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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6-207화. 계단 아래의 금지 표식과 빼앗긴 이름 일러스트

206-207화. 계단 아래의 금지 표식과 빼앗긴 이름

206화. 계단 아래의 금지 표식

문태식의 반쪽짜리 출입증은 손바닥 안에서 죽은 생선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뒷면에 적힌 피 글씨, '그곳은—'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나는 그 불길한 이정표를 주머니 깊숙이 쑤셔 넣었다. 거칠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가요. 여기 있으면 수거반인지 뭔지 하는 놈들한테 분리수거 당할 테니까."

나는 품 안의 아이를 다시 한번 고쳐 안았다. 아이의 몸은 가볍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만큼은 이상할 만큼 뜨거웠다. 그 온기가 지금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지표였다.

우리는 '비상 계단 0-B'라고 적힌 서비스 통로로 발을 들였다. 문을 넘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건 눅눅한 곰팡이와 오래된 종이가 썩어가는 냄새였다. 일반적인 건물의 비상 계단과 비슷해 보였지만, 벽면에 붙은 층수 표지판을 본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B4-1]

[B4-2]

[B4-삭제]

"삭제? 층수 이름이 왜 이따위야. 무슨 엑셀 파일 정리하다가 귀찮아서 지운 것도 아니고."

빈정거리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공포를 억누르기 위한 자가 방어 기제였다. 하지만 옆에서 벽면을 훑으며 내려가던 윤서하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녀는 멈춰 서서 계단 난간에 핀 녹의 방향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단순한 오타가 아니에요. 난간의 부식 정도와 공기의 흐름이 일정하지 않아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게 아니라, 특정 구간에서 공기가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도윤 씨, 여기는 물리적인 지하가 아니에요."

윤서하가 계단실의 구석진 배선을 가리키며 덧붙였다.

"기록상에서 폐기된, 혹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귀가 경로'들을 뭉쳐놓은 저장소 같은 곳이에요. 우리가 밟고 있는 이 계단 자체가 누군가의 지워진 퇴근길일 수도 있다는 뜻이죠."

"기분 더럽게 고맙네요. 남의 퇴근길 쓰레기통을 걷고 있다니."

뒤쪽에서 쇠붙이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질척, 끼이익. 아까 보았던 정화 수거반의 장화 소리와 금속 집게가 계단 난간을 훑는 소리였다. 붉은 조명이 문틈 사이로 가느다랗게 새어 나와 우리 발꿈치를 쫓았다. 놈들이 벌써 문턱을 넘었다.

"가온아, 뭐 좀 느껴지는 거 없어?"

내가 묻자, 반가온이 벽면에 깊게 패인 손톱자국에 코를 들이밀었다. 녀석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상해요. 문태식 아저씨 냄새가 나긴 하는데… 한꺼번에 나는 게 아니에요. 10년 전의 냄새, 5년 전의 냄새, 그리고 어제의 냄새가 층층이 쌓여 있어요. 마치 같은 사람이 수십 번, 매번 처음 이곳에 온 것처럼 행동하며 내려간 것 같아요."

"치매라도 걸려서 왔던 길을 계속 돌았다는 거야, 뭐야?"

"아뇨. 냄새의 결이 달라요. 매번 '처음'의 공포가 섞여 있어요."

반가온의 말은 등 뒤의 추격자보다 더 섬뜩하게 다가왔다. 그때, 내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이의 시선이 어두컴컴한 계단 아래쪽, 난간 사이의 빈 공간을 향했다.

텅. 텅. 텅.

규칙적인 금속음. 아이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엄마… 엄마가 하는 소리야."

아이가 내 품에서 벗어나려 버둥거렸다.

"엄마가 팔찌 안쪽을 두드릴 때 내던 소리랑 똑같아! 아래에 있어, 엄마가 저기에 있어!"

"잠깐, 기다려! 혼자 가지 마!"

나는 튀어 나가려는 아이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아이를 놓치는 순간, 이 기괴한 공간의 일부로 영영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이를 붙잡은 팔에 힘을 주자, 손바닥의 검은 우산 자국이 화끈거리며 맥동했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집 주소가 뭐였지? 서울시… 아니, 구역 7-B-102. 관리 번호 492.'

현관 비밀번호를 떠올리려 하자, 대신 [폐기물 분류 코드: C-032]라는 문자가 망막에 박혔다. 기억의 서랍이 뒤섞이고 있었다. 내가 인간 강도윤으로서 가졌던 소소한 파편들이 협회의 행정 서류 양식으로 치환되는 감각. 자아라는 이름의 데이터가 포맷되고 있었다.

"도윤 씨! 강도윤 씨, 정신 차려요!"

윤서하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사이렌처럼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녀가 내 어깨를 강하게 잡아 흔들었다. 차가운 현장의 감각, 그리고 내 품에서 느껴지는 아이의 작은 체온. 그 두 가지가 나를 간신히 이승의 경계에 붙잡아 두었다.

"…괜찮습니다. 잠시 어지러워서 그래요."

나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중간 지점쯤에 도달했을 때, 계단 전체를 가로막듯 붙여진 낡은 종이 한 장이 보였다.

노란색 바탕에 검은색 우산 문양, 그리고 그 위에 붉은색으로 선명하게 찍힌 협회 감식반의 직인.

[금지. 기록 대리인 외 접근 불가. - 문태식 봉인]

누군가의 침입을 막으려는 것인지, 아니면 안의 무언가가 나오지 못하게 가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표식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 표식 근처에 손을 가져다 댔다. 주머니 속의 반쪽짜리 출입증이 갑자기 달궈진 인두처럼 뜨거워졌다.

'잔향청취.'

억지로 스킬을 끌어올리자, 찢어진 출입증의 단면에서 수만 개의 목소리가 폭발하듯 튀어 나왔다. 그것은 모두 문태식의 목소리였다.

도윤이를 여기로 보내지 마. 절대 안 돼.

아니, 보내야 해. 그 방법뿐이야.

원본을 살리려면 대체명을 태워야 한다. 이름 없는 아이가 불씨가 될 거야.

아니야, 그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니야! 내가 대신 남겠다!

서로 충돌하는 수천 개의 문태식이 내 귓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원본'과 '대체명'. 그리고 '태워야 한다'는 잔인한 단어들.

윤서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도 내 상태를 보고 무언가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내 품의 아이에게 머물렀다가, 이내 단호하게 바뀌었다.

"…그 말, 믿지 마요. 문태식 씨가 어떤 상태에서 남긴 기록인지 알 수 없어요."

"알고 있습니다. 난 애를 땔감으로 쓸 생각 없으니까."

나는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윤서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계단 위쪽에서 들려오는 철컥 소리에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수거반 놈들이 방금 우리가 지나온 봉인 표식을 찢으려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계단실 전체가 거대한 지진이라도 난 듯 뒤집히듯 흔들렸다.

우드드득!

벽면에 무수히 새겨져 있던 손톱자국들이 일제히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자국들은 계단 아래쪽이 아니라, 난간 바깥쪽의 벽면, 아주 좁은 틈새로 이어진 점검용 철제 통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래가 아니야. 옆이에요!"

반가온이 먼저 허공을 가로질러 좁은 통로 위로 뛰어내렸다. 우리도 서둘러 몸을 날렸다. 그곳은 성인 한 명이 겨우 기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고 위험한 점검 통로였다. 통로 끝에는 오래된 우산 손잡이 하나가 녹슨 파이프에 걸려 있었다.

반가온이 그 손잡이를 잡으려다 멈칫하며 코를 킁킁거렸다.

"아저씨, 이거… 문태식 아저씨 냄새랑 다른 냄새가 섞여 있어요. 아주 오래된 향수 냄새인데, 차갑고… 슬픈 냄새예요."

여성용 라이터에서 느껴졌던 그 미세한 향취와 닮아 있었다. 이 우산의 주인은 누구인가. 문태식은 누구를 기다리며 이 지옥 같은 계단을 돌았던 걸까.

내가 우산 손잡이에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계단 아래, 빛조차 닿지 않는 심연의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품에 안긴 아이의 목소리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맑고 깨끗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아이를 부르는 것이 아니었다.

"강도윤. 이제 네 차례야."

그것은 내 이름을 불렀다.

순간, 나는 내 이름이 내 몸에서 뜯겨 나가 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살갗을 뜯기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놈이 내 이름을 가져갔다. 아니, 어쩌면 저 아래에 있는 것이 진짜 강도윤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나를 덮쳤다.

207화. 빼앗긴 이름의 점검 통로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감각은 단순한 소름이 아니었다. 낡은 우산 손잡이를 쥔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손바닥에 새겨진 검은 우산 낙인이 달궈진 인두처럼 내 살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머릿속 한구석이 텅 비어 나가는 감각이 엄습했다.

내 이름. '강도윤'이라는 세 글자가 점검 통로의 차가운 철판 아래,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끌려 내려가고 있었다.

“강도윤. 이제 네 차례야.”

발밑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아이와 닮아 있었다. 아니, 복사기로 찍어낸 듯 똑같았다. 무의식중에 아이를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아이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몸을 떨었다.

“……아니야.”

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내 쇄골 부근에서 웅얼거림처럼 터져 나왔다. 평소처럼 겁에 질려 떨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아이는 고개를 들어 어둠이 일렁이는 철판 아래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건 엄마가 아니야. 아저씨, 속지 마.”

아이가 스스로 그 목소리를 부정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 단호함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던 이름의 탈취를 잠시 멈춰 세웠다.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산 손잡이를 쥔 손을 고쳐 잡았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강도윤 씨, 정신 차리세요!”

윤서하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휴대 단말기를 꺼내 무언가를 급하게 조회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빠르게 좌우로 흔들렸다.

“이상해요. 협회 서버와의 동기화는 유지되고 있는데, 당신의 식별 정보가…….”

그녀가 내민 단말기 화면에는 내 사진 옆에 있어야 할 '강도윤'이라는 이름 대신 낯선 오류명이 깜빡이고 있었다.

[식별 불능: 임시 명칭 D-0]

“D-0? 내 이름이 무슨 폐기물 분류 코드처럼 변했단 말입니까?”

빈정거림이 방어기제처럼 튀어 나갔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이름이 사라진다는 건 존재의 뿌리가 뽑히는 것과 같다. 헌터에게 이름은 곧 시스템이 인식하는 유일한 좌표니까. 이름이 없으면 나는 이 공간의 '오류'로 간주되어 소거될 것이다.

“아직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에요. 데이터가 '대기 상태'로 넘어간 것뿐입니다.”

윤서하가 차갑게 덧붙였지만, 그녀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현장을 분석하는 이성적인 판단력을 유지하려 애쓰며 내 상태를 체크했다.

그때, 뒤에서 킁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온이었다. 녀석은 우산 손잡이 근처에 코를 갖다 대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그 여성용 라이터 주인 냄새랑 비슷해. 근데…… 좀 달라.”

“뭐가 다른데? 가품이라도 된다는 거야?”

“아니, 향수의 결은 같은데, 농도가 달라. 한 사람이 뿌린 게 아니라…… 마치 한 사람의 냄새를 반으로 쪼개서 각자 다른 곳에 묻혀둔 것 같아. 한 사람이 둘로 갈라진 것 같은 그런 기분 나쁜 냄새야.”

반가온의 비유는 언제나 모호했지만, 그만큼 본질적이었다. 한 사람이 둘로 갈라졌다니. 이 불길한 공간의 성격과 이상할 만큼 잘 어울리는 설명이었다.

깡! 깡! 깡!

점검 통로의 철판 아래에서 다시금 세 번의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환청이 아니었다. 발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명확했다. 동시에 내 손바닥의 우산 자국이 그 리듬에 맞춰 맥동했다.

이 우산 자국은 나를 죽이려는 낙인인가, 아니면 이 미로를 풀기 위한 열쇠인가.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내려옵니다!”

윤서하의 경고와 함께 위쪽 비상계단에서 쇳소리가 들렸다. 정화 수거반이었다. 그들은 봉인을 찢지 못하는지 계단으로 직접 내려오는 대신, 난간 사이의 틈으로 길게 늘어나는 금속 집게를 집어넣었다.

마치 먹잇감을 찾는 심해어의 촉수처럼, 시뻘건 녹이 슨 금속 집게들이 꺽지락거리며 점검 통로 안쪽으로 뻗어 들어왔다.

“가까이 오게 두지 마세요.”

윤서하가 단발총을 겨눴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 우산 손잡이에 집중했다. '잔향청취'를 끌어올려야 했다. 이 물건이 기억하는 가장 선명한 찰나를 붙잡아야 살길이 보일 것 같았다.

시야가 일렁였다. 붉은 조명이 사라지고, 코끝에 비릿한 빗물 냄새가 스쳤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젊고, 눈 밑이 퀭한 문태식이 서 있었다. 그는 누군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접히지 않는 긴 검은 우산을 든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림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내뱉는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 문태식, 세 번째 이니셜을 잊지 마. 그게 네가 치러야 할 마지막 함구의 대가야.

문태식은 바들바들 떨며 품 안의 무언가를 꽉 껴안았다. 그것은 아이의 옷가지처럼 보이기도 했고, 낡은 서류 뭉치처럼 보이기도 했다.

— 도윤이를…… 우리 도윤이를 원본으로 남기고 싶다고 하셨잖습니까.

— 그래. 원본을 살리려면 누군가는 대체명이 되어야지. 그게 이 세계의 등가교환이다.

누가 누구의 대체명이라는 건가. 문태식이 말한 '도윤'은 정말 나를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존재인가.

장면이 깨져나갔다. 현실의 감각이 돌아왔다. 금속 집게가 내 발목 앞까지 다가와 바닥을 긁고 있었다.

“강도윤 씨!”

윤서하가 내 어깨를 잡아챘다. 잔향의 여파로 비틀거리는 나를 지탱하며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정신 놓지 마요. 이름이 데이터상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당신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당신 이름은 지금 여기서, 내가 부르고 있고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까 살아 있는 거라고요. 알겠습니까?”

그녀의 말은 따뜻한 위로라기보다는 냉정한 팩트 체크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건조함이 오히려 나를 현실에 단단히 묶어주었다.

“……알겠습니다. 이름표 떼였다고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입술을 깨물며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더니, 자기 손목의 팔찌 안쪽, 그 반쪽짜리 단추를 자기 손으로 꼭 가렸다.

“아저씨…….”

“응?”

“나를 태우지 마…… 가 아니라, 아저씨를 태우지 마.”

아이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서려 있었다. 이 아이는 알고 있는 걸까. '대체명'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누군가를 대신해 불태워지고 지워져야 하는 운명을.

나는 아이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어주고는 우산 손잡이를 힘껏 돌렸다.

끼이익, 하는 불쾌한 금속음과 함께 벽이 열릴 것이라 예상했다. 하지만 틀렸다. 벽은 그대로였다. 대신 우리가 딛고 서 있던 점검 통로의 바닥 철판 일부가 서서히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건…….”

반가온이 헛바람을 들이켰다.

발밑으로 펼쳐진 풍경은 기괴했다. 지하층이 아니라, 거대한 지하철 노선도처럼 수만 개의 빛줄기가 얽히고설킨 심연이었다. 그것들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어디론가 흐르고 있었다. 윤서하가 단말기를 비추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게 기록상 사라진 '귀가 경로'들이군요.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길을 잃었을 때, 그들의 목적지가 저장되는 저장소…….”

그 수많은 경로 중 하나가 유독 우리 발밑에서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줄기 끝에는 작은 금속 태그 하나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마치 박쥐처럼, 혹은 목을 맨 사람처럼.

거기에는 익숙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강도윤]

내 이름표였다. 하지만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내 이름표가 아니었다.

내 이름표 바로 옆,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채 텅 비어 있는 하얀 이름표 하나가 허공에서 달랑거리고 있었다. 그 빈 이름표 위에는 아이의 서툰 손글씨와 똑같은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다음 대체명: ]

그 빈칸이 가리키는 방향을 깨닫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공포가 치솟았다.

그 이름표는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었다.

이름을 빼앗기고 'D-0'라는 임시 부호를 부여받은, 지금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구할 줄 알았던 아이의 필체로 내 사형 선고가 적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아래에서 뻗어 올라오는 검은 손들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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