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65화. 입관실의 첫 획과 꿰매진 이름표
제목: 64화. 입관실의 첫 획
엘리베이터 거울 속의 나는 이제 유령보다 조금 더 진한 수준이었다. 45%의 침식률은 단순히 수치가 아니었다. 내 왼손 끝이 가끔 시야에서 흐릿하게 번졌다. 마치 포토샵의 블러 툴로 문지른 것처럼, 존재의 경계선이 뭉개지고 있었다.
“괜찮습니까?”
이현우가 내 팔꿈치를 받쳐 잡았다. 그의 손길이 닿는 부위만 겨우 현실의 질감을 되찾았다.
“괜찮아 보이진 않겠지만, 일단 살아는 있습니다. 심장이 할부 결제 중이라 좀 두근거릴 뿐이죠. 연체 이자가 내 목숨이라 좀 부담스럽긴 한데.”
“농담이 나오는 걸 보니 아직 버틸 만한 모양이군요.”
이현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나를 잡은 손끝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지하 2층 매점에서 1층 입관실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 폐쇄된 공간에 짙은 국화 향과 지하실 특유의 곰팡이 섞인 냉기가 가득 찼다. 벽면에 붙은 조화 판매 안내문이 비뚤게 붙어 있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마음’이라는 문구가 오늘따라 협박처럼 들렸다.
띵.
1층 문이 열렸다. 장례식장의 복도는 정막했다. 자정이 넘은 시각, 빈소 앞을 지키는 상주들도 지쳐 잠든 시간이었다. 복도 양옆으로 늘어선 빈 상복들이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누군가 벗어놓고 간 슬픔의 껍데기들. CCTV의 빨간 불빛이 우리를 쫓았지만, 이현우는 능숙하게 그 사각지대를 골라 걸었다.
“아까 그 영수증 말입니다.”
이현우가 주머니에서 아까 매점 주인이 내준 종이를 꺼내 보였다.
[남은 잔액: 강도윤의 심장, 기억, 그리고 마지막 숨]
[사망 예정 시각: 04:52:12]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현우가 손가락으로 言(말씀 언) 자를 가리켰다.
“도윤 씨의 성씨 첫 단서라고 했죠. 言은 도윤 씨의 능력인 ‘잔향청취’와 관련이 깊습니다. 듣는 것과 말하는 것. 검은 우산이 도윤 씨의 원래 성씨를 뺏어간 뒤, 그 성질의 파편을 능력이라는 형태로 되돌려준 거라면…….”
“그걸 다 찾는 순간, 내가 누군지 들통난다는 거군요.”
“단순히 들통나는 게 아닙니다. 원본이 특정되는 순간, 검은 우산의 시스템이 도윤 씨를 ‘회수’하려 들 겁니다. 폐기된 계정이 다시 살아나는 걸 그들이 지켜보고만 있진 않겠죠.”
그의 경고가 끝나기도 전에 내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지율이었다.
“강도윤 씨! 서하 언니 차트가 이상해요.”
한지율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방금 전산이 강제로 업데이트됐는데, ‘상조회 결제 대기’ 항목 밑에 새로운 게 떴어요. ‘입관 전 최종 확인 절차’. 이게 대체 뭐죠? 서하 언니는 아직 숨을 쉬고 있는데, 병원 시스템이 언니를 시신 취급하고 있다고요!”
“시간은?”
“네 시간도 안 남았어요. 그리고 방금…… 언니 손가락 끝을 만졌는데, 아주 잠깐 힘이 들어갔어요. 입 모양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귀를 대봤는데…….”
한지율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주지 마’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돌려주지 마, 오빠’. 그게 무슨 뜻이에요?”
무언가 돌려주는 행위. 즉, 결제를 멈추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윤서하는 죽고, 나라는 존재는 ‘강도윤’이라는 가짜 이름 뒤로 영원히 사라진다.
나는 전화를 끊고 눈앞의 육중한 철문을 바라봤다.
[제1 입관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함께 소독약 냄새가 흘러나왔다. 스테인리스 작업대가 조명을 받아 번뜩였다. 그 옆에는 아직 뚜껑이 덮이지 않은 오동나무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하얀 면장갑을 끼고 있었다. 정갈한 검은 양복 차림의 입관지도사였다. 그는 관 안에 담긴 수의 위에 바늘귀를 놀리고 있었다. 실을 꿰매는 게 아니었다. 그는 공중에 떠다니는 검은 먹물 같은 선들을 집어 올려 옷감에 박아 넣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결제 대기자분들이시군요.”
입관지도사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이라기보다는 잘 만들어진 가면처럼 매끄러웠다. 그의 가슴팍에는 명찰 대신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공정 관리자: 획을 깁는 자]
“입관 전 확인 절차를 시작하겠습니까?”
“절차가 꽤 까다롭네요. 편의점 결제처럼 간단하면 좋을 텐데.”
내가 빈정거리며 다가갔다. 심장이 조여오는 통증에 가슴을 움켜쥐었지만, 목소리만큼은 떨리지 않게 눌렀다.
지도사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이름은 존재의 설계도입니다. 잃어버린 성씨의 다음 획을 원하신다면, 그에 합당한 설계 재료를 내놓으셔야 합니다. 言 부수를 완성하기 위한 첫 획의 값은…….”
그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내 목을 가리켰다.
“당신의 목소리, 혹은 당신이 평생 모아온 ‘잔향’ 중 하나입니다.”
이현우가 내 앞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나는 그를 제지했다. 내 손등의 핏줄이 검게 변하고 있었다. 침식률이 50%를 향해 치닫고 있다는 신호였다.
“목소리를 주면, 난 앞으로 농담도 못 하겠군요. 그건 좀 곤란한데.”
나는 관 쪽으로 걸어갔다. 차가운 오동나무 냄새 속에서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내 능력, 잔향청취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 관은 비어 있지 않다. 20년 전의 기억이 박제되어 있었다.
나는 슬쩍 관 모서리에 손을 올렸다.
― 철수야, 이건 너무 위험해.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긁었다. 박철수의 목소리도 들렸다. 훨씬 젊고,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 방법이 없어요. 이 아이의 ‘진짜 이름’이 장부에 적히는 순간, 그놈들이 아이를 데려갈 겁니다. 이름을 찢어서 숨겨야 해요.
― 그럼 누구 이름을 대신 쓰지?
― 죽은 자의 이름요. 방금 입관을 마친, 아무도 기억하지 않을 ‘강도윤’이라는 아이의 이름을 빌릴 겁니다.
환청 속에서 한 남자가 더 있었다. 그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차가운 금속성 소리가 났다. 수술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 그는 박철수도, 이름 모를 여자도 아니었다.
그는 내 원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그리고 내 성씨를 잘라낸 ‘집행자’였다.
“잔향을 담보로 내놓으라고 했지?”
나는 지도사를 향해 피식 웃었다.
“내 잔향은 비싸서 말이야. 대신 이건 어때?”
나는 방금 관에서 읽어낸 잔향의 한 조각, 박철수가 아닌 ‘제3의 인물’이 내뱉은 숨소리의 파편을 강제로 끄집어내 손바닥에 뭉쳤다. 내 계정이 침식되며 흘러나온 검은 데이터와 잔향이 뒤섞였다.
“이건 내 잔향이 아니라, 20년 전 여기서 당신들이 흘리고 간 쓰레기지. 내 목소리 대신 이 유실물이나 받아가라고.”
나는 그 검은 덩어리를 지도사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지도사의 눈이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가 당황하며 손을 뻗어 그것을 낚아채려 할 때, 나는 관 안쪽 수의 밑바닥을 더듬었다. 잔향이 가리키는 곳. 그곳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찌익.
종이를 뜯어내는 순간, 지도사가 내지른 검은 실들이 내 팔을 칭칭 감았다. 타는 듯한 통증이 팔을 타고 올라왔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현우 씨, 지금!”
이현우가 지도사의 시야를 가리며 달려들었다. 그 틈에 나는 내 손에 쥐어진 것을 확인했다.
그것은 20년 전의 입관 명부였다. 그리고 그 명부 위로, 내가 던진 잔향의 대가로 새로운 글자가 떠오르고 있었다.
言 부수 옆으로 첫 번째 획이 그어졌다.
[ 謹 (삼갈 근) ]
글자가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그 형태가 드러나는 순간 내 머릿속에 강렬한 통증과 함께 잊고 있던 감각 하나가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며 머리를 쓰다듬던 온기.
하지만 기쁨은 짧았다.
“도윤 씨, 저걸 보십시오!”
이현우가 가리킨 입관실 벽면 전광판에는 오늘의 입관 대상 목록이 흐르고 있었다.
[03:00 - 김OO]
[04:00 - 박OO]
[05:00 - 강도윤]
그리고 그 바로 밑에, 붉은 글씨가 점멸하며 새로 추가되었다.
[05:00 - 윤서하 (확정 대기)]
내 사망 시각과 윤서하의 입관 시각이 동일하게 맞춰져 있었다. 지도사가 하얀 장갑을 고쳐 끼며 기괴하게 웃었다.
“첫 획의 결제는 완료되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획은…… 당신들의 목숨을 통째로 꿰매야 할 겁니다.”
내 주머니 속의 영수증이 검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은 시간은 이제 3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보았다. 지도사가 쥐고 있는 바늘 끝에, 윤서하의 이름이 적힌 하얀 이름표가 실에 꿰여 대롱거리고 있는 것을.
제목: 65화. 꿰매진 이름표
한때 세탁소 아르바이트를 할 때 사장님은 내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바느질이란 건 결국 찢어진 두 세계를 억지로 이어 붙이는 일이라고. 그 경계가 매끄러울수록 기술자고, 울퉁불퉁할수록 초짜라고 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획을 깁는 자’는 자타공인 최고의 기술자였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은색 바늘이 차가운 형광등 불빛을 반사했다. 바늘귀에 꿰어진 것은 실이 아니라 그림자를 가늘게 뽑아낸 듯한 검은 줄이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하얀 플라스틱 이름표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윤서하]
정갈하게 박힌 세 글자가 내 망막을 찔렀다.
“이런 건 보통 수선집에서나 보는 건데. 여기 서비스가 너무 과한 거 아닙니까?”
입안이 바짝 말랐다. 농담을 내뱉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관리자의 그 잘난 목을 비틀어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살기 섞인 농담에도 관리자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름표를 흔들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공정은 정직해야 합니다. 당신은 규칙을 비틀어 ‘근(謹)’의 단서를 훔쳐갔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정이 필요하죠. 이 이름표가 관 뚜껑에 박히는 순간, 윤서하의 입관은 확정됩니다.”
“잠깐, 도윤 씨. 움직이지 마세요.”
이현우가 내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그의 눈은 내가 얻어낸 단서, ‘말씀 언(言)’에 ‘진흙 근(堇)’이 합쳐진 ‘삼갈 근(謹)’ 자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었다.
“삼가다, 금지하다, 입을 닫다……. 도윤 씨, 서하 씨가 아까 했던 말 기억합니까? 아무것도 돌려주지 말라고 했죠. 그게 이 ‘근’ 자랑 연결돼요. 이건 단순한 성씨 단서가 아니라, 도윤 씨 진짜 이름에 걸린 ‘금기’ 그 자체일 수도 있습니다.”
“금기요?”
“이름이 세상에 나오는 걸 막고 있는 잠금쇠 같은 거죠. 그리고 지금 저자는 그 잠금쇠를 서하 씨 생명줄이랑 엮으려는 겁니다.”
이현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한지율이었다.
“강도윤 씨! 서하 씨 상태가 이상해요!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손목에 갑자기 피멍 같은 게 올라오는데…… 꼭 바늘에 찔린 자국 같아요! 그리고 심박 모니터가……!”
지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모니터 구석에 숫자가 떴어요. 05:00:00. 입관실 전광판이랑 똑같은 숫자가요!”
전광판의 숫자는 이제 4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관리자가 바늘을 들어 올렸다.
“제안하죠. 이 이름표를 당신의 ‘사망신고서’에 임시로 꿰매겠습니다. 그러면 윤서하의 시간은 30분 연장되죠. 대신, 대가가 따릅니다.”
“내 기억 하나를 가져가겠다, 뭐 그런 뻔한 시나리오입니까?”
“정확히는 당신의 ‘원본’에 대한 기억입니다. 당신이 누구였는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파편 하나를 이 검은 실로 봉인하겠습니다. 30분마다 하나씩. 수락하시겠습니까?”
잔인한 할부 결제다. 서하를 살리려면 나를 지워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 잊어갈수록 서하의 숨은 붙어 있겠지만, 결국 마지막에 남는 건 서하의 시신 앞에 선 ‘이름 없는 껍데기’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관리자의 손에 들린 검은 실을 노려봤다. 잔향청취를 위해 감각을 극도로 끌어올렸다.
바늘과 실, 그리고 이름표.
그 세 가지가 얽히며 내는 기괴한 불협화음이 들려왔다.
(……보증……보증인이 필요해…….)
(……이 아이가 죽으면 잠금쇠가 풀린다…… 아직은 안 돼…….)
(……도윤의 이름을 감추는 대가로…… 서하를 묶어둔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서하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었다. 내 진짜 이름을 세상으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검은 우산’이 걸어둔 살아있는 자물쇠였다. 서하가 죽으면 자물쇠가 부서지고 내 이름이 드러나겠지만, 그건 곧 내가 ‘검은 우산’에게 완전히 노출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하가 “아무것도 돌려주지 마”라고 했던 건, 자기를 살리려고 내 정체성을 포기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도윤 씨, 안 됩니다. 저건 함정이에요. 기억을 내주는 순간 단서를 찾아낼 힘을 잃습니다.”
이현우가 만류했지만, 나는 이미 발을 떼고 있었다.
관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내가 굴복할 것이라 확신하는 듯했다.
“30분이라. 너무 짜네. 이왕 꿰매는 거 좀 통 크게 갑시다.”
나는 관리자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차가운 냉기가 장갑을 뚫고 전해졌다. 하지만 나는 놓지 않았다. 오히려 내 시선을 입관 명부의 한 줄로 돌렸다.
[05:00 - 강도윤]
20년 전 죽은, 내가 이름을 빌려 쓰고 있는 그 아이의 이름.
“내 기억을 가져가는 건 너무 흔하잖아. 대신 이 ‘가짜 강도윤’의 기록을 담보로 잡지. 어차피 당신들 장부에는 이 아이도 나로 되어 있잖아?”
“그건 공정 오류입니다. 죽은 자의 기록은 수정할 수…….”
“수정하라는 게 아니야. ‘덧씌우기’를 하라는 거지. 내 기억 대신, 이 아이가 죽으면서 남긴 잔향을 저 이름표에 꿰매. 그럼 서하의 이름표는 내 사망신고서가 아니라 이 아이의 ‘제적등본’에 묶이겠지.”
관리자의 눈동자가 경련하듯 떨렸다. 내 제안은 규칙의 빈틈을 정면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나는 아까 얻은 ‘근(謹)’의 단서를 머릿속으로 그리며, 그 획의 뒤틀림을 이용해 관리자의 검은 실을 낚아챘다.
“내가 겪었던 죽음의 통증, 그 결제는 이미 끝났어. 그러니까 이 바늘도 내 허락 없이는 못 움직여!”
나는 강제로 관리자의 손을 이끌어 명부 위로 내리눌렀다. 검은 실이 요동치며 서하의 이름표를 휘감았다.
찌르르, 뇌를 긁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대가가 없지는 않았다.
‘……아.’
머릿속 한구석이 가위로 잘려 나간 듯 텅 비었다.
어린 시절, 누군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따뜻한 손길의 감촉. 그 손의 주인공이 누구였는지, 어떤 냄새가 났는지에 대한 기억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하지만 결과는 확실했다.
전광판의 글자가 일렁거리더니 바뀌었다.
[05:00 - 윤서하 (확정 대기)] -> [06:00 - 윤서하 (공정 보류)]
“……미친 사람. 정말로 자기 기억을 태워서 시간을 벌다니.”
이현우가 허탈한 듯 내뱉었다. 내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방금 사라진 기억이 무엇인지조차 이제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가슴 한복판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허전함만이 남았을 뿐.
관리자는 불쾌한 듯 내 손을 뿌리치고는 장갑을 정돈했다.
“임시 조치일 뿐입니다. 바느질은 아직 끝나지 않았죠. 당신이 빌려 쓴 ‘이름’의 진짜 주인은 여전히 관 속에 누워 있으니까요.”
그가 바늘을 거두자, 입관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오래된 나무 관의 뚜껑이 천천히 열렸다. 20년 전 죽은 ‘진짜 강도윤’의 것이어야 할 사망신고서 한 장이 바람에 날려 내 발치에 떨어졌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된 종이.
사망자 성명란에는 정갈한 글씨로 ‘강도윤’이라 적혀 있었다. 하지만 내 시선이 멈춘 곳은 그 아래, 보호자이자 신고자 란이었다.
박철수의 이름이 있어야 할 그곳에는, 전혀 모르는 성씨 하나가 날카로운 필체로 적혀 있었다.
신고자: 諸葛(제갈) ○○
“제갈……?”
이현우의 눈이 커졌다. 대한민국에서 흔치 않은 복성.
그 성씨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또 다른 잔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것은 방금 잃어버린 따뜻한 기억과는 정반대의, 얼음처럼 차갑고 비릿한 피 냄새 섞인 목소리였다.
너는 죽어서도 이름을 남겨선 안 된다. 그게 네 업보다.
전광판의 숫자가 다시 깜빡였다.
[다음 결제 장소: 지하 3층 안치실 B-12호 (냉동 보관실)]
냉기 서린 공기가 입관실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이제 서하의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늘어났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방금, 내 영혼의 한 조각을 지불했다.
“가자, 현우 씨. 다음은 냉동실이래. 거기 가면 내 이름이 아이스크림처럼 꽁꽁 얼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나는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사라진 기억 때문인지, 아니면 안치실에서 올라오는 냉기 때문인지, 몸이 자꾸만 떨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