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210-211화. 보여주지 말라는 문과 존재할 수 없는 관찰자 일러스트

210-211화. 보여주지 말라는 문과 존재할 수 없는 관찰자

210화. 보여주지 말라는 문

"강도윤 씨.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윤서하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온도가 몇 도쯤 떨어진 것 같았다. 좁은 배관 안,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와중에도 그녀의 목소리만은 서늘한 칼날처럼 고막을 파고들었다.

문태식의 필체는 평소처럼 무심했다. 낡은 금속 점검문, 문고리 바로 옆에 날카로운 것으로 긁어 적은 문구. [윤서하에게 보여주지 말 것.]

그 문구 바로 앞에, 당사자인 윤서하가 서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 뒤통수를 뚫어버릴 듯이 박혔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좁은 공간 탓에 어깨가 배관 벽면에 닿아 불쾌한 금속 마찰음이 났다.

"그게, 팀장님. 문 선배 성격 아시잖습니까. 원래 좀 청개구리 기질이 있는 양반이라……."

"농담은 됐어요."

윤서하가 내 말을 잘랐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평소의 기계적인 냉정함이 아니라, 믿었던 발판이 무너져 내릴 때의 불안함이었다.

"이 문 너머에 뭐가 있길래, 문태식 헌터가 내 이름을 콕 집어서 적어둔 거죠? 내가 이 사건의 증거입니까, 아니면 처리해야 할 표적입니까?"

"둘 다 아닐 겁니다. 아마도요."

나는 대답 대신 배관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금속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화 수거반의 거대한 집게발이 우리가 지나온 경로를 가차 없이 뜯어내고 있었다. 녹가루와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진동이 배관을 타고 전달되어 발바닥이 저릿했다.

"팀장님, 지금은 서운해할 시간이 없습니다. 저 집게가 우리를 캔 통조림처럼 따버리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야 해요."

"이 문구, 강도윤 씨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 아니에요?"

윤서하가 한 걸음 다가왔다. 좁은 배관 안에서 그녀와 나의 거리는 한 뼘도 되지 않았다. 그녀의 숨결에서 반가온이 말했던 '차가운 편의점 커피' 향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떨리는 호흡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모르고 있었습니다. 저도 방금 봤거든요. 그런데 문 선배가 하지 말라고 한 건, 보통 두 가지 의미입니다. 진짜 위험해서 하지 말라는 거거나, 아니면 제때가 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거거나."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손끝에 닿는 금속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지금이 그 '제때'인 것 같네요. 보여주기 싫어한 걸 보여줘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이니까."

"아저씨, 저기서 냄새가 나요."

반가온이 내 옷소매를 당기며 속삭였다. 아이를 품에 안은 채 잔뜩 몸을 웅크린 녀석의 코가 실룩거렸다.

"문고리에서요. 아까 그 예쁜 라이터에서 나던 냄새…… 그리고 문 아저씨가 맨날 쓰던 그 지독한 알코올 소독제 냄새도 같이 나요. 섞여서 아주 이상한 냄새가 나요."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 품에 안긴 아이는 겁에 질린 와중에도 문 너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안에서…… 엄마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아주 조금요. 아주, 아주 조금……."

아이의 확신 없는 목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문태식의 소독제 냄새와 이름 모를 여성의 향수 냄새. 그리고 아이가 느끼는 연고의 기억. 이 모든 게 이 낡은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얽혀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문고리를 돌렸다. 끼이익, 비명을 지르며 문이 열렸다.

문 안쪽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공간이었다. 협회 지하 어딘가에 숨겨진 비밀 기지라기보다는, 잊힌 유령 도시의 관공서 같은 분위기였다. 천장에는 수명을 다해 깜빡거리는 형광등이 겨우 빛을 내고 있었고, 벽면을 따라 녹슨 철제 서랍장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공기는 정체되어 무거웠다. 누군가 일부러 시간을 멈춰놓은 듯한 압박감이었다.

"여기는…… 기록실인가요?"

윤서하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녀의 구두 소리가 빈 공간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벽면 한쪽에는 낡은 지도가 붙어 있었다. 협회 근방의 지형도였지만, 일반적인 지도와는 달랐다. 붉은색 펜으로 복잡하게 그어진 선들은 '귀가 경로'라는 기괴한 명칭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이름표를 끼워두는 보관판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칸이 비어 있거나, 이름표 자체가 날카로운 도구로 찢겨 나가 있었다. 누군가 증거를 인멸하려 한 흔적이 역력했다.

"강도윤 씨, 이쪽을 보세요."

윤서하가 가리킨 곳에는 구석에 처박힌 낡은 기록용 단말기가 있었다. 전원이 꺼진 채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지만, 내가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이상한 반응이 일어났다.

내가 쥐고 있던 검은 우산, 그 끝에 새겨진 낙인이 웅웅거리며 진동했다. 마치 단말기가 내 우산을 인증 키로 인식한 것처럼, 죽어 있던 화면에 푸르스름한 빛이 들어왔다.

[시스템 복구 중…….]

[불완전한 로그 데이터 로드 완료.]

화면 위로 깨진 글자들이 어지럽게 나열되었다.

임시 관찰자 Y : 상태 이상 확인.

세 번째 방향 은닉 성공 : 경로 재구성 완료.

귀가 대상 1명 누락 : 탐색 불가.

대체명 후보 리스트 : K.D.Y / Y.S.H / 미등록 아동

글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우리를 비웃었다. 'K.D.Y'와 'Y.S.H'. 그리고 이름 없는 아이. 우리 셋의 존재가 이 낡은 기계 안에 코드화되어 기록되어 있었다.

윤서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는 자신의 이니셜이 분명한 'Y.S.H'를 보며 뒷걸음질 쳤다.

"관찰자…… Y? 대체명이 나라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혼란에 빠진 와중에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단말기 화면을 찍기 위해 휴대용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로그를 저장하려는 모습은, 감정에 휩쓸리면서도 끝내 업무를 놓지 못하는 그녀다운 처절함이 느껴졌다.

나는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렁거림을 억누르며 단말기 옆면에 손을 얹었다. 잔향청취. 내가 가진 이 기분 나쁜 재능이 다시금 발동했다.

치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태식이었다.

야, 보여주지 말라면 꼭 보여주더라. 너희 둘 다 성격 더럽게 닮았어. 특히 강도윤, 너 말이야. 내 말 좀 들어라, 어?

농담조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물기는 감출 수 없었다. 평소처럼 낄낄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그건 억지로 쥐어짜는 비명이기도 했다.

서하야. 네가 이걸 봤다면…… 미안하다. 근데 말이야, 네가 이걸 너무 일찍 보면 안 됐어. 아직은 네가 '윤서하'로 살아야 하거든. 이 시스템의 부품이 아니라, 그냥 고집불통 팀장님으로 말이지.

잔향은 거기서 끊겼다. 문태식은 윤서하를 배신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를 보호하려 했다. 그녀가 자신이 누구인지, 혹은 무엇으로 지정되어 있는지 알게 되는 순간 찾아올 파멸로부터.

"문 선배……."

내 입에서 탄식 같은 이름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었다.

쾅! 쾅! 쾅!

기록실 입구의 점검문이 거대한 힘에 의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정화 수거반의 집게가 벽을 뚫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동시에, 공중에 떠 있던 빈 이름표의 '윤' 자가 다시금 붉은 빛을 내며 요동쳤다.

벽면에 붙은 이름표 보관판에서, 유독 깨끗하게 비어 있던 칸 하나가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무덤처럼, 윤서하를 향해 입을 벌렸다.

"안 돼……."

반가온이 비명을 질렀다. 윤서하의 몸이 자석에 끌리듯 이름표 보관판 쪽으로 휘청거렸다. 시스템이 그녀를 '재할당'하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내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갑자기 내 팔을 뿌리치고 보관판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저기, 내 이름이 들어갈 자리 아니야!"

아이가 작은 손으로 보관판의 빈칸 중 하나를 가리켰다. 아이의 눈에는 공포가 아닌, 어떤 확신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저긴…… 내가 원래 있던 데야. 아줌마 자리가 아니라고!"

아이의 외침과 동시에 보관판의 진동이 멈췄다. 아이는 누군가에 의해 일부러 숨겨진 '귀가 대상'이었다. 시스템의 오류로 누락된 것이 아니라, 누군가 아이를 시스템의 눈을 피해 이곳에 은닉시킨 것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고장 난 단말기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화면 가득 붉은 경고창을 띄웠다.

[데이터 충돌 발생.]

[관찰자 Y.S.H.의 상태값을 재검증합니다.]

글자들이 빠르게 흘러가더니, 단 한 줄의 문장만을 남기고 멈췄다.

[관찰자 Y.S.H. 사망 처리 예정 시각 : 742일 전. (이미 지남)]

윤서하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2년 전. 그녀가 이 일을 시작하기도 전의 시점이었다.

"……사망?"

윤서하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의 손. 하지만 시스템의 기록은 그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뒤쪽에서 배관을 뜯어내고 들어온 정화 수거반의 금속 집게가 기록실 내부를 휘저었다. 거대한 불꽃이 튀며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나는 멍하니 서 있는 윤서하의 손목을 낚아챘다.

"팀장님, 정신 차려요! 당신 살아있어. 내 눈앞에 있잖아!"

내 외침은 무너져 내리는 건물 잔해와 기계의 굉음에 묻혀버렸다. 화면 속의 붉은 글자만이 잔인하게 깜빡였다.

[오류 : 존재할 수 없는 관찰자가 감지되었습니다. 즉시 삭제 프로세스를 가동합니다.]

그 문장이 깜빡이는 동안, 윤서하의 손목에서 사람의 맥박이 너무 선명하게 뛰고 있었다.

211화. 존재할 수 없는 관찰자

빨간불이 터졌다. 경고음이라기보다는 비명에 가까운 고주파가 고막을 찔렀다. 비상 기록실의 낡은 천장이 비틀리며 녹슨 쇳가루가 눈처럼 쏟아졌다.

쿠구궁, 소리와 함께 기록실 입구 쪽 배관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정화 수거반의 거대한 집게발이 벽을 찢고 들어와 허공을 휘저었다. 저건 쓰레기를 줍는 도구가 아니다. 존재해서는 안 될 오차를 뜯어내기 위한 시스템의 손톱이다.

[오류 : 존재할 수 없는 관찰자가 감지되었습니다.]

[즉시 삭제 프로세스를 가동합니다.]

단말기의 액정 위로 붉은 글자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윤서하의 얼굴이 그 붉은 빛에 물들어 창백하게 질려갔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쥔 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742일 전. 그녀가 죽었어야 했다는 날짜. 아니, 시스템의 기록대로라면 이미 죽어 없어져야 했을 시간의 잔해.

“윤 팀장님!”

내 목소리가 금속음에 묻혔다. 윤서하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시스템이 그녀를 ‘기록’으로 규정하려 들 때, 인간의 자아는 그 거대한 논리에 먹혀버리기 마련이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흔들었다.

“정신 차려요! 당신 지금 내 손 잡고 있잖아. 맥박 뛰는 거 안 느껴져? 당신 아직 퇴근도 안 했고, 나한테 잔소리할 서류 더미도 산더미처럼 남았다고!”

“……강도윤 씨.”

“그래요, 강도윤. 그리고 당신은 윤서하. 협회 헌터 지원팀장. 편의점 1+1 행사 제품은 절대 안 놓치는 깐깐한 상사. 지금 여기서 이름표 한 칸으로 요약될 사람이 아니라고!”

윤서하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 앞쪽, 경동맥을 짚었다.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뛰는 박동. 그녀의 눈에 다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판단력이 살아난 것이다.

“……살아 있는 증거가 필요하다면, 현장 증거부터 남겨야겠네요.”

그녀가 떨리는 손가락을 단말기 자판 위에 올렸다. 로그를 저장하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천장에서 떨어진 집게발이 단말기 바로 옆 책상을 박살 냈다. 파편이 튀어 내 뺨을 긋고 지나갔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가온아! 냄새!”

내 외침에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이름표 보관판 앞으로 달려갔다. 녀석은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본능적으로 물건들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아저씨, 여기 냄새가…… 냄새가 세 개가 섞여서 싸우고 있어요! 차가운 커피 냄새는 팀장님 쪽으로 당겨지는데, 엄마 냄새 같은 건 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고…… 그리고 아저씨 우산에서 나는 그 탄내 같은 게 중간에서 막 엉켜 있어요!”

세 가지 냄새. 차가운 커피 향이 윤서하의 것이라면, 아이의 어머니와 연관된 냄새는 보관판 안쪽의 무언가와 공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낙인의 냄새가 그 사이를 찢고 있었다. 냄새들은 한 칸 안에서 겹치지 못한 채 서로를 밀어내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세 개의 진실이 한 자리를 놓고 다투는 것처럼.

“저기, 내 이름이 들어갈 자리 아니야.”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던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복했다. 아이는 보관판의 빈칸을 가리키며 뒷걸음질 쳤다.

“저긴 내가 원래 있던 데야. 아줌마 자리가 아니라고! 저기가 날 불렀었어. 그런데 아저씨가…… 아저씨가 날 꺼내준 거잖아!”

아이의 말에 머릿속이 번쩍했다. 이 아이는 시스템의 오류가 아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귀가 대상’에서 빼내어 이 기록실의 빈칸 속에 숨겨두었던 존재다. 그리고 그 빈칸이 이제는 윤서하를 삼키려 들고 있다.

나는 아이의 이름을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지금 이름을 묻는 순간, 시스템은 이 아이를 ‘확정’ 지을 것이다. 이름을 얻는다는 건 시스템의 레이더망에 포착된다는 뜻이다. 지금은 무명(無名)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였다.

그때, 귀 옆에서 익숙하고도 짜증 나는 목소리가 찌릿하게 울렸다. 문태식의 잔향이었다.

보라고, 보여주지 말라니까 꼭 보고 난리지. 윤 팀장 성격 어디 가겠어?

“문태식 씨, 농담할 때 아니니까 해결책이나 내놔요!”

내가 허공에 대고 소리치자, 윤서하가 움찔하며 나를 보았다. 잔향은 오직 나에게만 들리는 유령의 목소리였다.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기록으로 이기려 들면 안 돼. 기록 쪽을 망가뜨려야지. 서류가 사람보다 세면, 사람은 영원히 퇴근 못 한다고. 내 책상 밑에 숨겨둔 비상용 수정액 같은 거 없나?

“수정액?”

아니면 잉크를 엎든가. 기록이 읽히지 않게만 만들면 시스템은 다음 명령을 못 내려. 멍청하거든.

잔향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나는 윤서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로그를 저장하느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윤 팀장님, 단말기 부숴버릴 수 있어요?”

“안 돼요! 이거 부수면 우리가 나갈 귀가 경로 데이터까지 다 날아가요. 로그는 확보해야 해요!”

“그럼 기록을 꼬아버려요. 당신이 ‘사망 예정’이 아니라 다른 상태인 것처럼!”

윤서하의 손가락이 미친 듯이 움직였다. 그녀는 관리자 권한을 우회하여 자신의 상태값을 강제로 수정하기 시작했다.

“삭제할 순 없어요. 시스템의 기본 로직이니까. 하지만…… ‘현장 확인 보류’ 상태로 덮어쓰는 건 가능할지도 몰라요. 불법이지만, 지금은 살고 봐야 하니까요.”

화면 위로 [State: DECEASED]라는 글자가 명멸했다. 윤서하가 그 위에 [State: PENDING_VERIFICATION]이라는 코드를 삽입했다. 붉은 경고등이 잠시 주춤하며 노란색으로 변했다가, 다시 붉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시스템이 모순된 데이터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지금이에요! 가온아, 아까 그 냄새들 밀어내는 방향 확인해!”

반가온이 손가락으로 지도 뒤쪽 벽을 가리켰다. “저기! 저기서 향수 냄새가 확 나요!”

동시에 나는 검은 우산의 낙인을 단말기에 가져다 댔다. 검은 불꽃이 튀며 회로를 지져버렸다. 아이는 내 지시에 따라 코트 주머니 속의 단추를 세 번 톡, 톡, 톡 두드렸다.

우산의 낙인, 아이의 리듬, 그리고 윤서하가 만들어낸 3초간의 시스템 오류.

그 찰나의 틈을 타고 비상 기록실 벽면의 낡은 귀가 경로 지도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 뒤에는 좁고 지저분한 구멍이 나 있었다. 사람을 위한 비상구가 아니었다. 이름표 보관판 자체를 외부로 배출하기 위한 물류용 배출구였다.

“들어가요! 빨리!”

내가 윤서하를 밀어 넣으려 하자, 그녀가 멈춰 서서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낚아챘다. 아까 보관판에서 찢겨 나갔던 이름표 조각이었다.

“팀장님!”

“이거…… 확인해야 해요.”

그녀가 챙긴 조각에는 ‘……하’ 혹은 ‘Y……’로 보이는 애매한 획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것이 윤서하의 이름인지, 아니면 아까 반가온이 맡았던 그 여성용 라이터 주인의 이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쓰레기통처럼 좁고 악취 나는 배출구 안으로 몸을 던졌다. 뒤쪽에서 정화 수거반의 집게가 기록실 단말기를 완전히 박살 내는 굉음이 들려왔다.

미끄럼틀을 타듯 어두운 통로를 한참 동안 굴러 내려갔다. 온몸이 딱딱한 금속 벽에 부딪혀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차가운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간신히 눈을 떴다.

“커헉…… 다들, 괜찮아요?”

나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짚으며 일어났다. 반가온은 아이를 꼭 껴안은 채 훌쩍이고 있었고, 윤서하는 먼지를 털어내며 안경을 고쳐 썼다.

그런데 주변 풍경이 이상했다.

협회의 지하 배관도, 눅눅한 기록실도 아니었다. 코끝을 찌르는 건 락스 냄새가 아니라, 익숙한 튀김 기름 냄새와 인공적인 방향제 향기였다.

“여기…… 편의점 창고 아니에요?”

가온이가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쌓여 있는 컵라면 박스, 유통기한이 지난 폐기 식품들이 담긴 비닐봉지. 우리가 늘 보던, 지상의 평범한 편의점 뒷방이었다.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창고 문을 열고 매장 안으로 나갔다.

하지만 매장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형광등은 깜빡거리고 있었고, 카운터 뒤의 모니터만이 홀로 빛나고 있었다.

“잠깐만요. 저거…….”

윤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카운터 위에 설치된 CCTV 화면이었다.

화면 속의 날짜는 오늘이 아니었다. 742일 전. 기록실 단말기에서 보았던 그 사망 예정일이었다.

그리고 화면 속에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윤서하가 있었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카운터로 다가가더니, 마치 누군가와 대화하듯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순간, CCTV 속의 윤서하가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니, 카메라 너머 지금 여기 서 있는 우리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화면 속의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나를 찾지 마.]

지지직, 소리와 함께 CCTV 화면이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똑같은 장면이 다시 시작되었다. 742일 전의 윤서하가 다시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끝없이 반복되는 지옥 같은 루프 속에서.

나는 주머니 속에서 아까 주운 여성용 라이터를 꽉 쥐었다. 라이터의 금속 재질이 손바닥을 차갑게 파고들었다.

“강도윤 씨, 저거…… 저 아니죠?”

윤서하가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편의점 밖은 짙은 안개에 싸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카운터 뒤 CCTV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딩동. 742일 전의 윤서하가 또 문을 열었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