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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9화. 윤서하의 이름표와 10년 전의 목소리 일러스트

78-79화. 윤서하의 이름표와 10년 전의 목소리

제목: 78화. 윤서하의 이름표

문이 열리자마자 폐부를 찌른 것은 지독한 냉기였다.

그것은 단순히 온도가 낮은 수준이 아니었다. 누군가 기억의 한 조각을 통째로 냉동고에 처넣고 수십 년간 잊어버렸을 때 날 법한, 눅눅하고도 비릿한 서리 냄새였다.

한지율이 무전으로 말했던 소음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삐- 삐- 삐- 규칙적으로 고막을 긁는 심전도 소리. 어디선가 끊임없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음을 짓누르는, 비닐 우비가 서로 맞닿아 부스럭거리는 기분 나쁜 마찰음.

"여기가... 0번이라고?"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기록실이라기보다 병동에 가까웠다.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것은 서가가 아니라 의료용 유리 보관함들이었다. 그 안에는 서류 뭉치 대신 젖지 않은 검은 우산들이 환자처럼 하나씩 들어차 있었다. 천장에는 수액 팩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는데, 그 안에서 출렁이는 것은 투명한 약물이 아니라 검은 잉크였다.

그리고 그 복도 한복판, 가장 이질적인 위치에 그것이 있었다.

[윤서하(尹瑞夏)]

검은색 아크릴판에 정갈하게 새겨진 이름표. S급 수사협조관들이 가슴팍에 달고 다니는 것과 같은 형태였다. 하지만 이건 너무 낡아 있었다. 모서리는 깨져 나갔고, 글자 위로는 누군가 손톱으로 긁은 듯한 자국이 선명했다.

"팀장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윤서하는 지금 밖에서 내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있어야 한다. 내 기록을 담보로 잡고, 자신의 직위와 이름을 걸고 나를 이 심연으로 밀어 넣은 채권자. 그런데 그 채권자의 '이름' 자체가 이 죽은 자들의 원본실에 박제되어 있었다.

그 이름표 바로 아래, 누런 종이 한 장이 유리 벽에 붙어 있었다.

'박철수의 사망신고서.'

가까이 다가가자 잔향청취가 비명을 지르듯 머릿속을 울렸다. 나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신고서에 손을 뻗었다.

차갑다. 종이인데도 얼음 덩어리를 만지는 기분이다.

동시에, 내 귓가에 아주 사무적이고 친절한, 그래서 더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민원인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사망 신고는 1번, 부활 대여는 2번, 존재 말소는 0번을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박철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건 시스템의 목소리, 혹은 이 기록실 자체의 의지였다.

"박철수의 사망신고서에 대해 말해."

내가 나직하게 읊조리자, 목소리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 문건 말씀이시군요. 고객님께서 착각하신 모양인데, 이건 사망을 '신고'한 서류가 아닙니다. 사망을 '빌려준' 계약서죠.

"사망을 빌려줘?"

그렇습니다. 박철수 씨는 자기 죽음을 담보로 내놓고 살아있는 시간을 대출받으셨거든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서명자는 박철수가 아닙니다. 대리인이죠.

"서명자가 누군데?"

그건 영업 비밀입니다만... 한 가지 힌트는 드릴 수 있죠. 접수 날짜를 보시겠습니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서류 하단을 살폈다.

[접수일: 202X년 6월 3일]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은 5월 중순이다. 6월 3일은 아직 오지 않았다.

"사망일보다 접수일이 미래라고...?"

정답입니다! 박철수 씨는 아직 죽지 않았거나,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행정적으로만 살아있는 상태인 거죠. 기록이 실제보다 앞서가면 인간은 기록의 노예가 되는 법이니까요.

그때, 보관실 깊은 곳에서 부스럭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검은 우산들이 가득 찬 보관함 너머, 비닐 우비를 입은 형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수액 팩에서 흘러나온 검은 잉크가 우비 위로 빗물처럼 흘러내리고 있었고, 그 그림자가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를 먹칠하듯 가리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나 같기도 했고, 죽은 박철수 같기도 했으며, 동시에 전혀 모르는 괴물 같기도 했다.

치직-!

"강도윤! 들려? 내 목소리 들리냐고!"

무전기 너머로 이현우의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콰광! 무언가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이 미친 우산놈들이... 끝도 없이 밀려와! 접힌 우산살이 내 허벅지를 쑤셨다고! 5분? 야, 3분도 힘들어! 빨리 챙겨서 나와!"

이현우의 비명 뒤로 윤서하의 차분하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강도윤 헌터. 현재 대기실의 기록 밀도가 임계치를 넘었습니다. 지금 당장 채권자 권한으로 강제 퇴거 절차를 밟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윤서하가 말을 멈췄다. 그녀도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강제로 끌려 나가면 한지율의 깎여 나간 기억은 영영 되찾을 수 없고, 이 보관실의 단서들은 '소멸' 처리될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한지율 헌터의 기록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도윤 씨, 당신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비용은... 내가 감당하겠습니다.

윤서하의 목소리에는 기묘한 체념과 결의가 섞여 있었다. 0번 보관실에 자기 이름표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때, 아주 가냘픈 목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흘러들었다. 한지율이었다.

도윤... 씨...? 나, 방금 내 중학교 이름을 잊어버렸어요. 그리고... 그다음은 내 차례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해요. 그 방에... 팀장님 이름표가 보이죠?

"지율 씨, 정신 차려요."

그거, 거기 있으면 안 돼요. 그건 기록이 아니라... '족쇄'예요. 누군가 팀장님의 이름을 거기 가둬두고, 대신 다른 걸 끼워 넣은 거예요. 그걸 회수하면... 팀장님이 위험해질지도 몰라요. 하지만 회수하지 않으면...

한지율의 목소리가 끊겼다. 노이즈 너머로 그녀의 거친 호흡소리만 들려왔다.

선택의 시간이 왔다.

내 눈앞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미래의 날짜가 적힌, 박철수의 기괴한 사망신고서.

그리고 윤서하라는 존재의 근간을 쥐고 있는 듯한 낡은 이름표.

비닐 우비를 입은 형체가 한 걸음 다가왔다. 놈이 손을 뻗자 보관함 속의 검은 우산들이 일제히 탁, 탁, 탁 소리를 내며 펼쳐지려 꿈틀거렸다.

나는 이현우의 욕설과 한지율의 신음, 그리고 윤서하의 침묵 사이에서 숨을 들이켰다.

"빌려준 건 돌려받아야지. 그게 이 바닥 상도덕이니까."

나는 손을 뻗어 '박철수의 사망신고서'를 낚아챘다. 이름표를 먼저 챙겨야 할지 고민했지만, 한지율의 경고가 마음에 걸렸다. 기록이 실제보다 앞서 있다면, 그 기록을 비틂으로써 현재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서류를 움켜쥐는 순간, 보관실 전체가 거대한 구토를 하듯 뒤틀렸다.

"어...?"

내 손에 들린 사망신고서의 뒷면이 스르르 타오르더니, 새로운 글자들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박철수나 윤서하, 혹은 내 이름이 적혀 있을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그곳에 적힌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었다.

[보증인: 제갈후(諸葛厚)]

그리고 그 이름 옆, 서명란에는 날카로운 필체로 문장 하나가 덧붙여져 있었다.

'본 기록의 대여자는 신체를 반납하지 않았음. 대신, 한지율의 기억 14년 치로 대환 대출을 승인함.'

"이 미친... 제갈후, 당신이 왜 여기서 나와?"

내가 경악하며 고개를 든 순간, 내 손에 들려 있어야 할 사망신고서가 갑자기 반으로 쩍 갈라졌다. 그리고 그 갈라진 틈 사이에서, 잉크에 젖은 한 장의 사진이 툭 떨어졌다.

사진 속에는 어린 시절의 나와, 지금보다 훨씬 젊은 시절의 제갈후, 그리고...

눈이 가려진 채 비닐 우비를 입고 서 있는 '윤서하'가 나란히 서 있었다.

우드득, 보관실의 문이 뒤틀리며 닫히기 시작했다. 밖에서 이현우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강도윤! 문 닫힌다! 나와, 당장!"

나는 사진을 움켜쥐고 이름표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름표는 이미 검은 잉크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대신, 내 귓가에 박철수의 사망신고서가 마지막 잔향을 남겼다.

아, 참고로 말씀드리는 걸 깜빡했네요. 0번 원본실의 진짜 주인은... 아직 방 안에 계십니다.

비닐 우비를 입은 형체가 내 바로 뒤에서 차가운 입김을 내뱉었다.

"찾았다."

그건 내 목소리였다. 정확히, 10년 전 죽은 줄 알았던 내 목소리.

제목: 79화. 10년 전의 목소리

“찾았다.”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맑았다. 10년 전,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숨이 멎기 직전 내가 내뱉었을 법한,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어린 소년의 목소리.

나는 온몸에 돋은 소름을 애써 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박자가 마치 고장 난 메트로놈 같았다.

“야, 너 목소리 관리 좀 해야겠다. 요즘 애들은 변성기도 빨리 온다던데, 넌 10년째 목소리가 그 모양이냐? 보이스 피싱 치기엔 너무 고음인데.”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농담은 멈추지 않았다. 공포라는 놈은 원래 예의가 없어서, 웃음으로 문전박대하지 않으면 금세 안방까지 치고 들어오기 마련이니까.

내 뒤에 서 있는 존재는 형태가 모호했다. 낡아서 누렇게 변색된 투명 비닐 우비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그 안은 어둠뿐이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젖지 않는 우비 위로 검은 잉크 방울이 툭, 툭 떨어졌다.

삐— 삐— 삐—.

우비 안쪽에서 규칙적인 기계음이 들렸다. 병원 중환자실에서나 들을 법한 심전도 소리였다. 가느다란 손목이 우비 소매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그 손목에는 낡은 종이 재질의 병원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거기 적힌 이름은 피에 젖어 읽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10년 전, 폐기되었어야 할 나의 ‘원본’ 조각이다.

“네가 입은 이름은 반납 기한이 지났다.”

우비 인물이 손을 뻗었다. 창백하고 마른 손가락이 내가 쥔 사망신고서와 사진을 향했다. 잉크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윤서하의 이름표까지, 놈은 이곳에 있는 모든 ‘기록’을 한꺼번에 회수하려 했다.

“미안한데, 내가 연체료 내는 건 질색이라서 말이야.”

나는 사진을 품 안으로 쑤셔 넣으며 박철수의 사망신고서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잔향청취’를 다시 한번 강제로 끌어올렸다. 귀청을 찢는 듯한 노이즈와 함께, 아까보다 더 신경질적인 민원실 직원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때렸다.

[아, 정말! 몇 번을 말해요? 이 대환 대출, 채무자가 한지율 씨 본인이 아니라니까요!]

“그럼 누군데?”

[한지율의 기억을 보관한 ‘계좌’ 그 자체라고요! 그리고 이거 서명 확인 다시 하세요. 제갈후 이 양반, 원본 인감 안 찍고 사본으로 대충 넘겼네? 이거 효력 정지 사유인 거 몰라요?]

새로운 단서가 뇌를 관통했다. 제갈후의 서명이 사본이다. 그리고 채무자는 사람이 아니라 ‘기록의 보관소’ 자체였다. 그렇다면 지금 이 공간이 유지되는 동력 자체가 거대한 부실 대출이라는 뜻인가.

치직, 치지직.

귓가에 꽂힌 무전기에서 이현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윤 형! 젠장, 이 우산 새끼들이 갑자기 제 이름을 불러요! “이현우 씨, 3번 창구로 오세요!” 라면서! 목소리가 막, 우리 엄마 목소리로 변한다고요! 형, 나 진짜 3분도 못 버텨!

보관실 밖의 상황도 최악이었다. 기록 병정들이 이제는 상대의 이름을 훔쳐 부르며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도윤 씨.”

윤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채권자의 서늘한 권위가 느껴져야 할 목소리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제 퇴거시킬게요. 더는 안 돼요. 그 이름표… 그냥 버리고 나와요. 그건 이제 제 것이 아니에요.”

“서하 씨?”

“빨리요! 제가… 제가 버티기가 힘들어서 그래요. 제발.”

목소리 속의 균열. 윤서하는 지금 자신의 이름표가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채권자로서의 권한을 유지하기 위해 무언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대여자님… 아, 아니, 도윤 씨?”

한지율의 목소리도 섞여 들었다. 그녀는 방금 내 이름을 잊을 뻔했다. 그녀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고 있었다.

“사진… 사진 속의 저 인물요. 우비 입은 거, 서하 언니가 아닐 수도 있어요. 저건 그냥 ‘서하’라는 이름을 뒤집어씌운 빈 기록일지도 몰라요. 제갈후가 숨기려 했던 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보관실의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우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서가가 무너지고 천장에서 수액 팩이 터져 내렸다. 검은 잉크가 사방으로 튀며 벽면을 적셨다.

0번 보관실은 순식간에 형태를 바꿨다. 그것은 2004년의 낡은 병실이었다. 곰팡이 핀 벽지, 쇠 냄새 나는 침대 프레임, 그리고 한쪽 구석에 놓인 ‘사망신고 접수’라고 적힌 낡은 철제 책상.

과거와 현재가 끔찍하게 뒤섞인 공간 속에서 우비 입은 존재가 내 코앞까지 다가왔다. 놈의 손이 내 가슴팍을 스치듯 지나갔다.

“기한 만료다.”

서늘한 감각이 심장을 훑었다. 나는 품 안의 사진과 사망신고서를 필사적으로 움켜쥔 채, 무너져 내리는 병실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뒤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10년 전의 내 목소리가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내놔! 내 이름 내놔!”

“헉, 헉…!”

폐가 터질 듯한 고통과 함께 눈을 떴을 때, 나는 보관실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이현우가 박살 난 우산 잔해들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나를 부축하고 있었다.

“형! 정신 들어요? 와, 진짜 죽는 줄 알았네. 갑자기 보관실 문이 병원 문으로 바뀌더니 형을 뱉어내더라고요!”

윤서하는 창백해진 얼굴로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녀의 눈은 내가 챙겨 나온 사망신고서와 사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지율은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녀의 손등에는 검은 잉크 자국이 문신처럼 번져 있었다.

“살아… 나왔군.”

윤서하가 안도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나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다 가슴팍에 느껴지는 이질적인 촉감에 멈칫했다.

분명 보관실 안에서 잉크 속으로 가라앉는 걸 보았던 ‘이름표’였다. 우비 입은 놈이 내 가슴을 스쳤을 때 붙여놓은 것일까? 낡고 투박한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당연히 ‘윤서하’라고 적혀 있을 줄 알았다. 아니면 10년 전의 내 이름이거나.

하지만 내 가슴에 붙은 낡은 이름표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정갈한 글씨체로 박혀 있었다.

[ 제갈후 ]

그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내 품 안에 있던 사진 속 젊은 제갈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서 민원실 직원의 마지막 안내 멘트가 울려 퍼졌다.

[대환 대출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이 계좌의 ‘주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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