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161화. 후보 0번과 훔친 이름
제목: 160-161화. 후보 0번과 훔친 이름
160화. 후보 0번의 자격 검증
발밑에서 솟아오른 그림자는 액체처럼 끈적였다. 장화 끝부터 타고 올라오는 그 감각은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다. 누군가 내 존재의 밑바닥을 붙잡고 ‘너는 누구냐’고 묻는 듯한 지독한 압박감이었다.
[최우선 순위, 후보 0번의 자격 검증을 시작합니다.]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낡은 소각로의 그을린 벽이 하얗게 탈색되더니, 이내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공간으로 재조립되었다.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소독약 냄새. 삐삐거리는 기계음. 그리고 차가운 형광등 불빛.
헌터협회 민원실인가 싶었는데, 고개를 돌리니 병원 접수창구의 유리벽이 보였다. 그 너머에는 사람 대신 서류 뭉치들이 가득 쌓여 있었고, 천장에는 낡은 번호표 호출기가 매달려 있었다.
[피보호자 강도윤은, 스스로가 ‘강도윤’임을 증명하십시오.]
“증명? 그런 건 보통 민원실 2번 창구에서 초본 떼면 해주는 거 아닌가요? 수수료 400원인데.”
농담을 던져봤지만, 돌아오는 건 서늘한 침묵뿐이었다.
그림자는 어느새 내 무릎까지 차올랐다. 단순히 묶어두는 게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경계선을 야금야금 지워나가는 기분이었다.
“도윤 씨!”
멀리서 반가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형체는 안개 너머에 있는 것처럼 흐릿했다.
“여기 냄새가 이상해요! 도윤 씨한테서 나던 커피 냄새나 세제 냄새가 하나도 안 나요! 그냥…… 잉크 냄새랑 소독약 냄새만 가득해요. 가짜예요, 여기!”
가온이의 외침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나는 지금 소각로 지하에 있고, 이건 시스템이 내 머릿속 기록을 파헤쳐 만든 가상 공간이다.
그때, 허공에서 반투명한 홀로그램 서류 한 장이 내려왔다. 헌터협회 공식 양식이었지만, 내용은 전혀 공식적이지 않았다.
[질문 1. 피실험체 명칭: 강도윤. 생년월일: 19XX년 X월 X일. 맞습니까?]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압박 속에서,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해야 한다. 하지만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저 질문에 ‘예’라고 답하는 순간, 나는 저 서류 속에 박제된 ‘기록물’로 고정될 것이다. 0번 소장품. KDY-0라는 이름의 샘플로.
[질문 2. 첫 번째 각성 시점: 7세, OO병원 302호실. 맞습니까?]
이번엔 질문과 동시에 내 팔목에 환자용 플라스틱 팔찌가 채워졌다. 차가운 감촉에 소름이 돋았다.
그 팔찌를 본 순간, 내 고유 능력인 ‘잔향청취’가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왔다.
도윤아.
기억 속의 목소리. 형, 강도원이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어린 나를 내려다보는 형의 그림자가 보였다. 형은 내 손목의 팔찌를 매만지며 낮게 속삭였다.
누가 네 이름을 물어보면, 이름 말고 네가 한 일을 말해.
왜?
이름은 남이 지어준 거잖아. 이름으로 대답하면 넌 그놈들 서랍 속에 들어가는 거야. 하지만 네가 뭘 했는지는 너만 아는 거거든.
형의 목소리가 파편처럼 흩어졌다.
시스템의 질문이 계속되었다.
[질문 3. 보호자 성명: 강도원. 관계: 형제. 맞습니까?]
나는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그림자가 이제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여기서 부정하면 ‘신원 불명’으로 처리되어 폐기될 것이고, 긍정하면 ‘기록체’가 되어 시스템의 소유가 된다.
그때, 흐릿한 공간의 경계를 가르고 차가운 검광이 번쩍였다.
윤서하였다. 그녀는 나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검 끝으로 바닥을 강하게 내리쳤다.
챙그랑!
바닥의 타일이 깨지며 선이 그어졌다. 그녀는 말을 할 수 없는 제약 속에서도 눈으로 외치고 있었다.
서류를 보지 마. 시스템이 정해둔 칸 안으로 들어가지 마.
나는 그녀의 의중을 읽었다. 그리고 시스템의 서류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질문이 틀렸어.”
[……?]
“내 생일이 언제인지, 내 등급이 뭔지는 중요하지 않아. 그건 니들이 서류함에 처박으려고 만든 인덱스잖아.”
나는 팔목의 환자 팔찌를 이빨로 물어뜯어 바닥에 뱉어버렸다.
“나는 7세 병실에서 도망친 실험체가 아니라, 302호 침대 밑에서 형의 손을 잡고 끝까지 버텼던 놈이다. 그리고 문태식 팀장 이름을 사칭한 니들의 가짜 서류를 발로 걷어차 준 사람이지. 그게 나다.”
[데이터 일치율 하락. 피보호자 강도윤의 신원 확인에 오류가 발생합니다.]
시스템의 기계음이 미세하게 떨렸다.
반가온이 외쳤다.
“냄새가 바뀌었어요! 소독약 냄새가 깨지고 있어요!”
공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하얀 병원 벽 뒤로 시커먼 소각로의 불길이 비쳤다.
하지만 시스템은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최후의 수단인 듯, 내 눈앞에 거대한 결재판 하나를 들이밀었다.
[후보 0번의 자격 검증 최종 단계.]
[보호자 등록 서류: 피보호자 강도윤의 보호자로 ‘강도윤’ 본인을 등록하시겠습니까?]
이건 함정이다.
나 자신을 나의 보호자로 등록한다. 얼핏 들으면 스스로 주권을 찾는 완벽한 해결책처럼 들린다. 하지만 그건 결국 나를 ‘보호자’라는 시스템의 관리직이자, ‘피보호자’라는 소장품의 틀 안에 동시에 가두는 행위였다.
내가 나를 소유하는 순간, 나는 영원히 이 기록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때,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문태식 팀장의 깨진 출입증 케이스가 눈에 들어왔다.
그 케이스 뒤편, 아까 발견했던 메모의 뒷장이 비쳐 보였다. 잔향청취가 다시 한번 그 짧은 문장을 내 귓가에 박아넣었다.
보호자는 소유자가 아니라 증언자다. 보호자 칸은 비워야 사람이 남는다.
팀장님다운 지독한 원칙주의적 조언이었다.
보호자가 없으면 불안정하고 위험하겠지만, 적어도 누군가의 소유물은 되지 않는다.
나는 허공의 결재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서명을 독촉하듯 펜 모양의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나는 펜을 잡지 않았다. 대신, 현장 정리 일을 하며 묻은 장갑의 거친 소각재와 내 손바닥의 피를 섞어 결재판의 ‘보호자’ 칸을 문질러버렸다.
서명이 아니라, 지워버리는 선택.
[오류! 보호자 칸이 훼손되었습니다. 등록 절차를 진행할 수 없습니다.]
[후보 0번의 자격 검증…… 판정 보류.]
주변의 공간이 유리창 깨지듯 박살 났다.
하얀 병실도, 차가운 민원실도 사라졌다. 다시 매캐한 연기와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나는 소각로 지하층이었다.
발을 묶고 있던 그림자가 힘없이 흩어졌다.
“하아, 하아…….”
무릎을 꿇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이 두들겨 맞은 듯 아팠다.
윤서하가 급히 다가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의 눈에 안도감이 서렸지만, 입술은 여전히 굳게 다물려 있었다. 시스템의 제약이 아직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도윤 씨! 괜찮아요?”
반가온이 달려와 내 상태를 살폈다.
나는 대답 대신 바닥에 떨어진 문태식 팀장의 메모를 다시 집어 들었다. 메모는 이제 힘을 잃은 듯 바스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공간의 균열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 허공에서 아주 낯익은, 하지만 지금은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아.
그건 시스템의 기계음도, 과거의 잔향도 아니었다.
방금 내린 결정에 반응해 어디선가 실시간으로 건너온 듯한, 생생하고 서늘한 목소리.
네 이름을 내가 처음 훔쳤을 때, 너는 울지도 않았지.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은 소각로 더 깊은 곳, 아직 우리가 가보지 못한 암흑 속이었다.
여전히 빈칸으로 남으려 하다니. 장하네. 내 동생.
목소리의 주인은 형, 강도원이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내가 알던 다정함이 없었다. 마치 자기가 만든 장난감이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는 설계자의 즐거움만 가득했다.
형이 내 이름을 훔쳤다고?
그럼 지금껏 내가 ‘강도윤’으로 살아온 기록들은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균열 너머에서 검은 우산을 쓴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161화. 네 이름을 내가 처음 훔쳤다
균열 너머에서 걸어 나온 것은 거대한 검은 우산이었다.
실내에 비가 내릴 리 없는데도, 그 우산 위로는 투둑, 투둑, 하고 기분 나쁜 수분음이 튀었다. 소각로의 붉은 불빛이 일렁이는 공간 속에서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리고 그 그림자 끝에서, 아주 익숙하면서도 지독하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이름을 내가 처음 훔쳤을 때, 너는 울지도 않았지.”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려다 멈췄다. 여기서 물러나면 시스템이 파놓은 ‘0번’이라는 구덩이에 완전히 매몰될 것 같았다. 나는 떨리는 숨을 억지로 누르며 입술을 비틀었다.
“형이야? 아니면 형 목소리로 사기 치는 보이스피싱이야? 요즘 세상이 흉흉해서 내가 모르는 번호는 안 받거든.”
유머는 내 마지막 방어기제다. 농담이라도 던지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눈앞의 그림자에게 잡아먹힐 것 같았으니까.
그때, 옆에 서 있던 반가온이 짧게 신음하며 코를 감싸 쥐었다. 녀석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도윤이 형, 이상해. 냄새가 섞여 있어.”
“섞여 있다니?”
“싸구려 초콜릿 냄새, 병원 담요에서 나는 그 눅눅한 냄새……. 이건 진짜 형 냄새가 맞는데, 그게 반이야. 나머지 반은……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파일철이랑 관리국 잉크 냄새야. 방금 인쇄해서 나온 사람처럼.”
가온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냄새로 기록을 읽는 감정사가 ‘방금 인쇄된 사람’이라고 표현할 정도면, 저건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라는 뜻이다.
동시에 옆에서 차가운 금속음이 들렸다. 윤서하가 검을 뽑아 바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검 끝이 향한 곳은 명확했다. 검은 우산을 쓴 그림자의 발치.
소각로의 화염이 등 뒤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내 앞쪽으로 길게 뻗어야 정상이다. 하지만 저 우산의 그림자는 마치 독자적인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내 발등을 향해 역방향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그림자가 닿은 바닥에는 발자국이 남지 않았다.
“도윤아, 억울해하지 마라. 그 이름은 원래 네 것이 아니었으니까.”
우산 아래의 목소리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내가 훔친 건 네 이름만이 아니다. 네가 죽어야 할 ‘순서’였지.”
그 순간, 검은 우산 끝이 바닥에 닿으며 가벼운 파열음을 냈다.
[특수 스킬: ‘잔향청취’가 강제 발동합니다.]
[대상: 낡은 우산 끝에 남은 파편적 기억]
이명이 머릿속을 찢고 들어왔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더니, 소각로의 풍경이 순식간에 낡은 병동의 복도로 바뀌었다.
‘302호가 아니야. 여긴 203호인데.’
어린 시절의 내 목소리였다. 나는 병원 복도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내 앞에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형, 강도원이 서 있었다. 형의 손에는 헌터협회 관리국의 로고가 박힌 서류 뭉치가 들려 있었다.
형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한 장을 찢어냈다. 그리고 내 손목에 채워진 하얀 환자 팔찌를 거칠게 풀어냈다.
‘도윤아, 잘 들어. 이제부터 네 이름은 강도윤이야.’
‘……내 이름은 원래 그거잖아, 형.’
‘아니. 넌 이제부터 이 팔찌의 주인이야.’
형이 내 손목에 새로 채워준 팔찌에는 ‘KDY’라는 이니셜과 함께 빨간 스티커 하나가 붙어 있었다. 그리고 형이 바닥에 버린 원래의 내 팔찌에는, 지워진 글씨 사이로 ‘KDW-0’라는 흐릿한 표식이 보였다.
‘내가 죽을 순서를 내가 가져갈게. 너는 이름만 빌려서 살아.’
화면이 지직거리며 깨졌다. 환각 너머로 다시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보였다. 우산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은 물이 아니라, 검은 잉크처럼 보였다.
“기억났니? 너는 누군가의 대역으로 선택된 소장품에 불과해. 네가 강도윤이라는 이름을 고집할수록, 너는 시스템이 정해둔 ‘0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림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아까 내가 서명을 거부했던 보호자 서류가 들려 있었다.
“이름을 돌려줘라. 네가 강도윤이 아니라고 인정하는 순간, 너를 옥죄는 보호자 칸은 사라질 거야. 너는 자유로워질 수 있어. 윤서하나 저 꼬맹이, 그리고 죽은 문태식이 남긴 그 구질구질한 증언들 따위에 얽매일 필요도 없지.”
달콤한 유혹이었다. 내가 강도윤이 아니라고 말하면, 이 미친 시스템의 검증 단계는 깨질 것이다. KDY-0라는 번호도 나를 따라오지 못하겠지.
하지만.
“자유?”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자 묻어있던 소각재가 검게 번졌다.
“야, 형. 아니, 형을 흉내 내는 인쇄물.”
“…….”
“이름이 빌린 거라면, 그동안 내가 낸 세금이랑 연금은 누가 내주는 건데? 내가 현장에서 구르면서 묻힌 그 구역질 나는 괴물 피랑, 욕지거리 섞어가며 쓴 보고서들은? 그것도 다 주인 없는 대역이 한 짓이야?”
나는 윤서하를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검을 쥔 채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반가온. 녀석은 내 옷소매를 꽉 쥐고 있었다. 죽은 문태식 팀장이 남긴 메모의 감촉이 주머니 속에서 뜨겁게 느껴졌다.
“이름이 가짜여도 상관없어. 내가 한 짓이랑, 내가 진 빚은 다 내 거니까. 그 사람들이 증언해 준 ‘나’를, 그냥 이름 하나 돌려준답시고 지울 순 없거든.”
나는 보호자 서류를 향해 손을 뻗는 대신, 바닥에 떨어진 소각용 삽을 걷어찼다.
“보호자 칸은 비워두기로 했어. 누구한테 소유되는 건 질색이라서 말이야. 특히 너처럼 잉크 냄새 풀풀 풍기는 설계자한테는 더더욱.”
검은 우산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다정함이 섞여 있던 목소리에서 온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차가운 시스템의 소음이었다.
[경고: 후보 0번이 자격 검증을 거부합니다.]
[시스템 오류 발생. ‘원본 보관실’로의 경로가 강제 개방됩니다.]
우산 그림자가 뒤로 밀려나며, 소각로 한복판의 바닥이 거칠게 뜯겨 나갔다. B-0층 처리실보다 더 깊은 곳. 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녹슨 철문 하나가 솟아올랐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냉기가 쏟아졌다. 나는 보았다. 문 안쪽에 놓인, 주인 없는 빈 침대 하나를. 그리고 그 침대 머리맡에 붙은 이름표.
‘KDW-0’
강도윤(KDY)이 아니라 강도원(KDW).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지금 내 이름을 쓰고 있는 나는 누구고, 저 ‘0번’의 진짜 주인은 누구란 말인가.
검은 우산의 주인은 문 안으로 천천히 사라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좋아. 네가 그 이름을 끝까지 쓰겠다면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기억해라. 원래의 주인은 아직 숨을 쉬고 있어.”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자, 귀를 찢는 듯한 경보음이 멈췄다. 주변을 감싸고 있던 병원 민원실의 환각이 깨져나가고 다시 퀘퀘한 냄새가 진동하는 지하 소각로로 돌아왔다.
서하 씨가 검을 거두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눈에 짙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가온이는 내 소매를 놓지 못한 채 바닥을 가리켰다.
“형…… 저거.”
그림자가 사라진 자리, 타버린 종이 더미 위에 작은 금속 조각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헌터용 인식표가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 관리국 초기 모델에서나 쓰였을 법한 번호표였다.
[보관실 출입키: 0-000]
[장소: 초기명(初期名) 보관실]
손바닥에 닿은 번호표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네 이름의 원래 주인을 만나러 가자고? 거참, 사양하고 싶은 제안이네.”
나는 번호표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름이 훔친 것이든, 빌린 것이든 상관없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내 이름의 진짜 가격이 얼마인지, 그리고 그 이름을 팔아넘긴 대가로 누가 저 어둠 속에 갇혀 있는지 확인해야겠다.
“서하 씨, 가온아. 퇴근은 좀 늦어질 것 같다.”
나는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방금 솟아오른 지하 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지옥 같은 검증은 이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