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살의 시선
"몸은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패션과 인체 드로잉 수업. 교수님은 스크린에 띄운 다양한 체형의 인체 모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마른 사람, 통통한 사람. 모두 달랐고, 모두 아름다웠다.
"패션은 몸을 숨기는 게 아니라, 몸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을 사랑하세요. 그게 출발점입니다."
나는 노트에 그 문장을 적었다.
'몸을 사랑하라.'
언제부터 내 몸을 사랑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 언제부터 내 몸을 두려워했던 걸까?
문득, 중학교 때의 나, 고등학교 때의 나가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170센티미터다. D컵이다.
숫자로만 보면 고등학교 2학년 때와 똑같다. 하지만 내가 그 숫자를 대하는 마음은 완전히 다르다.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봐도, 더 이상 놀라지 않는다. 옷장에서 옷을 꺼낼 때, 사이즈를 여러 번 확인하지 않는다. 오버사이즈 셔츠를 입을 때는 당당하고, 몸에 맞는 옷을 입을 때도 편안하다.
키가 큰 게 장점이 된 순간들이 많다.
런웨이 수업에서, 자신 있게 걸을 수 있었다. "키가 커서 비율이 좋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옷을 직접 만들 때도, 내 몸에 맞춰 디자인하는 게 즐거웠다.
패션을 전공하면서, 나는 몸과 옷의 관계를 이해하게 됐다. 옷은 몸을 가리는 게 아니었다. 몸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표현하려면, 먼저 내 몸을 알아야 했다.
내 몸은 170센티미터다. 다리가 길고, 어깨가 좁고, 가슴이 크다. 이게 나다. 숨기려 했던 것들이, 이제는 자연스러운 나의 일부가 됐다.
작년 겨울이었다. 속옷을 사러 혼자 그 가게에 갔다.
엄마와 함께 가던 곳.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갔던 바로 그 가게.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였다.
"어서 오세요."
똑같은 직원이 있었다. 그녀도 나를 알아봤다.
"어머, 키가 정말 많이 컸네요. 대학생이에요?"
"네, 패션과 다니고 있어요."
나는 밝게 대답했다. 예전처럼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오늘은 혼자 오셨네요?"
"네. 이제는 혼자서도 괜찮아요."
직원은 미소를 지었다.
피팅룸에 들어가 사이즈를 쟀다. 여전히 70D였다.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놀라지 않았다.
"70D예요. 예전이랑 똑같네요."
직원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아요."
그녀는 여러 디자인을 가져왔다. 레이스가 달린 것, 심플한 것, 스포츠형. 나는 천천히 하나씩 살펴봤다.
"예쁜 걸로 주세요."
중학교 때는 '편한 걸로요'라고 말했다. 고등학교 때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예쁜 걸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예쁜 속옷을 입는 건, 나를 위한 것이었다. 누가 보든 안 보든, 나는 나를 위해 예쁜 걸 입고 싶었다.
계산을 하며, 직원이 물었다.
"학교생활 재미있어요?"
"네, 정말 재미있어요. 배우는 게 많아요."
"잘됐네요. 그때 처음 오셨을 때는 정말 수줍어하셨는데, 많이 달라지셨어요."
나는 웃었다.
"그때는... 제가 변화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괜찮아요."
"그게 성장이에요."
직원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요즘 친구들과 종종 얘기한다. 각자의 몸 이야기.
"나는 키가 작아서 항상 불편해. 옷도 다 기장 수선해야 하고."
서연이가 말했다. 160센티미터인 그녀는 패션과에서 가장 작은 편이었다.
"나는 가슴이 없어서 여름에 탱크톱 입기 부끄러워."
지혜가 덧붙였다.
"나는 어깨가 넓어서 블라우스 입으면 답답하더라."
민서도 한마디 했다.
모두 각자의 고민이 있었다. 완벽한 몸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너는 좋겠다.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서연이가 내게 말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되게 힘들었어. 시선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쳐다봐서."
"아, 그랬구나..."
"지금은 괜찮아. 이게 나니까. 너도 너만의 장점이 있잖아. 작은 키도 예쁘고, 너한테 잘 어울려."
서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다 다르지."
"응, 다른 게 자연스러운 거야."
그 대화 이후, 나는 더 자유로워졌다. 나의 몸, 친구들의 몸, 모두가 다르고, 모두가 괜찮다는 걸 확신하게 됐다.
지난주, 옷장 정리를 하다가 중학교 체육복을 발견했다.
너무 작아서 웃음이 났다. 이게 정말 나한테 맞았을까? 나는 체육복을 들고 거울 앞에 섰다. 가슴에 대보니 턱도 없이 작았다.
잠시 체육복을 내려놓고, 거울을 봤다.
이번에는 옷을 벗지 않았다. 입은 채로, 나를 봤다. 오버사이즈 후드티에 스웨트팬츠. 편안한 차림.
거울 속의 나는 170센티미터의 스무 살이었다. 더 이상 낯설지 않았다. 이게 나였다.
문득, 중학교 1학년 때 거울을 봤던 순간이 떠올랐다. 옷을 벗고, 변화하는 내 몸을 보며, 두려워하던 그 순간.
'그때의 나야, 안녕.'
마음속으로 인사했다.
'너도 나였어. 당황스러웠을 거야. 무서웠을 거야. 괜찮아. 나도 그랬어.'
그리고 고등학교 때의 나에게도.
'너도 나였어. 혼란스러웠을 거야. 시선이 무서웠을 거야. 괜찮아. 지금은 괜찮아.'
눈물이 살짝 맺혔다. 슬픈 게 아니었다. 그냥, 그때의 나가 안쓰러웠다. 그리고 지금의 나가 자랑스러웠다.
이제 나는 안다.
몸은 변한다. 당연한 일이다. 중학교 때의 150센티미터는 고등학교 때 170센티미터가 됐고, 평평했던 가슴은 D컵이 됐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그게 바로 나다. 안에 있는 나. 관찰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나. 키가 크든 작든, 가슴이 크든 작든, 나는 항상 나였다.
과거의 나를 부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의 나도 나였으니까. 변화하는 과정도 나의 일부였으니까.
오늘 오후, 캠퍼스를 걸으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내 몸은 변할 것이다. 스무 살의 몸이 서른 살이 되고, 마흔 살이 될 것이다. 또 다른 변화들이 올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다.
변화도 나의 일부니까. 변하지 않는 나도 그 안에 있으니까.
은행나무 길을 걷는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낙엽을 밟는 소리가 경쾌하다.
누군가 지나가며 나를 본다. 나는 자연스럽게 걷는다. 어깨를 웅크리지 않는다. 카디건으로 몸을 가리지 않는다.
이게 나니까.
집에 와서, 체육복을 다시 꺼낸다. 조심스럽게 접는다. 이번에는 구겨 넣지 않고, 정성스럽게 개어서 옷장 깊숙이 넣는다.
작별은 아니다. 기억이다.
150센티미터였던 나, 170센티미터가 된 나, 그리고 앞으로의 나. 모두 이어져 있다.
정말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에필로그
체육복은 여전히 옷장 깊숙이 있다.
나는 가끔 그걸 꺼내 본다.
작아진 옷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
변화는 두려운 게 아니었다.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지금의 나도 언젠가는 과거가 될 것이다.
그리고 미래의 나는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생각할 것이다.
"그때의 나도, 나였어."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