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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49화. 마지막 종소리와 7년 전의 내 서명 일러스트

48-49화. 마지막 종소리와 7년 전의 내 서명

제목: 48화. 심사실 안의 이현우

문 너머에서 불어오는 공기는 서늘함을 넘어 살갗을 베어 낼 듯 날카로웠다.

심사실. 그 명패가 붙은 문틈으로 물안개가 유령처럼 기어 나왔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에서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소독약 냄새, 그리고 오래된 교실 뒷바닥에서나 날 법한 마른 흙먼지 냄새가 뒤섞여 났다.

“강도윤, 정신 똑바로 차려.”

윤서하가 내 손목을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손등에 돋은 핏줄이 미세하게 떨렸다. 내 이름이 ‘공백’으로 지워지는 걸 본 뒤로, 그녀는 내가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세상에서 증발할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직은 제 이름 기억하니까.”

나는 애써 가벼운 투로 대꾸하며 심사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공간은 기괴했다. 천장에는 학교 상담실의 형광등이 깜빡거리는데, 벽면은 법원의 소심문실처럼 방음재가 덧대어져 있었다. 바닥은 병원 냉동 보관실처럼 차가운 스테인리스 재질이었고, 그 위로 자욱하게 깔린 물안개가 발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 낡은 나무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 위에는 소년이 있었다.

“……거기, 누구예요?”

소년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음색. 소년은 흠뻑 젖은 헌터고 교복 차림이었다. 얼굴은 마치 초점이 나간 사진처럼 흐릿해서 이목구비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왼쪽 가슴에 달린 헌터 태그만은 선명했다.

[이현우 / D급 / 탐색 계열]

태그의 LED 등이 심장박동처럼 붉은색과 주황색 사이를 위태롭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건 소년이 살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었다. 이 공간이 억지로 붙들어 둔 ‘기록의 박동’에 가까웠다.

“도와주세요. 너무 추워요. 문을…… 문을 열어 달라고 했는데, 아무도 안 와요.”

이현우가 몸을 떨었다. 소년이 움직일 때마다 스테인리스 바닥 위로 툭, 툭,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번졌다.

한지율이 신음 같은 소리를 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깨가 보이지 않는 무게에 눌린 듯 축 처졌다. 04번의 잔향이 그녀의 안에서 소리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미안하다고, 내가 그때 문을 열었어야 했다고. 지율은 자기가 한지율인지, 아니면 7년 전 그 문 앞에 서 있던 04번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눈으로 이현우를 바라봤다.

윤서하가 이현우에게 다가가려 발을 내디뎠다.

[경고: 해당 개체는 ‘행정 검토’ 대상입니다.]

[대리인 KDY-00 외의 접근 및 질의를 금합니다.]

허공에 붉은색 경고창이 비수처럼 꽂혔다. 윤서하가 이를 악물며 검을 움켜쥐었지만, 시스템의 벽은 물리적인 힘으로 넘을 수 없었다.

“서하 씨, 가만히 있어요. 규칙을 어기면 귀찮아집니다.”

내가 그녀를 제지하며 앞으로 나섰다.

“이름은, 강도윤입니다. 당신의 이의신청을 확인하러 온…… 대리인이라고 해 두죠.”

이현우가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얼굴 너머로 초점 없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강…… 도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혹시 04번인가요? 그 애가 문을 열 수 있다고 했거든요. 그 어른이 그랬어요.”

“그 어른?”

“검은 우산을 쓴…….”

이현우의 말이 끊겼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물안개가 자욱한 와중에도, 천장의 한 지점만은 기묘할 정도로 바짝 말라 있었다. 완벽한 원형의 마른 자국. 누군가 그 아래에서 우산을 쓰고 서 있었던 것 같은 흔적이었다. 책상 위의 서류들 위로도 젖지 않는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이현우의 의자 곁으로 다가갔다. 교복 소매에서는 물이 계속 흘러나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의 젖은 헌터 태그 위로 손을 얹었다.

[‘잔향청취’를 활성화합니다.]

순간, 고막이 터질 듯한 이명이 밀려왔다.

— 숨 쉬지 마.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 반가온이었다.

7년 전의 영상이 망막 위로 겹쳐졌다. 어린 이현우는 지금처럼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 커다란 유리관 안에 갇혀 있었다. 아니, 보관되어 있었다.

반가온은 유리관 너머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소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숨을 쉬면 기록이 널 찾는다. 기록이 널 찾는 순간, 넌 진짜로 죽는 거야.

반가온은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다. 소년을 구하려는 것 같기도 했고, 살아 있는 생명을 행정 서류함 속에 쑤셔 박으려는 것 같기도 했다.

— 넌 문을 열기 위한 임시 열쇠다. 행정적으로는 사망 처리하마. 그래야 ‘그들’의 눈을 피할 수 있어. 알겠나? 누구도 널 부르지 못하게 네 이름을 지우는 거다.

이현우는 공포에 질려 유리벽을 두드렸다. 하지만 반가온은 차갑게 등을 돌렸다. 반가온이 떠난 자리에는 오직 ‘사망 판정서’라는 낙인만 남았다. 이현우는 죽은 게 아니었다. 그는 산 채로 ‘사망’이라는 서랍에 처박혀 보관된 열쇠였다.

잔향이 끊기자 손바닥을 타고 서늘한 감각이 뇌수까지 전해졌다.

“강도윤! 대답해, 강도윤!”

윤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내 어깨를 흔들며 내 이름을 연거푸 불렀다. 침식 때문이었다. 권한을 쓸 때마다 내 존재의 일부가 시스템의 데이터로 환원되며 이름이 지워져 가고 있었다. 윤서하가 부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괜찮아요. 안 죽었습니다.”

나는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이현우를 보았다.

소년은 여전히 춥다며 떨고 있었다. 시스템은 내게 판결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 소년을 ‘사망’으로 확정해 영원한 안식을 줄 것인가. 아니면 ‘생존’으로 돌려놓아 이 지옥 같은 행정의 틈바구니로 다시 끌어올릴 것인가.

어느 쪽을 택하든 이현우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사망 확정을 내리면 소년의 영혼은 시스템의 연료가 된다. 생존을 선언하면 7년 전의 그 끔찍한 보관실로 되돌아가야 한다.

“현우야.”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기억이 안 난다고 했지? 마지막으로 본 거 말고, 마지막으로 들은 소리를 기억해 봐.”

“소리요……?”

“무서운 어른의 목소리나, 차가운 물 소리 말고. 네가 정말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곳의 소리.”

이현우의 흐릿한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종소리요.”

“종소리?”

“수업 끝나는 종소리요. 그거 들리면 친구들이랑 떡볶이 먹으러 가기로 했거든요. 운동장 가로질러서 교문 나갈 때 나는 소리…….”

그 순간, 심사실을 가득 채웠던 물안개가 소용돌이쳤다.

[대상자가 ‘기억의 지향점’을 설정했습니다.]

[사망 판정 이의신청서의 일부가 승인되었습니다.]

[심사 기록 01번 보관함을 해제합니다.]

이현우의 형체가 조금 더 흐릿해지며, 그가 앉아 있던 의자 아래에서 낡은 서류철 하나가 솟아올랐다. 시스템은 소년을 강제로 규정하려 했다. 나는 반대로, 그가 붙잡고 있던 생의 마지막 조각을 고르게 했다. 그 틈에서 논리 회로가 삐걱거렸다.

“이게…… 뭐지?”

한지율이 홀린 듯 다가와 서류철을 집어 들려 했다. 하지만 서류는 오직 나만이 만질 수 있다는 듯 내 손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서류철의 겉면은 빗물에 젖은 듯 눅눅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첫 장을 넘겼다.

[04번 생존자 분리 승인서]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04번 생존자? 그렇다면 한지율, 아니 04번이라 불렸던 그 아이를 이 지옥에서 내보낸 기록인가?

나는 황급히 페이지 하단의 승인자 명단을 확인했다.

당연히 반가온의 이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7년 전 이 모든 일을 설계하고 집행한 그 오만한 학년 주임의 이름.

하지만 내 시선이 멈춘 곳에는 전혀 다른 이름이 적혀 있었다.

[승인자: 강도윤 (KDY-00)]

낡고 바랜 종이 위에는, 지금의 내 필체와는 미묘하게 다르지만 분명히 내 것임이 틀림없는 서명이 날카롭게 그어져 있었다.

그것도 7년 전의 날짜로.

“말도 안 돼…….”

나는 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침식으로 하얗게 질린 손등 위로, 보이지 않는 사슬이 감겨 오는 것 같았다.

나는 7년 전에도 이곳에 있었다.

단순히 학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승인하는 자로서.

제목: 49화. 7년 전의 내 서명

내 이름은 종이 위에 있었다.

강도윤.

세 글자. 익숙해야 했다. 주민등록등본에도 있고, 통장에도 있고, 편의점 포인트 앱에도 있고, 월급 명세서의 공제 항목 옆에도 붙어 있는 이름이다. 그런데 그 순간 내 눈앞의 승인서에 찍힌 이름은 이상하게 낯설었다.

마치 누군가 내 이름을 빌려 입고, 7년 전의 어둠 속에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04번 생존자 분리 승인서]

승인자: 강도윤 (KDY-00)

검은 잉크는 오래되어 가장자리가 조금 번져 있었다. 그래도 필체는 선명했다. 끝을 괜히 한 번 더 꺾는 버릇. 받침을 작게 쓰다가 마지막 획에서 힘을 주는 습관. 내가 택배 수령 서명할 때마다 기사님이 “성함이 강… 도… 윤 맞으시죠?” 하고 한 번 더 묻게 만드는 그 못난 필체.

그게 7년 전 날짜 옆에 붙어 있었다.

“강도윤 씨.”

윤서하의 목소리가 귀 바로 옆에서 들렸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혀가 목구멍 안쪽에 붙어 버렸다. 종이가 내 이름을 먼저 말했고, 내 입은 그 뒤를 따라가지 못했다.

“강도윤 씨, 저를 보세요.”

윤서하가 내 손목을 잡았다. 차가운 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차가움이 나를 현실에 붙잡았다. 심사실의 공기는 눅눅했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빗물 묻은 금속 난간처럼 분명했다.

내 왼팔의 태그가 떨렸다.

[KDY-불완전 복구 개체]

문구가 한 번 깜박였다. 그리고 글자가 다시 조립되었다.

[KDY-00 승인자 권한 확인 중]

“아니, 잠깐만.”

나는 뒤늦게 숨을 들이켰다. 폐 안으로 들어온 공기는 오래된 서류철 냄새가 났다. 곰팡이, 잉크, 먼지, 그리고 누군가 너무 오래 닫아 둔 캐비닛의 쇠 냄새.

“나 이런 거 승인한 적 없어요. 저는 승인 같은 거 해본 적이 없다고요. 회사에서도 결재 라인 맨 아래였어요. 휴가 신청서 올리면 반려당하는 쪽이지, 빨간 도장 찍는 쪽이 아니란 말입니다.”

농담은 입 밖으로 나왔지만 웃기지 않았다. 내가 봐도 실패한 농담이었다. 연말정산 때 의료비 공제 누락된 걸 발견했을 때보다 더 처참한 실패였다.

윤서하는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면,” 그녀가 낮게 말했다. “누군가 당신 이름으로 결재했습니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나를 조금 살렸다.

당신이 범인이 아니라면.

의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윤서하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증거를 본다. 문장을 아낀다. 감정을 꺼내 보여 주는 대신 방향을 제시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그녀는 나를 승인서 안쪽으로 밀어 넣지 않았다.

“조사 방향을 바꿉니다.”

윤서하의 시선이 승인서 위를 훑었다.

“서명이 실제 강도윤 씨의 행위인지, KDY-00 권한을 빌려 쓴 계정 행위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계정이라니요.”

내 목소리가 갈라졌다.

“사람 이름이 로그인 아이디도 아니고.”

“협회는 가끔 사람을 로그인 아이디보다 낮게 취급합니다.”

그 말에는 농담이 없었다.

순간 심사실의 벽이 흔들렸다.

처음에는 전등이 깜박이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벽 자체가 접히고 있었다. 회색 심사실의 페인트가 갈라지더니 그 틈으로 초록색 칠판이 비쳤다. 낡은 교무실 책상이 튀어나오고, 그 위에 분필 가루가 내려앉았다. 다음 순간 칠판은 헌터협회 결재실의 전자 현황판으로 바뀌었다. 다시 눈을 깜박이자 법원 기록 열람실의 긴 나무 책상이 우리 앞에 놓여 있었다.

세 공간이 한꺼번에 겹쳤다.

책상 위에는 결재판이 있었다. 7년 전 날짜가 찍힌 결재 라인. 담당, 검토, 보류, 승인. 칸마다 이름이 흐릿하게 지워져 있었고, 마지막 승인 칸에만 내 이름이 남아 있었다.

빨간 도장이 옆에 놓여 있었다.

손잡이는 낡아 있었다. 누군가 너무 여러 번 쥐어서 나무 표면이 반질반질해진 도장. 도장 밑면에는 잉크가 아직 마르지 않은 것처럼 붉었다.

그 옆에 그림자가 있었다.

젖지 않는 우산 그림자.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오래된 교무실이라면 당연히 샐 법한 물이었다. 협회 결재실이라면 누군가 시설팀을 불러야 할 물이었고, 법원 기록 열람실이라면 즉시 보존 담당자가 기겁할 물이었다.

그런데 우산 그림자가 덮은 부분만 마른 채였다.

승인자 칸 위에 그림자가 둥글게 얹혀 있었다.

“저거.” 한지율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평소의 한지율은 날이 서 있었다. 세상이 자기 등을 찌르기 전에 먼저 칼을 빼는 사람처럼. 그런데 지금 목소리는 바닥에 젖은 종이처럼 힘없이 눌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한지율의 얼굴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 뒤에 다른 얼굴이 겹쳐졌다. 교복 셔츠의 흰 목깃, 물에 젖은 머리카락, 울음을 참는 입술. 이현우의 잔향이었다. 아니, 04번이라고 불렸던 생존자의 잔향.

한지율은 자기 가슴팍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 이거 알아.”

“뭘?”

“저 결재판.”

그녀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공간은 친절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난 발밑에 법원 기록 열람실의 의자가 생겼고,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심사실 전체를 찢었다.

“내가 저기 앉아 있었던 것 같아. 아니, 내가 아니라… 누가. 숨을 참으라고 했어. 숨 쉬면 기록이 찾는다고.”

반가온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숨 쉬지 마. 기록이 널 찾는다.

잔향 속에서 그는 이현우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구한 것인지, 묻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한지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한지율이야.”

그녀가 자신에게 말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04번이 아니야. 나는… 나는 분리된 생존자가 아니야. 그렇지?”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질문은 칼보다 날카로웠고, 내가 들고 있는 건 녹슨 행정용 스테이플러 같은 것이었다. 아무리 세게 찍어도 사람의 정체성을 고정할 수 없는 물건.

윤서하가 조용히 움직였다. 그녀는 한지율에게 다가가려다 멈췄다. 손을 뻗지 않았다. 대신 눈높이를 맞췄다.

“지금은 단정하지 않습니다.”

“그게 위로예요?” 한지율이 웃었다. 웃음은 금방 무너졌다.

“아니요. 안전장치입니다.”

윤서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승인서를 보았다.

“단정하는 순간 시스템이 분류합니다.”

그 말이 끝나자 책상 위 전자 현황판이 켜졌다.

[분류 대기]

대상: HJY-현재명

잔향 일치율: 64%

원본 생존자 기록 대조 중

한지율의 얼굴에서 피가 빠졌다.

나는 승인서에 손을 올렸다.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이었다. 아니, 생각이 없었다기보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뿐이라고 느꼈다. 종이를 넘기거나, 손을 대거나, 아주 비싼 복합기를 고장 내는 것처럼 죄책감을 느끼며 뭔가를 만지는 것.

손끝이 종이에 닿는 순간, 심사실이 꺼졌다.

검은 화면처럼 모든 것이 잠깐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7년 전 냄새를 맡았다.

비 온 뒤 운동장의 흙냄새. 오래된 학교 복도의 왁스 냄새. 젖은 우산이 우산꽂이에 빽빽하게 꽂혔을 때 나는 비린 냄새. 그리고 협회 임시 사무실에서만 나는 뜨거운 프린터 토너 냄새.

누군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형광등이 머리 위에서 흔들렸고, 그 사람의 손만 또렷했다. 손가락 끝에 빨간 잉크가 묻어 있었다.

“이 이름으로 승인하면 추적이 늦어집니다.”

낯선 목소리였다.

“강도윤?”

다른 목소리가 물었다. 젊은 남자. 숨이 가빴다. 어쩌면 반가온.

“실제 인물이 아닙니다. KDY-00 권한을 빌려 쓰는 승인 계정입니다.”

실제 인물이 아닙니다.

그 문장이 내 가슴 한가운데를 통과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종이 아래쪽에 작은 메모가 보였다. 결재 라인 밖, 아무도 중요하게 보지 않을 여백. 거기에 볼펜으로 삐뚤게 적힌 문장이 있었다.

- 이런 일까지 결재하면 야근수당은 누가 승인해 줍니까.

나는 숨을 삼켰다.

그건 내 농담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할 법한 농담이었다. 무서운 일을 앞두고 아무도 웃지 않는 말을 굳이 적어 두는 습관. 세상이 진지하게 나를 죽이려 들 때, 나는 늘 영수증 뒷면에 농담을 적었다. 별 쓸모 없지만 없으면 미칠 것 같아서.

잔향 속 손이 떨렸다.

빨간 도장이 승인 칸 위로 내려갔다. 그러나 도장이 찍히기 직전, 다른 손이 결재판을 잡아챘다.

반가온처럼 보이는 그림자였다.

그는 승인 칸 위에 보류 도장을 찍으려 했다. 아니, 이미 찍힌 승인 도장을 덮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움직임이 너무 급했고, 잔향이 너무 많이 찢겨 있었다.

빨간 도장 두 개가 겹쳤다.

승인.

보류.

둘 중 어느 것이 먼저였는지 알 수 없었다.

“실패했습니다.”

누군가 말했다.

“기록은 이미 원본 확인자를 요구합니다.”

우산 그림자가 승인자 칸을 덮었다.

그림자는 물처럼 번지지 않았다. 빛을 먹는 검은 천처럼 조용히 내려앉았다. 내 이름이 가려졌다. 그리고 아주 잠깐, 서명 옆에 작은 문구가 떠올랐다.

원본 확인자: 문태식

“문 팀장님?”

내 목소리가 잔향 속으로 새어 나갔다.

순간 모든 것이 깨졌다.

나는 다시 심사실에 있었다. 손끝은 승인서 위에 놓여 있었고, 윤서하가 내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한지율은 의자 옆에서 무릎을 꿇은 채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내 태그가 미친 듯이 진동했다.

[KDY-00 승인자 권한 확인]

[서명 부정 요청 대기]

[서명 인정 요청 대기]

“부정하세요.” 한지율이 거칠게 말했다.

그녀는 아직 떨고 있었다. 그래도 눈빛은 돌아와 있었다. 불안과 분노가 같이 섞인 눈빛. 살아 있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그거 당신 아니잖아. 아니라고 말해요. 빨리.”

나도 그러고 싶었다.

이 서명은 내가 쓴 게 아닙니다.

나는 7년 전 여기에 없었습니다.

나는 승인자가 아닙니다.

나는 그냥 퇴근하고 싶었던 F급 장비정비반 직원입니다.

말은 준비되어 있었다. 평생 억울한 일 앞에서 연습해 온 말들이었다. 그런데 입이 열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종이 여백의 농담이 내 안쪽을 찔렀기 때문이다.

필체만 닮은 게 아니었다. 농담도 닮았다. 도망치는 방식도 닮았다. 무서운 순간에 의미 없는 회사원 농담을 붙잡는 꼴까지 닮았다.

윤서하가 말했다.

“강도윤 씨, 부정해도 됩니다. 인정해도 됩니다. 다만 시스템이 원하는 문장으로 말하지 마세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는 아니다, 혹은 내가 했다. 둘 다 시스템이 준비한 선택지입니다.”

그녀의 손이 내 어깨에서 조금 더 단단해졌다.

“당신의 문장으로 말하세요.”

내 문장.

나는 승인서를 내려다보았다. 오래된 종이는 손끝 아래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아니, 살아 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적어 두고, 죽은 사람을 살아 있다고 숨겨 둔 종이답게 너무 오래 숨을 참은 것처럼.

나는 천천히 말했다.

“이 서명은 내가 쓴 게 아닙니다.”

태그가 번쩍였다.

[서명 부정 접수 준비]

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건 내가 아직 모르는 빚입니다.”

태그의 문구가 멎었다.

윤서하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한지율이 숨을 삼켰다.

“누가 내 이름을 썼든, 왜 내 농담까지 남겼든, 왜 문태식 팀장님이 원본 확인자로 붙어 있든. 이 서류가 누군가를 살리거나 묻는 데 쓰였다면… 그 빚은 내가 확인하겠습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열람 권한을 주세요. 승인자가 아니라, 채무자로.”

심사실이 조용해졌다.

법원 기록 열람실의 나무 책상이 삐걱거렸다. 교무실 칠판 위 분필 가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협회 결재실의 전자 현황판이 꺼졌다 켜졌다.

그리고 승인서 아래쪽에서 작은 도장이 솟아올랐다.

[열람 허가]

사유: 미확인 채무 인정

권한: KDY-00 제한 열람

“채무자라니.” 한지율이 허탈하게 웃었다. “당신은 진짜 이런 순간에도 단어 선택이 왜 그래요.”

“제가 카드값을 좀 오래 미뤄 본 사람이라서요.”

이번 농담도 실패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지율이 아주 작게 숨을 터뜨렸다.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소리였다.

윤서하는 승인서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종이 한 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심사실 전체를 지나갔다. 사락. 너무 가벼운 소리였다. 사람의 삶과 죽음을 나누기에는 말도 안 되게 가벼운 소리.

다음 기록이 드러났다.

첫 줄을 보는 순간, 내 몸이 얼어붙었다.

[강도윤 사망 예정 통지서]

아래에는 날짜와 시각이 적혀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내 태그를 내려다보았다.

왼팔의 타이머가 깜박이고 있었다.

00:03:12

통지서의 예정 시각도 같았다.

정확히 3분 12초 뒤.

그제야 우산 그림자가 다시 움직였다. 젖지 않는 검은 원이 통지서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내 이름을 가리지 않았다.

내 사망 예정 시각만 또렷하게 남겨 둔 채였다.

나는 웃으려다 실패했다.

“윤서하 씨.”

“네.”

“혹시 사망 예정도 이의신청 기간이 있습니까?”

윤서하가 통지서를 보았다. 그리고 내 손목의 타이머를 보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있게 만들 겁니다.”

그 순간, 심사실 문 너머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였다.

동시에 내 태그가 마지막 문장을 띄웠다.

[사망 예정자 강도윤]

[출석 확인 필요]

문손잡이가 안쪽에서 천천히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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