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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41화. 근태 관리의 지옥도와 본인 확인 일러스트

240-241화. 근태 관리의 지옥도와 본인 확인

240화. 근태 관리의 지옥도

열차의 문이 열리는 소리는 부드러운 유압식 소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작두가 생나무를 내리찍는 듯한 파열음이었고, 동시에 수만 장의 서류 뭉치가 한꺼번에 바닥에 쏟아지는 불길한 마찰음이었다.

“서명하실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헌터협회 감식반 시절, 지각한 나를 불러세우던 문태식 팀장의 목소리. 묘하게 끝이 갈라지면서도 공무원 특유의 건조함이 묻어나는 그 톤이 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으로 화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문태식 팀장은 이미 죽었거나, 적어도 이런 괴기스러운 열차 안에서 나를 기다릴 위인이 아니다. 그는 퇴근 후엔 무조건 핸드폰을 끄고 소주병을 붙잡는 사람이었으니까. 이건 목소리 도용이다. 누군가 내 기억의 가장 깊숙한 폴더에서 '권위'라는 이름의 음성 파일을 불법 다운로드해 재생하고 있는 것이다.

“강도윤 씨. 절차를 지연시키면 곤란합니다.”

플랫폼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인영들은 기괴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들의 목에는 머리 대신 거대한 도장이나 만년필 촉이 달려 있어야 할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더 끔찍했다. 그들의 얼굴은 백지였다. 그리고 그 백지 위에는 각기 다른 필체의 서명들이 가로세로로 어지럽게 갈겨써져 있었다.

어떤 놈은 '김철수', 어떤 놈은 '박영희', 또 어떤 놈은 읽지도 못할 휘갈겨 쓴 사인들. 그 서명들이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얼굴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차 보호자분들, 전원 하차하십시오. 검수가 끝난 물건은 보관실로 이동합니다.”

정장 인영들이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들의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스테이플러 심처럼 딱딱하게 꺾였다. 그들이 닿는 곳마다 차가운 사무실 냄새가 진동했다. 에어컨 필터를 10년 동안 갈지 않은 퀴퀴한 공기, 오래된 인주의 비린내, 그리고 젖은 서류가 썩어가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하야!”

내가 손을 뻗었지만, 윤서하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녀의 가슴에 달린 명찰에서 이름이 모래알처럼 부스러지고 있었다. YSH-RESERVED라는 글자가 번지더니, 그녀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빠져나갔다.

“도윤…… 씨. 저, 는…… 저는…….”

“서하 씨, 정신 차려!”

“저는…… 이름이…… ‘나’가…… 생각이 안 나요.”

서하의 말끝이 툭 끊겼다. 그녀는 자신을 지칭할 1인칭 대명사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정장 인영 하나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얼굴에 쓰인 서명이 붉게 달아오르며 서하의 빈 명찰로 옮겨붙으려 했다.

이름을 뺏으려는 거다. 빈 그릇이 된 그녀에게 새로운 ‘로그’를 강제로 기입해서, 강성훈 대신 이 열차의 영원한 담보로 묶어버리려는 수작이었다.

“잠깐! 거기 결재 대기!”

나는 소리를 지르며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아까 M-17이 준 라벨 조각과 미발행 영수증, 금속 핀을 조합해 만든 조잡한 ‘임시 검수원 표식’을 그들의 얼굴 앞에 들이밀었다.

“이거 안 보여? 지금 반품 절차 확인 중이라고! 규정 몰라? 검수 중인 물건에 손대면 너네 다 시말서감이야!”

정장 인영들이 일제히 멈췄다. 그들의 백지 얼굴 위에서 서명들이 일렁였다. 시스템이 나의 사기를 분석하는 짧은 찰나, M-17이 내 옷자락을 당기며 속삭였다.

“아저씨, 저놈들한테 진짜 이름을 들키면 안 돼요. K-서명실은 이름을 수집하는 곳이에요. 아빠가 그랬어요. 여기선 별명이나 오명, 아니면 아주 형편없이 잘못 적힌 이름만이 방패가 된다고.”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녀석의 털이 곤두서 있었다.

“형, 저 목소리 이상해. 문태식 아저씨 냄새가 아니야.”

“당연하지. 가짜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저 껍데기들한테서 감식반 보관실에 있던 낡은 복사기 토너 냄새가 나. 그리고 비 오는 날 구석에 처박아둔 검은 우산 천 냄새도.”

가온이의 감각은 정확했다. 저것들은 인간이 아니다. 사무실의 잔해와 서류의 원한이 뭉쳐 만들어진 행정적 괴물들이다.

“서명하십시오.”

가장 덩치가 큰 정장 인영이 내 코앞으로 거대한 서류철을 내밀었다. 종이의 질감은 사람의 가죽처럼 질겼고, 그 위에는 수많은 ‘사망 플래그’들이 빼곡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이름을 쓰십시오. 그러면 보호 대상자의 인계가 완료됩니다.”

나는 놈이 건넨 펜을 잡았다. 만년필 촉에서는 잉크가 아니라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나는 윤서하를 힐끗 보았다. 그녀의 명찰은 이제 완전히 백지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 가면 그녀는 ‘윤서하’가 아니라 ‘이름 없는 부속품’으로 하차당하게 된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농담은 나의 방어기제이자, 시스템의 허점을 찌르는 송곳이다.

“서명? 오케이. 내가 또 한 필체 하지.”

나는 서류의 서명란에 아주 정성스럽게, 하지만 아주 엉뚱한 문구를 휘갈겨 썼다.

[퇴근하고 싶음(야근 수당 미지급 시 파업 불사)]

그 순간, 서류철에서 끼이익 하는 기계적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스템 오류: 유효하지 않은 식별자입니다.]

[알림: '퇴근' 명령어가 입력되었습니다. 근태 관리 규칙에 의거, 해당 개체의 활동 정지를 검토합니다.]

“뭐야, 먹히네?”

정장 인영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퇴근’이라는 단어가 주는 근원적인 공포와 마력이 이 행정 지옥에서도 통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놈들의 얼굴에 쓰인 서명들이 더욱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명을 거부하는 것입니까? 규정 위반입니다!”

“규정? 내가 새로 만들어줄게.”

나는 명찰이 지워져 가는 윤서하를 낚아채며 소리쳤다.

“어이, 곽두팔! 정신 차려!”

“……네? 곽……?”

윤서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네 이름은 이제부터 곽두팔이야! 세계 서열 0순위 헌터, 전설의 주먹 곽두팔! 네 명찰에 저딴 서명 못 붙이게 네가 곽두팔인 걸 인정해!”

“저, 저는…… 곽…… 두팔……?”

[알림: 개체 'YSH-RESERVED'의 데이터 불일치 발생.]

[오류: 등록된 이름과 호출된 이름이 상이합니다. 이름 삭제 프로세스를 일시 중지합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였지만 효과는 있었다. 시스템은 '윤서하'라는 이름을 지우려 했지만, 내가 강제로 주입한 '곽두팔'이라는 엉뚱한 레이블 때문에 논리 회로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윤서하의 명찰 위로 ‘곽두팔’이라는 글자가 노란색 포스트잇처럼 위태롭게 덧씌워졌다.

“도윤아, 조심해!”

3호차 안쪽, 압류 봉인 테이프에 칭칭 감겨 있던 강성훈의 실루엣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K를 화나게 하지 마! K는 단순한 관리자가 아니야! 서명한 사람들의 공백, 그 자체라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플랫폼의 풍경이 뒤틀렸다. 역의 타일 바닥이 들리더니 거대한 서류 보관함들로 변했고, 천장에서는 수만 개의 집게가 내려와 우리를 낚아채려 했다.

“이쪽으로!”

나는 일행을 이끌고 서명실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사방이 종이의 숲이었다. 찢긴 이름표들이 낙엽처럼 휘날리고, 인주 냄새가 폐부를 찔러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때였다. 거대한 사무용 책상 하나가 내 앞길을 막아섰다. 그 책상 위에는 금방이라도 타오를 듯한 붉은색 결재판이 놓여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결재판을 펼쳤다. 그 안에는 딱 한 장의 서류가 들어 있었다.

[강도윤 사망 처리 유예 신청서]

심장이 내려앉았다. 내 죽음을 뒤로 미루고 있는 서류. 그런데 그 서류 하단의 '신청인' 란을 본 순간, 나는 숨을 쉴 수 없었다.

거기에는 Administrator-K의 서명이 없었다.

대신,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써오던, 나조차도 속일 수 없는 나만의 독특한 필체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도윤(印)]

마치 내가 직접 내 죽음을 유예해달라고 애걸하며 서명한 것처럼.

하지만 나는 이런 서류에 서명한 기억이 없다.

“이게…… 왜 내 글씨야?”

책상 너머에서, 문태식 팀장의 목소리를 빌린 거대한 인영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서명으로 가득 찬 그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직접 하신 일 아닙니까. 기억 안 나시나 보군요. 퇴근을 위해 당신이 무엇을 팔았는지.”

241화. 본인 확인이 필요합니다

붉은색 결재판 위에 놓인 종이는 지나치게 하얬다. 그 여백을 비집고 들어찬 내 이름 세 글자, ‘강도윤’.

내 필체였다. ‘강’ 자의 마지막 이응이 살짝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버릇이며, ‘윤’의 니은이 마치 낚싯바늘처럼 길게 빠지는 모양새까지. 거울을 보고 쓴 것처럼 완벽한 내 손때가 묻어 있었다.

“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자서전이라도 냈나? 아니면 팬 사인회라도 열었던 건가?”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걸 숨기려 일부러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심장이 갈비뼈 안쪽을 날카로운 서류 집게로 찝어대는 것 같았다. ‘강도윤 사망 처리 유예 신청서’. 제목부터가 아주 재수 옴 붙은 문구였다.

“도윤아, 너 저거 진짜 쓴 거 아니지?”

윤서하가 내 셔츠 자락을 붙잡으며 물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날카롭게 상황을 분석했겠지만, 지금 그녀의 눈동자는 조금씩 흐릿해지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곽두팔’이라고 부르며 임시 방패를 씌워둔 탓이다. 곽두팔이라는 이름의 거친 기운이 그녀의 단정한 마력 흐름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기억에 있으면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겠어? 벌써 로또 번호나 서명하고 있었겠지.”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결재판 가장자리를 잡았다. 종이에서는 오래된 인주 냄새와, 갓 인쇄된 복사지 특유의 비릿한 열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Administrator-K]의 목소리를 빌린 거대 정장이 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당신이 직접 하신 일 아닙니까. 기억 안 나시나 보군요. 퇴근을 위해 당신이 무엇을 팔았는지.”

“난 내 영혼은 팔아도 내 퇴근 시간은 안 팔아. 그게 내 철칙이거든.”

나는 억지로 여유를 부리며 ‘잔향청취(殘響聽取)’를 시도했다. 이 서류가 만들어지던 순간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이 말도 안 되는 사기극의 배후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손가락이 종이에 닿으려는 찰나, 결재판 위로 붉은색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안 등급: 1급(기밀). 접근을 위해서는 본인 인증이 필요합니다.]

[인증 방식을 선택하십시오.]

지문 및 혈흔 인식

진실한 성명 날인

가장 부끄러운 퇴근 사유 진술

“3번은 너무 개인정보 침해 아니야? 예를 들면 ‘배탈이 난 척하며 화장실에서 유튜브를 보다 걸릴 것 같아 도망침’ 같은 거 적어야 하냐고.”

투덜대면서도 나는 단검으로 손바닥을 살짝 그었다.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서류는 ‘거짓’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본인’의 것이 아닌 것은 철저히 배척한다.

“아빠가 그랬어.”

M-17이 내 등 뒤에서 작게 속삭였다. 녀석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아 있었다.

“K-서명실의 서류는 거짓을 싫어하지 않아. 오히려 ‘정식으로 접수된 거짓’을 진실보다 더 오래 보관해. 일단 서류가 수리되면, 그 거짓말이 이 세상의 유일한 정답이 되는 거야.”

그 말은 즉, 누군가 내 이름을 빌려 ‘정식으로’ 이 서류를 접수했다면, 내가 아무리 부정해도 나는 이미 시스템상으로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뜻이었다.

“가온아, 냄새는?”

“……토너 냄새. 그리고 검은 우산 천 냄새. 그런데 형, 그 뒤에 하나 더 있어. 아주 낡고 눅눅한…… 플라스틱 타는 냄새 같은 거.”

가온이가 코바람을 킁킁거리며 결재판 뒤쪽을 가리켰다. 거대한 정장 인영의 발치,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공간에 낡은 카세트테이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검은 우산 천으로 칭칭 감긴 채,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었다.

문태식 팀장의 목소리는 저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인증을 시작합니다.”

내가 피 묻은 손바닥을 서류 위로 내리눌렀다.

쩌적, 하고 공간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시야가 흑백으로 반전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주 낡은 CCTV 화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노이즈가 심합니다. 잔향 복원을 시작합니다.]

치직, 치지직.

귀를 찢는 듯한 기계음 사이로 파편화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장소는 병원 같기도 했고, 이 지하철역의 사무실 같기도 했다.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작은 형체.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는 어린아이였다. 그 옆에 서 있는 건 얼굴이 뭉개져 보이지 않는 한 남자였다. 남자는 아이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그리고 강제로 아이의 손가락바닥에 인주를 묻혔다.

……이렇게 하면, 이 아이는 살 수 있는 건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깊은, 하지만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서린 목소리.

사망 처리를 유예하는 대신, 아이의 ‘공백’을 우리가 가져갑니다. 아이는 자라겠지만, 그 시간의 일부는 시스템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Administrator-K의 목소리가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남자는 아이의 손을 쥐고 서류 위에 글자를 써 내려갔다. ‘강. 도. 윤.’

내 필체가 아니었다. 내 필체를 흉내 내는 남자의 필체였다. 하지만 그 손을 잡고 있는 건 내 손이었다. 시스템은 그것을 ‘본인의 서명’으로 인식했다.

퇴근하고 싶다고 했지? 이 아이를 이 지옥 같은 삶에서 퇴근시켜 주는 거다.

남자의 손이 떨렸다. 남자의 얼굴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강성훈. 나의 아버지였다. 아니, 아버지를 닮은 무언가였다.

“……도윤아!”

윤서하의 비명이 잔향 속의 나를 현실로 끄집어당겼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거대한 정장 인영들이 윤서하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윤서하의 어깨를 붙잡고 강제로 새 서류 위에 그녀의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신규 헌터 등록을 시작합니다. 성명, 곽두팔. 등급 측정 불능. 전투 방식…… 난동 및 기물 파손.”

“이거 놔! 나는 곽두팔이 아니라……!”

윤서하가 반항하며 마력을 방출했다. 하지만 그녀의 마력은 예전의 예리한 검기가 아니었다. 투박하고 거칠며, 마치 시장바닥의 깡패가 휘두르는 듯한 무질서한 폭력의 덩어리였다. 가짜 이름이 서류화되면서 그녀의 본질을 갉아먹고 있었다.

“서하야, 안 돼! 이름에 먹히지 마!”

나는 결재판을 내던지고 그녀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거대 인영이 문태식 팀장의 목소리로 나를 가로막았다.

“강도윤 헌터, 당신의 퇴근 신청은 이미 접수되었습니다. 대가는 당신의 아버지가 지불했죠. 이제 당신이 할 일은 이곳에 남아서 관리자로 근무하는 것뿐입니다.”

“관리자 같은 소리 하네. 내가 관리직 체질이었으면 진작에 9급 공무원 시험 쳤어!”

나는 품 안에서 ‘퇴근하고 싶음’이라고 적었던 엉터리 서류를 꺼내 들었다. 시스템의 허점을 찌르는 것은 언제나 정답보다 오답이었다.

“곽두팔은 취소다! 지금부터 이 여자의 이름은……!”

내가 새로운 이름을 외치려던 찰나, 발치에 떨어져 있던 카세트테이프가 기괴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감기기 시작했다.

치리릭, 탁.

재생 버튼이 눌리는 소리와 함께, 지금까지의 도용된 목소리가 아닌, 진짜 문태식 팀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스피커 너머의 목소리는 지독하게 차분했고, 그래서 더 절망적이었다.

도윤아.

나는 멈춰 섰다.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인공적인 노이즈가 없었다.

네 서명은 네가 직접 쓴 게 아니다. 하지만, 네가 동의한 건 맞다.

“무슨…… 소리야, 팀장님?”

기억나지 않느냐? 네가 열 살 되던 해, 병실에서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지. 너무 아파서 이제 그만 집으로 가고 싶다고. 일하기 싫다고. 퇴근하고 싶다고…….

테이프 속의 목소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너는 죽음이라는 직장에서 퇴근하기 위해, 네 삶의 ‘결정권’을 서명으로 넘겨준 거다. 넌 관리자가 되기 위해 살아남은 거야. Administrator-K는 바로 너다.

정장 인영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환영합니다, 관리자님. 이제 첫 업무를 시작하실 시간입니다.”

그들의 손에는 윤서하의 이름을 지우고 내 이름을 써넣을 새로운 ‘사망 진단서’가 들려 있었다.

테이프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비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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