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0-291화. 사망의 증명과 보증인이 부재 중인 죽음
290화. 사망의 증명, 책임의 전가
손가락 끝에 닿은 종이의 질감은 서늘했다. 일반적인 A4 용지의 매끄러움이 아니었다. 습기를 머금어 눅눅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사람의 피부 조직처럼 질기고 끈적이는 불쾌한 촉각.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 그 서류를 들어 올렸다.
우비 밑에 숨겨져 있던 그 문서는, 빛바랜 황색 바탕 위에 검은 잉크가 마치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망 기록 이전 동의서」
제목을 읽는 순간, 관자놀이 부근에서 찌릿한 통증이 달렸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글자들이 제멋대로 자리를 바꾸기 시작했다. 피보호자 칸에는 ‘반가온’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가도, 어느새 ‘강도윤’이라는 세 글자로 뒤바뀌었다. 보호자 칸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의 이름이 적혀 있어야 할 그 자리는 마치 블랙홀처럼 시커멓게 타버린 구멍이 나 있었고, 그 구멍 너머로 수많은 이름이 명멸했다.
“……이게 뭐야. 요즘은 죽음도 택배처럼 주소지 이전이 가능해진 건가? 고객님, 요청하신 사망 기록이 오배송되어 다시 수거하러 왔습니다, 뭐 그런 거냐고.”
입술 사이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건 눈앞의 현실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뇌가 파업을 선언하기 전에 농담이라는 완충재를 끼워 넣는 것뿐이다.
그때, 「잔향청취」가 허락도 없이 멋대로 발동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무겁고 습한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었다.
― [행정 안내: 사망 기록 이전 서비스에 연결되었습니다. 본 서비스는 ‘존재의 중첩’을 이용한 합법적인 책임 전가 프로세스입니다. 주의: 한 번 이전된 죽음은 반품이 불가능하며, 수취인이 거부할 경우 보호자의 영혼으로 대물변제 처리됩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지독하게 사무적이었다. 마치 구청 민원실의 만성 피로에 시달리는 공무원 같은 톤. 하지만 그 내용은 지독하게 악취가 났다.
― [고객님, 아이를 살리고 싶으신가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아이의 이름 뒤에 붙은 ‘사망 확정’ 도장을 떼어내서, 대신 죽어줄 다른 아이의 등 뒤에 붙이면 됩니다. 참 쉽죠? 서명은 혈흔으로 부탁드립니다. 아, 인주는 저기 저 쓰러진 아이의 상처를 활용해 주시고요.]
“미친 새끼들.”
나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왔다. 잔향이 들려주는 풍경은 지옥도 그 자체였다. B-04 시스템은 단순한 물건 보관소가 아니었다. 이건 거대한 ‘죽음의 세탁기’였다. 누군가의 죽음을 다른 누군가에게 떠넘겨서, 통계상의 ‘사망’을 지우고 ‘생존’을 조작하는 연금술.
“도윤 씨, 여기를 봐요.”
옆에서 서류를 같이 들여다보던 윤서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서류 하단의 작은 주석을 가리켰다.
“이 문서, 논리적으로 허점이 있어요. ‘사망 기록’은 분명히 이전되었다고 나오는데, 정작 그 죽음을 불러온 ‘원인’에 대한 항목은 비어 있어요.”
“원인이 비어 있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누가 죽었는지는 장부를 수정해서 속일 수 있었지만, ‘왜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인과율은 옮기지 못했다는 뜻이에요. 사고였든, 살해였든, 혹은 어떤 저주였든 간에…… 그 원인은 여전히 원래의 대상을 쫓고 있다는 거죠.”
윤서하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그녀는 내 손목을 잡고 서류를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사망 기록을 옮겨서 아이를 살려뒀지만, 그 아이는 평생 ‘자신을 죽이려 했던 원인’에 노출된 채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죽은 상태로 처리되었으니 보호받을 수도 없죠. B-04는 그 아이를 숨겨주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 유령으로 박제해버린 거예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반가온이 왜 그토록 위태로워 보였는지, 왜 그녀의 주변에는 늘 설명할 수 없는 사망 플래그가 들끓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녀는 서류상으로는 이미 죽은 존재였고, 세상의 시스템은 그녀를 지우기 위해 끊임없이 ‘오류 수정’을 시도하고 있었던 거다.
“……내가 그 기록을 대신 가져갔다는 건가.”
어린 시절의 내가 했던 약속. 내 이름을 빌려주겠다고, 내가 보호자가 되겠다고 했던 그 오지랖 넓은 맹세가 이 끔찍한 시스템의 기폭제가 된 걸까.
“확정할게요.”
백연이 끼어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단호했다. 그녀가 카메라 렌즈를 서류에 바짝 들이댔다.
셔터 소리가 회수실의 정적을 깼다. 찰칵,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졌다. 순간적으로 서류 위의 글자들이 고정되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대가는 즉각적이었다.
“윽……!”
백연의 신음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 위로 검은 잉크 같은 얼룩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녀의 피부 아래에 검은 물감을 주입한 것처럼, 기분 나쁜 얼룩은 쇄골을 타고 어깨 너머로 뻗어 나갔다.
“백연 씨! 멈춰!”
“아니요, 지금 고정하지 않으면…… 이 서류는 다시 바뀔 거예요. 현재를 증언하는 게 제 역할이니까요.”
그녀는 고집스럽게 셔터를 계속 눌렀다. 그녀의 몸에 번지는 검은 얼룩은 ‘현재’를 고정하기 위해 그녀가 지불하는 수수료였다. 세계의 인과를 억지로 붙잡아두는 대가로, 그녀 자신의 존재가 오염되고 있었다.
그때, 바닥에 놓여 있던 녹음기에서 다시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흘러나왔다.
― [계약 성립이다. 그럼 네 사망 기록부터 옮기자.]
어른의 목소리. 아까보다 훨씬 선명했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다.
문태식.
내가 아는 그 늙은 여우의 목소리와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하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지금의 문태식보다 조금 더 젊고, 조금 더 날이 서 있으며, 무엇보다…… 감정이 거세된 듯한 기계적인 어조.
그가 가담자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그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는 건가?
― [……첫 번째 보호자가 도착했군.]
녹음기 속의 목소리가 마치 지금의 나를 보고 있기라도 한 듯 말을 이었다.
“첫 번째 보호자?”
내가 되물었지만, 녹음기는 다시 침묵에 빠졌다. 첫 번째 보호자라니. 내가 반가온의 이름을 대신 짊어졌다면 내가 보호자여야 한다. 하지만 녹음기는 나를 지칭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이 시스템을 처음 설계하고, 이 잔인한 교환 일기를 처음 써 내려간 진짜 ‘주인’을 부르는 것 같았다.
쿠구궁―.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낡은 금속 캐비닛 B-04-0001이 양옆으로 갈라지며 바닥 아래로 이어지는 은밀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습한 흙냄새와 함께 소독약 냄새가 확 끼얹어졌다. 통로는 좁고 어두웠지만, 벽면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무언가가 걸려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갔다. 윤서하와 백연이 내 뒤를 따랐다. 손바닥만 한 손전등 빛이 어둠을 가르자, 벽에 걸린 ‘그것들’의 정체가 드러났다.
노란 우비였다.
성인용이 아닌, 아주 작은 아이들의 사이즈. 그것들이 수십 벌, 아니 수백 벌은 되어 보이는 숫자로 끝도 없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마치 주인 없는 껍데기들이 벽에 박제된 것처럼.
“이게 다…… 희생된 아이들인가요?”
백연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비들은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 따라 흔들거리며 기괴한 바스락 소리를 냈다.
나는 홀린 듯 가장 가까운 곳에 걸린 우비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안쪽, 목덜미 부분에 붙은 작은 이름표를 확인했다.
당연히 내 이름이거나, 아니면 반가온의 이름일 줄 알았다. 그래야 이 지독한 미스터리의 퍼즐이 맞으니까.
하지만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 윤서하 ]
반듯하게 정자로 적힌 세 글자.
나는 얼어붙은 채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윤서하를 보았다. 그녀 역시 자신의 이름이 적힌 노란 우비를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손전등 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서하 씨?”
내 부름에도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우비의 소매를 만졌다.
그 순간, 회수실 안쪽 깊은 곳에서 수천 개의 아이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보호자를 찾습니다. 보호자를 찾습니다. 보호자를 찾습니다.]
우비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몸을 돌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빈 우비들의 모자 안쪽에서, 형체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우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퇴근은 글러 먹었군.”
나는 검은 우산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차가운 감각만이 내가 아직 ‘현재’에 발을 딛고 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291화. 보증인이 부재 중인 죽음
축축한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지하 통로의 벽면을 가득 채운 노란 우비들은 마치 굴을 파고 들어온 거대한 노란색 균사체처럼 보였다. 수백 벌의 우비가 낮은 천장에 매달려 발 없는 시체들처럼 흐느적거렸다. 그 가장 앞줄, '윤서하'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우비 앞에서 그녀가 멈춰 섰다.
윤서하의 손끝바닥이 노란 비닐 재질에 닿으려 했다. 그 찰나, 공기의 흐름이 뒤틀렸다. 우비 안쪽의 어둠이 끈적한 촉수처럼 뻗어 나와 그녀의 손가락을 감싸 쥐려 했다. 기록에 먹히는 찰나의 순간, 보통 사람이라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거나 손을 뺐겠지만, 윤서하는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건 내가 아니야."
서하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녀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이상한 당김에 정면으로 맞서며, 마치 남의 물건을 품평하듯 읊조렸다.
"내 이름을 훔쳐서 덧씌우려는 조잡한 기록일 뿐이지. 내 과거를 여기다 버린 기억은 없거든."
그녀의 단호한 규정이 방어막처럼 작동했다. 기록의 소용돌이가 주춤하는 사이, 나는 들고 있던 검은 우산을 펼쳐 서하와 우비 사이를 갈라놓았다. 툭, 하고 우산살이 허공의 어둠을 쳐냈다. 우산 천 위로 떨어지는 건 빗물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악의와 비릿한 환청이었다.
"영업 방해입니다, 고객님."
우비들의 모자 안쪽, 눈도 코도 없는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이의 변성기 전 목소리인데, 말투는 지나치게 사무적이라 소름이 끼쳤다.
본 기록물은 개인정보 보호법 및 사망 관리 규정에 따라 엄격히 통제되고 있습니다.
현재 윤서하 고객님은 '첫 번째 보호자'의 미납 보증인으로 분류되어 계십니다.
미납된 죽음을 정산해 주십시오. 할부 결제는 불가능하며, 일시불 영혼 납부만 허용됩니다.
"뭐라는 거야, 이 노란 비닐봉지들이."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우산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농담이라도 던지지 않으면 이 기괴한 행정 서비스의 압박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보험 약관이라도 읊어주는 거야? 요즘 지옥은 민원 대응도 참 친절하네. 근데 미안하지만, 우린 오늘 해지하러 온 게 아니라 민원 넣으러 왔거든."
우비들이 일제히 고개를 꺾으며 나를 응시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뒤의 공백을 응시하는 듯했다.
확인되지 않은 사용자입니다.
데이터베이스를 조회 중입니다...... 조회 결과 없음.
귀하는 이미 '회수 완료' 목록에 존재합니다. 중복 수거는 시스템 오류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내 이름표가 이 수많은 우비들 사이에 없는 이유를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예정자 명단에 있을 필요가 없다. 이 시스템의 논리대로라면, 강도윤이라는 개체는 이미 죽어서 서류상으로 소각된 '처리 완료' 건이니까. 죽은 놈이 다시 죽을 수는 없다는, 지독하게 행정적인 논리였다.
"도윤 씨, 비켜봐요. 다 찍어버릴 거니까."
백연이 창백해진 얼굴로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그녀의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 검은 얼룩은 이제 쇄골을 넘어 어깨 너머로 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셔터가 터질 때마다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렌즈를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독종의 그것이었다.
플래시!
강렬한 빛이 통로를 찢었다. 찰나의 광원 속에서 기이한 현상이 목격됐다. 사진기 속의 인화지 위로 기록되는 이름들이 실시간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윤서하'였던 이름표가 '박○○'으로, 다시 '최○○'으로 변하더니, 우리가 아는 현역 헌터들이나 협회 고위 간부들의 이름으로 명멸했다.
"이건 과거가 아니에요."
백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사진 속 노란 우비들은 이제 아이들의 옷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수의처럼 보였다.
"앞으로 죽을 예정인 사람들...... B-04 시스템이 다음 순번으로 찍어둔 '대기자 명단'이에요. 이 우비들은 그들의 죽음을 미리 수거해서 보관하고 있는 거예요."
"선불제 사망이라니, 세상 참 흉흉하구먼."
나는 혀를 찼지만 손등에 돋은 소름은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내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녹음기가 멋대로 치익거리는 노이즈를 내뱉기 시작했다.
형.
반가온의 어린 목소리였다. 하지만 290화에서 들었던 것보다 훨씬 선명하고, 차분했다.
형 말고, 진짜 첫 번째 보호자를 찾아야 해. 그 사람이 도장을 찍었거든. 도장을 찍으면 기록은 바꿀 수 없어. 그냥...... 이어질 뿐이야.
"가온아?"
녹음기 너머로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지익, 지익" 하는 테이프 릴이 감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서하는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자신의 이름이 적혔던 우비의 소매 끝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우비 안쪽의 박음질 부분을 뜯어냈다.
"이거 봐."
서하의 손가락 사이에서 작은 은색 단추 하나가 떨어져 나왔다.
단추 표면에는 헌터 협회의 공식 문장이 정교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 생뚱맞게도, 작은 우산 모양의 각인이 덧씌워져 있었다. 협회의 보급품에 이런 사적인 문양을 새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자는 단 한 부류뿐이다.
"협회 창립 초기 멤버이거나, '우산' 프로젝트의 기안자."
서하가 단추를 꽉 쥐었다. 날카로운 금속 단추가 그녀의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배어 나왔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 가문이 이 지옥과 연결되어 있었다면, 그건 내가 끊어야 할 사슬이야. 도윤 씨, 저 끝을 봐요."
서하가 가리킨 통로 끝에 철제 문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문 위에는 낡은 아크릴 판이 붙어 있었고, 그 위로 붉은 글씨가 휘갈겨져 있었다.
[첫 번째 보호자 대기실 (1st Guardian Waiting Room)]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 문틈 사이로 차가운 냉기가 흘러나와 발등을 훑었다. 문 앞 바닥에는 누군가 급하게 떨어뜨린 듯한 물건 하나가 뒹굴고 있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 올렸다.
먼지가 자욱하게 앉은, 하지만 디자인만큼은 10년 전 협회에서 공용으로 쓰던 구형 출입증이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케이스 안의 사진은 변색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하단에 박힌 이름 세 글자는 선명했다.
[문태식]
"......이 영감님은 안 끼는 데가 없네."
나는 출입증을 가볍게 던져 손안에서 굴렸다. 문태식이 이곳의 가담자인지, 아니면 이 시스템을 추적하다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피해자인지는 알 수 없다. 혹은, 그 자신이 말하는 '첫 번째 보호자'일지도 모른다.
"가시죠. 예약도 안 했는데 대기실부터 들어가는 건 좀 실례지만, 우린 원래 무례한 게 전문이니까."
나는 우산을 칼처럼 고쳐 쥐고 앞장섰다.
문 너머에서는 누군가 종이를 넘기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래된 구두굽이 바닥을 치는 규칙적인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려온 사람처럼.
끼이익—
문이 열리자, 비릿한 소독약 냄새와 함께 거대한 서류 더미 속에 파묻힌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