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165화. 증언자 문태식의 원본과 윤서하의 보호자 칸
제목: 164-165화. 증언자 문태식의 원본과 윤서하의 보호자 칸
164화. 증언자 문태식의 원본
또각, 또각.
어둠 속을 가르는 구두 소리가 규칙적이다. 보관실의 모든 조명이 꺼진 뒤라 그 소리는 마치 텅 빈 관 속을 울리는 낙수 소리처럼 고막에 박혔다. 코끝을 찌르는 건 차가운 철분 냄새와 오래된 종이가 썩어가는 퀴퀴한 악취였다.
그리고 그 모든 냄새의 중심, 열린 철제 병상 위에 ‘그것’이 있었다.
“……팀장님?”
목구멍까지 차오른 이름을 간신히 삼켰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가 이곳에선 단순한 호출이 아니라는 걸 방금 전 뼈저리게 배웠으니까. 이름을 부르는 순간, 대상은 시스템의 소유물로 확정되거나 혹은 다른 무언가로 대체된다.
병상 위에 누워 있는 것은 내가 알던 문태식 팀장의 온전한 육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괴하게 뒤섞인 형상이었다. 수백 장의 누런 서류 뭉치가 사람의 근육 조직처럼 얽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낡은 출입증 줄과 카세트테이프의 검은 마그네틱 릴이 혈관처럼 뻗어 나와 있었다. 육체와 기록, 그리고 누군가의 유품이 강제로 융합된 듯한 모습. 하지만 그 기괴한 덩어리 안에서 분명히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거칠고 습한, 살아 있는 사람의 숨소리.
“뒤로.”
갈라진 목소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윤서하였다. 그녀의 세운 검 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방금 전 나를 경계선 밖으로 밀어내며 쏟아낸 피가 그녀의 턱 끝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보였다. 그녀의 가슴팍에 붙은 S급 헌터 이름표가, 마치 노이즈가 낀 화면처럼 흐릿하게 지워져 가고 있다는 것이.
나를 지키기 위해 시스템의 금기를 건드린 대가였다.
“서하 씨, 당신 상태가…….”
“오지 마. 선 넘지 마.”
그녀는 단호했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로 보이는 손등은 이미 창백함을 넘어 투명해지고 있었다.
그때, 내 옆에서 코를 킁킁거리던 반가온이 내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녀석의 목소리는 공포와 경악으로 뒤섞여 있었다.
“아저씨, 이거 냄새가 이상해. 문 팀장님 냄새가 나긴 하거든요? 맨날 마시던 싸구려 캔커피 냄새, 비 오는 날 사무실에서 나던 눅눅한 종이 냄새, 그리고 그… 현장에서 쓰던 가죽 장갑 냄새까지 다 나는데…….”
“그런데?”
“검은 우산 냄새가 섞여 있어. 근데 그게 팀장님 몸 안에서 나는 게 아니에요. 저 병상 바깥을 두르고 있는 선, 저 봉인선에서만 진동한다고요. 마치 안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밖에서 못 나오게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가온의 말대로였다. 검은 우산의 냄새는 문태식이라는 존재를 잠식한 게 아니라, 그를 ‘원본’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가두고 있었다.
“내가 잘 부른 거야?”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KDW-0.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한 그 존재가 병상 옆에 멍하니 서 있었다. 방금 문태식의 이름을 부른 여파인지, 녀석의 눈동자는 초점이 풀린 채 흐릿했다. 적의라곤 느껴지지 않는, 그저 칭찬을 바라는 아이 같은 표정. 그 순진함이 오히려 소름 끼쳤다.
“그래, 아주 잘 불렀다. 증언자의 원본을 깨우는 데 네 목소리만큼 적합한 열쇠는 없으니까.”
어둠 너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각, 구두 소리가 멈췄다. 보관실 입구 쪽에 서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검은 코트, 그리고 길게 뻗은 검은 우산. 그는 우산대를 지팡이처럼 짚은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증언자 문태식. 그는 아주 오래전에 폐기되었어야 할 불량품이었지. 보호자 칸을 비우는 것으로 시스템의 인과를 비틀려 했던 오만함의 산물이다.”
“폐기라고……?”
“사망 순서가 확정되지 않은 존재는 시스템의 오류일 뿐이다. 강도윤, 네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도 그가 네 순서를 가로채 숨겨두었기 때문이지. 하지만 여기까지다. 순서가 오지 않았다면, 이제 새로 배정하면 그만이니까.”
남자가 우산 손잡이를 가볍게 돌렸다. 끼익, 하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병상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으려 했지만, 나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지금은 도망칠 때가 아니었다.
잔향청취(殘響聽取).
나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이 기괴한 육체와 서류의 덩어리 안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문태식의 형태를 한 그 ‘기록’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가울 줄 알았는데, 뜨거웠다.
[잔향이 동기화됩니다.]
[대상이 ‘증언자’의 권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기록된 행동을 읽어 들입니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했다.
과거의 감식반 사무실. 낡은 형광등이 깜빡이는 소리가 들렸다. 젊은 날의 문태식이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붉은색 스티커가 붙은 서류 봉투가 놓여 있었다. 스티커 위에는 날카로운 필체로 203호라고 적혀 있었다.
문태식은 주변을 살피더니, 떨리는 손으로 서류의 한 부분을 수정액으로 지워버렸다. ‘보호자’라고 적힌 칸이었다. 그곳에 적혀 있던 이름이 무엇인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 칸을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깨끗하게 비워냈다.
도윤아, 도원아.
그의 낮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는 자신의 출입증 뒷면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긁어내고 있었다. B-0. 그 의미 모를 기호를 새기며 그는 몇 번이고 책상을 세 번 두드렸다. 탁, 탁, 탁. 규칙적인 노크 소리. 그건 감식반에서 신입들에게 가르치던, ‘상황 종료’를 의미하는 구식 암호였다.
보호자는 소유자가 아니다. 증언자는 이름을 부르지 않고 행동을 기억할 뿐이다. 그래야 너희가 산다.
다시 시야가 돌아왔다. 내 눈앞의 기괴한 덩어리가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팀장님.”
나는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그가 내게 남겼던, 시스템이 가둘 수 없는 ‘행동’을 입 밖으로 냈다.
“내가 처음으로 야근하다 도망치려다 들켰던 날. 팀장님은 화를 내는 대신 내게 자기 출입증을 던져주셨죠. 야식값 대신이라면서. 그 출입증 뒷면에 새겨진 흠집, 내가 다 봤습니다.”
병상 위의 서류 뭉치가 파르르 떨렸다.
“기록되지 않은 초과 근무 수당을 챙겨주겠다며 내 활동 일지를 매번 공란으로 비워두셨던 것도 압니다. 그게 나를 시스템에서 지워주려던 당신의 방식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고요.”
그건 단순한 회상이 아니었다. 증언자에 대한 ‘행동 증언’이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증언자 문태식의 원본이 활성화됩니다.]
[임시 기록 갱신을 시작합니다.]
병상 위에서 마그네틱 테이프들이 비명을 지르며 풀려나왔다. 누런 서류들이 허공으로 솟구치며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 중심에서, 문태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건 목소리라기보다 수만 장의 종이가 부딪히며 내는 마찰음에 가까웠다.
……도윤아.
지직거리는 노이즈 섞인 목소리.
네…… 순서는…… 내가 한 번…… 훔쳤다. 하지만…… 두 번째는…… 네가 직접…… 거절해야 해.
그의 목소리가 끊길 듯 이어졌다. 나는 그의 형체 없는 손이 내 옷자락을 붙잡는 것을 느꼈다.
검은 우산을…… 보지 마라. 손잡이를…… 봐.
손잡이?
나는 고개를 돌려 어둠 속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우산을 짚고 서 있었다. 하지만 문태식의 경고를 듣고 나서야 보였다.
그의 검은 우산 손잡이 부분.
거기에는 내가 병원 팔찌 잔향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재질의 흰색 고리가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 고리 위에는 이름 대신 날카로운 글자가 박혀 있었다.
증언자 0 혹은 보호자 203.
“눈치가 빠르군. 하지만 너무 늦었어.”
남자가 차갑게 읊조리며 우산을 들어 올렸다.
“증언자가 깨어났다면, 이제 증언을 받아낼 시간이다. 이 보관실에 잠든 모든 ‘공란’들을 채울 시간이군.”
우산이 펼쳐지려 했다. 저 우산이 펼쳐지는 순간, 이 보관실에 보관된 수천 명의 이름 없는 죽음들이 시스템의 소유로 확정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나도, 그리고 지금 내 곁에서 사라져가는 윤서하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남자를 향해 뛰어들었다. 내 손에는 어느새 문태식의 병상에서 튕겨 나온, 날카로운 출입증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뒷면에 B-0가 새겨진 바로 그 출입증이었다.
“그 손잡이, 내가 챙기죠.”
내가 우산 손잡이의 흰 고리를 낚아채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보관실 전체를 울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허공에 붉은 글자로 박혔다. 문태식이 마지막 힘을 쥐어짜 시스템의 우선순위를 뒤집은 결과였다.
[증언자 문태식이 최종 권한을 행사합니다.]
[강도윤의 사망 순서 배정을 연기합니다.]
성공인가, 라고 생각한 순간.
남자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우산이 완전히 펼쳐졌고, 검은 그림자가 보관실 바닥을 집어삼켰다. 시스템 메시지가 비명처럼 바뀌었다.
[경고: 대체 경로를 탐색합니다.]
[증언자의 보호 대상이 변경되었습니다.]
[강도윤을 대신하여, 증언자 윤서하의 ‘보호자’ 칸을 강제 개방합니다.]
“……아.”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내 등 뒤에 서 있던 윤서하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가슴 위에 떠 있던 이름표가 완전히 깨져나가고, 그 자리에 시커먼 공란이 입을 벌렸다.
[윤서하의 사망 순서가 현재 시간부로 확정되었습니다.]
검은 우산의 남자가 나를 보며 우아하게 목을 꺾었다.
“자, 이제 누가 누구를 증언할 차례지?”
나는 굳어버린 손으로, 바닥에 쓰러진 윤서하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동자에서 빛이 급격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문태식의 병상은 다시 고요해졌고, 어둠 속에서 검은 우산의 그림자만이 기괴하게 길어졌다.
165화. 윤서하의 보호자 칸
윤서하의 손등에 닿은 내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S급 헌터의 신체 능력은 보통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다. 그녀의 체온이 이토록 급격히 떨어진다는 건, 지금 그녀를 갉아먹고 있는 게 단순한 부상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내 눈앞으로 형광색 시스템 메시지가 비명처럼 점멸했다.
[경고: 대상 ‘윤서하’의 보호자 칸이 비어 있습니다.]
[사망 순서 확정을 위해 적합한 ‘보호자’를 스캔합니다…….]
[가장 인접한 증언자, ‘강도윤’을 후보로 등록합니다.]
검은 우산의 사내가 낮게 웃었다. 우산 아래로 비치는 그의 입술이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자, 이제 누가 누구를 증언할 차례지?”
그의 질문은 독이었다.
내 이름을 저 빈칸에 넣는 순간, 윤서하는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보호자’라는 형식적인 톱니바퀴가 채워질 테니까. 하지만 그 대가는 명확했다. 보호자라는 명목하에 이루어지는 완전한 소유. 기록상으로 그녀는 내 종속물이 되고, 나는 그녀의 죽음까지 관리할 권한을 얻게 된다.
그건 구원이 아니라 박제다.
“도윤아, 왜 그래? 그냥 이름을 쓰면 되잖아.”
옆에서 지켜보던 KDW-0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을 한 내 원본. 녀석은 이 상황이 아주 단순한 퍼즐이라도 되는 양 천진하게 굴었다.
“보호자면 좋은 거 아니야? 네가 저 여자를 가지면 되잖아. 그럼 죽지 않아도 되는데.”
“닥쳐.”
나는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가진다니. 녀석은 ‘사람’과 ‘기록’의 차이를 모른다. 아니, 어쩌면 시스템 그 자체가 녀석의 사고방식일지도 몰랐다.
손바닥에 땀이 찼다. 문태식 팀장이 남긴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두 번째는 네가 직접 거절해야 한다.
첫 번째는 팀장이 내 순서를 훔쳐서 나를 살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내가 윤서하를 살리겠다는 욕망에 잡아먹혀 그녀의 보호자 칸을 채우는 순간, 우리는 둘 다 시스템의 영원한 노예가 될 것이다.
그때였다.
바닥에 쓰러진 윤서하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검자루를 놓지 않고 있었다. 피 묻은 입술이 달싹였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의 눈동자가 향하는 곳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그어놓은 세 번째 경계선, 그 너머를 보고 있었다.
하지 마.
그녀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고통을 감수하느니, 차라리 시스템의 부품으로 파기되겠다는 고집. 그건 S급 헌터로서의 자존심이 아니라, 윤서하라는 인간이 평생 지켜온 유일한 선이었다.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진짜…… 냄새 지독하네.”
“가온아, 뭐가 느껴져?”
“언니한테서 나는 냄새요. 원래는 서늘한 검 냄새랑, 비 오는 날 입는 코트 냄새, 그리고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편의점 커피 냄새가 섞여 있었거든요? 근데 지금 그 보호자 칸이라는 거 안쪽에서…… 남의 이름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썩은 냄새가 나요. 누가 억지로 밀고 들어오면, 저 언니는 그 자리에서 바로 부패할 거예요. 살아있어도 산 게 아닌 상태로.”
반가온의 말은 쐐기였다.
나는 검은 우산의 사내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는 우산 손잡이에 달린 ‘증언자 0’ 혹은 ‘보호자 203’이라고 적힌 흰 고리를 만지작거리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강도윤. 네가 거절하면 이 여자는 이 자리에서 ‘처리’된다. 시스템은 공란을 허용하지 않거든. 네가 이름을 넣으면 이 여자는 네 것이 되고 목숨을 부지하겠지. 아주 합리적인 거래 아닌가?”
“합리적이라…….”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내 인생에서 합리적인 일이 있었던가? F급 헌터가 감식반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죽은 놈들의 잔향을 듣다가 내 사망 플래그를 직접 주으러 다니는 이 상황 자체가 비합리적이었다.
나는 윤서하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표 대신, 그녀가 지금까지 했던 행동들을 떠올렸다. 잔향청취의 감각이 극대화되며 그녀의 과거가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밀려왔다.
[시스템이 강도윤의 증언을 대기합니다.]
[보호자 성명을 입력하십시오.]
나는 입을 열었다.
“이 여자는 내 보호자가 아니다.”
검은 우산의 사내의 눈썹이 꿈틀했다.
“또한 나는 이 여자의 보호자가 될 자격이 없다. 이름으로 묶는 방식은 거절한다.”
“그럼 죽이겠다는 뜻인가?”
“아니, 나는 증언할 뿐이야.”
나는 윤서하가 바닥에 그어놓은 세 개의 선을 가리켰다.
“이 사람은 내 발목을 붙잡던 그림자를 자른 사람이다. 내 이름을 부르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끝내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나를 사지(死地)에서 밀어낸 사람이다. 목소리를 잃어가는 순간에도 자신보다 타인의 경계선을 먼저 걱정했던 미련한 인간이지.”
반가온이 내 옆으로 다가와 한 걸음을 보탰다.
“맞아요. 이 사람은 누군가의 소유물이 될 냄새가 아냐. 비바람이 몰아치는 현장에서도 자기 검 냄새를 잃지 않는 사람이지. 누군가의 보호자 칸에 들어가기엔 너무 날카롭다고요.”
KDW-0가 멍하니 우리를 보다가, 툭 던지듯 한마디를 보탰다.
“……저 사람은 네 이름을 부르지 않았어. 그런데 너를 보냈어. 그건 보호자가 하는 일이 아니야?”
세 사람의 목소리가 보관실의 무거운 공기를 갈랐다.
단순히 이름을 기입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우리가 한 것은 시스템이 규정한 ‘관계’를 비트는 증언이었다.
[시스템 오류 발생.]
[‘보호자’ 정의와 증언 내용이 충돌합니다.]
[기록물의 본질적 특성을 재확인합니다…….]
눈앞의 상태창이 지지직거리며 노이즈를 일으켰다. 검은 우산의 사내가 들고 있던 우산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여유롭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증언으로 시스템을 오염시키겠다고? 고작 F급 주제에!”
“F급이니까 하는 거야. 우린 잃을 게 이름표밖에 없거든.”
[보호자 칸 변질.]
[소유 관계 확정 실패.]
[대체 경로 탐색…….]
[임시 증언자 칸 생성: 윤서하.]
윤서하의 가슴 위에 떠 있던 붉은색 ‘보호자’라는 글자가 파랗게 변하며 ‘증언자’로 바뀌었다. 사망 순서가 확정되는 대신, 그녀는 이제 나처럼 ‘기록을 증명하는 자’의 지위를 임시로 부여받은 것이다.
윤서하의 창백했던 뺨에 미미하게 혈색이 돌았다. 그녀가 감았던 눈을 아주 천천히 떴다. 그녀는 여전히 말을 할 수 없었지만, 떨리는 손으로 검 끝을 움직여 바닥에 네 번째 선을 그었다.
앞선 세 개의 선이 ‘거부’와 ‘경계’였다면, 네 번째 선은 달랐다.
그것은 퇴로를 차단하는 선이 아니었다. 안쪽으로, 더 깊은 곳으로 향하는 유도선이었다.
그때, 문태식 팀장의 ‘원본’이 보관된 병상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탁, 탁—
짧은 정적.
—탁.
기존의 규칙적인 세 번의 노크가 아니었다. 쉼표가 섞인, 변형된 암호.
나는 그 리듬을 알았다. 감식반에서 긴급 상황 시 사용하는 ‘다음 구역 개방’ 신호였다.
윤서하가 그은 네 번째 선의 끝에서 공간이 비틀리기 시작했다.
검은 우산의 사내가 우산을 휘둘러 우리를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그림자들이 선을 따라 문 형태로 형상화되었다.
그 문 위에 붙은 문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203호 보호자 대기실>
그리고 그 밑에, 죽은 듯이 가라앉아 있던 이름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보호자 203: 강도원]
내 형의 이름이었다.
동시에 문 너머에서 차갑고도 다정한, 그러나 뼈저리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아.”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검은 우산의 사내조차 그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네가 누구를 버릴 차례인지 정해야지.”
설계자처럼 정교하게 다듬어진 목소리.
형은 단 한 번도 나를 지키겠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내가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를 물어보던 사람이었다.
나는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그 문 안쪽을 응시했다.
윤서하의 보호자 칸은 비웠지만, 이제 내 인생의 보호자 칸에 숨어 있던 진짜 괴물과 마주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