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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293화. 접수된 영혼의 대기 명단과 연대보증의 유산 일러스트

292-293화. 접수된 영혼의 대기 명단과 연대보증의 유산

292화. 접수된 영혼의 대기 명단

문을 여는 순간, 코끝을 찌른 것은 불쾌할 정도로 익숙한 냄새들의 칵테일이었다. 병원 응급실 특유의 시큼한 소독약 냄새, 구청 민원실의 눅눅한 서류 먼지, 그리고 장례식장 향나무 타는 냄새가 한데 뒤섞여 콧속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내 눈앞에 펼쳐진 ‘첫 번째 보호자 대기실’은 공간의 논리가 실종된 장소였다. 천장은 협회 사무실처럼 형광등이 깜빡거리며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고, 바닥은 병원 복도처럼 매끄러운 리놀륨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벽면은 낡은 상갓집의 병풍처럼 우중충한 색지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이거, 보험사 놈들이 지옥을 설계하면 딱 이런 모양이겠는데.”

내 목소리는 습기 가득한 방 안의 공기에 먹혀들어가듯 금세 흩어졌다.

플라스틱 의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대기 공간에는 손님들이 있었다. 아니, ‘것들’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하겠지. 통로에서 보았던 노란 우비들이 의자마다 하나씩 걸터앉아 있었다. 안이 텅 비어 있어야 할 우비들은 기묘한 부피감을 유지하며, 저마다 가느다란 손가락 형체로 번호표를 꽉 쥐고 있었다.

그들은 미동도 없었다. 다만 형광등이 깜빡일 때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났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도윤 씨, 저거 봐요.”

백연이 턱끝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거대한 서류 더미가 산처럼 쌓여 있는 접수대 너머,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낡은 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펜을 놀리는 그 실루엣. 그 어깨선과 머리 모양을 본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주머니 속의 낡은 출입증을 꽉 쥐었다.

문태식.

내가 아는 그의 뒷모습과 너무나 흡사했다. 당장이라도 다가가 어깨를 돌려 세우며 ‘아저씨가 왜 여기 있느냐’고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배운 가장 값비싼 교훈은, 가장 그리운 얼굴일수록 가장 위험한 덫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었다.

“함부로 움직이지 마. 저건…… 살아있는 게 아닐 수도 있어.”

내 제지에 윤서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단도를 고쳐 쥐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접수대로 다가갔다. 서류 더미 사이로 잉크 냄새와 피 냄새가 섞여 흘러나왔다.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대기 번호가 좀 늦었네요.”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그의 얼굴은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에는 문태식의 인자하면서도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다가, 다음 순간에는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젊고 야심 찬 협회 간부의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다 다시 내가 아주 어릴 적, 기억의 저편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정체 모를 ‘보호자’의 서늘한 표정으로 일렁였다.

그것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수만 명의 기록을 짜깁기해 만든 누더기 인형 같았다.

“당신, 누구야? 문태식은 어디 있지?”

내 질문에 남자, 아니 기록 대리인이 잉크가 묻은 손가락을 까닥이며 웃었다.

“문태식? 아, 그 이름은 현재 ‘미결재 항목’에 들어가 있습니다. 저는 그저 첫 번째 보호자를 대신해 이곳을 지키는 접수 담당일 뿐이죠. 당신들이 들고 온 그 ‘사망 기록’을 처리하러 온 것 아닙니까?”

대리인의 시선이 내 손에 든 녹음기를 스쳐, 윤서하의 손에 들린 은색 단추에 머물렀다. 윤서하는 주저 없이 그 단추를 접수대 위에 올려놓았다.

쾅.

“이게 이 가문과 협회가 맺은 계약의 증표인가? 대답해. B-04와 우리 집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대리인이 단추를 집어 들고는 냄새를 맡는 시늉을 했다. 그의 얼굴이 다시 한번 일렁이며 중년 여인의 모습으로 변했다가 돌아왔다.

“오호, 윤서하 헌터님. 이건 이미 한 번 ‘접수’된 혈통이군요. 아주 오래전, 누군가가 이 단추를 담보로 미래의 지분을 가불해 갔습니다. 덕분에 그쪽 가문이 협회에서 지금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거죠. 물론, 그 이자는 지금 당신들이 치르고 있는 셈이지만.”

윤서하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그녀의 가문이 쌓아 올린 명성이 사실은 이런 기괴한 기록의 거래 위에 세워진 사상누각이었다는 사실이 그녀의 자존심을 긁어놓은 모양이었다.

옆에서 백연이 카메라를 들었다. 그녀의 본능이 이 기괴한 ‘대리인’의 존재를 기록해 고정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틱, 틱.

셔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백연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녀가 카메라 뒷면의 액정을 확인하더니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 찍혀요. ‘현재가 아직 선택되지 않았습니다’라는 시스템 메시지만 떠요.”

백연의 능력은 ‘확정된 순간’을 포착해 고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모든 가능성이 뒤섞인 대기실. 선택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백연의 렌즈조차 갈 길을 잃은 것이었다.

그때였다. 내 귀를 울리는 이명이 시작됐다. 「잔향청취」가 멋대로 발동하며 주변의 노란 우비들이 쥐고 있는 번호표들로부터 소름 끼치는 속삭임을 길어 올렸다.

― 24번, 우산 프로젝트 초기 실험군. 비가 오지 않는 방에서 익사.

― 89번, 윤씨 가문의 방계. 이름이 지워지는 대신 수명을 헌납함.

― 156번, 문태식의 도장이 찍힌 보증 서류. ‘첫 번째’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려됨.

― 302번, 보호자가 도망친 아이. 영혼의 일시불 납부가 결정됨.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사무적인 말투였지만, 그 내용은 하나하나가 비릿한 비극이었다. 특히 문태식의 도장이 언급된 부분에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여기서 무엇을 막으려 했던 걸까, 아니면 무엇을 완성하려 했던 걸까.

기록 대리인이 서류 더미 속에서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내 내 앞으로 밀어냈다.

“반가온의 사망 기록을 되돌리고 싶다고 했죠? 방법은 간단합니다. ‘보증인 부재’ 항목을 채우면 돼요. 누군가가 새로운 보호자로 서명하고, 그 아이가 짊어졌어야 할 ‘죽음의 원인’을 나누어 가지면 됩니다.”

서류 하단, 서명란을 보았다. 거기에는 이미 희미한 필체로 내 이름, ‘강도윤’이 적혀 있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이곳에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그리고 그 옆에는 붉은색 잉크로 잔인한 문구가 덧씌워져 있었다.

[대체 가능: 윤서하]

“이런 미친…….”

욕설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 시스템은 나를 ‘이미 회수 완료된 존재’로 취급하면서도, 동시에 나를 제물로 삼거나 혹은 내 옆의 소중한 사람을 끌어들이라고 종용하고 있었다.

“도윤 씨, 내가 할게요.”

윤서하가 펜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꿈도 꾸지 마. 내 장례식 축의금 낼 돈도 없는 주제에 무슨 보증이야? 이건 내 문제야.”

나는 농담조로 받아치며 펜을 집어 들었다. 손끝이 떨렸다. 이 서류에 사인을 하는 순간, 나는 단순히 헌터로서의 삶을 넘어 무언가 되돌릴 수 없는 심연으로 떨어지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하지만 가온이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펜촉이 종이에 닿으려는 찰나였다.

주머니 속에서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녹음기가 멋대로 작동했다. 반가온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훨씬 더 젊고, 날 선 긴장감이 서린 문태식의 목소리였다.

― [서명하지 마! 강도윤, 들려? 절대 그 서류에 손대지 마!]

기록 대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평온하던 사무실의 공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녹음기 속 문태식의 외침은 절박했다.

― [첫 번째 보호자는 내가 아니다. 그리고 너도 아니야! 그놈들이 이름을 훔치게 두지 마!]

“……뭐?”

내가 펜을 멈추고 대리인을 노려보았다. 대리인의 얼굴은 이제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채, 검은 잉크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당황한 기색도 없이, 그저 기계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해 요소가 감지되었습니다. 심사 순서를 조정합니다.”

칭!

벽면에 걸린 디지털 순번표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뀌었다. 붉은색 숫자가 깜빡이며 새로운 호출 대상을 알렸다.

[대기 번호: 292번]

[대상: 윤서하 보호자 사망 원인 심사]

윤서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의 등 뒤에 서 있던 노란 우비 하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우비의 가슴팍에 붙은 이름표가 서서히 글자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윤서하가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던, 그녀의 어머니의 이름이었다.

“다음 분, 입장하십시오.”

대리인이 비릿하게 웃으며 우리 뒤의 닫혀 있던 또 다른 문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빗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흐느낌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293화. 연대보증의 유산

문을 여는 순간, 콧등을 찌른 것은 비릿한 흙내음과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였다.

공간은 기괴하게 뒤섞여 있었다. 머리 위로는 빗방울이 요란하게 때려대는 투명한 유리 온실의 천장이 보였고, 발밑은 고급 저택의 푹신한 카펫 대신 차가운 병원 복도 타일이 깔려 있었다. 벽면에는 국화 향이 밴 장례식장의 검은 천들이 늘어져 있었으나, 그 사이사이로 헌터협회의 임시 의료실에서나 볼 법한 수액 거치대와 낡은 모니터들이 어지럽게 배치되어 있었다.

습도가 높았다. 단순히 비가 와서가 아니라, 공간 자체가 누군가의 눅눅한 슬픔을 억지로 짜내어 채워 넣은 것 같았다.

“어서 오십시오. 상속 및 채무 승계 심사 구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록 대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의 접수대보다 훨씬 더 사무적이고 건조한, 마치 은행 대출 창구 직원이나 대학병원의 원무과 직원 같은 톤이었다.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은 아까의 그 대리인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여전히 고정되지 않았다. 젊은 문태식이었다가, 윤씨 가문의 얼굴 모를 친척이었다가, 다시 내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이름 없는 헌터의 얼굴로 일렁였다.

“대기 번호 292번. 대상자, 윤서하 보호자 관련 사망 원인 소급 심사.”

대리인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노란 우비 하나가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그 가슴팍에 붙은 이름표에는 윤서하의 어머니 이름이 적혀 있었다. 우비는 안이 비어 있었으나, 누군가 들어 있는 것처럼 축 처진 채 빗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윤서하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시선이 어머니의 이름이 적힌 그 노란 비닐 덩어리에 고정되었다. 나는 슬쩍 그녀의 소매를 잡으려다 그만두었다. 지금의 그녀에게 필요한 건 동정이 아니라 증명일 테니까.

“……내가 듣겠어.”

윤서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날카로웠다.

“어머니의 죽음이 왜 이곳에서 ‘심사’ 대상이 되는지. 그리고 너희가 말하는 그 ‘잔금’이 대체 무엇인지.”

“합리적인 질문입니다, 상속인.”

기록 대리인이 서류 뭉치를 넘기며 웃었다. 물론 그 웃음은 입매만 비틀린 기괴한 형상이었다.

“어머니께서는 생전에 아주 큰 담보를 잡히셨거든요. B-04 구역의 영속성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첫 번째 보호자’의 미납 보증인 명단에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를 매물로 내놓으셨습니다. 덕분에 귀하는 지금까지 협회의 보호 아래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었죠. 하지만 원금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자가 복리로 붙는 건 상식이니까요.”

“개소리도 정도껏 해. 이게 무슨 사채업자 소굴인 줄 알아?”

내가 툭 내뱉었다. 내 목소리는 온실의 빗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울렸다. 대리인이 나를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내 얼굴이 아니라, 내 가슴 근처에 머물러 있는 ‘회수 완료’ 낙인을 보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강도윤 씨. 당신은 이미 시스템 바깥의 존재입니다. 여기는 ‘채무자’와 ‘보증인’들의 공간이지, ‘폐기물’의 공간이 아니에요. 조용히 관전이나 하시죠.”

폐기물이라니. 농담으로도 듣기 힘든 소리였지만, 덕분에 확신이 섰다. 이 시스템은 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회수 완료’라는 상태 창의 빨간 글씨가 일종의 치트키나 오류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슬쩍 백연을 보았다. 그녀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지만, 셔터를 누르지 않았다. 대신 카메라의 LCD 화면을 거울처럼 비스듬히 세워 대리인의 등 뒤와 유리 온실의 굴절된 면을 살피고 있었다.

“현재가 선택되지 않았어.”

백연이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선택을 강요받고 있지. 도윤아, 저 우비에 맺힌 물방울을 봐. 저건 비가 아니야.”

나는 집중했다. 「잔향청취」를 끌어올렸다.

귀청을 때리는 건 거친 빗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억눌린 흐느낌, 그리고 아주 일상적인 생활의 소음이었다.

치익.

무언가 끓는 소리. 그리고 달콤쌉싸름한 냄새가 났다.

장례식의 향 냄새가 아니라, 감기에 걸린 어린 딸을 위해 끓이던 유자차의 냄새였다. 내 눈앞에 환영처럼 물건들이 떠올랐다.

바닥에 떨어진 낡은 면장갑. 손가락 끝이 닳아 실밥이 튀어나온 그 장갑은 빗물에 젖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옆에는 반쯤 식어 표면에 하얀 막이 생긴 유자차 컵과, 귀퉁이가 찢어진 협회 건강검진표가 놓여 있었다.

검진표의 판정란에는 붉은색 도장이 찍혀 있었다. [부적격: 마력 회로 과부하].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은 글씨로 적힌 메모가 잔향과 함께 내 귓가에 박혔다.

‘서하만큼은 안 된다. 그 아이의 이름이 보증인 칸에 들어가는 순간, 이 굴레는 영원히 끝나지 않아. 내가 대신 들어가겠다. 내가 그 자리의 공백을 채우면, 서하는 리스트에서 제외될 수 있는가?’

그것은 거래였다. 윤서하의 어머니는 B-04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가문이 대대로 짊어져 온 ‘첫 번째 보호자’에 대한 부채를 자신의 목숨으로 탕감하려 했던 것이다.

“……유자차였어.”

윤서하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에 떠 있는 젖은 장갑의 환영에 머물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나한테 유자차를 타 주셨어. 조금만 기다리라고, 금방 다녀오겠다고 하셨는데. 그게 협회로 가는 길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었어. 여기였던 거야.”

“감동적인 회상이군요.”

기록 대리인이 박수를 쳤다. 건조한 손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마치 뼈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하지만 어머니의 희생은 ‘선이자’에 불과했습니다. 원금은 바로 당신, 윤서하 씨의 혈통 그 자체니까요. 자, 여기 서명하십시오. 어머니의 미납금을 승계하겠다는 확인서입니다. 거부하시면…… 저 우비 속에 남은 어머니의 마지막 기록은 영원히 이 빗속에서 부패하게 될 겁니다.”

대리인이 내민 서류에는 윤서하의 이름이 이미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의 손이 서류를 향해 뻗어 나갔다. 떨림을 숨기지 못한 채.

그때였다. 내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문태식의 낡은 녹음기였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를 뚫고, 아까보다 훨씬 선명해진 젊은 문태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 [내가 왜 반려시킨 줄 알아? 그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은 건 내 마지막 양심이었어.]

대리인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시스템에 예정되지 않은 간섭이 일어났을 때 발생하는 노이즈였다.

― [첫 번째 보호자를 낚으려면 미끼가 필요했지. 그래서 일부러 반려될 보증 서류를 낸 거야. 윤 씨 가문이 낸 건 진짜가 아니야. 그들은 속고 있었어. 도윤아, 서하야. 기록을 믿지 마. 기록은 승리한 놈들이 편집한 결과물일 뿐이니까.]

“입 닥쳐, 이 퇴물!”

대리인이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괴물처럼 변하며 주변의 유리 온실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회수 완료’ 상태인 나는 이 공간에서 유령이나 다름없다. 나는 대리인의 팔을 통과해 윤서하의 어머니 이름표가 붙은 노란 우비로 달려들었다.

“강도윤! 위험해!”

백연의 외침이 들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내 손이 우비에 닿는 순간, 차가운 빗물이 아니라 끈적이는 타르 같은 감각이 손을 덮쳤다. 하지만 나는 그 속을 헤집었다. 잔향이 가리키는 곳,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진짜’를 찾아서.

우비의 가슴팍, 이름표가 붙은 자리 뒤편의 박음질이 느껴졌다. 나는 손톱을 세워 그 실밥을 뜯어냈다.

그 안에서 나온 건 종이도, 마석도 아니었다.

아주 가느다란, 빛바랜 흰색 실 한 가닥이었다.

그 실에는 헌터의 마력으로 새겨진 마이크로 문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윤서하의 어머니가 죽음의 순간, 자신의 영혼을 깎아 박음질해 둔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서하에게 책임을 물리지 말 것. 이 계약의 보증인은 내가 아니라, ‘살아있는 첫 번째’다.]

“서하야! 이거!”

내가 실을 던졌다. 윤서하가 공중에서 그 실을 낚아챘다. 그녀의 손가락에 실이 닿는 순간, 대리인이 내밀었던 서류가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다.

“이, 이건…… 무효야! 있을 수 없는 기록이야!”

대리인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얼굴이 수십 번의 점멸을 거듭하더니, 마침내 하나의 형상으로 고정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더 이상 문태식도, 윤씨 가문의 조상도 아니었다.

백연이 들고 있던 카메라의 빈 화면이 환하게 빛났다. ‘현재’가 고정되는 순간이었다.

유리 온실이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빗소리가 멈추고, 사방은 정적에 잠겼다.

그리고 우리 앞에 서 있는 기록 대리인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윤서하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창백할 정도로 하얀 피부, 맑은 눈동자, 그리고 입가에 걸린 서늘한 미소.

“……가온아?”

내 입에서 이름이 흘러나왔다.

반가온.

내가 분명히 죽음을 목격했고, 내 손으로 그 기록을 회수했던 나의 파트너.

그녀가 대리인의 옷을 입은 채, 아니, 대리인 그 자체가 된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기계적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생생한 감정과,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잔향이 아니라, 바로 눈앞에서 들려오는 실재하는 음성이었다.

“형, 이제 기억났어?”

그녀의 손이 내 뺨을 향해 다가왔다.

“우리가 왜 이 끔찍한 대기실에서 서로를 기다려야 했는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 상태 창의 [회수 완료] 문구가 미친 듯이 깜빡거리며 오류를 뿜어내고 있었다.

[시스템 경고: 등록되지 않은 ‘첫 번째 보호자’의 현재가 감지되었습니다.]

반가온이 생긋 웃었다.

“미납금 받으러 왔어,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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