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77화. 6월 3일로 돌아가는 시계와 0번 원본의 호출
제목: 76화. 6월 3일로 돌아가는 시계
손목시계가 비명을 질렀다. 톱니바퀴가 서로의 살점을 씹어 돌리는 기괴한 금속음이 고막을 찔렀다. 시계 바늘이 미친 듯이 거꾸로 회전했다. 째깍거리는 소리는 어느새 육중한 기계 장치가 돌아가는 굉음으로 변해 대기실 안을 가득 채웠다.
“강도윤 씨! 정신 차려!”
이현우의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녀석이 내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내 시선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B-12호 대기실의 차가운 강철 바닥 위로, 낡은 병원 복도의 리놀륨 타일이 잉크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냄새가 바뀌었다. 눅눅한 기름 냄새와 곰팡이 핀 지하실 내음 대신, 지독하게 건조한 알코올 솜과 락스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과거가 현재를 갉아먹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기록’이 ‘현실’을 덮어씌우는 중이었다.
[야, 야! 퇴근 시간 지났다고! 연장 수당도 안 주면서 왜 자꾸 돌려!]
내 낡은 손목시계가 쇳소리를 내며 투덜거렸다. 잔향청취. 이 빌어먹을 능력은 이 상황에서도 농담을 멈추지 않았다. 시계 태엽 속에서 억울함에 찌든 말단 공무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규격 외 재생이야! 이러다 메인 스프링 끊어진다고! 너도 끊기고 싶어?]
“입 닥쳐.”
나는 떨리는 손으로 시계 유리를 눌렀다. 바늘을 멈춰야 했다. 지율이가, 한지율이 위험했다. 내 과거를 대신 담고 있는 녀석의 머릿속에서 유치원 사진이 타버리고 대신 2004년의 병원 팔찌가 들어앉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시계 바늘을 억지로 붙잡으려 손가락에 힘을 준 순간, 머릿속이 번쩍하며 무언가 떨어져 나가는 감각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먹은 편의점 도시락의 맛, 어제 이현우와 나누었던 시시껄렁한 농담, 그리고 윤서하가 내게 건넸던 서류의 질감. 기억의 파편들이 정전기처럼 튀어 오르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시간을 멈추려 한 대가였다.
강도윤 헌터, 멈추세요.
지지직거리는 무전기 너머로 윤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차분했지만, 평소보다 훨씬 가라앉은 톤이었다.
당신의 기록은 현재 내 권한 아래 압류되어 있습니다.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그건 이제 당신만의 것이 아닙니다.
“윤 수사관님, 지율이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채권’을 행사하는 겁니다.
무전기 너머로 날카로운 타자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에 섞인 숨소리가 평소보다 거칠었다.
지금부터 관리국 시스템에 이 기록을 ‘담보물’로 동결합니다. 제갈후의 간섭을 차단할 거예요. 그 대가는… 내가 지불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시야 우측 하단에 떠 있던 시스템 메시지가 붉게 점멸했다.
[알림: 채권자 ‘윤서하’가 담보권을 실행합니다.]
[대상: 기록 B-20040603]
[경고: 채권자의 등급 및 직위 정보가 담보로 동결 전환됩니다. 윤서하 헌터의 ‘S급 수사협조관’ 기록이 소멸 위험군으로 분류되었습니다.]
미친. 이 여자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깨달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지금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이름과 쌓아온 경력 전체를 시스템의 불확실한 도박판에 칩으로 던지고 있었다.
“안 돼, 윤서하! 당장 멈춰!”
내가 소리쳤지만, 내 목소리는 2004년의 병원 복도에 흡수되어 흩어졌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정장을 입은 사내가 걸어왔다. 박철수였다. 2004년의 그가, 아직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어린 나를 향해 걷고 있었다. 그 옆에는 얼굴이 검은 안개로 가려진 형체가 거대한 낫 같은 펜을 들고 서 있었다.
“저 새끼가…!”
이현우가 주먹을 쥐고 달려나갔다. 하지만 그의 주먹은 박철수의 몸을 허공처럼 통과해 벽을 강타했다.
“이현우, 건드리지 마!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야!”
“그럼 보고만 있으라고? 도윤아, 저 자식이 지금 네 손에 뭘 쥐여주려 하는지 보란 말이야!”
이현우의 외침대로, 박철수는 어린 나의 손을 잡고 누런 종이 한 장을 내밀고 있었다.
[후견 기록실 대리 보관 계약서]
그 종이 위로 붉은 인장이 찍히기 직전이었다. 잔향청취가 다시 한번 내 귀를 찢을 듯 울렸다. 이번에는 시계가 아니라, 어린 내가 손에 차고 있는 환자용 플라스틱 팔찌였다.
[아아, 테스트. 잘 들리나? 이건 몸에 맞는 옷이 아니야.]
팔찌가 낄낄거리며 비웃었다.
[이 아이는 원래 이 날짜에 죽었어야 할 ‘여백’인데 말이지. 누군가 아주 비싼 수의를 입혀놨어. 죽으면 안 되는 놈의 기록을 억지로 기워 붙였다고. 이건 생존이 아니라, 대리 착용이야.]
나는 숨을 들이켰다. 팔찌의 말이 내 머릿속을 헤집었다. 내가 원래 죽었어야 할 아이라고? 그럼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이 끔찍한 생애는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박철수가 펜을 어린 도윤의 손가락에 끼워주며 속삭였다. 환상 속의 목소리가 현재의 대기실까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도윤아, 여기만 적으면 돼. 그럼 넌 죽지 않아. 넌 ‘기록’으로서 영원히 보존될 거야.”
계약서 하단에 적힌 문구가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내 눈앞에 박혔다.
[항목 4: 기록 착용자(강도윤)의 신체는 원본 회수 시 자동 폐기함.]
[항목 5: 본 계약은 후견인 ‘제갈후’의 승인 전까지 무한 갱신됨.]
“사인하지 마!”
나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 손은 허공을 갈랐고, 손목시계의 바늘은 마침내 2004년 6월 3일, 그 시각에 멈춰 섰다.
동시에 공간이 뒤틀렸다. 병원 복도의 유리가 비명처럼 깨져 나갔다. 파편 하나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통증과 함께 선혈이 배어 나왔다.
그 깨진 유리 파편 속에서, 2004년의 어린 내가 고개를 들었다.
아이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그건 어린애의 눈이 아니었다. 수만 번의 죽음과 삶을 박제당한 채 전시되어 온 낡은 계약서 같았다.
거울처럼 고정된 유리 파편 속에서, 어린 도윤이가 현재의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이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 말을 똑똑히 읽을 수 있었다.
아저씨.
아이는 비릿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내가 평생 거울을 보며 지어왔던, 방어기제로 가득 찬 내 자신의 미소와 똑같았다.
아저씨가 날 살린 게 아니야.
아이가 펜을 쥔 손을 꽉 쥐었다. 계약서 위로 잉크가 번졌다.
아저씨가 날 ‘입은’ 거야.
그 순간, 내 손목시계의 유리가 완전히 박살 났다.
멈췄던 시계 바늘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거꾸로가 아니라, 미친 듯한 속도로 미래를 향해. 그리고 대기실 한복판에 설치된 번호표 발급기에서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새로운 종이가 한 장 툭, 떨어졌다.
거기에는 내 이름도, 번호도 적혀 있지 않았다.
[호출 대상: 0번 (Original)]
그리고 그 아래, 붉은색 글씨로 단 한 문장이 추가되어 있었다.
[귀하의 대여 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제목: 77화. 0번 원본의 호출
대기실의 공기가 단번에 뒤집혔다.
2004년 6월의 눅눅한 병원 복도 냄새와 B-12 대기실 특유의 서늘한 정적이 엉겨 붙어 기괴한 소음을 냈다. 번호표 발급기가 뱉어낸 종이 한 장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파르르 떨렸다.
[호출 대상: 0번 (Original)]
[귀하의 대여 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그 문구가 내 망막을 찌르는 순간, 대기실 곳곳에 피어올라 있던 검은 우산들이 일제히 반응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실을 잡아당긴 것처럼, 수십 개의 우산살이 기괴한 마찰음을 내며 한 방향으로 툭, 툭 접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례라기보다 거대한 기계 장치가 가동을 멈추는 소리에 가까웠다. 접힌 우산들의 끝이 가리키는 곳. 대기실의 가장 깊숙한 구석, 원래는 곰팡이 핀 벽지뿐이었던 그곳에 이질적인 금속제 엘리베이터 문이 솟아올랐다. 아니, 그것은 병동의 육중한 납문 같기도 했고, 거대한 냉동고의 입구 같기도 했다.
문 위에는 흐릿한 형광등 불빛 아래 ‘0번 원본 보관실’이라는 명패가 점멸하고 있었다.
“……아저씨가 날 입은 거야.”
발치에 앉아 있던 어린 시절의 ‘나’가 무표정하게 중얼거렸다. 그 아이의 눈동자에는 감정이 없었다. 그저 잘 만들어진 인형이 녹음된 대사를 내뱉는 것 같았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고? 누군가의 기록을 기워 붙인 대리 착용자?
현기증이 일었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거꾸로 돌 때마다 내 기억의 파편들이 발등 위로 툭툭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강도윤으로서 쌓아온 20여 년의 세월이 사실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연극에 불과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나’라는 존재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괴물인가, 아니면 그저 운 나쁜 마네킹인가.
“강도윤, 멍청하게 서 있지 마!”
날카로운 외침이 정신을 채찍질했다. 윤서하였다. 그녀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자신의 PDA를 움켜쥐고 있었다. 화면에는 ‘S급 수사협조관 직위 소멸 위험’이라는 경고등이 붉게 점멸 중이었다. 나를 담보로 잡고 내 기록의 붕괴를 막는 대가로, 그녀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판돈으로 걸었다.
“명령인가요?”
내가 쉰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내 채권자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 인격이 무너지지 않게 강제로 고정할 권한이 그녀에게 있었다. 하지만 윤서하는 입술을 깨물 뿐, 시스템적인 명령어를 내뱉지 않았다.
“……아니, 부탁이야. 제발 정신 차려.”
명령이 아닌 부탁. 그것은 빚쟁이와 채무자의 관계에서 나올 법한 대사가 아니었다. 그 한마디에 덜덜 떨리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내가 누구든, 무엇을 입고 있든, 지금 내 눈앞의 사람들은 실재한다. 저 보관실 안으로 끌려 들어가 내 ‘원본’이라는 것에게 몸을 내어주는 순간, 나를 위해 직위를 건 윤서하도, 기억이 마모되어가는 한지율도 끝장이다.
그때, 품 안의 무전기에서 치익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한지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 도윤 씨…… 들려요? 제 목소리…… 들리냐고요.
목소리가 힘겹다. 그녀의 목소리 끝이 흐릿하게 뭉개지는 것은 그녀의 기억이 그만큼 지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거기, 아주 이상한 냄새가 나요. 0번…… 0번이라고 불리는 거요. 분명히 비가 오는데…… 비닐 우비 냄새가 나는데, 정작 우산은 하나도 젖어 있지 않아요. 그리고…… 자꾸 들려요. 규칙적인 기계음. 어린아이 병실에서 듣던…… 심전도 소리 같은 거요.
“지율 씨, 들리니까 더 말하지 마요. 에너지 아껴.”
—아뇨, 기억해야 해요. 이건…… 이건 사람의 냄새가 아니에요. 기록이…… 기록이 썩어가는 냄새예요.
무전이 끊겼다.
비닐 우비, 젖지 않은 우산, 심전도 소리.
단서가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번호표 ‘0번’을 꽉 쥐었다. [잔향청취] 스킬이 예민하게 곤두섰다.
그러자 내 손바닥 안에서 번호표가 마치 입이라도 달린 것처럼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편의점의 불친절한 아르바이트생이나, 퇴근 직전의 구청 공무원 같은 말투였다.
『아, 좀 살살 쥐지? 구겨지면 바코드 안 찍힌다고.』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이 상황에서도 내 능력은 코믹한 하드보일드를 유지하고 있었다.
“너, 0번 원본에 대해 알지? 저 문 안에 뭐가 있나.”
『뭐가 있긴, 주인이 있지. 근데 말이야, 손님. 착각하지 마. 원본은 사람보다 먼저 접수된 기록이야. 너 같은 대여자는 몸을 빌린 게 아니라 ‘이름’을 빌린 거라고.』
“이름을 빌려?”
『6월 3일 병실. 거기가 반납처야. B-12는 그냥 정거장일 뿐이고. 빨리 가봐. 다음 대기자 줄 서 있는 거 안 보여? 아, 안 보이지? 넌 곧 ‘폐기’될 소모품이니까!』
번호표의 목소리가 비웃음처럼 잦아들었다.
“강도윤.”
이현우가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렸다. 그리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내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퍼억!
고개가 꺾이며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퍼졌다. 얼떨떨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이 좀 드냐? 네가 괴물인지 옷인지 고민할 시간 없어. 저 문이 열린다는 건 탈출구가 열린다는 뜻이기도 해. 저 안으로 들어가서 ‘0번’인지 뭔지 하는 놈 모가지를 비틀든, 시스템을 박살 내든 해라. 내가 밖에서 5분 벌어줄 테니까.”
“……5분 뒤엔요?”
“그때까지 못 나오면 나도 내 살길 찾아서 튈 거야. 난 의리파 헌터 같은 거 아니거든.”
이현우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손등에 핏줄이 돋아 있었다. 현실적인 탈출 조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지금 탈출 버튼을 누르면 한지율의 소멸하는 기억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탈출 안 합니다.”
“뭐?”
“지율 씨 기억, 전부 찾아와야 퇴근할 수 있거든요.”
나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바로잡고 ‘0번 원본 보관실’ 앞으로 다가갔다.
문 앞에 서자, 지율이 말했던 비릿한 비닐 우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젖지 않은 우산들이 벽에 기대어 나를 비웃듯 서 있었다.
삑—, 삑—, 삑—.
규칙적이고 건조한 심전도 소리가 문틈 너머에서 새어 나왔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대여 기간이 만료된 번호표를 문 옆 리더기에 갖다 댔다.
[인식 중…….]
[대여자 ‘강도윤’ 확인.]
[원본 회수 절차를 시작합니다.]
쿠우웅—!
납덩이처럼 무거운 문이 좌우로 열렸다.
내부에는 서늘한 냉기가 가득했다. 나는 보관실 중앙에 나를 닮은 어떤 괴물이나, 혹은 어린 시절의 내가 누워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6월 3일의 참극을 그대로 재현한 피칠갑 된 병실을 상상하며 권총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하지만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냉기 너머로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수많은 유리 보관함 중 가장 앞줄,
스포트라이트를 받듯 강렬하게 빛나는 구역에 놓여 있는 것은 낡은 서류 한 장과 플라스틱 이름표였다.
나는 그것을 확인한 순간, 숨을 쉴 수 없었다.
[박철수의 사망신고서]
그리고 그 옆에 놓인, 누군가의 옷에서 떨어진 듯한 빳빳한 이름표.
그곳에 적힌 이름은 강도윤이 아니었다.
‘0번 원본’의 이름표에 새겨진 글자.
[윤서하]
그것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의문을 품기도 전, 보관실 깊은 곳에서 누군가 비닐 우비를 부스럭거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