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44-45화. 원본 대기실과 잠들지 않은 04번 일러스트

44-45화. 원본 대기실과 잠들지 않은 04번

제목: 44화. 원본 대기실

“늦었네, 강도윤.”

제1 실습실 안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내 귀 안쪽을 손톱으로 긁었다.

아는 목소리였다. 당연했다. 매일 아침 세면대 거울 앞에서 졸린 얼굴로 “아, 퇴사하고 싶다”를 중얼거릴 때 나오는 바로 그 주파수였으니까. 문제는 그 목소리에 사람 냄새가 없다는 점이었다. 녹음 파일을 열 번 복사한 뒤 다시 스피커로 튼 것처럼, 내 목소리인데 내 것이 아니었다.

윤서하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의 마나 스틱이 실습실 문 안쪽을 겨눴다. 총구 끝에 맺힌 푸른빛이 흔들림 없이 고정됐다. 다만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만 아주 조금 굳어 있었다.

“강도윤 씨. 뒤로.”

“싫다고 하면 상담실로 끌려갑니까? 학교에서 제일 무서운 곳이 상담실이었는데.”

농담은 입에서 나왔지만, 목구멍은 바싹 말라 있었다. 나는 한지율을 벽에 기대게 하고 반쯤 몸을 돌렸다. 지율의 숨은 얕았다. 입술 사이로 희미한 흰 김이 새어 나왔다. 폐쇄 실습동 안쪽은 여름밤도 겨울로 바꾸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었다.

문이 더 열렸다.

끼이이익.

낡은 경첩 소리와 함께 제1 실습실의 어둠이 복도로 밀려 나왔다. 그 안에서 풍겨온 냄새는 교실 냄새가 아니었다. 젖은 체육복. 오래된 비. 세탁을 대충 끝낸 수건에서 나는 눅눅함. 거기에 마나 억제 금속 특유의 차갑고 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실습실 안은 평범한 교실의 탈을 쓰고 있었다.

칠판은 있었다. 분필 받침도 있었다. 벽에는 색이 바랜 던전 안전 수칙 포스터가 비뚤게 붙어 있었다. 하지만 책상들은 학생들이 앉기 좋게 줄지어 있지 않았다. 누군가를 가운데로 몰아넣기 위해 일부러 밀어 둔 것처럼, 방 가장자리에 밀려 있었다.

중앙에는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금속 의자.

팔걸이와 발목 받침대에는 두꺼운 가죽끈이 달려 있었고, 등받이 뒤쪽에는 마나 억제 코일이 척추처럼 촘촘히 박혀 있었다. 의자 주변으로는 투명한 유리 격벽이 사각형으로 둘러져 있었다. 유리 너머에는 관찰실 창이 있었다. 검은 거울처럼 빛을 삼키는 창.

나는 그 창을 보자마자 속이 뒤틀렸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가 보고 있었다.

그 기분은 착각이 아니었다.

책상마다 작은 번호표가 붙어 있었다. 01. 02. 03. 04. 번호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희미하게 빛났다. 그리고 가장 안쪽, 유리 격벽 바로 앞 바닥에 검은 글씨가 떠올랐다.

[원본 대기실]

“와.”

내 입에서 아주 형편없는 감탄사가 나왔다.

“학교 시설 좋아졌네요. 우리 때는 급식실 에어컨도 제대로 안 틀어줬는데, 이제 학생용 고문 의자까지 들여놨어.”

“강도윤 씨.”

윤서하가 낮게 불렀다. 농담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동시에 무너지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때 실습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한 걸음 나왔다.

처음엔 그림자처럼 보였다. 다음 순간, 보랏빛 형광등이 한 번 깜빡이며 그의 얼굴을 밝혔다.

내 얼굴이었다.

열일곱, 혹은 열여덟쯤의 강도윤. 지금보다 조금 마르고, 턱선이 덜 굳었고, 눈 밑에 어른 흉내를 내기 전의 피곤함이 엷게 깔린 얼굴. 서울헌터고등학교 구형 실습복을 입고 있었다. 왼쪽 가슴의 학교 로고는 지금 기억보다 촌스러웠다. 소매 끝은 젖어 있었고, 바짓단에는 마른 흙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눈이 달랐다.

그 눈에는 놀람도, 분노도, 반가움도 없었다. 오래 켜 둔 모니터처럼 빛만 남아 있었다. 표정은 비어 있었다. 입술도 움직임이 적었다. 사람이라기보다, 내 얼굴을 뒤집어쓴 기록물 같았다.

그리고 손목.

실습복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목에 금속 팔찌 자국이 있었다. 살을 파고든 붉은 흉터가 손목을 한 바퀴 감고 있었다. 오래전에 풀렸는데도 아직 풀리지 않은 것처럼.

내 왼손의 헌터 태그가 지이잉, 하고 울렸다.

피부 아래 검은 선들이 잠깐 솟았다가 가라앉았다. 마치 저 흉터를 알아본 것처럼.

“저건 도윤 씨가 아니에요.”

윤서하가 말했다.

말은 단호했지만, 호흡이 한 박자 늦었다. 그녀도 보고 있었다. 내 얼굴. 내 목소리. 내 몸에 있어야 할지도 모르는 흉터.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한데요.”

나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고등학교 때의 저보다 지금의 제가 더 낫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됩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뒤로 빠져요.”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등 뒤에서 한지율이 신음했다.

“원본 대기실 개방…….”

기계음 같은 목소리였다. 지율의 목소리인데 지율이 아니었다.

“공백 증인 확인. 04번 분리 완료. KDY-00 반응 지연. 관찰 기록 재개.”

윤서하가 지율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다시 실습실 안쪽을 조준했다. 선택지가 부족했다. 저 얼굴을 쏘면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지율을 방치하면 침식이 올라간다. 내가 뒤로 빠지면 이 방은 아마 우리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도 선택형 문제는 싫었다. 보통 다섯 개 중 하나가 답이라는데, 내 인생 시험지는 늘 다 틀린 답만 다섯 개였다.

어린 내 얼굴을 한 것이 나를 바라봤다.

“실습생 04번은 뒤로.”

그가 말했다.

“KDY-00은 대기.”

그 문장이 떨어진 순간, 실습실 바닥의 먼지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나는 기억도 아닌 장면을 봤다.

비가 오고 있었다.

복도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 젖은 체육복이 등판에 들러붙는 감각. 손목에 채워진 금속 팔찌의 무게. 누군가 내 어깨를 눌러 중앙의 의자에 앉혔다.

나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손목, 발목, 가슴. 가죽끈이 하나씩 조여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가슴을 누르는 끈이 살을 파고들었다. 유리 격벽 너머로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움직였다. 얼굴은 흐릿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또렷했다.

—반응 없습니다.

—공포 반응은?

—있습니다. 기억 응답은 없습니다.

—좋아. 그게 필요해.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왔다. 구두 굽 소리가 젖은 바닥 위에서 딱, 딱, 울렸다.

반가온이었다.

지금보다 젊은 얼굴. 냉정한 눈. 하지만 눈 밑에 잠을 못 잔 사람 특유의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는 유리 너머에서 나를 보다가 서류철을 접었다.

—이 애는 원본이 아니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폐기합니까?

반가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원본을 대기실 밖으로 내보내면 안 된다. KDY-00은 공백 증인으로 유지해. 이 애가 본 것을 지우는 게 아니라, 보지 않은 상태를 고정해야 한다.

—증언 가능한 빈칸 말입니까?

—그래.

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마지막 말은 누구에게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연구원에게? 나에게?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

의자에 묶인 어린 내가 입을 열었다.

—나는 보지 않았다.

목소리는 비어 있었다.

—나는 보지 않았다. 나는 보지 않았다. 나는 보지 않았다.

그 반복이 머릿속을 긁었다. 나는 손을 뻗어 가까운 책상을 짚었다. 손바닥 아래 번호표가 차갑게 빛났다. 00.

잔향이 끊겼다.

나는 현실로 돌아와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목 안에 분필 가루가 뭉친 것 같았다.

“무슨 걸 봤어요?”

윤서하가 물었다.

“상담 기록이요.”

나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학생 인권 같은 건 교문에서 압수하고 시작하는 아주 훌륭한 상담.”

“강도윤 씨.”

“반가온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나는 말을 멈췄다.

반가온은 실험을 진행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가 내뱉은 마지막 문장, ‘그래야 살아남는다’는 이상하게 목에 걸렸다. 누구를 살리려 했던 걸까. 원본? KDY-00? 04번? 아니면 자기가 저지른 일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던 걸까.

판단하기엔 단서가 너무 적고, 원망하기엔 목소리가 너무 피곤했다.

어린 내 얼굴을 한 것이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강도윤이면.”

그가 물었다.

“나는 뭐지?”

실습실이 조용해졌다.

그 질문은 칼보다 느리게 들어왔다. 그래서 더 아팠다. 나는 입을 열었다. 나는 강도윤이라고 말하려 했다. 당연한 말을 하는 데 이렇게 힘이 들 줄은 몰랐다.

“나는…….”

왼손 태그가 조여들었다.

피부가 찢어지는 줄 알았다. 검은 코드가 손목을 감고 올라왔다. 목구멍 안쪽까지 무언가가 기어올라와 내 이름을 움켜쥐었다.

말하지 마.

이름을 말하는 순간, 기록이 덮어쓴다.

그 경고가 내 것이었는지, 태그의 것이었는지, 아니면 저 원본 대기실의 규칙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한지율이 숨을 삼켰다.

“흡…….”

지율의 목덜미에 검은 반점이 다시 피어났다. 아까 가라앉았던 침식이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을 긁었다. 관찰실 창 너머에서 누군가 그 반응을 기록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윤서하의 얼굴이 굳었다.

“도윤 씨, 지율 대원 침식이 다시 올라갑니다.”

알고 있었다.

이 방은 내 이름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가 내 이름을 버리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강도윤이라고 우기면, 지율이 대신 값을 치른다. 내가 KDY-00이라고 인정하면, 이 방은 나를 안쪽으로 들여보낸다.

정말이지 학교는 졸업하고 나서도 성적표를 내밀 줄 안다.

나는 웃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윤서하 씨.”

“말해요.”

“혹시 제가 이상한 소리 하면 나중에 따귀 한 대 부탁합니다. 정신 차리게.”

“한 대로 끝날 거라고 생각해요?”

“역시 믿음직하시네.”

나는 어린 내 얼굴을 똑바로 봤다.

“강도윤은.”

태그가 다시 조였다. 눈앞이 하얘졌다. 나는 그 이름을 삼켰다. 삼킨 이름이 목 안쪽에서 피 맛으로 번졌다.

그리고 다른 말을 꺼냈다.

“여기 없다.”

원본 대기실의 공기가 멈췄다.

나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덧붙였다.

“출석한 건 KDY-00이다.”

말이 끝나자 바닥의 번호표들이 한꺼번에 빛났다. 01, 02, 03, 04, 그리고 00. 유리 격벽의 잠금장치가 딸깍, 하고 풀렸다. 한지율의 호흡이 돌아왔다. 검은 반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번지는 속도가 멈췄다.

대신 내 왼손 태그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안정된 것이 아니었다. 등록된 것이다.

어린 내 얼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KDY-00.”

그는 나를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다.

나를 정리했다.

분류표의 맞는 칸에 꽂아 넣은 것처럼.

유리 격벽 너머 관찰실 창에 금이 갔다. 아주 가느다란 금이었다. 그 틈에서 빗물이 흘러내렸다. 실내인데도 비가 내렸다. 검은 유리 안쪽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작은 실루엣.

의자에 묶인 소녀.

윤서하가 숨을 멈췄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소녀는 한지율과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의 지율보다 훨씬 어렸다. 서울헌터고 실습복을 입고 있었고, 손목에는 금속 억제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텅 빈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어린 내 얼굴이 미소 없이 말했다.

“그럼 다음은 04번을 깨워야지.”

관찰실 창 너머에서 소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살려줘.

작가의 말: 도윤은 한지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이름을 삼켰습니다. 그런데 원본 대기실은 그걸 기다렸다는 듯 04번을 꺼내 보이네요. 다음 출석 대상은 지율과 같은 얼굴의 소녀입니다.

제목: 45화. 04번은 잠들지 않았다

검은 관찰실 창 너머에서, 그 아이가 입을 뻐끔거렸다.

[살려줘.]

소리 없는 비명은 투명한 유리 격벽에 부딪히지도 못하고, 내 고막 안쪽에서 직접 공명했다. 잔향은 언제나 이딴 식이다.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순간에, 가장 절박한 목소리를, 가장 생생하게 들려준다.

“그럼 다음은 04번을 깨워야지.”

7년 전의 내가, 내 얼굴을 하고서 친절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이었다. 마치 감정을 학습한 안드로이드가 상황에 맞는 표정 근육을 가동한 것 같은, 완벽하지만 텅 빈 미소.

그는 천천히 오른손을 뻗어 관찰실 유리창을 터치했다.

지이잉―

마치 태블릿 PC의 잠금을 해제하는 듯한 기계음과 함께, 새까맣던 관찰실 창이 서서히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특수 강화 유리 너머,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은 또 다른 대기실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서 있는 이곳보다 훨씬 더 좁고, 사방이 하얀 타일로 뒤덮여 병원 수술실 같은 불쾌한 청결함을 풍기는 곳.

그리고 그 중심, 또 하나의 마나 억제 의자에 한 소녀가 묶여 있었다.

서울헌터고 실습복을 입은, 나와 똑같이 생긴 소년.

그리고 그 너머 유리방에 갇힌, 한지율과 똑같이 생긴 소녀.

이 상황을 조별 과제 피드백 시간에 교수님께 설명한다면, 교수님은 아마 내 정신감정을 권하며 상담실로 조용히 부르실 게 분명했다.

“저, 저건…….”

윤서하가 신음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현재의 한지율과 유리 너머의 소녀를 번갈아 쫓았다.

유리 너머의 소녀는 한지율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등에 업혀 숨을 헐떡이는 한지율과는 달랐다. 나이는 대략 열두 살에서 열세 살 정도. 앳된 얼굴에는 젖살이 아직 남아 있었고, 체구는 훨씬 작았다.

무엇보다 분위기가 달랐다.

지금의 한지율이 무덤덤함 속에 칼날을 숨긴 느낌이라면, 저 안의 소녀는 극도의 공포와 절망에 절어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실습복,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동자.

그 눈은 살아 있는 사람의 것도, 죽은 사람의 것도 아니었다. 끝나지 않는 악몽에 오래 담가 둔 유리구슬 같았다.

“준비가 끝났어, KDY-00.”

7년 전의 내가 나를 보며 속삭였다.

“이제 네가 호명할 차례야. 출석부에 이름을 적어야, 이 아이가 이 답답한 방에서 나갈 수 있어. 공백 증인의 권한으로.”

나는 침을 삼켰다. 목줄이 또다시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내가 저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미친 시스템은 결코 공짜로 무언가를 내주지 않는다는 것.

[흐윽, 흑…… 싫어, 가지 마…… 선생님, 제발…….]

소녀의 잔향이 터져 나왔다. 유리창에 가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전신이 발작하듯 떨리는 것이 보였다. 의자에 고정된 금속 구속구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그 순간, 내 등 뒤에서 거친 호흡 소리가 멈췄다.

“……!”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윤서하의 품에 안겨 있던 현재의 한지율이,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가슴의 오르내림이 멈췄고, 입은 반쯤 벌어진 채 굳었다.

“지율아! 안 돼, 지율아!”

윤서하가 비명을 지르며 지율의 가슴을 압박하려 했다.

하지만 그 찰나, 나는 유리 너머의 소녀를 보았다.

[커흑! 컥, 으흐흑…….]

잠잠했던 유리 너머의 소녀가 갑자기 과호흡을 일으키며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마치 밖의 한지율이 쉬어야 할 공기를 안쪽의 소녀가 가로챈 것처럼.

공명.

그 단어가 머릿속에 박혔다. 한쪽이 숨을 들이쉬면 다른 한쪽이 멈춘다. 누가 만든 규칙인지 몰라도, 만든 놈은 분명 체육 시간 피구에서 맨날 마지막까지 남아 남 괴롭히던 부류였을 것이다.

“지, 지율이가 숨을 안 쉬어! 그런데 심장은…… 심장은 터질 것처럼 뛰어!”

윤서하의 목소리가 울먹임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치유 마법을 전개하려 해도, 대상의 생체 리듬이 이토록 불안정하면 마법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도윤아, 어떻게 좀 해봐! 제발!”

윤서하의 절규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출석부. 7년 전의 내가 말한 출석부가 필요했다.

나는 낡은 책상 위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빛바랜 가죽 표지의 노트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이 대기실의 시스템 권한을 가진 ‘출석부’인 모양이었다.

내가 책상으로 다가가려 하자, 7년 전의 내가 내 앞을 막아섰다.

“생각 잘 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친절했지만, 그 속에는 서늘한 경고가 담겨 있었다.

“04번을 깨우면, 그 아이는 ‘원본 관찰자’로서의 지위를 회복해. 하지만 그렇게 되면…… 지금 밖에 있는 저 ‘불완전한 기록’은 어떻게 될까?”

그의 시선이 윤서하의 품에 안긴 한지율에게 향했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왔다.

“기록은 원본에 통합되거나, 폐기돼. 시스템은 중복된 데이터를 허용하지 않으니까. ‘한지율’이라는 이름은 7년 전 명단 어디에도 없어. 저 아이는 그저 04번의 분리된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 나중에 만들어진, 임시 신원에 불과해.”

속이 내려앉았다. 지금의 한지율이라는 이름이 7년 전의 명단에 없다는 말. 그 이름이 보호인지, 위장인지, 아니면 폐기 라벨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04번을 깨우는 순간, 지금 내 동료인 한지율은 사라진다.

하지만 깨우지 않으면, 04번은 영원히 저 지옥 같은 유리방에 갇혀 있을 것이고, 공명 현상으로 인해 지금의 한지율도 결국 숨이 막혀 죽을 것이다.

이건 학교 시험 문제보다 악랄했다. 정답이 없는 게 아니라, 모든 보기가 오답이었다.

“공백 증인은 선택하지 않아, KDY-00.”

7년 전의 내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차가웠다.

“그저 존재하는 사실을 기록할 뿐이지. 자, 어서 적어. 04번을 출석시킬 건지, 아니면 저 밖의 기록을 폐기할 건지.”

그의 압박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숨이 멈춘 한지율. 숨을 헐떡이는 04번.

그 사이에서 나는, 그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

아니, 선택하지 않겠다.

이딴 미친 시스템이 강요하는 룰 따위 따르지 않는다.

나는 헌터다. F급 잠행 헌터.

정공법이 통하지 않으면, 편법을 쓴다. 시스템의 허점을 찾는다.

나는 책상이 아닌, 유리 격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7년 전의 내가 당황하기도 전에, 내 오른손을 유리창에 내리쳤다.

“비켜, 이 가짜 녀석아!”

나는 능력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잔향청취].

과거의 소리를 듣는 능력. 하지만 지금 나는 이 능력을 단순히 듣는 것에만 쓰지 않겠다.

이 유리창은, 04번과 현재를 가르는 경계다.

그리고 저 안의 04번과 밖의 한지율은 공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유리창에는, 그 두 존재를 잇는, 혹은 가르는 가장 강력한 잔향이 새겨져 있을 터였다.

파창-!

유리는 깨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 손바닥이 유리에 닿는 순간, 거대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내 뇌리를 강타했다.

그것은 7년 전, 이 방에서 일어났던 분리 절차의 잔향이었다.

[절차 04번. 원본 관찰자 분리 및 격리.]

차가운 기계음이 들렸다. 하얀 방, 의자에 묶인 어린 소녀. 그녀는 울다 지쳐 눈물도 나오지 않는 상태였다.

[대상, 실험 거부 반응 지속. 마나 수치 불안정.]

방 밖, 검은 관찰실 창 너머로 목소리들이 오갔다.

[이대로는 폐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이 아이는 필요해. ‘눈’이 필요하단 말이야. 그 보관소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눈이.]

익숙한 목소리. 반가온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지만, 특유의 냉철함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본체가 버티질 못합니다. 정신 붕괴 확률 98%.]

반가온의 침묵. 그리고 이어진 단호한 명령.

[그럼 분리해. 인격과 기억을 ‘기록’으로 추출해서 밖에 남겨두고, 본체는 ‘원본’으로 냉동 격리한다. 하나는 남겨야 해. 그래야 나중에 다시 합칠 수 있어.]

[승인되었습니다. 분리 절차 시작.]

치이익-!

소녀의 팔다리에 연결된 주사기에서 초록색 액체가 주입되었다.

소녀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그녀의 몸에서 무언가 반투명한 형태가 찢겨 나오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아아아악―! 싫어! 아파! 엄마, 엄마-!]

단말마의 비명.

그것은 존재가 둘로 찢어지는 고통이었다.

잔향 속에서, 나는 찢겨 나가는 소녀의 고통을 고스란히 느꼈다. 내 영혼까지 같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그 고통의 한복판, 두 기록이 갈라지는 그 균열 틈새로 내 마나를 쏟아부었다.

[잔향청취]의 응용.

기억의 파편을 강제로 붙잡아 연결하거나, 혹은 차단하는 것.

나는 유리 너머의 04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절망적인 눈동자와 마주했다.

“듣고 있지? 내 말 잘 들어.”

나는 숨을 헐떡이며 속삭였다.

이것은 대기실의 시스템에 대항하는 나만의 비밀스러운 조별 과제였다. 제출 기한은 바로 지금.

“너를 지금 깨울 수는 없어. 깨우면 밖의 아이가 사라져. 하지만 밖의 아이를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야.”

유리 너머의 소녀가 나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니까, 지금은 잠깐만 숨 쉬어. 내 잔향 속에 머물러. 내가 이 지독한 공명을 끊어줄게.”

나는 내 손바닥과 유리창 사이에 가느다란 마나의 실을 자아냈다. 7년 전, 반가온이 승인했던 ‘분리’의 절차를, 나는 거꾸로 ‘임시 봉인’의 절차로 비틀었다.

두 존재 사이의 연결 고리에 내 [잔향]을 끼워 넣어 완충 지대를 만드는 것.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래도 당장 둘 중 하나가 숨을 잃는 건 막아야 했다.

“이름은 아직 주지 마. 네 이름은…… 네가 온전히 밖으로 나갈 때, 그때 돌려받아.”

나는 마지막 마나를 쥐어짜 내어 유리창에 내 표식을 새겼다.

f급 잠행 헌터의 특기.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표식 남기기.

화아악-!

유리창에 새겨진 내 마나 표식이 희게 빛나다가 이내 사라졌다.

동시에, 등 뒤에서 거친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커헉! 허억, 허억…….]

한지율이 숨을 쉬기 시작했다. 그녀의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유리 너머의 04번도, 과호흡을 멈추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는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까와는 달랐다. 절망이 아닌, 일말의 안도감이 섞인 잠이었다.

“……하아, 하아.”

나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전신의 마나가 고갈되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경고: 시스템 절차 외 조작 감지.]

[태그 ‘공백 증인’ 침식률 급상승. 현재 68%.]

목줄이 살을 파고드는 것 같은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시스템의 룰을 어긴 대가였다.

그리고 그 대가는, 단순한 통증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머릿속에서 강제로 기억 하나가 재생되었다.

이것은 [잔향청취]가 아니다. 내 뇌리에 봉인되어 있던, 7년 전의 내 진짜 기억이었다.

7년 전. 비가 오던 날이었다.

나는 낯선 어른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그 어른은 검은 코트를 입고, 검은 우산을 쓰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내뿜는 분위기는 압도적이었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이 걸어 다니는 것 같았다.

[도윤아.]

검은 우산 아래에서, 낮고 쇳소리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가서, 04번을 데려오너라. 그 아이가 있어야, 문을 열 수 있다.]

나는 겁에 질린 채, 하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내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윽!”

기억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코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윤서하가 놀라서 나에게 달려오려 했다.

하지만 그녀보다 먼저, 대기실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는 노이즈가 울렸다.

[-방송합니다. 실습실 내 인원들은 주목해 주십시오.]

목소리가 울렸다. 그것은 7년 전 대기실의 안내 방송이 아니었다.

더 깊고, 기괴하게 뒤틀린 목소리. 마치 낡은 테이프를 천천히 감는 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공백 증인 KDY-00. 절차 01, 04번 등록 완료. 시스템 권한 일부 획득.]

그 목소리는, 내 기억 속의 ‘검은 우산’의 목소리와 닮아 있었다.

[-대기 절차를 종료합니다. KDY-00, 그리고 동행자들은 즉시 제2 실습실로 이동하십시오.]

쾅-!

우리가 들어왔던 낡은 철문이 거칠게 닫히고, 반대편 벽에 새로운 문이 나타났다. 새까만 어둠으로 가득 찬, 지옥의 입구 같은 문이었다.

스피커를 통해 마지막 안내 멘트가 울려 퍼졌다.

[-다음 과목은, ‘사망 판정’입니다. 제한 시간 내에 전원 생존하지 못할 시, ‘기록’은 삭제됩니다.]

종소리가 울렸다.

딩동댕동.

학창 시절 그렇게 듣기 싫던 소리가, 이번엔 사망 선고처럼 들렸다.

작가의 말: 04번은 깨어나지 않았지만, 완전히 잠든 것도 아닙니다. 도윤이 만든 임시 봉인은 시간을 벌었을 뿐이고, 제2 실습실은 더 나쁜 방식으로 출석을 요구할 예정입니다.

작가의 말

도윤은 이름을 삼키고 KDY-00으로 등록됐습니다. 04번은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지만, 이제 제2 실습실이 다음 과목을 시작합니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