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73화. 대기실은 이름을 먹고 기록은 번진다
제목: 72화. 대기실은 이름을 먹는다
발등을 덮친 것은 차가운 지하수가 아니었다. 그것은 점성이 강하고 지독하게 비린 검은 액체였다. 바닥을 훑으며 밀려드는 꼴이 꼭 누군가 쏟아버린 대용량 먹물 같기도 했고, 아주 오랫동안 썩어 문드러진 기록들의 사체 같기도 했다.
“우욱, 이게 뭐야? 냄새가….”
옆에 선 이현우가 헛구역질을 하며 내 어깨를 잡아챘다. 놈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럴 만도 했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검은 물속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종이 조각들이 비늘처럼 떠다니고 있었으니까.
그건 물이 아니라 지워진 이름들의 찌꺼기였다.
“도윤아, 뒤로 물러나! 이거 장례식장 오수 같은 게 아냐.”
“알아. 그러니까 잡지 마. 중심 못 잡겠으니까.”
나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버텼다. B-12호 문 안쪽에서 쏟아지는 이 검은 압력은 우리를 밀어내려는 게 아니었다. 안으로 끌어당기려는 기세였다.
그때, 텅 빈 복도 안쪽에서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번엔…… 농담…… 하지 말고…… 도망… 쳐요…….]
윤서하 씨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평소의 그 차분하고 단호한 어조가 아니었다. 테이프가 늘어진 것처럼 느릿하다가도, 갑자기 배속을 돌린 것처럼 날카롭게 튀어 올랐다. 그녀는 그곳에 실재하는 게 아니었다. 임시 보증인이라는 명목으로 시스템에 강제로 ‘기록’된 조각이 비명을 지르는 것에 가까웠다.
[여긴…… 대기실이…… 아…… 니야…….]
말소리가 끊기자마자 안쪽에서 거친 기계음이 터져 나왔다.
탈칵, 탈칵, 탈카카카칵!
은행 창구에서나 들릴 법한 번호표 발급기 소리였다. 검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B-12호 정면, 그 어둠 속에서 영수증 용지들이 눈송이처럼 뿌려졌다. 아니, 뱉어지고 있었다.
나는 밀려드는 먹물(?)을 헤치며 한 걸음 내디뎠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이 내 발등에 들러붙었다.
<대기 번호: 444>
<성명: 강도윤 (회수 예정)>
<상태: 이름값 미납>
<비용 청구 대상: 윤서하 (승인 대기 중)>
“미친….”
욕설이 절로 터졌다. 종이는 한 장으로 끝이 아니었다. 발급기는 미친 듯이 종이를 토해내며 바닥을 하얗게 덮어버리고 있었다.
<성명: 박철수 (이탈)>
<성명: 제갈後? (대리 보관)>
<성명: 제갈候? (관리자)>
글자들은 잉크가 번진 것처럼 뭉개져 있었다. 후인지, 호인지, 혹은 그 뒤에 어떤 이름이 더 붙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 ‘제갈’이라는 성씨가 주는 불쾌한 압박감만은 선명했다.
그때였다. 내 귓가에 2004년의 환청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혔다.
—이름만 살리면 된다며! 몸만 붙여 놓으면 다야? 애가 지금 숨만 쉬지 제 정신이 아니잖아!
박철수의 목소리였다. 지금보다 훨씬 젊고, 훨씬 절박한.
—살린 건 몸이지 이름이 아닙니다. 박철수 씨, 당신이 지불한 대가는 ‘생존’이지 ‘존재’가 아니었으니까요.
상대의 목소리는 기계적일 만큼 차분했다. 박철수의 고함에도 미동도 하지 않을 법한, 높낮이 없는 중성적인 톤.
—그게 무슨…! 그럼 내 아들은, 도윤이는 어떻게 되는 건데!
—대기실에 맡겨두는 거죠. 진짜 이름은 우리가 보관하고, 껍데기엔 임시 바코드를 붙여줄 겁니다. 나중에 대가를 다 치르면… 그때 돌려받으러 오십시오.
잔향이 끊겼다.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
“강도윤! 정신 차려! 일단 나가야 돼!”
이현우가 내 팔을 잡아당겼다.
“윤서하를 살리려면 여기서 나가는 게 먼저야. 저 프린터인지 뭔지 하는 거, 지금 너랑 윤서하를 한꺼번에 먹으려고 하잖아! 병원 쪽 헌터들 불러서 물리적으로 타격하면….”
“안 돼.”
나는 현우의 손을 뿌리쳤다.
“나가는 순간 승인 떨어져. 내가 도망치면, 그 ‘이름값 미납’이라는 청구서가 그대로 윤서하 씨한테 넘어간다고. 그럼 그 여자는 평생 내 보증인으로 묶여서 저 검은 물속에 잠겨 살아야 해.”
“그럼 어쩌게? 네가 대신 죽겠다고? 그건 박철수가 원한 게 아냐!”
“누가 죽는대?”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시스템이 오류를 냈다면, 더 큰 오류로 덮어씌우면 된다.
나는 왼쪽 손목에 감긴, 이미 반쯤 찢어진 병원 팔찌를 내려다봤다. 2004년의 내가 차고 있던, 그리고 지금의 내 영혼에 낙인처럼 찍힌 바코드.
나는 남은 바코드 부분을 손톱으로 사정없이 긁어냈다.
드득, 드드득!
“으윽!”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이 아니었다. 내 존재의 일부가 가위로 오려지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갑자기 머릿속에서 풍경 하나가 지워졌다.
어린 시절, 동네 골목에서 먹었던 떡볶이의 맛.
나를 ‘도윤아’라고 부르던 누군가의 얼굴.
우리 집 전화번호 뒷자리.
사소하지만 나를 구성하던 기억들이 휘발유처럼 증발하기 시작했다. 팔찌를 망가뜨리는 대가는 내 ‘기록’의 삭제였다.
“강도윤! 너 얼굴이…!”
이현우의 경악 섞인 목소리를 무시하고, 나는 찢어낸 바코드 조각과 바닥에서 뱉어져 나온 ‘대기 번호표’ 한 장을 겹쳐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잉크를 뿜어내던 발급기 투입구에 강제로 쑤셔 넣었다.
본인 확인 시스템에 쓰레기 데이터를 먹이는 거다.
[지직… 지지직!]
발급기가 굉음을 내며 멈췄다. 화면에 붉은 글자가 점멸했다.
[경고: 데이터 충돌]
[원보증인: 박철수(이탈) / 신청자: 강도윤(데이터 불일치)]
[상태 변경: 대기자 본인 직접 이의 신청 접수]
[임시 보증인 윤서하 승인 보류]
“하아… 하아….”
성공이다. 일단 서하 씨에게 청구서가 넘어가는 건 막았다. 검은 물의 수위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가는 혹독했다. 나는 방금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와, 어머니의 성함을 잊어버렸다. 떠올리려 할수록 머릿속에는 회색 노이즈만 가득했다.
[제갈 候… 보관소… 확인 중….]
[제갈 後… 기록실… 연결 중….]
키오스크 화면에는 여전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글자 조각들이 명멸했다. 제갈후? 제갈후보관소? 그것이 사람의 이름인지, 아니면 이 기괴한 대기실을 운영하는 집단의 명칭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때였다.
파앗—!
천장에 매달려 있던 수많은 검은 우산 중 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내 머리 위에서 펼쳐졌다.
이현우가 검을 뽑아 들며 앞을 가로막았지만, 우산에서는 공격 대신 종이 한 장이 툭 떨어졌다.
그건 우산 안쪽 면에 붙어 있던 종이였다. 아니, 우산 천 자체가 커다란 기록지였다.
나는 홀린 듯 고개를 들어 우산 안쪽을 보았다. 거기에는 누군가의 필체가 휘갈겨져 있었다. 아주 익숙한, 매일 거울을 보며 메모를 남길 때 쓰던 바로 그 필체.
내 글씨였다.
<나는 박철수를 고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기억에도 없는 나의 과거가, 우산 안쪽에서 나를 비웃고 있었다.
“이게… 무슨…….”
내가 박철수를 용서했다고? 아니, 애초에 고소조차 하지 않았다고?
그럼 지난 세월 동안 내가 믿어왔던 박철수에 대한 증오와 원망은 대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우산 안쪽의 문장은 마치 낙인처럼 내 망막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대기실은 이름을 먹는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진실을 채워 넣고 있었다.
제목: 73화. 내가 선택한 적 없는 선택
검은 우산 천에 적힌 글자들은 하나같이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나는 박철수를 고소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누가 봐도 내 필체였다. ‘ㄹ’을 쓸 때 마지막 획을 살짝 위로 올리는 버릇이나, ‘ㅇ’을 타원형으로 길게 늘어뜨리는 습관까지 지독하게 닮아 있었다. 아니, 닮은 게 아니라 그냥 내 손글씨였다. 머릿속이 누군가 커다란 수저로 휘저어놓은 것처럼 울렁거렸다.
“강도윤 씨, 정신 차려요. 그거 보지 마.”
이현우가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저거 네 글씨 아냐. 이 대기실이라는 공간, 사람 기억 쑤셔 파는 데 도가 텄어. 가짜 기록을 심어서 네 정신을 흔들어 놓으려는 수작이라고.”
“……현우 씨, 나도 그러고 싶은데요.”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장에 매달린 우산들을 올려다보았다. 잉크가 번진 자국 하나하나가 내 뇌세포 어딘가에 박혀 있던 파편처럼 느껴졌다.
“내 습관이 너무 정확해요. 내가 나 자신에게 보내는 유서 같아서…… 소름이 돋는다고요.”
그때, 번호표 발급기에서 ‘치익’ 소리와 함께 붉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기계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노이즈를 일으키더니, 기괴하게 변조된 음성이 대기실 전체에 울려 퍼졌다.
[본인 직접 이의 신청 접수가 확인되었습니다. 본인 확인 절차를 시작합니다.]
이의 신청. 아까 내가 찢긴 병원 팔찌와 대기표를 억지로 쑤셔 넣어 만든 결과였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대가는 이미 내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와 어머니의 이름을 앗아갔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신청자 강도윤의 ‘어머니 성명’을 입력하십시오.]
“……!”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알고 있다.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따뜻한 밥상머리에서 나를 부르던 목소리, 명절 때마다 내 용돈을 챙겨주던 그 손길을 기억한다. 하지만 그 모든 기억의 핵심인 ‘이름’만은 마치 누군가 지우개로 벅벅 문지른 것처럼 하얗게 비어 있었다.
[답변 대기 중. 지연 시 기록 회수가 가속화됩니다.]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오른쪽 다리의 감각이 서서히 멀어졌다. 단순히 마비되는 느낌이 아니었다. 내 몸의 일부였다는 ‘사실’ 자체가 세상에서 소멸해가는 공포였다.
[두 번째 질문입니다. 신청자 강도윤의 ‘첫 보호자’의 이름을 입력하십시오.]
[세 번째 질문입니다. 2004년 6월 3일, 네가 그에게 먼저 건넨 말을 입력하십시오.]
질문이 거듭될수록 나는 낭떠러지로 밀려났다. 2004년 6월 3일. 그날 무슨 일이 있었지? 기억의 방을 뒤질수록 날카로운 통증이 뇌를 찔렀다.
[마지막 질문입니다. 박철수를 고소하지 않은 사유를 진술하십시오.]
“으윽……!”
나는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고통보다 무서운 건 상실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여기 있는지에 대한 근간이 뿌리째 뽑혀 나가고 있었다. 질문에 답하지 못할수록, 대기실은 내 존재의 ‘백업 데이터’를 삭제하듯 기억을 갉아먹었다.
그때였다. 내 주머니 안에 있던 낡은 녹음기—윤서하가 남겼던 기록 매체에서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답하지 마요. 도윤 씨, 듣고 있어요? 그거 질문이 아니에요. ‘채굴’이라고요.
윤서하의 목소리였다. 평소보다 낮고 딱딱하게 가라앉은, 마치 미리 녹음된 경고 메시지 같은 톤이었다.
—당신이 답을 하려고 애쓰는 순간, 뇌의 신경망이 활성화되죠. 시스템은 그 경로를 역추적해서 당신의 본질을 더 깊게 파낼 거예요. 침묵하세요. 아니면…… 시스템이 이해하지 못할 쓰레기 값을 던져요.
“채굴……?”
나는 초점 흐린 눈으로 발급기를 보았다. 이 기계는 내 진실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내 기억의 경로를 열어젖혀, 나라는 존재를 통째로 뜯어먹으려는 거였다.
“비켜봐요, 강도윤 씨!”
이현우가 대검을 뽑아 들더니 천장으로 도약했다. 그가 허공을 가르자, 내 필체가 적혀 있던 검은 우산 하나가 처참하게 찢겨 나갔다.
서걱—!
우산 천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 시커먼 물 대신 종이 조각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그것은 종이가 아니었다. 타인의 기억, 누군가의 삶이 기록된 데이터 조각들이었다. 이현우가 바닥에 떨어진 파편 하나를 낚아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걸 봐! 이게 네 진짜 모습 같아?”
조각에는 붉은 글씨가 박혀 있었다.
[한지율 / 기록 접촉자 / 잔여 동기화율 3%]
“지율이……?”
한지율의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혼란이 가중되던 찰나, 내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턴가 그곳에 서 있던 ‘아이’가 보였다. 병원 환자복을 입은,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죽은 아이.
아이의 눈동자는 깊은 늪처럼 어두웠다. 녀석이 입술을 달싹였다.
“아저씨가 선택했어. 내가 아니라.”
아이의 목소리는 대기실의 소음마저 잠재울 만큼 선명했다.
심장이 내려앉았다. 우산에 적혀 있던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라는 문장이 머릿속에서 거대한 종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내가? 내가 이 아이의 죽음을 방치하고 이 자리를 차지했다고?
[답변하십시오. 박철수를 고소하지 않은 사유는 무엇입니까?]
발급기의 독촉이 이어졌다. 시스템의 압박과 아이의 원망 섞인 시선이 나를 양방향에서 짓눌렀다. 숨이 막혔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강도윤’이라는 존재는 로그아웃될 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묘한 반골 기질이 치솟았다. 무섭고, 아프고, 다 때려치우고 싶지만…… 그래도 나는 ‘나’였다. 지옥 같은 퇴근길에서도 상사 뒷담화를 하며 버티던 대한민국 직장인 강도윤.
“……사유?”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발급기 앞에 섰다. 그리고는 자판 위에 손을 올렸다.
“그래, 알려주지. 내가 박철수를 왜 고소 안 했냐면 말이야.”
이현우와 아이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나는 입가에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자판을 두드렸다.
[답변: 그놈 관상이 고소해봤자 합의금도 못 내줄 거지 꼴이라서. 가성비가 안 맞잖아, 이 깡통아.]
[……?!]
발급기 화면에 경고등이 들어왔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다음 질문인 ‘어머니의 성명’ 칸에도 거침없이 글자를 써 내려갔다.
[답변: 우리 엄마 성함은 ‘엄마’다. 전 세계 공통어지. 불만 있으면 네가 낳아보든가.]
[시스템 오류: 데이터 일치율 저하. 진술 신뢰도 낮음.]
“뭐 해, 강도윤! 미쳤어?”
“아니, 아주 제정신이에요.”
나는 이현우를 향해 씩 웃었다.
“이 새끼들이 내 기억을 가져갔으면, 그 빈자리에 내가 새로운 쓰레기를 채워 넣으면 되는 거 아냐? 어차피 팩트 체크도 못 하는 놈들 같은데.”
나는 ‘첫 보호자’ 칸에 ‘24시간 편의점 ATM 기기’라고 적었고, ‘2004년에 한 말’에는 ‘아, 퇴사하고 싶다’라고 입력했다. 2004년에 나는 중학생이었겠지만, 알 게 뭐야. 시스템이 내 기억을 훔쳐갔으니 이제 여기 기록된 건 다 가짜다.
[경고: 자기기록 오염 감지.]
[보안 등급 상향. 수동 심사 전환.]
[강제 회수 프로세스 일시 정지.]
지직, 소리와 함께 나를 옥죄던 보이지 않는 사슬이 풀려나갔다. 다리의 감각이 돌아왔다.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더 이상 뜯겨 나가지는 않았다.
화면에는 새로운 텍스트가 빠르게 흘러갔다.
[관리자 개입 필요: 제갈(諸葛) 〇〇 보관소 관리자 기록 필요]
[상위 권한 요구: 후견 기록실 접근 필요]
“제갈……?”
이현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성씨 외에는 뒷글자가 깨져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이 지옥 같은 대기실의 ‘진짜 주인’ 혹은 ‘관리자’에게 접근할 단서가 열렸다는 점이었다.
“일단 산 건가?”
이현우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입안에서 쇠 냄새가 났다.
그때였다. 내 품 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시스템에서 지급된 헌터용 무전기였다. 이곳은 외부와 차단된 공간일 텐데, 치익거리는 소음 너머로 익숙하면서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윤 씨? 강도윤 씨! 제 말 들려요?
한지율이었다. 목소리는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주변에서는 기계음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지율 씨? 어떻게 연결된 거예요? 거긴 괜찮아요?”
—아니요, 안 괜찮아요. 서하 언니가…… 서하 언니 상태가 이상해요!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서하 씨가 왜요? 설마 깨어난 겁니까?”
—그게 아니라…… 언니 왼쪽 손목에요. 도윤 씨가 찼던 그 병원 팔찌 자국 있잖아요. 그게 똑같이 생겨났어요. 마치 살을 파고든 것처럼 시커멓게……!
한지율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나를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리고…… 도윤 씨, 제 손목에도요. 저한테도 그 자국이 생겼어요. 우리 지금, 도윤 씨랑 똑같이 ‘기록’되고 있는 것 같아요.
무전기 너머로 지율의 짧은 비명이 들렸다. 나는 멍하니 내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던진 오염된 데이터가, 나를 넘어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전염되고 있었다.
[수동 심사 대상자: 강도윤 및 관련 기록 접촉자 전원]
발급기 화면에 뜬 그 문장이, 새로운 사형 선고처럼 번쩍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