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47화. 사망 판정 실습과 사망 취소 요청자
제목: 46화. 사망 판정 실습
철컥, 소리와 함께 대기실 너머의 공간이 열렸다.
두꺼운 철문이 회전하며 만들어 낸 틈새로 차가운 한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소독약 냄새와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지극히 불쾌한 공기였다.
“……팀장님?”
내 옷자락을 쥔 한지율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깨어나긴 했지만 상태가 온전치 못했다. 04번과의 공명이 남긴 여파 때문인지, 녀석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허공을 배회하다가 겨우 내 얼굴에 머물렀다.
“나…… 졸려요. 선생님이 이제 집에 가도 된다고 했는데.”
“지율아.”
내가 나직하게 부르자, 한지율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이마를 짚었다.
“아, 앗……. 죄송해요, 팀장님. 제가 무슨 소릴 한 거지? 갑자기 머리가 너무 지글거려서…….”
“괜찮아. 천천히 걸어.”
윤서하가 한지율의 다른 쪽 어깨를 부축했다. 서하의 시선이 내 얼굴에 머물렀다. 걱정과 의문이 가득한 눈빛이었지만, 그녀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질문보다 호흡을 맞추는 게 먼저였다.
새로 열린 문을 통과하자, 시야가 기괴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윤서하가 낮게 신음했다.
제2 실습실은 공간 서너 개를 강제로 찢어발겨 이어 붙인 꼴이었다.
바닥은 낡은 헌터고 보건실의 나무 마룻바닥이었다. 군데군데 녹색 천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 커튼 뒤에 놓인 것은 보건실용 침대가 아니었다. 은색으로 번뜩이는 차가운 철제 검안대(檢案臺). 장례식장 지하에서나 볼 법한 시신 안치용 작업대였다.
벽면에는 헌터협회에서 사용하는 최첨단 사망판정실의 장비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다. 붉은 빛을 내뿜는 헌터 태그 판독기와 오래된 브라운관 사양의 심전도 모니터가 어울리지 않게 나란히 배치되어 작동음을 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규칙적이고도 느린 기계음이 고요한 실습실 내부를 채웠다.
탁자 위에는 얼룩진 출석부와 함께 ‘사망판정서’라고 인쇄된 서류 더미가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치지직.
천장에 달린 녹슨 방송용 스피커가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실습을 시작합니다.]
[본 실습의 목적은 ‘사망 판정’입니다. 대상자의 잔향 기록을 분석하여 정확한 상태를 분류하십시오.]
[잘못된 판정은 기록의 영구 손실을 야기합니다. 실습생 여러분은 신중을 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망 판정…….”
윤서하가 출석부 옆에 놓인 태그 판독기를 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단순히 몬스터를 사냥하는 게 아니네요. 시스템이 지금…… 살아 있는 기록과 죽은 기록을 억지로 짜맞추려 하고 있어요.”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 방은 사람을 보지 않았다. 기록만 봤다. 산 사람을 죽은 기록에 밀어 넣고, 죽은 사람의 이름을 산 몸 위에 덧칠하려는 냄새가 났다.
나 역시 그 왜곡의 중심에 서 있었다. KDY-00의 권한을 억지로 일부 끌어다 쓴 대가는 생각보다 혹독했다.
“서하 씨, 일단 저 검안대 주변부터 수색해 보죠. 기록을 건드릴 만한 단서가 있을 겁니다.”
“…….”
“서하 씨?”
윤서하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짙은 혼란이 서려 있었다.
“강도윤 씨?”
“예. 왜 그러십니까?”
“……방금 제 말 안 들렸어요? 제가 세 번이나 불렀는데.”
“아.”
정말로 들리지 않았다.
뇌리에 낀 짙은 안개 속에서 내 이름이라는 단어가 아주 먼 나라의 언어처럼 겉돌았다. 마치 남의 이름을 듣는 것 같은 기묘한 위화감.
문득 내 손목에 찬 헌터 태그로 시선이 갔다.
액정 화면이 지직거리며 깨지더니, 내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문자가 흘러갔다.
[사용자: 공백 증인 (BLANK WITNESS)]
내 이름이 조금씩 밀려나고 있었다. 권한을 쓸수록 나는 강도윤이 아니라 이 방의 물건이 되어 갔다.
마치 본사 파견직 사원의 이름표가 어느 날 갑자기 ‘익명의 임시 용역 1’로 바뀌어 버린 듯한 불길함이었다. 내 존재 자체가 미결재 문서 구석의 낙서처럼 흐릿해지고 있었다.
“강도윤 씨, 태그가 왜 이래요?”
윤서하가 내 손목을 와락 낚아챘다. 차갑게 식어 있는 그녀의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이름이 왜 안 떠요? 이거…… 시스템 침식 때문이죠? 아까 그 권한인가 하는 걸 써서 그런 거잖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원칙과 규정을 칼같이 지키던 에프엠(FM) 헌터가, 지금은 이성보다 감정의 동요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냥 시스템 에러 같은 겁니다. 회사에서도 전산 오류로 사원 정보가 잠깐 안 보일 때가 있잖습니까.”
“지금 농담이 나와요?”
윤서하의 눈이 매섭게 치켜올려졌다. 하지만 그 기세 뒤에 숨겨진 공포를 나는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이 공간의 일부가 되어 영영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었다.
“누가 자고 있었는데…….”
그때, 벽에 기대어 있던 한지율이 중얼거렸다.
녀석은 초점 없는 눈으로 은색 검안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린애였어요. 나랑 비슷한…… 아니, 나보다 조금 더 컸나? 아무튼 누워서 자고 있었는데, 숨을 쉬고 있었거든요. 분명히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는데.”
한지율이 제 머리를 쥐어뜯듯 움켜잡았다.
“그런데 안경 쓴 선생님이…… 반가온 선생님이 그냥 빨간 도장을 찍어 버렸어요. ‘이현우는 이제 결석이야’라고 하면서…….”
이현우.
이미 들은 이름이었다. 집 앞 검은 우산 밑에서 죽어 있던 남자. 실습 B반 출석부가 몇 번이나 불렀던 이름. 그런데도 그 이름은 들을 때마다 처음 칼에 베이는 것처럼 낯설었다.
“지율아, 그게 무슨 소리야? 이현우가 누구지?”
윤서하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한지율은 멍하니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네? 제가 방금 뭐라고 했어요? 이현우요? 그게 누군데요?”
방금 자기가 뱉은 말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04번의 기억 편린이 한지율의 의식 표면으로 불쑥 솟아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은 것이 분명했다.
7년 전의 사망 판정 실습.
살아 있던 학생이 사망 처리가 되어 사라졌다.
나는 홀린 듯 검안대 앞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스테인리스 스틸 표면 위에 낡고 녹슨 헌터 태그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길게 늘어진 심전도 기록지가 어지럽게 엉켜 있었다.
침을 삼키며, 태그 위에 손을 올렸다.
[고유 능력: 잔향청취(殘響聽取)가 활성화됩니다.]
이명이 머릿속을 날카롭게 찔렀다. 눈앞의 공간이 왜곡되며 회색빛 잔향의 세계가 펼쳐졌다.
7년 전의 이 공간이었다.
지금처럼 기괴하게 섞인 보건실과 검안실. 그 한가운데의 철제 침대에 열서너 살 남짓해 보이는 소년이 누워 있었다. 소년의 가슴은 미약하게나마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살아 있었다.
심전도 모니터 역시 미약하지만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생명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반가온 선생님.”
검은 방호복을 입은 연구원들이 누워 있는 소년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 사이로 젊은 시절의 반가온이 서 있었다. 지금보다 훨씬 고뇌에 찬, 지친 얼굴이었다.
“기록 분리 도중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이대로 두면 시스템 전체가 붕괴합니다. 하나를 지워야 합니다.”
“……꼭 이 아이여야 합니까?”
반가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현우 군의 기록은 이미 04번의 공명 잔향에 잠식당했습니다. 판정을 내리지 않으면 04번마저 소멸합니다. 한 명은 남겨야…… 나중에 다시 합칠 기회라도 생깁니다.”
반가온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끝이 하얗게 피가 안 통할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는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말려야 했다. 적어도 그 얼굴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반가온은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뒤편, 어둠 속에서 조용히 서 있는 실루엣이 있었기 때문이다.
검은 우산을 든 남자.
그는 젖지 않은 검은 우산을 가볍게 바닥에 툭, 툭 치며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연구원 중 한 명이 기계적으로 서류 위에 빨간 도장을 찍었다.
쾅—!
[사망 (DECEASED)]
그 순간, 소년의 심전도 모니터가 거친 소음을 내며 일직선으로 뻗었다. 소년이 죽어서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소년의 ‘기록’이 강제로 사망 처리되어 시스템에서 말소된 순간이었다.
서류 한구석에는 검은 우산의 끝부분이 닿았던 듯, 타들어 간 듯한 마른 동그라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자국 근처의 글씨는 전부 사망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허억!
숨을 들이켜며 잔향에서 깨어났다.
등 뒤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동시에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왔다. 침식률이 요동치고 있었다.
[경고: 태그 침식률 71%.]
[시스템이 강도윤 님의 신원을 재평가합니다.]
[판정 대상: 강도윤 (공백 증인 KDY-00)]
[상태 분석: 생체 신호 불완전, 시스템 권한 과다 보유. 생존 기록의 누락 확인.]
“……이런 미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삐이이이이이—!
실습실 안의 심전도 모니터가 일제히 거친 평탄음을 내기 시작했다. 빨간 경고등이 사방에서 번쩍였다.
[경고: 대상자 ‘공백 증인’의 사망 판정을 시작합니다.]
[사망 판정서에 서명을 완료하십시오.]
공간 전체가 나를 압박해 왔다. 차가운 한기가 내 발목을 타고 올라와 심장으로 향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그런데 이 방은 나를 이미 죽은 쪽 장부에 올리려 했다. 7년 전 이현우처럼.
“강도윤 씨! 몸이…… 왜 이래요!”
윤서하가 소리쳤다.
내 손끝이 조금씩 흐릿해지며 회색 먼지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기록의 소멸 과정이었다.
“비켜요! 내가…… 내가 막을 테니까!”
윤서하가 다급하게 검안대 위의 태그 판독기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헌터 태그를 판독기에 강제로 밀어 넣으며 시스템 권한을 해킹하려 시도했다.
[권한 거부. 현장 실습생의 개입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허용해, 이 빌어먹을 시스템 새끼야!”
서하가 평소답지 않게 거친 욕설을 내뱉었다.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협회 규정 제3조! 현장 판정관은 비정상적인 사망 판정에 대해 임시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있다! 이 사람 살아 있어! 내가 보고 있고, 내가 보증해! 사망 처리는 무효라고!”
그녀가 내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 말이 시스템을 뚫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녀의 손은 선명했다. 그 온기 때문에 내가 아직 여기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살아 있다고 바득바득 우기는 건 서류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기안서 반려보다 귀찮은 게 소명 자료 제출이고, 시스템은 애초에 내 진짜 이름을 ‘공백’으로 인식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완전히 살리는 게 아니라…….’
머리를 굴렸다.
완벽한 답을 찾다가는 시간 초과로 퇴사, 아니 사망이다. 이럴 때 직장인이 꺼내는 최후의 기술이 있다. 보류.
승인하기도 무섭고 반려하기도 귀찮을 때 쓰는 마법의 단어.
나는 남은 KDY-00의 시스템 권한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잔향청취로 읽어낸 7년 전의 왜곡된 흐름을 억지로 비틀어 쥐었다.
[권한 발동: KDY-00]
[판정 명령을 수정합니다.]
[수정 사항: ‘사망(DECEASED)’ -> ‘판정 보류(PENDING)’]
‘지금 당장 결론 내지 마. 검토할 시간이 필요하잖아?’
시스템을 향해 억지 청구서를 밀어 넣었다.
사망도 아니고, 생존도 아니다. 그냥 서류철 깊은 곳에 넣어두고 다음 담당자에게 인수인계해 버리는 임시 보류 상태.
지이잉—.
내 손목의 태그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삐걱거리며 멈추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붉은 경고등의 점멸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더니, 마침내 주황색 불빛으로 고정되었다.
[알림: 대상자 ‘공백 증인 KDY-00’의 상태가 ‘판정 보류’로 임시 등록되었습니다.]
[최종 판정은 차후 세션으로 이월됩니다.]
숨이 터져 나왔다.
흐릿해지던 내 손발의 윤곽이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았다.
“하아…… 하아…….”
윤서하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가쁜 숨결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살아 있는 거 맞죠?”
“예. 아주 질기게 살아 있습니다.”
나는 안도감을 감추며 짐짓 덤덤하게 대답했다.
보류. 직장 생활에서 배운 기술이 사람 목숨을 붙잡는 날도 오는구나. 인생 참 더럽게 실용적이다.
그때였다.
삐이이이—, 소리가 멎은 심전도 모니터의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흔들렸다.
녹색 광선으로 이루어진 화면 위에, 7년 전 이 교실에서 실습을 치렀던 학생들의 명단이 어지럽게 나열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이름 옆에는 붉은 글씨로 ‘사망’ 혹은 ‘소멸’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명.
명단의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이름 옆에서, 기묘한 문구가 붉은빛을 내뿜으며 깜빡이고 있었다.
[이현우 (Lee Hyun-woo) - 사망]
[└ 시스템 메시지: 사망 판정 취소 요청 접수됨.]
[└ 신청자: 04]
그 깜빡임은 7년 동안 검안대 밑에 깔려 있던 심장이 이제 와서라도 뛰겠다고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심전도 화면을 바라보며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 기이한 실습실의 다음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제목: 47화. 사망 취소 요청자
무거운 철문이 삐걱거리는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제2 실습실의 경계가 무너지며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던 짙은 안개가 한 꺼풀 벗겨졌다. 하지만 다음 공간으로 발을 들이기도 전에, 나는 내 왼쪽 손목에 찬 헌터 태그에서 흘러나오는 기묘한 박동을 느꼈다.
심장이 뛰는 궤적과 전혀 맞지 않는, 엇박자의 진동. 태그를 들어 올려 홀로그램 화면을 띄운 순간 미간이 좁혀졌다.
[상태: 판정 보류]
[남은 시간: 01:47:52]
어떻게든 사망 판정을 밀어내 보겠다고 꼼수를 부렸는데, 시스템이 내놓은 최종 타협안은 고작 이것이었다. 생존 확정이 아닌 '보류'.
내 생명력에 아주 친절하게도 유통기한이 표기되어 있었다. 계약 만료를 앞둔 임시직의 심정이 이런 걸까. 타이머가 0이 되는 순간, 시스템은 나를 다시 '사망자'로 분류해 처리할 터였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회색지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저려 왔다.
"강도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돌아보니 윤서하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끝은 내 헌터 재킷 자락을 찢어발길 기세로 움켜쥐고 있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예, 팀장님."
"방금 그거, 다시는 하지 마."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KDY-00 권한 섞어 쓴 거요? 그래도 덕분에 사망 확정은 피하지 않았습니까."
"면한 게 아냐."
윤서하의 눈동자가 깊게 일렁였다. 평소의 냉철하고 깐깐한 협회 사무관의 가면 뒤로, 억눌러 두었던 감정이 얇은 막을 찢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 방금 네 이름을 지우고 시스템의 공백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거야. 만약 다음에도 그 짓을 했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강도윤'이라는 존재 자체가 시스템 규칙 내에서 완전히 말소되면, 나는 널 뭐라고 불러야 해? KDY-00? 그 무기물 같은 임시 코드가 네 이름이 되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으라고?"
그건 규정 위반 경고가 아니었다. 눈앞의 사람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에이, 그래도 KDY-00이면 군대 군번이나 회사 사번 같아서 나름 정겹지 않습니까. 부르기도 편하고……."
"농담하지 마!"
윤서하가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 서슬 퍼런 기세에 한지율마저 깜짝 놀라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장난칠 상황 아니야. 앞으로 자료 조사나 시스템 대응은 실무자인 내가 해. 넌 그 위험천만한 권한에 손대지 마. 내 눈앞에서 먼지처럼 사라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란 말이야."
"……예. 주의하겠습니다."
결국 내가 꼬리를 내렸다. 어쨌거나 나를 걱정해서 하는 소리라는 것쯤은 안다. 그녀의 손끝 온기 때문에 내가 아직 완전히 보류된 망자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리가 발을 디딘 다음 공간은 기묘할 정도로 가라앉은 서늘함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방을 채운 것은 초록색 페인트가 벗겨진 철제 캐비닛들과 삐걱거리는 목제 책상들, 그리고 불투명한 유리가 끼워진 접수 창구였다. 오래된 헌터고 행정실 같기도 하고, 구청의 낡은 민원실 같기도 하고, 장례식장 서류 보관소 같기도 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은 숨이 넘어가는 짐승처럼 찌르르 소리를 내며 깜빡였다.
코끝을 찌르는 것은 곰팡이 냄새와 오래되어 부스러지는 종이의 건조한 향이었다.
"여긴…… 꼭 시청 지하 서고 같은데요."
한지율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중얼거렸다.
"정확히는 '사망 취소 접수실'이나 '이의신청 보관실' 같은 곳이겠지."
나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답했다. 한국의 행정은 죽어서 던전이 되어서도 멈추지 않는 모양이다. 죽음마저 서류를 떼고 이의신청을 해야 번복된다니.
그때, 한지율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묘해졌다.
지율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행정실 안쪽 안락의자를 지나 창구 뒤편 캐비닛으로 걸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려 움직이는 태엽 인형 같았다.
"지율아?"
윤서하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가려 했지만, 나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한지율의 눈동자 가장자리에 아주 미세한 회색 잔향이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04번의 기억 파편이 그녀의 무의식을 흔들고 있었다.
한지율은 캐비닛의 두 번째 서랍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멍하니 손을 뻗어 손잡이를 툭툭 건드렸다.
"여기……."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아까 실습실에서 들었던, 낮고 어린아이 같은 말투가 흘러나왔다.
"여기에 숨겼어. 가온 선생님이 빨간 도장을 찍어서, 아무도 못 보게…… 깊은 곳에 넣어 뒀어."
툭, 손을 떨구며 한지율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 눈을 세차게 깜빡였다.
"어? 선배, 팀장님. 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죠? 또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서……."
"아냐, 잘했어. 네 덕분에 번거로운 수색 작업을 몇 단계는 건너뛰었으니까."
나는 지율이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진정시킨 뒤, 캐비닛 앞으로 다가갔다.
두 번째 서랍의 열쇠구멍은 이미 녹이 슬어 뭉개진 지 오래였다. 굳이 열쇠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나는 가죽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차가운 금속 손잡이를 잡았다.
'잔향청취.'
속으로 나직하게 읊조리는 순간, 내 시야의 채도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회색빛으로 물든 과거의 행정실.
그곳에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한 명은 책상 밑에 웅크려 앉아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작은 소녀, 04번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얼굴 여기저기에 흙먼지와 피멍이 가득한 채, 소녀의 손을 꼭 쥐고 있는 남학생이 있었다. 이현우였다.
"괜찮아. 내가 대신 써 줄게. 네가 부르는 대로 적으면 돼. 이걸 내면 우린 나갈 수 있어."
이현우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이상하리만치 단단했다. 그는 책상 위에 놓인 누런 종이에 거친 필체로 글을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망 판정 이의신청서]
그의 손끝에서 잉크가 번지며 사그라지는 조각들이 내 뇌리에 문장으로 박혔다.
'……살아 있음.'
'……오판정.'
'……문을 열 수 있는 아이.'
단서가 하나씩 맞춰졌다. 이현우는 단순히 사고에 휘말린 학생이 아니었다. 그는 던전의 장막을 열 수 있는 특수한 힘을 가진 04번을 구해서, 이 끔찍한 실습실 밖으로 탈출시키려 했던 조력자였다.
그가 서류 하단에 무언가를 마저 적으려던 찰나였다.
쿠구구구―!
천장이 무너질 듯한 한기가 공간을 지배했다.
책상 너머에서 검은 우산을 든 남자의 실루엣이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실내였건만, 그가 든 검은 우산의 끝자락에서는 기이한 압박감이 뿜어져 나와 이현우의 어깨를 짓눌렀다.
스윽.
젖지 않은 검은 우산의 뾰족한 끝이 책상 위의 신청서 정중앙을 꾹 눌렀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이현우가 적어 내려가던 '살아 있음'이라는 명확한 글씨들이 마치 불에 타듯 뒤틀리더니, 서서히 '사망 확정'이라는 단어로 변질되어 갔다. 우산 끝이 닿은 문장은 현실 쪽으로 번졌다. 기록이 바뀌자 사건도 그쪽으로 끌려가는 것 같았다.
"안 돼……!"
이현우가 비명을 지르며 우산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의 손은 허공을 갈랐다.
그때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반가온이 뛰어 들어왔다. 그의 숨은 가쁘게 헐떡이고 있었고, 안색은 흙빛이었다.
"그만두십시오!"
반가온이 외쳤지만 이미 상황은 끝난 뒤였다. 검은 우산의 실루엣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현우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반가온은 절망적인 얼굴로 변질되어 가는 신청서를 내려다보았다. 그에게는 검은 우산을 막아설 힘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의 양심을 버리지 못했다.
"……미안하다. 미안해."
반가온은 신음 같은 흐느낌을 뱉으며 품에서 붉은 직인을 꺼냈다. 그리고 이미 '사망'으로 조작되어 가는 서류 위에, 원래 찍어야 할 '반려(Reject)' 도장 대신, 떨리는 손으로 '보류(Pending)' 도장을 찍었다.
반려가 찍히면 서류는 끝난다. 보류가 찍히면, 적어도 어딘가에 남는다. 그는 그 서류를 이 낡은 캐비닛 두 번째 서랍 가장 깊숙한 곳, 무가치한 교육 계획서 더미 밑에 밀어 넣었다.
탁.
현실로 돌아오는 감각과 함께 내 손끝이 거칠게 떨렸다.
"도윤 씨!"
윤서하가 내 안색을 살피며 다급하게 내 손을 감싸 쥐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랍 손잡이를 굳게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끼이이익―!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아 비명을 지르는 철제 서랍이 열렸다. 뽀얗게 일어나는 먼지 더미 속에서, 나는 가장 아래쪽에 깔려 있던 누런 종이 한 장을 주저 없이 끄집어냈다.
"이겁니다."
종이를 펼치자, 거칠게 쓰인 '사망 판정 이의신청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류 한가운데에는 둥글고 마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검은 우산의 끝에 눌려 인과가 왜곡된 흔적이었다. 그 조작의 힘 때문에 서류의 절반은 까맣게 변색되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반가온이 찍어 둔 선명한 붉은색 '보류' 도장만은 그 왜곡의 힘 속에서도 희미하게 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윤서하가 서류를 받아 들어 꼼꼼히 읽어 내렸다.
"이현우는…… 04번을 탈출시키려던 조력자였어. 신청서에 '문을 열 수 있는 아이'라는 표현이 있어. 04번이 이 공간의 경계를 열 수 있는 능력을 지녔고, 그걸 눈치챈 무언가가 이현우를 강제로 사망 처리해서 둘을 격리한 거야."
"그리고 반가온 선생님은 그 음모를 방조했지만, 완전히 외면하지는 못하고 보류 도장으로 서류를 숨겨 둔 거군요."
내가 씁쓸하게 덧붙였다.
"참 대단한 분이십니다. 교무실 구석에 사고 친 기안서 숨겨놓는 신입 사원도 아니고, 이런 문서를 여기다 처박아 두다니. 덕분에 후배들이 개고생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내 농담에 윤서하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긴장이 조금은 풀린 듯, 그녀의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앉았다.
"자료는 확보했어. 하지만 아직 부족해. 이의신청서가 최종적으로 이송되어 보관된 진짜 장소를 찾아야 해."
윤서하가 서류 하단의 미세하게 타들어 간 자국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반가온의 서명과 함께 기묘한 일련번호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송 보관처: D-07 눈을 잃은 문]
"D-07, 눈을 잃은 문……."
한지율이 그 단어를 나지막이 읊조렸다.
"이게 다음 구역으로 가기 위한 키워드이자 좌표 같네요. 던전의 더 깊숙한 안쪽으로 이어지는 문입니다."
윤서하는 재빨리 서류를 자신의 서류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녀는 내가 혹여나 'KDY-00'의 권한을 다시 쓸까 봐, 한 치의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서류를 철저하게 격리했다.
띵동―!
그때, 정적을 깨고 날카로운 기계음이 행정실 내부에 울려 퍼졌다.
우리 세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굳어졌다. 소리가 난 곳은 다름 아닌 우리가 서 있던 접수 창구의 머리 위였다.
시커멓게 죽어 있던 먼지 낀 구식 전광판이 찌르르 소리를 내며 붉은색 LED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대기 번호: 04]
[신청자: 04]
[대리인: KDY-00]
[호출 창구: 심사실]
"……!"
내 손목에 찬 태그가 거칠게 요동쳤다.
'판정 보류'의 타이머가 미친 듯이 줄어들며, 남은 시간이 단숨에 30분 안팎으로 깎여 나갔다.
철컥, 스으으으…….
접수 창구 바로 옆, 굳게 닫혀 있던 '심사실'이라고 적힌 철문이 아주 미세한 틈을 남기며 안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문틈 너머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어둠의 심연 속에서, 아주 가냘프고 젖어 있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 있어요?"
방금 전 내 잔향 속에서 들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제발…… 문 좀 열어 주세요. 여기가 너무…… 추워요."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열린 심사실의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은 지독하리만큼 차가웠고, 그 안에서 불길한 어둠이 우리를 향해 손을 뻗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