뀐 대장의 첫 줄에 ‘원액 매입비’ 대신 ‘훈련 4반 예약금 은화 30닢’을 적어 넣었다. 머릿속으로 내일 아침 배송받을 흡수빵 100개의 수량과 늘어난 보온 용기 대여비를 바쁘게 계산하기 시작했다.
에릭의 눈동자가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위약금으로 여관을 통째로 집어삼키려던 그의 판이, 수많은 모험가들과 길드 서기가 지켜보는 눈앞에서 휴지 조각이 되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용병들을 부려 탁자를 엎어버리고 싶었으나, 길드의 공식 서기인 한셀이 버티고 서 있는 이상 섣불리 무력을 쓸 수는 없었다. 길드와의 전면전은 연합으로서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좋소, 보란 여사. 대단한 뒷배를 구하셨소.”
에릭이 이를 악문 채 조나단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잊지 마시오. 그 빵과 잡뼈, 시든 채소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는 않을 터. 상인조합이 당신 여관을 어떻게 말려 죽이는지 똑똑히 지켜보겠소.”
그는 ‘상인조합’이라는 단어에 묵직한 힘을 실어 경고했다. 그는 용병들에게 턱짓을 하고 거칠게 여관을 나섰다. 문이 쾅 닫혔다.
여관 안에 잠시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이내 모험가들의 우렁찬 환호성과 박수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보란은 주방 앞 의자에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원액을 치우니 이제 식자재 차례인가.”
조나단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이미 다음 분쟁의 전장을 내다보고 있었다. 원액 연합의 독점 고리는 끊어냈지만, 상인조합을 통한 식재료 공급망 차단이라는 더 크고 근본적인 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걱정 마세요!” 페니가 그의 옆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며 방방 뛰었다. “지점 수수료도 확보했으니, 이제 새로운 공급처 개척 비용을 청구할 명분이 생겼잖아요! 저쪽 상인들이 건드릴 수 없는 우리만의 납품 루트를 뚫어야죠. 벌써 견적서에 올릴 숫자 조율에 가슴이 두근거려요. 혹시 성벽 너머 고블린 빈민가 쪽에 헐값에 버려지거나 방치되는 뼈다귀나 채소 찌꺼기 같은 건 없나? 상인조합 놈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그 물건들을 쓸어가면 식재료 원가는 기존의 절반 이하로 떨어질 텐데요!”
페니의 당찬 제안에 조나단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날 밤, 개척자의 여관 앞 게시판에는 다음 날 아침 식사를 예약하려는 훈련생과 모험가들의 이름표가 빼곡하게 걸렸다. 보란은 구석에 박아둔 원액 통을 치우고, 늘어난 예약 명단을 살피며 밤늦도록 등불 아래 장부를 넘겼다. 첫 번째 지점은 그렇게, 썩어 문드러진 옛 계약서의 잔해 위에 굳건히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