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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8-289화. 버리지 않은 이름과 회수실의 첫 번째 서랍 일러스트

288-289화. 버리지 않은 이름과 회수실의 첫 번째 서랍

288화. 버리지 않은 이름

“형, 이번엔 내 이름 버리지 마.”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 가늘어서, 마치 낡은 테이프가 늘어지기 직전의 잔향처럼 위태로웠다.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떨어뜨리려 했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언제부터였는지 검은 우산의 살들이 내 팔등을 갈비뼈처럼 조여 오고 있었다. 동시에 공중전화의 꼬인 전화선이 뱀처럼 내 손목을 휘감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끈적한 플라스틱의 질감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이거 놔, 이 껌딱지 같은 게 진짜…….”

입으로는 평소처럼 툴툴거렸지만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렀다. 보관실 안쪽, 수천 개의 서랍이 뱉어낸 어둠 속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저벅, 저벅.

일정한 간격으로 다가오는 소리는 괴물의 포효보다 더 소름 끼쳤다. 그것은 서류 뭉치를 정리하고, 도장을 찍고, 서랍을 닫는 행정 절차의 소음이었다.

어둠을 가르고 나타난 형체들은 기괴했다. 그들은 모두 문태식이 입었던 것과 같은 감식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번호표가 붙어 있었다. 누군가는 낡은 서류철을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고, 누군가는 잉크가 뚝뚝 떨어지는 거대한 인장을 들고 있었다.

“보호 요청자 확인.”

“대조 결과, 기록 불일치. 폐기 절차 개시.”

그들의 목소리는 기계적인 안내음과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인 불쾌한 화음이었다. 그들이 허공에 서류철을 펼치자, 시뻘건 도장 자국들이 허공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보호 요청 취소]

[대체 보호자 지정]

[반납자 본인 확인]

붉은 글자들이 사방에서 나를 압박해 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강도윤 씨, 정신 차려요! 이건 물리적인 타격이 아니라 개념적인 강제 집행이에요!”

윤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자신의 수첩을 펼쳐 들고 증인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이 허공을 떠도는 문구들을 날카롭게 훑었다.

“백연 씨, 지금이에요!”

백연은 이미 카메라를 치켜들고 있었다. 그녀의 목 위까지 타고 올라온 검은 얼룩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삼킬 듯 꿈틀거렸지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셔터를 눌렀다.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왜곡되던 공간이 찰나의 순간 고정되었다. 하지만 대리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내 존재 자체가 서류상의 오류라도 되는 양, 끊임없이 도장을 찍어 눌렀다.

[형제 관계 부정]

그때였다. 내 귀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박혀들었다. 잔향청취. 놈들이 휘두르는 문구들이 투덜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이거 취소하려면 요청자가 살아 있어야 하는데.

말이 안 맞잖아. 요청자 기록은 아까 사망자 서랍에서 나왔는데, 왜 저놈은 여기서 숨을 쉬고 있어?

나도 헷갈려. 도장을 찍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모순이다.

놈들이 내세우는 행정적 절차 자체가 서로 충돌하고 있었다.

“서하 씨! 저놈들 도장이 다 먹히는 게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형제 관계 부정’ 문구가 계속 튕겨 나가고 있어요. B-04 시스템조차 당신들과의 연결 고리를 완전히 끊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예요!”

윤서하의 지적대로, 내 머리 위로 떨어지던 [형제 관계 부정]이라는 붉은 글자들은 내 몸에 닿기도 전에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때, 서류철을 든 대리인 하나가 내 우산 손잡이에 매달린 ‘반가온’의 이름표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해당 명찰은 반납 누락물이다. 즉시 회수한다.”

그 손길이 닿는 순간,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비명을 지르듯 갈라졌다. 동시에 백연의 얼굴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이름표가 떼어지면 이 가냘픈 연결도, 백연이 붙잡고 있는 삶의 유예도 끝날 것이 분명했다.

“안 돼!”

나는 몸을 날려 이름표를 감싸 쥐었다. 대리인의 차가운 장갑이 내 손등을 스쳤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기계처럼 다시금 도장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내 손등 위로 [보호 요청 취소] 도장이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이 도장이 찍히면, 나는 반가온을 보호하겠다는 그 옛날의 약속—그것이 위조된 것이든 진짜든—을 영구히 상실하게 된다.

나는 수화기를 꽉 쥐고 소리쳤다.

“야! 대답해! 내가 정말 널 버렸어? 아니면 누가 내 이름으로 널 버리게 만든 거야!”

수화기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발소리들이 나를 에워싸고, 붉은 인장이 내 코앞까지 다가온 찰나, 아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형은 날 버린 적 없어.”

그것은 확신에 찬 대답이었다.

“형은…… 나 대신 도장을 맞았어.”

도장을 맞았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생각할 틈은 없었다. 거대한 인장이 내 손등을 뭉개버릴 듯 낙하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비틀었다. 도장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유도했다.

다만 내 맨살이 아니었다. 나는 검은 우산의 손잡이, 그 딱딱한 금속 고리를 도장의 궤적 속으로 밀어 넣었다.

깡-!

날카로운 금속음이 보관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사람의 기록에 찍혀야 할 [보호 요청 취소] 도장이 증거물인 우산의 금속부와 충돌했다. 시스템이 예상치 못한 오류를 일으켰는지, 허공을 떠돌던 대리인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백연 씨, 지금 사진 찍어!”

백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정상 필름, 가장 소중하게 아껴두었던 그 한 컷을 위해 셔터를 눌렀다.

“이제 제 사진도……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증언으로 취급될 거예요.”

그녀의 말과 함께 플래시가 보관실의 어둠을 완전히 찢어발겼다.

인화된 사진 속에는 도장이 찍힌 우산 손잡이와 그곳에 단단히 묶인 ‘반가온’의 이름표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현재 보존 중’이라는 판정이 사진의 테두리를 따라 금색으로 흘렀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우산 손잡이를 살폈다. 도장이 찍히며 벗겨진 도색 안쪽에서, 아주 오래되고 작은 글자가 드러났다.

[B-04-0001]

수천, 수만 개의 서랍이 있는 이 거대한 보관실에서 가장 처음으로 등록된 번호였다.

“0001……?”

윤서하가 신음하듯 읊조렸다.

“반가온의 사건이 단순한 보관 사례가 아니었던 거군요. 이 아이의 기록 자체가 B-04라는 체계를 만든 시발점이었거나, 최초의 실험체였다는 뜻이에요.”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대리인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들은 더 이상 도장을 찍으려 들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여 우산 손잡이의 번호를 응시했다.

그중 가장 앞서 있던, 문태식과 소름 끼칠 정도로 흡사한 체격의 대리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기계음이 섞이지 않은, 낮고 서늘한 문태식의 그것이었다.

“첫 번째 건은 반납 대상이 아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회수 대상이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보관실 바닥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육중한 철판들이 맞물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리가 서 있던 바닥 한가운데가 마치 거대한 입처럼 벌어졌다.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심연 속에서, 아래로 향하는 낡은 철제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차가운 냉기와 함께, 퀘퀘한 종이 냄새보다 더 지독한—오랫동안 썩지 못한 채 방치된 무언가의 냄새가 올라왔다.

계단 입구에는 낡은 팻말이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회수실(回收室) : 승인되지 않은 시작점]

나는 우산을 고쳐 쥐었다. 수화기에서는 더 이상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전화선은 여전히 내 손목을 놓아주지 않은 채 아래쪽 어둠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려가라는 거지, 지금?”

나는 텅 빈 보관실을 향해 빈정거리듯 내뱉었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계단 아래쪽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아주 작게 부르는 잔향만이 바람을 타고 올라올 뿐이었다.

버리지 못한 이름이,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289화. 회수실의 첫 번째 서랍

“잠깐만요. 나 폐쇄 공포증은 없는데, ‘지하 공포증’은 확실히 있거든요? 그것도 공무원 놈들이 관리하는 지하는 질색이라고요.”

입으로는 쉴 새 없이 지껄였지만, 발은 이미 허공을 더듬고 있었다. 손목에 감긴 전화선은 나를 친절하게 인도하겠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빨리 안 내려가면 손목 하나 정도는 놓고 가든가’라고 협박하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우산 손잡이에 박힌 ‘B-04-0001’이라는 번호가 달궈진 인두처럼 뜨거웠다. 그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와 심장 근처까지 지져대는 느낌이었다.

“강도윤 씨, 엄살 부릴 시간 없습니다. 뒤를 보세요.”

윤서하의 차분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위층 보관실의 풍경은 이미 일그러지고 있었다. 감식반 장갑을 낀 ‘보호자 대리인’들이 계단 입구에 빽빽하게 모여 서 있었다. 그들은 내려오지는 못하지만, 서류철을 든 손으로 허공을 긁으며 ‘반납’과 ‘취소’를 읊조렸다. 그 기괴한 합창이 등뒤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나는 떠밀리듯 계단을 밟았다.

위층이 먼지 쌓인 서류와 종이 냄새였다면, 이곳 회수실은 전혀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계단을 한 칸씩 내려갈 때마다 코를 찌르는 것은 날카로운 소독약 냄새였다. 병원 영안실의 그것보다 훨씬 독했고, 그 사이사이에 젖은 흙냄새와 오래된 비닐 냄새가 눅눅하게 섞여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가장 낮은 층계에 발을 디뎠을 때 훅 끼친 것은 다름 아닌 어린아이 운동화에서 날 법한 시큼한 고무 냄새였다.

“……여기가 회수실이라고?”

내 목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려 퍼졌다.

구조는 이상하게 어긋나 있었다. 서류 창고라기보다, 아이들을 잠시 가둬두는 보호시설이나 실험실의 대기실을 뒤섞어놓은 듯한 형태였다. 벽면에는 어울리지 않게 아이들의 키를 잰 흔적들이 빼곡했다. 하지만 그 선들은 위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촘촘해지는 기형적인 구조였다.

그 옆으로 손바닥에 잉크를 묻혀 찍은 듯한 낙인들이 줄지어 붙어 있었다. 보호자 서명란이 있는 낡은 종이들. 하지만 적혀 있어야 할 이름들은 모두 녹아내린 듯 비처럼 아래로 시커멓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잔향이 귓가로 스며들었다.

나는 매년 자라야 하는데, 여기서는 줄어들기만 했어. 어제보다 오늘 더 작아졌어.

손이 너무 작아서 글씨를 못 쓴대. 그래서 서명을 대신 찍으래. 근데 이 잉크, 너무 뜨거워.

키 표시가 투덜거리고, 손바닥 낙인들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섞였지만, 내용은 비명보다 차가웠다. 어린 내가, 혹은 반가온이 이 절차의 톱니바퀴에 끼어 있었을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도윤 씨, 저걸 보세요.”

윤서하가 가리킨 곳은 회수실 한가운데였다. 수많은 사물함 사이에 유독 이질적인 광채를 내뿜는 금속 캐비닛 하나가 서 있었다. 다른 사물함들은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오직 그것만은 방금 닦아낸 듯 매끄러웠다.

번호는 B-04-0001.

우산에 새겨진 번호와 정확히 일치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캐비닛 전면에 네 개의 홈이 파여 있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시스템의 요구사항이 강제로 주입됐다.

[열람을 위한 책임 소재 확인이 필요합니다.]

[증명 물품 1: 협회 공인 출입증]

[증명 물품 2: 지정 보관물 B-04-0001]

[증명 물품 3: 연결된 수화기]

[증명 물품 4: 확정된 현재의 기록]

“잠금장치가 네 개라니. 무슨 비밀 금고라도 되는 모양인데, 이거 열면 내 월급 미지급분이라도 들어 있는 겁니까?”

나는 애써 농담을 던지며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협회 출입증을 꺼내려는데, 백연이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그녀의 목덜미까지 올라온 검은 얼룩이 이제는 턱 끝을 위협하고 있었다.

백연은 아무 말 없이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셔터를 누르는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정상적인 필름을 다 썼다. 하지만 카메라 몸체에서 배어 나오는 희미한 잔향과, 마지막으로 찍었던 필름의 잔광을 렌즈 앞에 겹쳐내고 있었다.

“……이건 열쇠가 아니에요.”

윤서하가 캐비닛의 요구 조건을 훑으며 낮게 읊조렸다.

“책임 소재 분산 장치입니다. 네 개의 기록과 물건이 동시에 존재해야만 문이 열린다는 건, 역설적으로 이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책임이 네 사람 혹은 네 기관에 골고루 나눠진다는 뜻이죠. 아무도 단독으로 이 기록을 조작하거나 확인했다고 발뺌할 수 없게 만드는 시스템의 악의예요.”

“책임 전가라면 저도 전공인데, 이건 좀 세네요.”

나는 헛웃음을 삼키며 협회 출입증을 첫 번째 홈에 끼워 넣었다. 이어 검은 우산의 손잡이를 두 번째 홈에 맞췄고, 손목을 옥죄던 전화 수화기를 세 번째 자리에 거치했다.

마지막은 백연의 차례였다. 그녀가 카메라 렌즈를 네 번째 홈에 대자, 깨진 필름의 잔광이 인화지처럼 잠금장치 위로 쏟아졌다. 현재 우리가 여기 서 있다는 사실, 그리고 반가온의 이름표가 보존 중이라는 ‘사진적 증언’이 박혔다.

철컥.

무거운 기계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차가워졌다.

[보호 요청자 본인 인증을 시작합니다.]

목소리는 시스템의 것이 아니었다. 내 기억 깊숙한 곳에서 끌어올린, 아주 오래전 잊어버렸던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동시에 머릿속이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덮쳐왔다.

시야가 번졌다. 회수실의 풍경 대신, 빗줄기가 쏟아지는 어느 골목길이 보였다.

내 몸이 작아져 있었다. 내 손에는 낡은 우산 하나가 들려 있었고, 그 옆에는 나보다 더 작은 아이가 내 옷자락을 꽉 쥐고 있었다.

얘야, 이름을 빌려주면 이 아이는 살 수 있단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어른의 목소리가 위에서 떨어졌다. 비릿한 가죽 냄새와 도장 인주 냄새가 섞인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가 무서워 아이의 손을 더 세게 잡았다.

네 이름을 잠시만 이 서류에 적어주렴. 그러면 이 아이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아도 돼.

작은 손이 내 손등을 스쳤다. 온기가 느껴졌다. 나는 그 온기를 지키고 싶어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미친 듯이 경고를 보냈다. 이건 공짜가 아니라고. 이름을 빌려주는 게 아니라, 내 존재 자체를 담보로 잡히는 거라고.

“형, 그때 많이 아팠지.”

수화기 너머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환각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각 속에서 나는 이빨을 악물었다. 기억의 파편이 내 자아를 뜯어내려 하고 있었다.

“아픈 건 됐고…… 야, 너 내 월급 통장도 지금 아픈 상태거든? 국민연금이랑 건강보험료 나가는 거 보면 내 자아가 다 찢어질 것 같은데, 그것부터 좀 보상해 줄래?”

나는 비명을 농담으로 짓눌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출입증을 꽉 쥐었다. 기억 속에 잠식되지 않으려 발버둥 쳤다.

“강도윤 씨! 정신 차리세요!”

윤서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이 인증은 과거의 당신에게 묻는 게 아닙니다! 시스템은 지금의 당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있어요. 과거에 어떤 계약을 했든, 지금 살아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당신입니다! ‘본인 인증’의 주체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생존자라고 내가 증언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이 내 이성을 잡아끌었다. 백연 역시 카메라의 잔광을 더 강하게 쏘아 보내며 캐비닛의 잠금 문구를 고정했다. 과거의 기억이 나를 끌어내리려 할 때, 그녀들의 ‘현재’가 나를 지탱했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캐비닛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래, 내가 과거에 어떤 멍청한 짓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지금의 나는 협회 소속이자, 퇴근을 간절히 바라는 헌터 강도윤이다. 이건 반납하러 온 게 아냐. 내가 낸 세금이 어디에 쓰였는지 보러 온 열람자라고, 이 관료주의 괴물 자식들아!”

내 외침과 함께 캐비닛이 거칠게 열렸다.

예상했던 시신이나 화려한 마석, 혹은 정답지 같은 서류 뭉치는 없었다.

안에는 그저 낡은 노란 우비 한 벌과, 테이프가 늘어진 아주 오래된 음성 녹음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녹음기에 붙은 라벨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0001 보호 요청 면담

“이게…… 전부입니까?”

나는 허탈함에 손을 뻗었다. 그때, 위층에서 내려오지 못하던 보호자 대리인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계단 입구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생긴 듯, 그들은 더 이상 우리를 압박하지 못했다.

윤서하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회수실 내부에서는 ‘보호자 대리’ 권한이 제한되는군요. 여기서는 오직 원 보호 요청자와 그 증인들만이 발언권을 가집니다. 저들이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나는 조심스럽게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끝에, 두 아이의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하나는 조금 전 기억 속에서 들었던 내 목소리였고, 다른 하나는 그보다 더 작고 가녀린 목소리였다.

제가 보호자 할게요.

어린 시절의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제 이름은 가져가도 돼요.

그 말에 이어지는 어른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익숙한, 하지만 지금은 들을 수 없는 누군가의 톤이었다.

좋아. 계약 성립이다. 그럼 네 사망 기록부터 옮기자.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사망 기록을 옮긴다고?

내가 죽지 않았는데, 이미 내 장례식 서류가 수십 년 전에 작성되었다는 뜻인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아이의 흐느낌과 빗소리가 회수실의 소독약 냄새와 뒤섞였다. 나는 캐비닛 안의 노란 우비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우비의 가슴팍에는 내 이름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지워진 듯한 검은 얼룩만이 남아 있었다.

나의 ‘삶’은 언제부터 누군가의 ‘죽음’과 바뀌어 있었던 걸까.

나는 떨리는 손으로 우비 밑에 깔린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곳에는 B-04 시스템의 진짜 시작점이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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