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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8-239화. 반품 기한 만료와 유통기한이 지난 보호자 일러스트

238-239화. 반품 기한 만료와 유통기한이 지난 보호자

238화. 반품 기한 만료 1초 전

끼이이익―!

고막을 찢는 금속음이 플랫폼을 가득 채웠다. 병원 검사실 문을 열었을 뿐인데, 내 앞에는 타일이 다 깨져나간 낡은 지하철 승강장이 펼쳐져 있었다. 습하고 퀴퀴한 냄새. 오래된 종이 뭉치와 먼지가 뒤섞인, 누군가의 유품 보관소에서나 날 법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검은 우산의 그림자들이 벽면에 화석처럼 박힌 채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로 끝에서,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열차가 미끄러져 들어오고 있었다.

“……저게 뭐야?”

M-17이 내 옷자락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아이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열차는 괴기스러웠다. 외벽은 스테인리스 대신 누렇게 바랜 물류 라벨과 헌터 협회의 붉은 압류 봉인 테이프로 도배되어 있었다. 객차 사이사이에는 조화로 쓰이는 하얀 장례식장 리본들이 넝마처럼 매달려 강풍에 펄럭였다. 열차 상단의 전광판에는 행선지 대신 붉은 글자가 점멸했다.

[L-742 GHOST STATION : 반품 전용]

“미친, 무슨 지하철을 택배 상자처럼 포장해놨어.”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내 방어기제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을수록 뇌는 공포를 이기기 위해 농담을 배설한다. 하지만 농담으로 넘기기엔 열차가 뿜어내는 기운이 너무나 무거웠다. 마치 거대한 관이 선로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안내방송 드립니다. 승객 강도윤 님의 보호자, 강성훈 님이 이미 탑승 중입니다.]

[반품 기한이 만료되었습니다. 지금 승차하지 않으면 담보물은 강제 폐기됩니다.]

무미건조한 기계음이 다시 한번 플랫폼을 울렸다. ‘강제 폐기’라는 단어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윤 씨, 안 돼요. 함정이에요.”

윤서하가 비틀거리며 내 팔을 잡았다. 그녀의 안색은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마력이 바닥나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텐데, 그녀는 자기 가슴에 달린 명찰을 쥐어짜듯 부여잡고 있었다.

명찰 위로 ‘YSH-EMPTY’라는 붉은 로그가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제 권한 껍데기를…… 누군가 쓰고 있어요. 이 열차의 규칙을 읽어볼게요. 잠시만요.”

“서하 씨, 무리하지 마요. 그러다 진짜 영혼까지 털린다고.”

“상관없어요. 이대로 가면 우리 다 ‘미수령 반품’ 취급받아서 여기서 지워져요.”

서하의 눈동자에 기계적인 코드가 빠르게 흘렀다. 그녀의 권한을 깎아 먹으며 강제로 시스템에 접속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녀의 코끝에서 핏방울이 툭, 떨어졌다.

그때, 내 다리에 매달려 있던 M-17이 멍한 눈으로 열차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빠가…… 아빠가 그랬어.”

“뭐라고?”

“저 열차는…… 반품 열차라고. 한 번 타면 절대로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간다고. 아빠가 저 열차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반대 방향으로 뛰라고 했어. 저건 산 사람을 실어 나르는 게 아니라고…….”

M-17의 ‘아빠’가 누군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 아이가 가진 기억의 파편은 늘 소름 끼치도록 정확했다. 이 노선, L-742. 아버지는 이 지옥 같은 시스템의 생리를 알고 있었던 걸까?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열차 쪽으로 다가갔다. 평소답지 않게 꼬리가 바짝 내려가 있었다.

“……도윤 형. 세 번째 칸. 거기서 아주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나. 형이랑 비슷한 냄새야.”

“아버지 냄새야?”

“그게…… 맞는 것 같기도 한데, 너무 섞여 있어. 마치 썩은 물에 깨끗한 물 한 방울 떨어뜨린 것처럼. 형, 나 무서워. 저 안에 있는 게 정말 형네 아빠 맞아?”

가온이의 목소리가 떨렸다. 예민한 후각을 가진 녀석이 확신하지 못한다는 건, 그 안의 존재가 오염되었거나 교묘하게 위장되었다는 뜻이다.

내 손바닥에는 아까 박힌 금속 핀이 여전히 살을 파고들고 있었다.

[L-742-GHOST-STATION].

열차를 직접 읽는 건 위험하다. 그건 거대한 악의가 설계한 함정 속으로 제 발로 기어 들어가는 꼴이다. 나는 대신 내 손바닥의 피가 묻은 금속 핀에 ‘잔향청취’를 집중했다. 이 핀은 이 스테이션의 부속품이자, 누군가의 흔적이다.

‘보여줘.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귀를 찢는 환청과 함께 시야가 뒤집혔다.

742일 전. 날짜가 머릿속에 박혔다.

어둡고 축축한 플랫폼. 지금보다 조금 더 젊은, 하지만 훨씬 더 지쳐 보이는 아버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정장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노이즈가 낀 것처럼 뭉개져 있었지만, 가슴팍에는 ‘Administrator-K’라는 명찰이 빛나고 있었다.

강성훈 씨, 당신 아들은 이미 사망 확정입니다. 시스템상 복구 불가능한 오류예요.

남자의 목소리는 차갑고 금속질이었다. 아버지는 그의 멱살을 잡으려다 투명한 벽에 막혀 뒤로 밀려났다.

개소리 마! 내 아들은 살아 있어! 네놈들이 제멋대로 플래그를 꽂은 거잖아!

플래그는 운명입니다. 그걸 유예하려면 대가가 필요하죠. 보호자 자격으로 먼저 탑승하십시오. 당신이 ‘담보’가 된다면, 강도윤의 사망 처리를 742일간 유예해 드리지요.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열차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나를, 병실에 누워 있을 나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타면, 도윤이는 건드리지 않는 거지?

기한 내에 당신 아들이 직접 당신을 찾아오지 못한다면, 두 분 다 ‘반품’ 처리될 뿐입니다. 행운을 빌죠.

아버지는 주저 없이 열차에 올랐다. 그 순간, 그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이 바로 이 금속 핀이었다.

잔향이 끊겼다.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현실로 돌아왔다.

742일. 오늘이 바로 그 유예 기간의 마지막 날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담보가 되어 이 유령 열차에 몸을 던진 것이다.

치이익―!

열차의 문이 열렸다.

동시에 플랫폼 바닥에 홀로그램으로 된 ‘승차 대상자 명단’이 떠올랐다.

[1. 강도윤 (대상자)]

[2. 강성훈 (담보물/보호자)]

그리고 그 밑에 예상치 못한 이름이 추가로 나타났다.

[3. 윤서하 (빈 보호자 - YSH-EMPTY)]

“서하 씨?”

내가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서하는 자신의 명찰을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제 권한을 훔쳐간 놈이 제 이름까지 이 시스템의 부품으로 등록해버린 모양이에요. 저도 저 열차에 타야 할 ‘소모품’ 리스트에 올라 있네요.”

열차 안에서 차가운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선택해야 했다. 이 미친 열차에 올라타 아버지와 서하의 권한을 되찾을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도망쳐 ‘강제 폐기’를 지켜볼 것인가.

나는 가온이와 M-17을 내 뒤로 밀어내고, 열차의 열린 문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세 번째 객차. 가온이가 말한 피 냄새가 나는 곳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피커를 통해서가 아니었다. 열차 내부의 어둠 속에서, 아주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뒤틀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윤아.”

그건 분명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가슴이 설레기도 전에 소름이 쫙 돋았다.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 아버지의 성대를 뜯어내 기계에 연결한 것 같은 기괴한 울림이었다.

“도윤아, 타지 마라.”

그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금 문 앞에 서 있는 나는…… 이미 네 아버지가 아니다. 여긴 ‘반품’된 것들이 섞이는 곳이야. 타는 순간 너도 나처럼 껍데기만 남게 된다.”

열차 안쪽에서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 위에는 하얀 반품용 라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 이목구비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라벨지 사이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도윤아, 뒤를 봐라. 열차 문은 이미 너희를 가두기 위해 열린 거다.”

그의 말에 뒤를 돌아본 순간, 우리가 들어왔던 검사실 문은 온데간데없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승차 완료’라는 문구만이 떠오르고 있었다.

플랫폼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가 통째로 열차 안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239화. 유통기한이 지난 보호자

발밑이 꺼진다는 건 비유적인 표현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지금 내 발밑에서 벌어지는 일은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낡은 타일 바닥이 디지털 노이즈처럼 파르르 떨리더니, 그대로 시커먼 심연 속으로 증발해 버렸다.

“악!”

가장 먼저 몸이 쏠린 건 윤서하였다. 마력이 바닥나 비틀거리던 그녀가 허공으로 고꾸라지려는 찰나,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강도윤 씨!”

“잡아! 놓치면 이번 달 월급 가불해서 장례비로 쓸 줄 알아!”

농담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죽기 직전의 방어기제치고는 참 저렴하기 짝이 없었지만, 덕분에 머릿속의 공포는 한풀 꺾였다. 나는 왼손으로 윤서하를, 오른팔로는 M-17과 가온이를 한꺼번에 끌어안았다.

추락은 없었다. 대신 강력한 진공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는 먼지처럼, 우리 몸이 열차 안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알림: 미승인 승객의 강제 승차 절차가 개시됩니다.]

[주의: 승차 구역 내의 모든 사물은 ‘규칙’에 귀속됩니다.]

눈앞에 번쩍이는 붉은 경고창들이 시야를 가렸다. 열차 문턱에 손을 짚으려던 나는 멈칫했다. 문턱 위로 기괴한 시스템 문구가 덧씌워져 있었다.

< 반품 승인선: 밟는 즉시 물류센터로의 반송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함. >

“미친, 이게 무슨 기차야? 노예 계약서지.”

옆을 보니 가온이가 열차 손잡이를 잡으려다 비명을 지르며 손을 뗐다. 거기에도 문구가 떠 있었다.

< 동의의 손잡이: 잡는 순간 ‘보호자 자격 승계’에 서명함. >

“도윤 형, 이거 잡으면 안 돼요! 내 손가락이 막 멋대로 움직이려고 해!”

“아무것도 잡지 마! 벽도 짚지 말고 바닥도 최대한… 젠장, 공중부양이라도 하라는 거야?”

플랫폼은 이미 사라졌다. 우리는 열차 문턱에 간신히 걸친 채, 시커먼 공허와 열차 내부 사이의 경계선에서 버티고 있었다.

윤서하가 창백해진 얼굴로 내 팔을 붙잡으며 중얼거렸다.

“강도윤 씨… 명찰의 로그가 바뀌었어요. ‘YSH-EMPTY’가 아니라… ‘YSH-RESERVED’로.”

“예약? 누가 뭘 예약했다는 거야?”

“저예요. 누군가 제 안의 마력을 비워낸 게… 단순히 저를 무력화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저를 ‘빈 그릇’으로 만들어서, 당신의 새로운 보호자로 갈아 끼우려는 거예요.”

윤서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가슴팍에 붙은 명찰을 내려다보았다.

“강성훈 씨가 이 열차에 담보로 잡혀 있잖아요. 하지만 담보도 유통기한이 있나 봐요. 시스템은 이제 낡은 담보 대신, 새로 준비된 ‘빈 껍데기’인 저를 원하는 거예요. 제가 이 열차에 완전히 타는 순간, 강성훈 씨는 ‘폐기’되고 제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돼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 번째 객차 안쪽에서 아까 그 뒤틀린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타지 마라… 도윤아, 서하를 데리고 나가야 해. 여긴… 이름이 먹히는 곳이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해요. 저 안에서 나는 아저씨 피 냄새… 아까 플랫폼 바닥에 붙어 있던 그 낡은 봉인 테이프 냄새랑 똑같아요. 진짜 살 냄새랑 가짜 종이 냄새가 막 섞여서…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어.”

진짜와 가짜의 혼합. 아버지는 저 안에 있지만, 동시에 저 열차라는 시스템의 일부로 박제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때, 내 품에 안겨 있던 M-17이 작게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환자복 소매를 걷어붙였다. 아이의 팔목에는 낡은 회수용 라벨 조각이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었다.

“아빠가… 이거 절대로 떼지 말라고 했어.”

M-17이 그 라벨을 찌익, 소리가 나게 찢어냈다. 그러고는 그것을 내 손바닥에 박힌 금속 핀 위에 꾹 눌렀다.

“이걸 표처럼 쓰면… 잠깐은 우리가 반품 대상이 아니게 보일지도 몰라. 아빠가 그랬어. 라벨이 붙어 있는 동안은 ‘아직 검사 중’인 물건이니까,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고.”

아이의 눈동자는 맑았지만, 그 안에 담긴 정보는 서늘했다.

나는 M-17이 준 라벨 조각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내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지난번 던전에서 챙겨온 ‘미발행 영수증’ 조각을 꺼냈다.

“검사 중인 물건이라 이거지? 좋아, 그럼 검사 서류를 조작해주마.”

나는 손바닥의 금속 핀으로 잔향청취를 우회하며, 시스템의 틈새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막을 찔렀다.

[에러: 승차권 정보 불일치.]

[관리자 권한으로 임시 반송권을 생성합니다…?]

나는 M-17의 라벨과 미발행 영수증, 그리고 내 마력을 억지로 버무려 ‘임시 승차권’ 형태의 기호로 치환했다. 시스템이 우리를 ‘담보’나 ‘반품물’로 인식하기 전에, ‘잠시 확인하러 온 검수원’으로 속이는 일종의 해킹이었다.

“모두 내 옷자락 잡아. 문턱을 넘는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하지만 단호하게 열차의 문턱을 넘었다. 발을 들이는 순간,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차가운 냉기가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열차 내부는 기괴했다.

천장에는 손잡이 대신 수많은 명찰과 헌터 등급표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S급부터 F급까지, 어떤 것은 빛이 나고 어떤 것은 까맣게 타버린 채였다. 그것들이 열차가 흔들릴 때마다 달그락거리며 해골 부딪히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저 멀리, 세 번째 객차의 연결 통로 너머로 짙은 안개 속에 앉아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강성훈. 나의 아버지이자, 이 기나긴 악몽의 시작점.

그의 몸 주변에는 수십 개의 붉은 압류 봉인 테이프가 거미줄처럼 칭칭 감겨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고치에 갇힌 희생양 같기도 했고, 스스로를 봉인한 괴물 같기도 했다.

“아버지!”

내가 소리치며 달려가려 하자, 실루엣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도윤아, 시간이 없다. 놈이… Administrator-K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그놈이 누군데요? 대체 왜 우리 가족한테 이러는 건데!”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몸에서 마력이 새어 나와 천장의 명찰들을 흔들었다.

—그는… 네가 아주 잘 아는 이름으로 왔다. 네 곁에서, 네가 가장 믿는… 혹은 네가 가장 미워하는…

아버지가 그 이름을 말하려는 찰나, 열차의 스피커가 찢어지는 듯한 굉음을 내며 방송을 쏟아냈다.

치익, 치이익—!

[안내말씀 드립니다. 본 열차는 곧 이번 역의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이번 역에서 하차하실 ‘보호자’께서는 본인의 이름을 반납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름을 반납하지 않을 경우, 존재 자체가 폐기 처리됩니다.]

열차의 창밖으로 붉은빛이 번쩍였다. 플랫폼도, 선로도 없는 허공에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문 위에는 피처럼 붉은 글씨로 역명이 적혀 있었다.

[이번 역은 K-서명실. K-서명실입니다.]

윤서하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강도윤 씨! 제… 제 이름이 사라지고 있어요! 명찰에서 이름이 지워져요!”

그녀의 명찰에 적혀 있던 ‘YSH’라는 글자가 연기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열차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만 개의 명찰들이 일제히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마지막 힘을 짜내 외쳤다.

—도윤아! 서명실에 들어가면 안 돼! 거기서 이름을 적는 순간, 너는…!

쿠웅!

열차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사무실 냄새와 함께 정장을 입은 정체불명의 인영들이 플랫폼에 길게 줄을 서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눈코입 대신, 각기 다른 사람들의 ‘서명’이 갈겨써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거대한 존재가,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강도윤 헌터님. 서명하실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목소리는, 내가 매일 아침 출근해서 듣던 아주 익숙한 상사의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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