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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209화. 빈 이름표의 방향과 윤서하의 임시 이름 일러스트

208-209화. 빈 이름표의 방향과 윤서하의 임시 이름

208화. 빈 이름표의 방향

발밑의 철판이 투명해지는 순간, 세상의 중력이 뒤집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아니, 중력은 그대로인데 ‘나’라는 존재의 무게중심만 저 아래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투명해진 점검 통로 아래로 거대한 거미줄처럼 얽힌 빛줄기들이 보였다. 그것은 지하철 노선도 같기도 했고, 누군가의 잘린 혈관 같기도 했다. 그 빛줄기들—실종된 자들의 ‘귀가 경로’ 끝에 내 이름표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강도윤]. 딱딱한 협회체로 박힌 그 글자가 마치 미끼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바로 옆, 약 올리듯 놓여 있는 또 하나의 빈 이름표.

[다음 대체명: ]

그 빈칸이 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름표와 이름표 사이에서 발생하는 보이지 않는 인력이 내 정강이를 붙잡고 바닥 아래로 끌어내렸다.

“……아.”

입술을 달싹이자마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머릿속에 들어있던 일상의 파편들이 마치 협회 데이터베이스의 무미건조한 항목으로 재편성되기 시작했다.

어젯밤 편의점에서 고민 끝에 골랐던 육개장 사발면의 알싸한 맛은 ‘야간 근무 보급품 A-3’라는 코드로 치환되었다. 매달 통장에서 꼬박꼬박 빠져나가던 월세 고지서의 압박은 ‘거주 이력 검증 실패’라는 붉은색 경고등으로 바뀌어 뇌리에 점멸했다. 추억이 데이터로, 생활이 서류로 오염되고 있었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분류되기를 기다리는 ‘물건’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신 차려요, 강도윤 씨!”

윤서하의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그녀가 단말기를 내팽개치듯 바닥에 내려놓고는 품속에서 은색 현장 검증용 펜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이름이 쓰이게 두지 않을 거야. 이건 일종의 좌표 침식이에요. 공간이 당신을 인식하기 전에 내가 먼저 ‘고정’할게요.”

윤서하는 망설임 없이 투명한 철판 위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 넣기 시작했다. 현장 감식반들이 오염된 마력을 일시적으로 격리할 때 쓰는 임시 앵커(Anchor) 수식이었다. 즉흥적인 시도였지만 근거는 있었다. 현장 감식반은 오염된 마력의 좌표를 붙들 때 비슷한 표시를 쓴다.

끼이익, 은색 펜촉이 철판을 긁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가온아, 라이터랑 단추 냄새 계속 추적해! 어느 쪽이 진짜인지 찾아!”

“으, 으응! 언니, 근데 냄새가…… 냄새가 찢어지고 있어!”

반가온이 울먹거리며 우산 손잡이를 꽉 쥐었다. 아이의 팔찌에서 떨어져 나온 반쪽짜리 단추와 우산 손잡이에서 풍기는 향수 냄새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하나는 아저씨 이름표 쪽으로 가는데, 다른 하나는 저 빈 이름표 쪽으로 가요! 마치 한 사람이 양쪽에서 자기 팔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냄새야!”

가온의 말대로였다. 우산 손잡이에 남은 ‘여성용 라이터 주인’의 잔향은 하나이되 둘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본질을 쪼개어 이 경로의 설계도로 사용한 것 같았다. 가온은 구역질이 나는 듯 입을 틀어막으면서도 코를 떼지 않았다. 겁 많은 꼬맹이가 현장에서 버티는 방식은 언제 봐도 지독했다.

쾅!

그때, 머리 위에서 천장이 내려앉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정화 수거반의 금속 집게가 결국 점검 통로의 외벽을 뚫고 들어왔다. 거대한 게의 다리처럼 생긴 은색 집게가 난간 사이를 휘저으며 바닥 철판을 찍어 눌렀다.

콰직, 투명해진 철판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그 틈새로 지하에 고여 있던 ‘귀가 경로’의 잔향들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 삼각김밥은 데워달라고 할걸.

— 오늘 딸기우유 사 가기로 했는데, 애가 기다릴 텐데.

— 아, 비 오네. 우산 안 가져왔는데.

— 이번 달 카드값…… 하아, 진짜 죽고 싶다.

수많은 사람의 평범하고도 구질구질한 퇴근길 목소리들이 귀청을 때렸다. 누군가에게는 지겨운 일상이었을 그 목소리들이, 돌아가지 못한 자들의 유언이 되어 이 폐쇄된 통로 안을 떠돌았다. 슬프다기보다는 지독하게 현실적이라 더 소름 돋는 목소리들.

옆에 서 있던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이는 솟구치는 잔향들 속에서 필사적으로 단 하나의 목소리를 찾으려 했다.

“엄마……?”

아이가 균열 사이로 손을 뻗으려 하자, 나는 본능적으로 아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안 돼. 저건 소리만 남은 껍데기야. 들어가면 못 나와.”

“하지만 엄마 목소리가…….”

“네 엄마는 저런 데 없어. 저건 그냥 이 통로가 뱉어내는 찌꺼기일 뿐이야.”

내 말투는 평소보다 딱딱했다. 아이를 달래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아이는 울지 않았다. 대신 내 옷자락을 꽉 쥐고는, 다른 한 손으로 자기 팔찌에 남은 반쪽 단추를 세 번 두드렸다.

딱, 딱, 딱.

그 규칙적인 리듬이 울릴 때마다 내 손바닥에 새겨진 검은 우산 낙인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윽!”

고통과 함께 빈 이름표 위에 써 내려가던 투명한 글자가 멈췄다. 아이가 두드리는 단추의 리듬이 시스템 오류를 멈추는 임시 정지 키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아이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나를 올려다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아저씨…… 태우지 마. 아저씨 이름, 안 뺏기게 할 거야.”

아이의 용기는 가상했지만 상황은 최악이었다. 윤서하의 앵커는 집게의 물리적인 타격에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았고, 빈 이름표는 여전히 내 이름을 갈구하며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이름을 바쳐야만 이 경로가 완성된다면, 이름을 바치지 않고도 경로를 끝낼 방법은 없는 걸까.

문태식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누군가는 대체명이 되어야 한다.’

아니, 틀렸어. 대체명이라는 건 결국 혼자서 그 무게를 감당하니까 생기는 문제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면, 나누면 된다.

“윤 팀장님.”

“말 시키지 마요! 지금 수식 계산하기 바쁘니까!”

“내 이름 불러요.”

“뭐라고요?”

윤서하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빈정거렸다.

“거기 멍하니 서 있는 것보다 내 이름 부르는 게 더 도움 될 겁니다. 큰 소리로,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증명하라고요.”

현장 대응 치고는 민망한 방법이다. 하지만 헌터 세계에서 ‘인식’은 곧 ‘존재’다. 한 명의 시스템이 나를 지우려 한다면, 세 명의 인간이 나를 붙들면 된다.

윤서하는 잠시 멍청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내 의도를 파악한 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강도윤 씨, 거기 가만히 있어요. 제멋대로 사라지면 무단결근 처리할 테니까!”

“아저씨! 강도윤 아저씨!”

가온이도 덩달아 소리를 질렀다. 아이 역시 내 이름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세 사람의 목소리가 좁은 점검 통로 안에 공명했다. 민망해서 혀라도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내 기억을 잠식하던 ‘보급품’이니 ‘거주 이력’이니 하는 딱딱한 단어들이 녹아내리고, 그 자리에 다시 컵라면의 냄새와 월세 걱정의 눅눅한 습기가 차올랐다.

동시에, 발밑의 경로 중 하나가 거세게 뒤틀리며 종이 조각 하나를 위로 뱉어냈다. 과거 문태식이 남긴 메모의 파편이었다.

[세 번째 이니셜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돌아가야 할 곳을 가리키는 방향이다.]

방향? 그게 무슨 개소리야.

의문을 가질 틈도 없었다. 위쪽에서 난입한 금속 집게 하나가 번개처럼 낙하하더니, 바닥에 박혀 있던 ‘빈 이름표’를 낚아챘다.

정화 수거반의 목표가 바뀐 건가? 아니면 시스템이 오류를 수정하려는 건가?

집게에 붙잡힌 빈 이름표가 공중으로 끌어올려졌다. 그 짧은 찰나, 이름표의 빈칸에 날카로운 획 하나가 그어졌다.

검은 잉크가 번지듯 나타난 첫 글자. 그것은 내 성인 ‘강’이 아니었다.

그것은 ‘ㅇ’으로 시작하는, 지극히 익숙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 가장 보고 싶지 않은 글자였다.

‘윤(尹)’.

윤서하의 성과 똑 닮은 그 한 획이 이름표의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내 등 뒤로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빈 이름표는 나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나를 붙잡고 있는 ‘앵커’를 감지하고, 그 앵커의 주인으로 다음 표적을 수정한 것이었다.

“윤 팀장님, 피해!”

내 외침보다 집게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빈 이름표를 움켜쥔 집게가 방향을 틀어 윤서하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빈 이름표에 적힌 글자가 마치 굶주린 짐승의 눈처럼 번뜩였다.

209화. 윤서하의 임시 이름

"윤 팀장님, 피해!"

내 비명은 정화 수거반의 금속 집게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파묻혔다. 거대한 기계 팔이 투명해진 철판 바닥을 찍어 누르며 내려앉았다. 표적은 명확했다. 내 이름표 [강도윤] 옆에서 맥동하던 빈 이름표가, 내 성 대신 윤서하의 성씨인 '윤'의 첫 획을 긋는 순간 시스템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이다.

하지만 윤서하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오히려 자신의 구두 끝으로 철판 위에 그려진 은색 앵커 수식을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뭐 하는 거야! 죽고 싶어?!"

"계산상 이게 맞아요. 강도윤 씨를 놓치면 우린 여기서 전원 소거됩니다."

윤서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단말기를 쥔 손가락 끝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동자는 집게의 날카로운 끝부분을 보며 경련하듯 흔들렸다. 겁을 집어먹은 게 분명한데도 그녀의 뇌는 공포보다 효율을 먼저 출력하고 있었다. 그녀는 앵커의 중심점으로 자기 몸을 밀어 넣었다. 강도윤이라는 좌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방패로 삼은 셈이었다.

쾅!

집게가 그녀의 머리 바로 위, 보이지 않는 기하학적 방벽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다. 충격파에 윤서하의 안경이 비뚤어졌다. 그녀의 단말기 화면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경고: 관찰자 권한 회수 중]

[알림: 임시 이름 재할당 대기...]

빈 이름표 위에 나타난 '윤'이라는 글자가 잉크처럼 번지며 다음 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저게 완성되면 윤서하의 존재는 협회 데이터베이스에서 '폐기 예정인 보급품' 따위로 치환될 것이다.

"윤서하!"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 앵커를 강화하려 했다. 하지만 목구멍에 딱딱한 이물감이 돋았다.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어 제멋대로 꼬였다. 시스템이 내 발화 권한을 간섭하고 있었다.

"윤... 윤서...류함!"

"뭐라고요?"

윤서하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돌아봤다. 나도 미칠 노릇이었다.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그녀의 이름을 외치고 있는데,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전혀 다른 단어들이었다.

"윤... 소하물! 아니, 윤... 서... 서점 주인!"

"강도윤 씨, 지금 농담할 상황입니까?"

"농담... 아냐! 읍, 윤... 서... 서무과!"

제기랄, 시스템 이 개자식들이 내 주둥이에 필터링을 걸어버렸다. '윤서하'라는 세 글자가 금지어라도 된 양 비슷한 음절의 단어들만 쏟아졌다. 우스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등 뒤로 흐르는 식은땀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름이 불리지 못하는 관찰자는 더 이상 관찰자가 아니다. 지켜줄 사람이 없으면 그녀는 잡아먹힌다.

반가온이 내 옷자락을 붙들며 코를 킁킁거렸다. 녀석의 얼굴이 유령을 본 것처럼 창백해졌다.

"아저씨, 윤 팀장 언니한테서 이상한 냄새가 나요."

"무슨 냄새인데?"

"비 맞은 흰 장갑 냄새... 그리고 아주 차가운 편의점 커피 냄새. 아, 단말기 액정이 깨졌을 때 나는 탄내도 섞여 있어요."

그건 생명의 냄새가 아니었다. 사무실 구석에서 잊힌 채 폐기되는 비품들의 냄새, 혹은 누군가의 마지막 근무지가 남기는 쓸쓸한 잔향이었다. 시스템이 윤서하를 '사람'이 아닌 '물건'으로 처리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집게가 다시 한번 위에서 아래로 짓눌러왔다. 앵커 수식이 비명을 지르며 균열을 일으켰다. 윤서하의 발밑으로 투명했던 철판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아가리가 그녀를 삼키려는 것 같았다.

"너, 너도 불러! 어서!"

나는 아이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아이는 내 뒤에 숨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이는 강도윤이라는 이름은 불렀지만, 윤서하에 대해서는 여전히 경계심을 풀지 못한 상태였다. 아이에게 윤서하는 자신을 조사하고, 가두고, 딱딱한 질문을 던지던 협회 사람이었으니까.

"무서워요... 저 아줌마는 나를 싫어할 거야."

아이의 작은 목소리에 윤서하가 피식, 실소했다. 그녀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금속 집게의 압력을 버티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꼬마야, 착각하지 마. 난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분석하기 까다로워하는 것뿐이야. 그리고 굳이 이름을 부르기 싫으면 직함으로 불러도 돼. 내 이름은 비싸거든."

그 와중에도 품위를 지키려는 말투였지만, 그녀의 다리는 눈에 띄게 후들거리고 있었다. 아이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내 옷자락을 꽉 쥔 채, 보이지 않는 용기를 쥐어짜듯 입을 뗐다.

"윤... 윤 팀장 아줌마!"

순간, 윤서하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줌마...?"

불평할 새도 없었다. 아이의 목소리가 닿자마자 바닥의 앵커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강하게 살아났다. '윤' 자에서 멈춰 있던 이름표의 필적이 잠시 흐릿해지며 뒤로 물러났다. '아줌마'라는 호칭이 시스템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아이가 인식하는 윤서하라는 존재의 좌표를 고정하는 데는 성공한 모양이었다.

"아줌마라고 부른 대가는 나중에 톡톡히 치르게 해 주죠. 일단 여기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에요."

윤서하가 단말기를 두드리며 이를 악물었다. 나는 문태식의 메모 조각을 떠올렸다.

[세 번째 이니셜은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돌아가야 할 곳을 가리키는 방향이다.]

방향.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점검 통로의 난간 모양, 내 검은 우산 손잡이의 굽은 각도, 그리고 아이가 세 번 두드렸던 팔찌 단추의 문양. 그 모든 것이 가리키는 미세한 공통점이 있었다.

이건 동서남북 같은 평면적인 방향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설계한 '귀가 경로'의 뒤틀린 틈새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화 수거반의 집게가 노리는 바닥이나 천장이 아니었다.

"저기야!"

나는 배관 뒤쪽, 성인 한 명이 간신히 기어 들어갈 법한 좁은 틈을 가리켰다. 벽면의 결이 교묘하게 어긋나 있는 곳이었다.

"저기로 가야 해. 거기가 세 번째 방향이야!"

"저런 구석에 길이 있다고요? 제 검증 시스템에는 벽으로 나오는데..."

"시스템을 믿지 말고 내 감을 믿어! 퇴근하고 싶은 내 본능은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으니까!"

우리는 포복 자세로 좁은 배관 사이를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정화 수거반의 집게가 철판을 완전히 박살 내는 굉음이 들려왔다. 금속이 뒤틀리고 찢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좁은 공간은 먼지와 녹슨 쇠 냄새로 가득했다.

앞서 기어가는 아이의 뒤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환청 같은 목소리가 벽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세 번째 방향으로 보내. 이름이 아니라 귀가를 숨겨.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반가온이 아까 말했던, 여성용 라이터에서 나던 그 향수 잔향이었다. 차갑지만 우아하고, 어딘가 비극적인 향기. 그 목소리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치 우리를 유도하듯 배관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강도윤 씨, 저기 좀 봐요."

가장 뒤에서 쫓아오던 윤서하가 낮게 속삭였다. 배관 뭉치가 끝나는 지점, 막다른 벽처럼 보이던 곳에 아주 작은 금속 점검문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문은 오랫동안 열리지 않은 듯 녹슬어 있었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건 문고리 옆에 휘갈겨 써진 손글씨였다. 낡은 매직으로 급하게 적은 듯한 글씨체. 나는 그 필적을 알고 있었다. 문태식이었다.

[윤서하에게 보여주지 말 것.]

글귀를 읽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뒤를 확인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바로 내 뒤에서 기어오던 윤서하의 단말기 불빛이 이미 그 문구를 훤히 비추고 있었다.

윤서하의 눈동자가 문구에 고정되었다. 그녀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배관 너머에서 다시 한번 정화 수거반의 기계음이 들려왔지만, 지금 이 좁은 통로 안을 지배하는 침묵이 훨씬 더 위협적이었다.

"강도윤 씨."

윤서하가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나는 대답 대신 문고리를 잡았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금속의 냉기가 뼛속까지 시려왔다. 이 문을 여는 순간, 우리가 공유하던 위태로운 동맹이 박살 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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