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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71화. 거울 속의 꼬마와 젖은 우산의 보호자 / 출생신고 대기실과 보증인 변경 절차 일러스트

68-71화. 거울 속의 꼬마와 젖은 우산의 보호자 / 출생신고 대기실과 보증인 변경 절차

제목: 68화. 거울 속의 꼬마

지하 복도의 형광등이 지직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럴 때마다 시야가 명멸했다. 방금 전까지 영하 40도의 냉동실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 영혼 어딘가에 구멍이 뚫려 그사이로 차가운 외풍이 들이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 옆에 붙은 전신거울 앞에 멈춰 섰다.

습기 찬 거울 속의 남자는 낯설었다. 창백하게 질린 뺨, 초점 없는 눈동자. 거기까지는 며칠 밤을 설친 헌터의 흔한 몰골이었다. 문제는 그 실루엣 너머로 겹쳐지는 잔상이었다.

눈을 깜빡였다. 거울 속의 내가 아주 짧은 찰나, 짧은 반바지에 무릎이 다 까진 꼬마로 변했다. 꼬마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엄지손가락을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코끝에서 비릿한 병원 소독약 냄새와 오래된 담요의 눅눅한 먼지 향이 훅 끼쳤다.

“……아저씨, 나 이제 집에 가도 돼?”

목소리는 내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온 것 같기도 했고, 거울 너머 먼 곳에서 울린 것 같기도 했다. 뇌세포 하나하나가 얼음송곳에 찔리는 기분이었다. 손가락 끝이 떨렸다. 나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려던 순간, 무거운 손바닥이 내 어깨를 썩 짚었다.

“야, 강도윤. 너 정신 안 차려?”

이현우의 목소리였다. 현실의 중력이 발목을 낚아채듯 나를 끌어내렸다. 고개를 돌리자 잔뜩 미간을 찌푸린 이현우가 보였다. 그는 내 얼굴 가까이 자기 얼굴을 들이밀며 눈동자를 살폈다.

“너 방금 표정 진짜 이상했어. 무슨 7살짜리 애가 길 잃어버린 것 같은 표정이었다고.”

“……그냥, 날이 추워서 그래. 냉동실에 너무 오래 있었나 봐.”

나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농담이라도 던지지 않으면 이 서늘한 감각에 잡아먹힐 것 같았다.

“현우야, 나 혹시 지금 키 줄어들었냐? 갑자기 세상이 좀 높아 보이는데.”

“헛소리하는 거 보니까 아직 제정신이긴 하네. 이름 말해봐.”

“강도윤.”

“나이는?”

“서른 될 준비 중인 꽃다운 청춘.”

“직업.”

“박봉에 시달리는 F급 헌터 겸 사망 플래그 수거반.”

이현우가 내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 지금 네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윤서하 깨우는 거. 그 성격 까칠한 고용주님 살려놔야 내 미지급 수당도 받지.”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슬쩍 거울을 곁눈질했다. 꼬마의 형상은 사라졌지만, 거울 가장자리에 낀 성에가 기묘한 기하학적 문양을 그리며 얼어붙고 있었다.

그때 복도 천장의 스피커가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서늘한 기계음을 뱉어냈다.

[알림: 공정 보류. 보증물 온도 안정화 단계 진입.]

[기록 혼합 관찰 중……. 보증인 간의 데이터 동기화율 14.8%.]

냉동 기록원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보다 더 거대하고 시스템적인 무언가가 우리를 관조하고 있다는 느낌. B-12 냉동실에서 시작된 ‘기록’이 이미 내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지율이었다.

“강도윤 씨! 들려요? 방금 서하 씨 체온이 정상 범위로 돌아왔어요!”

한지율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몰려오려는 찰나, 그녀의 다음 말이 내 뒷덜미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런데, 서하 씨가 아주 잠깐 눈을 떴거든요? 의식이 있는 건 아닌데, 뭔가를 계속 중얼거려요. 너무 무서운 목소리로…….”

“뭐라고 하는데요?”

“거울을 믿지 마……. 꼬마가 네 이름을 들고 있어. 제발, 도윤 씨, 그 이름을 돌려주지 마…….”

전화기 너머로 윤서하의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거울을 믿지 말라고? 이미 거울 속의 꼬마와 눈이 마주친 뒤였다.

나는 다시 전신거울을 바라보았다. 이현우는 한지율과의 통화 내용을 듣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사이, 거울에 낀 성에 위로 작은 손가락 자국이 생겨났다. 누군가 안쪽에서 유리창을 닦아내듯, 슥슥 소리를 내며 글자가 써 내려져 갔다.

諸葛 (제갈)

그 뒤로 이어지는 한 획. 아까 B-12호에서 보았던 그 희미한 선이 조금 더 선명해졌다.

諸葛 候……? 아니면 後……?

획의 끝이 뭉개져 있어 정확한 한자를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아래에 마치 낙인처럼 찍힌 문구는 명확했다.

보증인 1: 박철수 / 보증인 2: 제갈○

동그라미 쳐진 부분은 마치 누가 파낸 것처럼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 한 획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2004년 6월 3일, 서울 기록망이 최초로 붕괴하던 그날. 박철수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건넸던 첫 번째 보증 계약의 대상은 바로 나였다. 아니, ‘죽은 아이 강도윤’이었다.

“이거 봐, 현우야. 여기 글자가…….”

내가 거울을 가리키려 할 때, 거울 속의 획들이 갑자기 뒤틀리며 다시 꼬마의 얼굴로 변했다. 이번에는 꼬마가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꼬마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 아저씨.

목소리가 머릿속을 직접 긁었다.

— 우산이 젖은 날엔 도망가.

“뭐?”

“뭐가? 왜 그래, 도윤아?”

이현우가 내 팔을 붙잡았다. 거울 속은 이미 평범한 습기만 남은 채 깨끗해져 있었다. 꼬마도, 글자도 사라졌다.

“……아무것도 아냐. 가자. 여기 계속 있다가는 진짜 미칠 것 같아.”

우리는 서둘러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상으로 향했다. B-12 냉동실의 한기가 등 뒤에서 끈질기게 따라붙는 기분이었다.

장례식장 로비는 고요했다. 새벽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지하 복도만큼 살벌하지는 않았다. 밖으로 나가는 자동문 앞에 섰을 때, 나는 잠시 발을 멈췄다.

밖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구름은 잔뜩 끼었지만 바닥은 말라 있었다.

그런데 출구 옆 플라스틱 우산꽂이에, 단 하나의 우산이 꽂혀 있었다.

검은색 장우산.

마치 방금 밖에서 폭우라도 맞고 들어온 것처럼, 우산 천에서는 투둑, 투둑 소리를 내며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작은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어? 누가 우산을 두고 갔나 보네. 비도 안 오는데 웬일이냐.”

이현우가 무심코 지나치려다 멈춰 섰다. 나도 모르게 그 우산으로 시선이 향했다.

우산 손잡이 부분에 하얀색 플라스틱 띠가 감겨 있었다.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채워주는 인식표, 즉 병원 팔찌였다.

나는 홀린 듯 다가가 우산 손잡이를 살폈다. 팔찌에는 낡은 글씨가 인쇄되어 있었다.

[성명: 강도윤 / 생년월일: 2004. 06. 03 / 보호자: 박철수]

거기까지만 읽었다면 나는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시선을 잡아챈 것은 팔찌 안쪽, 살점과 맞닿는 부분에 아주 작게, 누군가 손톱으로 긁어놓은 듯한 날카로운 획이었다.

諸葛 (제갈)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아까 거울에서 보았던 것과 똑같은 방향의 한 획.

우산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내 구두 위로 튀었다.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물기였다.

“우산이 젖은 날엔…….”

내가 중얼거리자, 이현우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뭐라고?”

나는 고개를 들어 장례식장 밖을 보았다. 비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하지만 밤하늘은 마치 거대한 검은 우산이 우리를 덮치려는 듯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나는 젖은 우산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 플래그를 뽑아야 할지, 아니면 이대로 도망쳐야 할지 뇌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손가락은 이미 젖은 천의 서늘한 감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망 플래그를 줍는 게 내 일이라면, 이건 피할 수 없는 업무 분담이었다.

제목: 69화. 젖은 우산의 보호자

손가락 끝이 젖은 우산 손잡이에 닿는 순간, 세상의 소음이 전원 꺼진 라디오처럼 툭 끊겼다.

대신 그 빈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건 축축하고 끈적한 감각의 파편들이었다.

―툭, 투둑.

―비 오는데 애를 왜 여기까지….

―철수야, 이거 사인해라. 안 그러면 이놈 진짜 죽는다.

시야가 울렁거렸다. 현재의 장례식장 로비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그 위로 20년 전의 병원 복도가 겹쳐졌다. 코끝을 찌르는 건 락스 냄새와 눅눅한 빗물 냄새. 바닥을 구르는 스트레처 카의 바퀴 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내 시선은 아주 낮았다. 시야 한구석에 들어온 내 팔목은 너무 얇아서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았다. 그 앙상한 팔목을 누군가의 거칠고 젖은 손이 꽉 쥐고 있었다. 박철수였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우산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내 발등에 닿았다. 차가웠다. 얼음송곳이 살을 파고드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

―도윤아, 아저씨가 미안해. 근데 이게 널 살리는 유일한 방법이야.

거친 플라스틱 팔찌가 내 손목을 조였다. 보호자 박철수. 내 이름 강도윤. 노란색 전등 아래서 팔찌의 글씨가 번뜩였다. 그 순간, 누군가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강도윤! 손 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현우가 내 팔목을 잡고 뒤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허억, 헉…….”

입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났다. 방금까지 내 몸을 지배하던 그 지독한 냉기가 가시지 않았다. 바닥을 내려다보니, 우산에서 떨어진 물방울들이 기묘한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장례식장 로비의 대리석 타일 위로, 물방울이 번진 자리에 글자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사라졌다.

[2004. 06. 03]

[보호자 확인 완료]

[기록 이관 중……]

[보증 계약 서명 대기]

“팀장님, 이거 보여요?”

“뭐가 말이야. 우산 잡고 멍하니 서 있는 것밖에 안 보였어. 너 방금 눈 풀렸었다고.”

이현우가 인상을 쓰며 구두 끝으로 검은 우산을 툭 쳤다. 우산을 접으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우산은 마치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현우의 구두가 닿은 부분부터 서리가 하얗게 피어올랐다.

“건드리지 마요. 이거 보통 물건 아니야.”

그때 품 안의 무전기가 찢어지는 듯한 노이즈를 내뱉었다. 한지율의 목소리였다.

―도윤 씨! 들려요? 병원 쪽 상황이 이상해요!

“지율 씨, 진정하고 말해요. 무슨 일입니까?”

―CCTV가…… 5초 전부터 갑자기 노이즈가 끼더니 화면이 이상하게 변했어요. 지금 현실 시간인데, 화면 속 복도에는 옛날식 소독차랑 환복을 입은 사람들이 지나다녀요. 꼭 20년 전 기록이 겹쳐진 것처럼요!

이현우의 눈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나는 우산 손잡이에 묶인 병원 팔찌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서하 씨가…… 서하 씨 침대 주변에 젖은 발자국이 생겼어요. 아무도 없는데 바닥에 물기가 뚝뚝 떨어지면서 발자국만 늘어나고 있다고요! 서하 씨가 자면서 계속 중얼거려요. 보호자 서명하지 마, 절대 서명하면 안 돼…… 라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보호자 서명.

2004년 6월 3일, 그날 박철수가 했다는 그 서명이 단순히 병원 입원 수속이 아니었음을 직감했다.

“이거 보증 계약이었어.”

나는 다시 우산으로 손을 뻗었다. 이현우가 내 손목을 낚아챘지만, 나는 그를 뿌리쳤다.

“확인해야 할 게 있어요. 나 안 죽으니까 걱정 말아요. 사후 보험도 빵빵하게 들어놨거든.”

우산 손잡이를 잡는 대신, 이번에는 우산의 안쪽 천을 살짝 들췄다. 겉보기엔 평범한 검은 천이었지만, 물방울이 튀어 젖은 부위에 숨겨져 있던 얇은 글씨들이 서서히 배어 나왔다.

[보호자 박철수는 본 기록의 원소유권을 포기하고, 제갈(諸葛) ○에게 대리 보관을 위임한다.]

제갈 뒤의 이름은 마치 누군가 칼로 긁어낸 듯 찢겨 있었고, 그 위로 검은 물 얼룩이 번져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위임'이라는 단어만큼은 비수처럼 명확했다. 박철수는 나를 살리기 위해, 혹은 다른 이유로 나의 '기록'—즉 내 존재 자체를 누군가에게 넘겨버린 것이다.

“강도윤, 그만해. 우산이 너를 빨아들이고 있어.”

이현우의 말대로였다. 우산 주변의 공기가 왜곡되며 내 몸이 점점 그 축축한 어둠 속으로 끌려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로비 바닥의 타일들이 하나둘씩 뒤집히며 2004년의 병원 복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 우산을 통째로 들고 가는 건 자살행위였다. 이건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를 가둬두는 '보관함' 그 자체였다.

나는 주머니에서 소형 나이프를 꺼내 우산 손잡이에 묶인 병원 팔찌의 매듭을 끊어냈다.

쩍—!

거울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장례식장 로비의 전등이 일제히 점멸했다.

팔찌를 낚아채자마자 나는 뒤로 몸을 날렸다. 이현우가 내 뒷덜미를 잡아채며 로비 입구 쪽으로 끌어당겼다.

우리는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거기 있던 검은 우산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누군가 집어간 것 같았다. 바닥에는 물방울이 떨어진 자국만 길게 복도 끝으로 이어져 있었다. 마치 투명한 누군가가 우산을 쓰고 걸어 나간 것처럼.

“……놓쳤나.”

이현우가 이를 갈았다. 나는 손바닥에 쥔 병원 팔찌를 꽉 쥐었다.

그런데 팔찌를 떼어낸 우산 손잡이 안쪽에서, 아주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오래된 환자 번호표 같기도 하고, 영수증 같기도 한 종이였다. 누렇게 변색된 그 종이에는 휘갈겨 쓴 박철수의 필체가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심장이 그대로 얼어붙는 것 같았다.

[B-12는 보관실이 아니다. 출생신고 대기실이다.]

그 문장 아래, 아주 작은 글씨로 덧붙여진 추신이 있었다.

[내 이름은 내가 가져간다, 아저씨.]

그건 박철수의 글씨가 아니었다.

방금 전 잔향 속에서 들었던, 내 안의 '죽은 아이'가 내뱉는 서늘한 목소리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 팔목을 만져보았다.

거기엔 방금 떼어낸 팔찌의 자국이 화상처럼 붉게 남아 있었다.

6월 3일.

나의 생일이자, 강도윤이라는 이름의 원소유주가 '대기실'에서 사라진 날이었다.

제목: 70화. 출생신고 대기실

방금 전까지 장례식장 로비에 세워져 있던 검은 우산은 연기처럼 증발했다. 아니, 연기라기보다는 물거품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대리석 바닥에는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이 점선처럼 길을 그리며 정문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나는 손바닥에 남은 병원 팔찌의 서늘한 감촉을 움켜쥐었다.

“야, 강도윤. 저거.”

이현우가 턱 끝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물자국을 따라 뛰었다. 물방울은 자동문 바로 앞에서 뚝 끊겼다. 문 너머의 새벽은 먼지 하나 날리지 않을 만큼 바싹 말라 있었다. 실외기 돌아가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리는, 지독하게 평범한 6월의 새벽 공기.

하지만 문 안쪽은 여전히 축축한 습기로 가득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수조 속에 우리만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밖으로는 안 나갔어.”

이현우가 문틀을 살피며 인상을 썼다.

“나간 게 아니라, 여기서 사라진 거지. 아니면 애초에 밖이라는 공간 자체가 놈들한테는 없는 거거나.”

나는 손에 든 종이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B-12는 보관실이 아니다. 출생신고 대기실이다.] 그리고 그 아래 적힌 [내 이름은 내가 가져간다, 아저씨.]라는 문구.

아저씨라니. 나 아직 이십 대인데. 억울함보다 먼저 소름이 돋는 건 내 정신 상태가 그만큼 코너에 몰렸다는 증거였다.

그때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한지율이었다.

―도윤 씨! 서하 언니가... 언니가 좀 이상해요!

“정신 들었어?”

―아뇨, 그게... 깨어난 건 아닌데, 자꾸 침대 난간을 꽉 붙잡고 뭘 중얼거려요. 제가 가까이 가서 들어봤는데...

수화기 너머로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한지율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B-12로 돌아오지 마. 대기실은 태어나는 곳이 아니라 이름을 기다리는 곳이야... 라고요. 그리고 언니 침대 주변에 자꾸 물기가 생겨요. 분명히 닦았는데, 발자국 같은 게 계속...

“서하 씨 옆에서 떨어져 있어, 지율 씨. 현우 형 보낼 테니까.”

전화를 끊자마자 이현우가 내 어깨를 낚아챘다.

“너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거길 왜 가. 널 혼자 두고?”

“서하 씨 상태가 안 좋아. 저번에 안치실에서 나 도와주다가 뭔가 옮겨붙은 것 같아. 형이 가서 지켜줘야 해.”

“웃기지 마. 그 젖은 발자국인지 뭔지, 목표는 너야. 이 팔찌에 네 이름 박혀 있는 거 안 보여?”

이현우의 시선이 내 왼손에 들린 병원 팔찌에 꽂혔다. 그 순간, 내 손바닥 안에서 기분 나쁜 진동이 느껴졌다.

차가운 플라스틱 재질의 팔찌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그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스르륵 내 손목 쪽으로 말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 어?”

“강도윤! 버려!”

이현우가 소리쳤지만 늦었다. 팔찌는 자석이라도 된 듯 내 왼쪽 손목에 착 달라붙었다. 정확히는, 아주 오래전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흉터 혹은 자국 위로 이빨을 맞추듯 맞물렸다.

찍찍이(벨크로)가 붙는 소리도, 버클이 잠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원래부터 내 몸의 일부였던 것처럼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감각이 전해졌다.

그 찰나, 시야가 뒤집혔다.

“...!”

장례식장 로비의 형광등 불빛이 순식간에 점멸하며 푸르스름한 수조 속 같은 빛으로 변했다.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비릿한 양수와 썩은 물의 향기.

눈앞에 복도가 펼쳐졌다. 장례식장 지하 복도와 닮았지만 달랐다. 천장에는 ‘보관실’ 대신 ‘대기실’이라는 표지판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B-01, B-02, B-03....

문은 모두 반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었다. 그 너머로 수천 개는 됨직한 아기 침대들이 끝도 없이 늘어선 실루엣이 보였다. 침대에는 아이 대신 검은 우산들이 하나씩 꽂혀 있었다.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묘비처럼.

벽면의 전광판이 치직거리며 글자를 띄웠다.

[대기자: 강도윤]

[처리 상태: 회수 지연]

[사유: 보증인 이탈 및 대리인 미지정]

그리고 가장 끝에 위치한 문.

[B-12]

그 문 앞에 서 있는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흠뻑 젖은 우산을 든 아이. 아이는 얼굴이 없었다. 아니, 거울에서 본 것처럼 내 어린 시절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코입이 있어야 할 자리는 물결처럼 일렁이며 흐릿했다.

―아저씨.

아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긁었다.

―이름표 돌려받으러 왔어. 내 자리가 여기거든.

“강도윤! 정신 차려!”

퍽, 하는 충격과 함께 시야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현우가 내 손목을 낚아채 팔찌를 강제로 뜯어내고 있었다. 팔찌는 마치 생살을 뜯어내는 것처럼 쩍쩍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허억, 헉....”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손목에는 팔찌 모양대로 벌건 피멍이 들어 있었다. 이현우는 뜯어낸 팔찌를 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내 멱살을 잡았다.

“너 방금 눈 뒤집혔었어, 임마! 당장 병원 가. 한지율이고 윤서하고 나발이고, 너부터 살아야겠으니까.”

“안 돼.”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아까 주워둔 종이 조각을 다시 펴 보였다.

“병원 간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냐. 방금 봤어. 거긴 보관실이 아냐. 미지급된 ‘이름’들을 쌓아두는 창고 같은 곳이야.”

나는 종이 뒷면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조명에 비춰보니 희미하게 눌린 자국들이 보였다.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선과 선이 정교하게 맞물린, 일종의 내부 구조도였다.

“이거 봐. 현재 이 건물 도면이랑은 안 맞아. 하지만 지하 B-12 냉동 보관실 옆에... 숨겨진 공간이 있어. ‘대기실’로 연결되는 통로야.”

“야, 강도윤. 너 설마 거길 다시 가겠다고?”

“서하 씨 침대 주변에 젖은 발자국이 생긴다고 했지? 그게 뭘 뜻하는 것 같아? 내 이름을 가져가려는 놈이, 내 주변 사람들부터 잠식하고 있다는 뜻이야. 내가 안 가면 다음은 한지율, 그다음은 형일지도 몰라.”

이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빌어먹을. 헌터고 뭐고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야, 너 거기서 잘못되면 난 네 보험금도 안 청구하고 그냥 같이 죽을 줄 알아.”

“걱정 마. 나 아직 연차도 다 못 썼어.”

나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종이 조각이 가리키는 방향은 로비 구석, 화물용 엘리베이터 뒤편의 좁은 복도였다.

우리는 다시 지하로 향했다. 안치실의 서늘함과는 차원이 다른, 눅눅하고 무거운 압박감이 발끝부터 차올랐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에 물기가 맺히는 기분이었다.

약도에 표시된 지점에 도착하자, 벽면과 교묘하게 색을 맞춘 철문 하나가 나타났다. 잠금장치는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낡은 터치스크린 하나가 박혀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스크린에 푸른빛이 들어왔다.

[경고: 대기 시간 초과.]

[보호자 재서명 필요.]

글자가 나타나자마자 나는 숨을 들이켰다.

화면 아래쪽, 서명란에는 이미 누군가의 이름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 미리 와서 서명을 하다가 멈춘 것처럼.

[서명자: 윤서하]

“...윤서하?”

이현우가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서하 언니가 왜 여기 있어? 아까 지율이가 언니는 병원 침대에 있다고 했잖아.”

나 역시 눈을 의심했다. 윤서하는 지금 의식 불명 상태로 병원에 있다. 그런데 왜 그녀의 이름이 이곳의 ‘보호자’ 칸에 적혀 있는 거지?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철문 너머에서 철벅, 철벅 하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안쪽에서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스크린의 문구가 붉은색으로 점멸하며 바뀌었다.

[확인되었습니다. 보증인 변경을 위해 입장하십시오.]

치익-

압력이 빠지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쏟아져 나온 것은 차가운 공기가 아니었다. 수천 개의 우산이 젖은 채 매달려 있는, 거대한 ‘대기실’의 비릿한 물비린내였다.

제목: 71화. 보증인 변경 절차

철문이 열리자마자 쏟아져 나온 것은 비릿한 물냄새와 코를 찌르는 소독차의 향취였다.

“도윤아, 멈춰.”

이현우가 내 어깨를 잡아챘다. 그의 손아귀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내 발은 이미 문턱을 넘고 있었다. 의지라기보다는 인력에 가까웠다. 자석에 이끌리는 쇳가루처럼, 내 주머니 속 찢긴 병원 팔찌가 문 안쪽의 공간을 갈망하듯 차갑게 떨고 있었다.

통로는 기괴했다. 분명 현대식 장례식장의 매끄러운 콘크리트 벽이었는데, 깜빡이는 형광등 불빛이 지나갈 때마다 2004년의 누런 타일 벽체로 뒤집혔다. 바닥에는 고인 빗물이 출렁였고, 그 위로 신생아실의 투명한 요람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현우 형, 저거 보여요?”

내가 가리킨 천장에는 수천 개의 검은 우산이 박쥐처럼 매달려 있었다. 접힌 우산들은 마치 거대한 누에고치 같았다. 우산 손잡이마다 하얀 병원 팔찌들이 대롱거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인데도 그것들은 일제히 옆으로 흔들리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김○희 / 2004. 05. 12 / 회수 완료]

[이○준 / 2004. 06. 30 / 폐기 대기]

가까이 보이는 이름표들은 대부분 글자가 번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젖은 손가락으로 벅벅 문지른 것처럼.

“여기 분위기 진짜 더럽네. 무슨 장례식장에 우산 건조장이라도 만들어둔 거야? 인테리어 감각 한번 독특하시구먼.”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일부러 툭 내뱉었다. 이현우는 대답 대신 권총 집의 단추를 풀었다.

“더 들어가면 위험해. 윤 소장님 이름이 뜬 건 함정일 가능성이 높아. 일단 퇴각해서 지원을 기다리자.”

“안 돼요. 이미 발자국이 번지고 있잖아요.”

내 말대로였다. 우리가 걸어온 길 뒤로 윤서하의 구두 굽 소리가 환청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통로 벽면에는 어느새 ‘윤서하’라는 석 자가 수성 사인펜으로 휘갈긴 것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보증인 변경 절차. 그 빌어먹을 시스템이 이미 서하 씨를 이 늪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통로 중간쯤, 낡은 병원 접수 창구처럼 생긴 목제 데스크가 나타났다. 그 위에는 최신형 키오스크가 어울리지 않게 박혀 있었다. 화면은 붉은색으로 점멸하며 차가운 기계음을 내뱉었다.

[경고: 현재 보증인 부재.]

[원보증인 ‘박철수’ 이탈 확인.]

[임시 보증인 ‘윤서하’ 승인 대기 중.]

“보증인?”

이현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보증인 변경 시, 기존 발생한 ‘이름 회수’ 비용 일체가 대리인에게 전가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이건 단순한 서류 절차가 아니었다. 누군가 내 대신 죽거나, 혹은 내 이름이 치러야 할 대가를 대신 짊어져야 한다는 뜻이었다. 20여 년 전 박철수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 귀밑에서 익숙한 지지직거리는 잔향이 터져 나왔다.

“서명하면… 정말 이 아이가 사는 겁니까?”

박철수의 목소리였다. 지금보다 훨씬 젊고, 훨씬 절박했던 시절의 목소리.

“상관없어. 내가 다 짊어질 테니까. 이름값이든 뭐든, 언젠가 누군가 치러야 한다면 그게 내가 되면 돼. 일단 살리고 봐요. 제발.”

박철수의 목소리에는 물기가 가득했다. 그가 협박을 당한 건지, 아니면 스스로 영혼을 판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건, 그가 저지른 그 ‘유예’의 유효기간이 이제 끝났다는 사실뿐이었다.

“아저씨.”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발밑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숙이자, 물웅덩이에 비친 내 그림자가 입을 뻥긋거리고 있었다. 2004년에 죽었어야 할 ‘진짜 강도윤’이었다.

“서하 누나 이름을 빌려. 그럼 아저씨는 살 수 있어. 아저씨가 살아야 이 지옥 같은 농담도 계속할 수 있잖아.”

아이는 감정 없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건 유혹이라기보다는 합리적인 제안에 가까웠다. 내가 살기 위해 누나를 제물로 바치라는, 아주 효율적인 거래.

“미안한데 꼬맹아. 난 남의 이름값으로 생명 연장할 만큼 얼굴이 두껍지 못해서 말이야. 피부 관리를 좀 덜 받았거든.”

나는 키오스크 화면으로 손을 뻗었다. 이현우가 내 팔을 잡으려 했지만, 내 손은 이미 주머니 속 병원 팔찌를 움켜쥐고 있었다.

팔찌의 바코드가 키오스크의 붉은 스캔 레이저에 닿으려는 찰나, 나는 손톱끝을 세워 팔찌의 바코드 한복판을 길게 찢어버렸다.

찌지직,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플라스틱 팔찌가 너덜거렸다.

[에러: 데이터 손상.]

[읽기 오류. 보증인 변경 절차를 일시 중단합니다.]

시스템이 비명을 지르듯 요란한 경고음을 울렸다. 화면이 지지직거리며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무슨 짓이야!”

이현우의 외침과 동시에 화면에 가려져 있던 로그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원보증인: 박철수]

[대리보관자: 제갈後(후)?]

글자가 깨져 보였다. ‘후’인지 ‘호’인지, 아니면 그 뒤에 다른 글자가 더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제갈’이라는 성씨만은 선명하게 뇌리에 박혔다.

“제갈…?”

내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통로 끝에 굳게 닫혀 있던 B-12호의 철문이 덜컥거리며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결코 들려서는 안 될 목소리가 들렸다.

“강도윤 씨.”

윤서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병실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수만 번 재생되어 닳고 닳은 테이프처럼, 혹은 이 공간에 영원히 박제된 기록처럼 메마른 음성이었다.

“지금 내 이름표 건드리지 말고… 제발 그냥 가요.”

나는 숨을 멈췄다.

“강도윤 씨, 이번엔 농담하지 말고 도망쳐요. 여긴… 대기실이 아니야.”

말이 끝나기도 전에 B-12 안쪽에서 수천 개의 우산이 일제히 펼쳐지는 굉음이 들려왔다. 우산 속에서 쏟아진 검은 빗물이 우리 발등을 덮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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