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259화. 원장실 결재 대기 중과 퇴근하지 않은 분실물
258화. 원장실 결재 대기 중
손끝에 닿는 종이의 감촉이 기분 나쁘게 축축했다. 25년 전의 잉크가 방금 찍힌 것처럼 번져 나왔다.
[성명: 문태식]
[구분: 임시 외출]
[상태: 미복귀]
[1999년 2월 14일 오후 12시 31분]
[원장실 결재 대기 중]
코끝을 스치는 건 낡은 종이 냄새만이 아니었다. 눅눅한 소독약 냄새 사이로 싸구려 김가루와 멸치 육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달큰한 잔향이 섞여 있었다. 병원 식당의 식권에서나 날 법한 냄새였다.
“무단외출도 25년쯤 계속되면 그건 가출이 아니라 이민으로 쳐줘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전설의 고향 찍으러 간 거거나.”
나는 카드를 흔들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스갯소리와는 달리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M-17이 내 눈앞에 띄운 팝업은 농담을 받아줄 기분이 아니었으니까.
[시스템 메시지: 대기열(Queue) 동기화 오류]
[상태 ‘미복귀’는 유효한 결재 없이는 해제되지 않습니다.]
[경고: 결재권자가 해당 개체를 ‘분실물’로 처리 중입니다.]
“도윤 씨, 그 카드…… 단순한 기록이 아니에요.”
윤서하가 내 곁으로 다가오며 찢어진 명찰 끈을 다잡았다. 그녀의 눈은 이미 차갑게 식어 수사관의 그것으로 변해 있었다.
“한○희 씨의 이름 조각을 앗아간 손, 그리고 이 카드의 ‘결재 대기’ 문구. 이건 같은 결재 라인입니다. 한쪽은 이름을 지워 존재를 인멸하려 했고, 다른 한쪽은 ‘미복귀’라는 상태에 가둬서 퇴근을 막고 있어요. 증거 인멸과 인신 구속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셈이죠.”
“결재를 25년째 안 해주는 상사라니. 이쯤 되면 노동청이 아니라 퇴마사를 불러야 할 수준인데.”
내 말에 백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에는 금이 간 하얀 우산살과 가느다란 신생아 인식표 팔찌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의 낙인이 누군가에게 오염되었다는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했지만, 그녀는 도망치는 대신 정면을 택했다.
“잠깐만요. 이 카드의 시간…… 억지로 멈춰져 있어요. 제가 잠깐만 ‘태어나지 않은 시간’으로 되감아 볼게요.”
백연이 신생아 팔찌를 카드의 ‘12시 31분’ 글자 위에 올렸다. 하얀 우산살이 공명하며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순간, 카드의 잉크가 역류하듯 꿈틀거렸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카드의 뒷면에서 희미한 빛이 번졌다. 12시 31분이 30분으로, 다시 29분으로 돌아가려다 비명 같은 기계음을 내며 멈췄다.
[결과: 부분적 소급 성공]
[오류: 관리자 권한 ‘K’에 의해 시간축이 고정됨]
“안 돼요…… 1분 이상은 무리예요. 하지만 방금 보였어요. 이 카드는 지하 0층에서 올라온 게 아니에요. 지하 0층으로 ‘불려가는’ 중이었어요.”
백연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그때 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계단 쪽을 가리켰다.
“아저씨, 냄새가 바뀌었어. 딸기우유 냄새는 여기서 멀어지는데, 저 아래서는…… 가죽 장갑 냄새랑 장례식장 냄새가 엄청 진해. 소독약 냄새랑 섞여서 코가 따가워.”
가온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병원 안내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어둠에 잠긴 하향 계단이었다. 일반적인 계단이 아니었다. 출근기록기가 뱉어낸 문태식의 카드가 계단 입구에 닿자, 마치 그림자가 길을 열듯 낡은 타일 바닥 위로 검은 유도선이 그어졌다.
퇴근하지 못한 자들에게만 보이는 길. 25년 전의 퇴근길이 지금 우리 앞에 열리고 있었다.
“가죠. 결재판 들고 25년 대기 탄 선배님 면회라도 가야지.”
나는 검은 우산을 고쳐 쥐었다. 우산 끝이 미세하게 떨리며 지하를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우산의 원주인이 남긴 조각이 있다는 듯이.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기괴했다. 벽면에는 ‘정숙’, ‘금연’ 같은 평범한 표지판 대신 붉은 종이 테이프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우리가 계단을 한 층 내려갈 때마다, 그 테이프들이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벽에서 툭 튀어나와 우리를 훑었다.
“도윤 씨, 조심하세요!”
윤서하의 외침과 함께 붉은 테이프 하나가 채찍처럼 날아와 내 가슴팍의 임시 명찰을 낚아채려 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검은 우산을 휘둘러 테이프를 쳐냈다.
파각!
단단한 플라스틱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테이프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직함’과 ‘권한’을 회수하려는 시스템의 손길이었다.
“이거 순 미친 회산데? 퇴근하려니까 사원증부터 압수하려고 하네.”
나는 문태식의 카드를 방패처럼 앞세웠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붉은 테이프들이 카드의 ‘결재 대기 중’ 문구를 인식하더니 스르르 물러났다.
[인식 성공: 결재 대기 중인 문서로 간주함]
[통과 권한 부여]
“문태식 씨가 우리 통행증이 되어주고 있네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계단 끝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시야가 일렁였다. 잔향청취의 발작적인 가동이었다.
(……)
1999년 2월 14일. 공기는 차가웠지만 병원 복도는 활기가 있었다. 젊은 시절의 문태식이 식권 두 장을 손에 쥐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맑았고, 양복 소매에는 떡볶이 국물 자국이 작게 묻어 있었다.
“형님, 밥은 먹고 싸우세요. 원장님도 식후경이라잖아요.”
문태식이 웃으며 누군가에게 식권 한 장을 내밀었다. 그 맞은편에 서 있는 사람. 얼굴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손은 명확히 보였다.
질 좋은 검은 가죽장갑. 그리고 소매 끝에서 반짝이는 영롱한 자개 단추.
그는 문태식이 내민 식권 대신 차가운 서류철을 내밀었다.
가죽장갑 낀 손가락이 서류철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 소리는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이고 기분 나빴다.
(……)
환각이 걷히자 눈앞에는 무거운 철문이 나타났다.
M-17의 메시지가 지지직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위치 확인: B1-000]
[명칭: 원■실 / Origin L■dger Room]
[상태: 접근 제한 구역 / 분실물 처리장]
“원장실……인 것 같죠?”
백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문 옆에 붙은 낡은 아크릴 명판은 우리가 예상한 것과 달랐다.
[분실물 보관소]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붙은 명판 아래로, 소독약 냄새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가온이 코를 감싸며 내 뒤로 숨었다.
“아저씨, 여기 냄새 너무 심해. 누군가 죽어서 썩는 게 아니라…… 죽지 못해서 썩는 냄새야.”
나는 우산 끝으로 문고리를 건드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우산을 타고 손바닥으로 전해졌다. 그런데 그 순간, 문 안쪽에서 아주 익숙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아.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25년의 시간을 건너온, 하지만 어제 들은 것처럼 생생한 목소리.
—문 열지 마라.
그것은 경고였다.
—나 아직, 퇴근 안 했다.
문틈 사이로 딸기우유의 달콤한 향기와 함께, 검은 가죽장갑의 실밥이 가느다랗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섰다. 손에 쥔 문태식의 외출 카드가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결재 대기열의 맨 앞줄에 서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제야 깨닫고 있었다.
259화. 퇴근하지 않은 분실물
“도윤아, 문 열지 마라. 나 아직, 퇴근 안 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나도 문태식다웠다. 낡은 복사기 토너 가루가 섞인 것 같은 텁텁한 저음, 그리고 당장이라도 등짝을 후려칠 것 같은 기색. 하지만 그 목소리가 닿은 곳은 내 고막이 아니라, 품속에 넣어둔 잉크도 안 마른 임시 외출 카드였다.
나는 문고리를 잡으려던 손을 멈췄다.
“아저씨?”
대답은 없었다. 대신 문틈 사이로 희박한 딸기우유 냄새가 새어 나왔다. 달콤해서 더 기괴한 그 향기는 지하 1층의 묵은 먼지 냄새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나는 주머니에서 문태식의 식권과 함께, 아까 주워둔 가죽 실밥과 자개 단추를 꺼냈다. 손바닥 위에서 단서들이 따로 놀기 시작했다. 식권과 카드는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문 안쪽을 향해 바르르 떨었지만, 가죽 실밥과 자개 단추는 엉뚱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분실물 보관소’라고 적힌 문패 뒤쪽의 좁은 틈이었다.
“강도윤 씨, 잠깐만요.”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은 문고리가 아니라 문 상단의 명판을 꿰뚫고 있었다.
“문 안쪽의 목소리가 진짜 문태식 씨인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증거물의 반응은 명확해요. 가죽 실밥과 자개 단추는 결재 라인의 끝자락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 문패, 단순한 장식이 아니에요. 일종의 ‘접수 대장’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문패를 뜯어보자는 소리군요. 수사관님 스타일치고는 꽤 파괴적인데요.”
“파괴가 아니라 확보입니다. 동선상 저 문패 뒤에 무언가 은닉되어 있을 가능성이 98%니까요.”
윤서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녀가 꽉 쥐고 있는 찢어진 명찰 끈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죄책감을 수사 본능으로 억누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때 백연이 품에서 금이 간 하얀 우산살과 신생아 팔찌를 꺼내 문틈에 끼워 넣었다. 마치 벌어진 상처를 봉합하듯, 그녀의 손길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단호했다.
“열면 안 돼요. 이 문은… 댐 같아요. ‘퇴근하지 못한 것들’이 이 안에 꽉 차 있어요. 문을 여는 순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분실물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올 거예요.”
백연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녀의 시선은 문 너머의 어둠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백연의 뒤로 몸을 숨겼다.
“이상해요, 형. 안쪽에서는 아저씨 냄새랑 딸기우유 냄새가 나는데… 저 문패 뒤에서는… 으, 차가워요. 장례식장 냉장고 냄새랑, 오래된 가죽 장갑 냄새가 나요. 목소리는 안쪽에서 들리는데, ‘손’은 문패 뒤에 있는 것 같아요.”
목소리와 손이 따로 노는 병원이라니. 이쯤 되면 이 병원은 원장을 뽑을 게 아니라 퇴마사를 고용했어야 했다. 아니, 원장실보다 분실물 보관소 문패가 더 수상한 병원이라면 고객센터부터 분실물로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검은 우산을 고쳐 쥐었다.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우산 끝을 문패와 문 사이의 미세한 틈새로 밀어 넣었다.
“알았어. 문은 안 열게. 대신 이 불친절한 안내판은 좀 치워야겠어.”
끼이익, 기분 나쁜 금속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검은 우산을 지렛대 삼아 힘을 주자, ‘분실물 보관소’라고 적힌 아크릴판이 서서히 들떠 올랐다.
“원래 공공기관이든 병원이든, 결재 안 해주고 버티는 놈들한테는 이게 약이지.”
빠드득!
마침내 문패가 떨어져 나갔다. 바닥으로 떨어진 문패에서는 낡은 종이가 타는 냄새가 났다. 그리고 문패가 붙어 있던 자리, 문의 표면에는 기괴한 홈이 파여 있었다.
동그란 원형 직인 홈. 그 크기는 내가 들고 있던 자개 단추와 정확히 일치했다. 그리고 그 홈 안쪽, 끈적한 검은 액체 사이에 하얀 종이 조각 하나가 끼어 있었다.
한○희.
윤서하의 손에서 빼앗겼던 이름 조각의 나머지 절반이었다.
[ 시스템 경고: 잔향청취(殘響聽取)가 강제로 동기화됩니다. ]
[ 대상: 분실물 접수대 - 1999년 2월 14일 ]
시야가 울렁거리며 색이 빠졌다.
원장실 문은 더 이상 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분실물 접수대’였다. 철창이 처진 창구 너머로 검은 가죽 장갑을 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철과 소지품들이 있었다. 신발 한 짝, 깨진 안경, 그리고 사람의 이름표들.
그는 퇴근하지 못한 사람들을 물건처럼 분류하고 있었다.
“문태식. 미복귀.”
가죽 장갑을 낀 남자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옷소매에는 자개 단추가 단정하게 달려 있었다. 젊은 시절의 문태식이 피 칠갑이 된 식권 두 장을 들고 그 앞에 서 있었다.
“형님, 밥은 먹고 싸우자니까요.”
문태식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한쪽 팔은 이미 검은 그림자에 먹혀 사라진 상태였다. 그는 자기 대신 누군가의 결재판을 몸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이거 결재 안 하면, 애들 다 ‘분실물’ 처리할 거 아닙니까. 나 하나 미복귀 뜨는 게 낫지.”
“고집은 여전하군.”
가죽 장갑을 낀 남자가 직인을 들어 올렸다. 그 직인은 도장이 아니라, 사람의 영혼을 찍어 누르는 낙인처럼 보였다. 문태식은 그 낙인이 찍히기 직전, 결재판 사이에 한○희의 이름표를 쑤셔 넣었다.
그 순간, 현실의 내 눈앞에 M-17의 팝업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 !!! 오류: 개체 ‘문태식’의 상태가 변동됩니다. ]
[ 분실물 등록번호: T-SK-0214 ]
[ 현재 상태: 원소유주 서명 대기 중 ]
[ 위기: 대리 수령인이 지정되지 않았습니다. ]
[ 시스템 추천: 강도윤 님을 ‘대리 수령인’으로 임시 지정하시겠습니까? ]
“수령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무슨 택배 기사인 줄 알아?”
입으로는 농담을 던졌지만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대리 수령’이라는 말은 달콤한 유혹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태식이 짊어지고 있는 저 기괴한 ‘미복귀’의 굴레를 내가 대신 뒤집어쓰겠다는 계약이나 다름없었다.
“강도윤 씨! 손등을 보세요!”
윤서하의 비명 섞인 외침에 시선을 내렸다.
백연이 새겨주었던 낙인이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번지고 있었다. 문패 뒤의 직인 홈에서 흘러나온 검은 액체가 내 우산을 타고 올라와 내 오른손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도윤아!”
백연이 내 손을 잡으려 했지만, 그녀의 손은 공중에서 투명한 벽에 막힌 듯 튕겨 나갔다.
“안 돼… 문 안쪽의 것들이… 도윤 씨를 ‘보관함’으로 인식하고 있어요!”
그때였다. 문 안쪽에서 들려오던 문태식의 목소리가 갑자기 뒤틀렸다. 텁텁한 아저씨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고, 수천 명의 비명이 겹쳐진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고음이 터져 나왔다.
“도윤아, 그 도장 찍으면….”
문패 뒤의 홈 속에서 한○희의 이름 조각이 완전히 밖으로 밀려 나왔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향해 내 손등의 낙인이 자석처럼 끌려 들어갔다.
“……네가 대신 보관된다.”
철컥.
무언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패 뒤의 홈에 내 손등이 닿기 직전, 문 안쪽에서 거대한 ‘손’이 문을 뚫고 나와 내 멱살을 잡아챘다.
아니, 그것은 손이 아니었다.
붉은 종이 테이프로 칭칭 감긴, 거대한 결재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