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163화. 초기명 보관실과 문태식의 원본
162화. 초기명 보관실
손에 든 번호표가 차갑다. [0-000].
세상의 모든 숫자가 시작되기 전, 혹은 모든 것이 소거된 후의 영(零)을 겹쳐놓은 것 같은 숫자. 소각로의 불길이 등 뒤에서 일렁이고 있었지만, 내 눈앞에 솟아오른 철문은 열기를 모조리 잡아먹을 듯이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문은 이상했다.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면 형태가 일그러졌다. 평범한 헌터협회의 기록실 문 같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어린 시절 지긋지긋하게 드나들던 병원 병실 문으로 변했다. 그러다 찰나의 순간, 장례식장 지하의 시신 보관용 냉동고 문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리기도 했다.
“……환영회 치고는 분위기가 너무 무거운데.”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농담을 던졌다. 목소리가 떨리는 걸 들키지 않으려는 내 나름의 방어기제였다.
윤서하가 검집을 쥔 채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검집 끝으로 우리가 서 있는 바닥에 짧은 선을 세 번 그었다.
직선 세 개. 돌아올 길을 잃지 말라는 뜻일까, 아니면 우리가 아직 '바깥'에 속해 있다는 기준선을 확인시켜 주는 것일까. 그녀의 무거운 눈빛이 내 발치와 문을 번갈아 보았다. 시스템의 제약 때문에 내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고였다.
반가온은 코를 훌쩍이며 내 옷소매를 꽉 쥐었다. 녀석의 얼굴이 창백했다.
“형, 여기 냄새가…… 이상해요.”
“어떻게?”
“새 파일철이랑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데, 그 틈에서 자꾸 밥 짓는 냄새가 나요. 아주 오래된 베개에서나 날 법한 냄새도 섞여 있고…….”
가온의 말에 나는 문 손잡이로 향하던 손을 멈칫했다.
죽은 자들의 기록을 쌓아둔 감옥일 거라 생각했는데, 갓 지은 밥 냄새라니. 이건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누군가를 '살려두기 위해' 억지로 시간을 멈춰놓은 장소라는 뜻이다.
그때였다.
-똑, 똑, 똑.
안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열리지 않은 문 너머, 누군가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정중하고도 일정한 간격의 노크였다.
나는 번호표 [0-000]을 문 손잡이 옆 인식기에 갖다 댔다.
삑, 하는 기계음 대신 서늘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천천히 열렸다.
내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서고였다. 하지만 책장 대신 들어차 있는 것은 수천, 수만 개의 병상이었다.
병상 위에는 환자 대신 두꺼운 서류 뭉치와 이름표가 놓여 있었다.
[초기명: ***]
[대체명: KDY-102]
[보호자: (공란)]
[사망 순서: 44]
[증언자: 불일치]
대부분의 이름표는 글자가 검게 번져 읽을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지워버린 것처럼. 하지만 '보호자' 칸이 공란으로 비어 있는 것만은 공통적이었다.
우리는 홀린 듯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발소리가 기분 나쁘게 울려 퍼졌다. 병상 사이를 지날 때마다 잔향이 귓가를 스쳤다. 수많은 아이의 울음소리, 기침 소리, 그리고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그러다 발길이 멈춘 곳은 가장 구석, 유독 깨끗하게 관리된 병상 앞이었다.
[초기명: KDW-0]
내 형, 강도원의 이니셜과 '0'이라는 숫자가 붙은 침대.
침대는 비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시트를 짚었다.
“……따뜻해.”
방금 누군가 일어난 것처럼 시트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온기를 매개로 내 고유 능력인 '잔향청취'가 폭주하듯 터져 나왔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며 과거의 파편이 망막을 때렸다.
[경고: 권한 없는 사용자의 무단 열람입니다.]
[기억 동기화를 강제 차단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눈앞을 가렸지만, 찢어진 틈새로 조각난 영상이 흘러들었다.
어린아이의 뒷모습이었다. 형일까, 아니면 나일까.
아이는 침대 옆에 서 있는 성인 남성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물었다.
이름을 바꾸면, 정말로 죽는 순서도 바뀌어요?
관리국 제복을 입은 남자가 무심하게 서류를 넘기며 답했다. 얼굴은 안개에 가린 듯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목소리만은 선명했다.
순서가 바뀌는 게 아니다. 책임이 바뀌는 거지. 네가 이름을 빌려주는 순간, 그 이름에 얽힌 모든 빚과 죽음의 순서는 '원본'이 아니라 '대체물'이 짊어지게 된다.
남자의 손에 들린 서류 상단에는 빨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203호'라는 숫자와 함께.
하지만 기억해라. 보호자 칸을 비워두지 않으면 시스템은 너를 개별 존재로 인식하지 않는다. 살고 싶다면, 증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누구의 소유도 되지 마라.
잔향이 뚝 끊겼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침대 기둥을 붙잡았다.
문태식 팀장이 남겼던 메모가 머릿속을 스쳤다. '보호자는 소유자가 아니라 증언자다. 보호자 칸은 비워야 사람이 남는다.'
그건 단순한 철학이 아니었다. 이 미친 시스템 속에서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생존 조건이었던 거다.
“형, 조심해요!”
가온의 외침과 동시에 바닥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덩굴처럼 뻗어 나와 내 발목을 낚아챘다.
보관실의 시스템이 나를 'KDW-0'의 대체물로 등록하려 하고 있었다. 내 이름이, 내 존재 자체가 이 서고의 한 페이지로 박제되려는 순간이었다.
콱!
서슬 퍼런 검기가 내 발목을 감싼 그림자를 끊어냈다.
윤서하였다.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거칠게 검을 휘두르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안…… 돼…….”
그녀의 목소리가 젖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가 내 존재를 부정하려는 시스템의 흐름을 억지로 끊어낸 대가였다. 서하의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가 지직거리며 흐려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잠기고, 입가에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서하 씨!”
“……비켜요, 형!”
가온이 나를 뒤로 밀쳐내며 코를 킁킁거렸다. 녀석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여기 냄새, 너무 슬퍼요. 여기 있는 사람들…… 죽은 게 아니에요. 죽지 못하게 보관된 거예요. 누군가의 이름을 대신 쓰고, 누군가의 죽음을 대신 기다리면서…….”
나는 가온의 외침을 들으며 KDW-0의 침대 밑을 살폈다. 무언가 있었다.
먼지 쌓인 프레임 사이에 끼어 있는 낡은 종이쪽지 하나. 그리고 색이 바랜 노란색 병원 팔찌.
종이를 펼치자, 떨리는 필체로 적힌 문장이 나타났다.
[도윤아, 네가 나를 찾으러 오면 절대 내 이름을 부르지 마.]
그 뒤의 문장은 핏자국에 가려 읽을 수 없었다. 왜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지, 이름을 부르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다만 그 문장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이 내 심장을 짓눌렀다.
그때, 보관실 안쪽, 더 깊은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이번에는 훨씬 가까웠다. 바로 다음 병상, 혹은 그 너머의 벽에서 나는 소리였다.
[시스템 알림]
[초기명 KDW-0, 호흡 확인.]
[원본이 깨어납니다.]
[구역 내 모든 존재의 '증언'을 시작합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병상들에 놓여 있던 수천 개의 이름표가 동시에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윤서하가 비틀거리며 내 앞을 막아섰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려 했다.
시스템의 제약을 깨부수고, 금지된 단어를 내뱉으려는 듯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강…… 도…….”
그녀의 목소리가 채 완성되기도 전, 그녀는 왈칵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지는 와중에도 검을 바닥에 박아 넣어 지탱하며 나를 보았다. 이름을 부르는 대신, 그녀는 검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내 옷자락을 밀어냈다.
도망쳐. 아니, 보지 마.
하지만 내 시선은 이미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그것'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검은 우산은 없었다. 대신,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존재가 침대 위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내 이름이었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르려 하고 있었다.
163화. 내 이름을 부르려는 얼굴
세상은 가끔 너무 정직해서 문제다. 죽음의 문턱에 서면 주마등이 스친다더니,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딱 그랬다.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
하지만 나보다 훨씬 더 매끄러운 피부와, 단 한 번도 세상의 풍파를 겪어보지 않은 듯한 맑고 기괴한 눈동자.
KDW-0.
시스템이 ‘원본’이라 명명한 존재가 입술을 뗐다. 그 틈새로 흘러나오는 숨결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반가온이 말했던 것처럼, 갓 지은 하얀 쌀밥에서나 날 법한 따스하고 구수한 냄새가 났다. 그게 더 소름 끼쳤다. 여긴 시체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는 초기명 보관실이었으니까.
[원본이 등록 대상의 고유 식별명을 확정하려 합니다.]
[경고: 식별명이 확정될 경우, ‘대체명’의 소유권이 강제 이전됩니다.]
머릿속에서 시스템의 경고음이 비명처럼 울렸다.
놈이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강도윤이 아니라 KDW-0의 ‘대체품’ 혹은 ‘백업 데이터’로 확정되어 이 보관실의 서고 어딘가로 박제될 것이다.
“강... 도...”
놈의 입술이 내 성을 뱉어냈다. 공기가 진동했다. 단순히 소리가 울리는 게 아니라, 공간 자체가 그 이름을 받아 적기 위해 기울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안 돼!”
내가 소리치기도 전이었다. 옆에서 쿨럭, 하는 거친 기침 소리와 함께 뜨거운 액체가 내 뺨에 튀었다. 윤서하였다. 그녀는 검을 지팡이 삼아 간신히 버티면서도, 내 어깨를 거칠게 낚아챘다.
“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지 찢어지는 쇳소리만 냈다. 그녀는 나를 뒤로 밀쳐냈다. 내가 밀려난 곳은 아까 그녀가 검집 끝으로 바닥에 그어두었던 세 개의 기준선 너머였다.
그 선을 밟는 순간, 마치 투명한 막 하나를 통과한 것처럼 기괴한 압박감이 덜어졌다. 윤서하가 피를 토하며 만들어낸 임시 경계선. 그녀는 이름의 대가를 치르면서도 내가 ‘소유’당하지 않도록 나를 밀어낸 것이다.
“형, 괜찮아요? 저... 저거 냄새가 너무 이상해.”
반가온이 코를 틀어막으며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녀석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떤데?”
“강도윤 형 냄새인데, 형이 아니야. 커피 냄새도 없고, 며칠 안 감은 머리 냄새도 없고, 그... 헌터 현장에서 묻혀오는 찌든 장갑 냄새도 없어. 그냥 갓 지은 밥이랑, 어린아이 베개랑, 병원 담요 냄새만 나. 사람인데... 아직 자기 하루를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사람 냄새야.”
가온이의 표현은 늘 섬뜩할 정도로 정확했다.
하루를 살아본 적 없는 사람.
그렇다면 저기 앉아 있는 ‘원본’은, 누군가가 누려야 했을 세월을 통째로 박탈당한 채 박제된 기록체라는 뜻인가.
침대 위에 앉은 KDW-0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움직임을 쫓는 눈동자가 기계적이면서도 아이처럼 순진했다. 놈은 이름을 부르려다 멈춘 채, 내밀었던 손을 거두지 않았다.
“부르면... 네가 사라져?”
놈이 물었다. 목소리는 변성기가 채 지나지 않은 소년의 것 같았다.
“내가 네 이름을 부르면, 드디어 내가 깨어나는 거야? 형이 그랬어. 네가 나를 찾으러 오면, 그때부터 내가 진짜 내 이름으로 살 수 있다고.”
형.
강도원의 이름이 나오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는 주머니 속에서 아까 주운 아이용 병원 팔찌를 꽉 쥐었다. 그 순간, 지독한 잔향이 손바닥을 타고 뇌를 찔렀다.
― 도윤아, 이건 네 팔찌가 아니야.
― 그럼 누구 거야? 나랑 이름이 똑같아.
― 이건... 아직 태어나지 못한 아이의 거야. 형이 지켜줘야 하는 아이.
흐릿한 시야 속에서 어린 시절의 강도원이 보였다. 그는 자기보다 훨씬 작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머리맡에는 항상 갓 지은 밥그릇이 놓여 있었다. 강도원은 식어가는 밥을 보며 울고 있었다.
― 이름을 바꾸면 죽는 순서도 바뀌어요?
― 순서가 아니라 책임이 바뀐다.
관리국 남성의 목소리. 그리고 이어지는 빨간 스티커의 환영.
강도원은 가해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살려두기 위해 이름을 훔쳤다. 아니, 어쩌면 죽어야 할 순서를 뒤바꾸기 위해 스스로 ‘보호자’라는 멍에를 짊어진 것일지도.
[증언자 프로토콜이 강제 활성화됩니다.]
보관실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병상마다 붙어 있던 수만 개의 이름표가 나뭇잎처럼 파르르 떨렸다. ‘보호자 공란’이라고 적힌 수많은 서류가 허공으로 흩날리며 비명 같은 증언들을 쏟아냈다.
― 내 이름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름을 돌려받으러 갔을 땐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었다.
― 보호자 칸에 엄마 이름을 쓰자, 그날로 엄마가 나를 잊었다. 나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다.
― 공란으로 남긴 아이만 숨을 쉬었다. 기록되지 않은 것만이 죽음에서 안전했다.
소름 끼치는 진실들이 내 귓가를 스쳤다.
문태식 팀장의 메모가 머릿속을 스쳤다.
‘보호자는 소유자가 아니라 증언자다. 보호자 칸은 비워야 사람이 남는다.’
그래, 이름은 소유의 시작이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관계가 고착되고, 시스템은 그 관계를 바탕으로 서열을 매긴다. 원본과 복제, 주인과 노예, 산 자와 죽은 자.
KDW-0가 다시 입을 열었다. 놈의 뒤편으로 검은 우산의 실루엣 같은 그림자가 일렁였다. 시스템이 놈을 독촉하고 있었다. 내 이름을 불러서, 이 기괴한 보관 절차를 마무리하라고.
“강... 도...”
“내 이름 부르지 마.”
나는 놈의 말을 잘랐다. 놈이 눈을 크게 떴다.
“이름 말고, 내가 뭘 했는지 들어.”
문태식 팀장의 메모가 알려준 새 잔향이 뇌리에 박혔다. ‘증언자는 이름을 대신 부르지 않는다. 행동을 기억한다.’
“나는 네 침대 밑에 떨어진 쪽지를 주운 사람이다.”
나는 한 걸음 내디뎠다. 윤서하가 그어놓은 경계선 바로 앞까지.
“저 여자가 피를 토하면서도 지키려 했던 사람이고, 내 옆에 있는 애가 냄새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너를 깨우러 온 사람이 아니라, 네가 누군지 증언하러 온 사람이다.”
KDW-0의 눈동자에 혼란이 서렸다. 놈은 내 이름을 부르려던 입술을 달싹였다. 놈의 뒤에 있던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며 차가운 음성을 내뱉었다.
[원본이여, 식별명을 확정하라. 대체물을 회수하고 너의 자리를 증명하라.]
그것은 시스템의 명령이자, 이 보관실을 만든 자들의 의지였다. 놈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윤서하가 다시 검을 치켜들었지만, 이미 그녀의 손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놈의 입에서 나온 것은 내 이름이 아니었다.
“...문... 태... 식.”
그 이름이 울려 퍼진 순간, 보관실 전체를 지배하던 정적이 유리창 깨지듯 박살 났다.
[치명적 오류 발생.]
[초기명 KDW-0가 등록되지 않은 증언을 시도합니다.]
[보호자 공란 203호의 봉인이 해제됩니다.]
내 이름도, 강도원의 이름도 아니었다.
놈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혹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유일한 탈출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문태식 팀장의 이름을 불렀다.
쿠구궁, 하는 육중한 소음과 함께 보관실 가장 깊숙한 곳,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어 보이던 거대한 철제 병상 하나가 덜컥거리며 밀려 나왔다.
그것은 ‘보호자 공란’이라는 표식 대신, 핏자국으로 얼룩진 ‘증언자’라는 낙인이 찍힌 병상이었다.
서서히 열리는 병상 안쪽에서 차가운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안에는 문태식 팀장의 유품이라 생각했던 것들, 아니, 유품이 아닌 ‘진짜 사망 기록 원본’이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반가온이 비명을 지르며 내 팔을 꽉 쥐었다.
“형... 저거, 저 안에서... 죽은 팀장님 냄새가 나. 그런데... 아직 안 죽었어. 숨을 쉬고 있어!”
나는 굳어버린 채 열린 병상을 바라보았다.
KDW-0는 나를 보며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이제야 숙제를 끝낸 아이 같은 표정으로.
그리고 병상 안쪽, 문태식의 이름이 적힌 기록지 위로 새로운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증언자 문태식이 최종 기록을 갱신합니다.]
[강도윤의 진짜 사망 순서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보관실의 모든 불이 꺼졌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또각, 또각 들려오기 시작했다.
검은 우산을 든 남자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