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cm의 세계
이 체육복이 정말 나한테 맞았을까?
옷장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중학교 체육복. 접어서 넣어뒀던 게 아니라 구겨져 있던 걸 보면, 언제 여기 처박아둔 건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펼쳐보니 생각보다 작다. 아니, 정말 작다. 이게 내 옷이었다고?
나는 잠시 체육복을 들고 거울 앞에 섰다. 가슴에 대보니 웃음이 났다. 지금의 내 몸에는 턱도 없이 작다.
그때는 이게 맞았는데.
체육 시간이었다. 4월의 따스한 바람이 운동장을 스쳐 지나가고, 우리는 800미터 달리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중학교 1학년. 열세 살. 나는 150센티미터였다.
"출발!"
트랙을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달렸다. 친구들과 나란히, 봄바람을 가르며.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뛸 때마다 가슴 부분이... 흔들렸다. 아주 조금.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나는 느꼈다.
팔로 가슴을 살짝 감싸며 달렸다. 달리기를 싫어한 적은 없었는데, 그날은 빨리 끝나기만 바랐다.
"야, 너 왜 그렇게 달려?"
지은이가 골인 지점에서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이 흔들려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지은이는 아직 평평했다. 다른 애들도 다 그랬다. 나만 달랐다.
"그냥."
겨우 한마디를 내뱉고 물을 마셨다. 목이 타는 것보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더 괴로웠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거울 앞에 섰다.
체육복을 벗었다. 그리고 속옷까지.
거울 속의 나는 낯설었다. 분명 내 몸인데, 조금 다른 사람 같았다. 평평했던 가슴이 조금 튀어나와 있었다. 작은 언덕 같은 것이 두 개. 만져보니 말랑했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신경 쓰였다.
"이게... 가슴이 나오는 건가?"
혼잣말이었다.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무서웠다. 아니, 정확히는 모르겠다. 무서운 건지, 신기한 건지.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변화하는 내 몸이 낯설었다. 내가 원한 적도 없는데, 몸은 멋대로 자라고 있었다.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오후 햇살이 내 몸을 비췄다.
거실에서 엄마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황급히 옷을 입었다.
"엄마."
저녁을 먹다가 작게 불렀다. 엄마는 고개를 들었다.
"응?"
"나... 속옷 사야 할 것 같아."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빠가 있는 자리에서는 절대 못 할 말이었다. 다행히 아빠는 야근이었다. 엄마는 잠시 나를 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말에 같이 가자."
담담했다. 놀라지도, 호들갑 떨지도 않았다. 그게 다행이었다. 만약 엄마가 "벌써?"라든가 "우리 딸이 이제 다 컸네"라는 말을 했다면, 나는 아마 밥을 못 먹었을 것이다.
토요일 오후, 우리는 아파트 상가에 있는 속옷 가게에 갔다.
가게는 생각보다 밝았다. 형광등이 아니라 따뜻한 조명이었다. 벽에는 여러 색깔의, 여러 디자인의 속옷들이 걸려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피팅룸이 보였다.
"어머, 어서 오세요."
직원이 우리를 반겼다.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나는 엄마 뒤에 숨듯 섰다.
"저, 애가 이제 속옷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엄마가 말했다. 직원은 나를 훑어보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키가 많이 컸네요. 중학생이죠?"
"네..."
"그럼 이쪽으로 와볼래요? 사이즈 좀 재볼게요."
피팅룸 앞으로 갔다. 커튼을 치고 들어가는데, 심장이 뛰었다. 직원이 줄자를 들고 들어왔다.
"윗가슴, 그리고 아래가슴 사이즈를 재야 해요. 편하게 서 있어요."
줄자가 내 등과 가슴을 감쌌다. 차가웠다. 직원의 손길은 능숙했지만, 나는 온몸이 굳어 있었다.
"70A네요. 아직 작은 편이니까, 얇은 걸로 드릴게요."
직원은 밖으로 나가서 몇 개를 가져왔다. 흰색, 베이지색. 레이스도 없고 심플한 디자인들이었다.
"하나씩 입어보고, 편한 걸로 고르세요."
커튼이 닫혔다. 나는 혼자 남았다.
브라를 처음 입어봤다. 어떻게 입는 건지 잘 몰라서 헤맸다. 고리를 뒤에서 채우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인 줄 몰랐다. 두 번째 시도 끝에 겨우 채웠다.
거울을 봤다. 어색했다. 브라 끈이 어깨에 닿는 느낌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뭔가... 안정적인 느낌도 있었다. 가슴이 흔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어때?"
커튼 너머로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은 것 같아."
그렇게 대답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다.
밖으로 나오니 직원이 말했다.
"앞으로 더 클 거예요. 1년 후에 또 오셔야 할 거예요."
더 큰다고?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지금도 충분히 당황스러운데, 더 크다고?
그때는 정말 몰랐다. 그게 예언이 될 줄은.
키도 자랐다.
4월에 줄을 설 때는 앞에서 세 번째였다. 9월이 되니 중간쯤으로 밀렸다. 2학년 3월, 키를 재는 날. 165센티미터.
"너 요즘 엄청 크는 것 같아."
지은이가 말했다. 나는 애매하게 웃었다.
크는 게 나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만 빨리 크는 것 같아서, 혼자 튀는 것 같아서, 왠지 모를 불안함이 있었다.
거울 앞에서 나를 볼 때마다, 어제와 조금씩 달라진 것 같았다. 다리가 길어진 것 같고, 얼굴이 성숙해진 것 같고, 가슴도 조금 더 나온 것 같았다.
내 몸인데,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왜 이렇게 빨리 자라는 걸까? 친구들은 왜 안 그런 걸까?'
대답은 없었다. 다만 밤의 고요함만이 나를 감쌌다.
지금, 스무 살의 나는 그 체육복을 다시 접는다. 조심스럽게. 이번에는 구겨 넣지 않고, 정성스럽게 개어서 옷장 깊숙이 넣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게 시작일 뿐이라는 걸. 앞으로 내 몸이 얼마나 더 변할지, 그리고 그 변화가 나를 얼마나 혼란스럽게 만들지.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때의 150센티미터 나도, 나였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