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5화. 폐기 장비함의 이름표
14-15화. 폐기 장비함의 이름표
제목: 14화. 폐기 장비함 B-04
분실물 보관함 뒤쪽은 사람이 숨으라고 만든 공간이 아니었다.
먼지, 녹, 누군가 십 년 전에 흘린 커피 냄새, 그리고 설명하기 싫은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한꺼번에 코를 찔렀다. 나는 그 좁은 틈에 몸을 구겨 넣은 채 숨을 죽였다. 숨을 죽인다고 해서 내가 대단히 은밀해지는 건 아니었다. 지금 내 몸은 이미 세상에서 반쯤 지워진 회색 상태였으니까.
문제는 한지율이었다.
지율 씨의 숨소리는 내 귀에 유난히 크게 들렸다. 후, 하고 삼키는 숨. 참으려다 새어 나오는 떨림. 던전에서 다 죽어가는 고블린이 마지막으로 뱉은 욕설보다 더 선명했다. 나는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손이 복사본 뭉치를 꽉 쥐고 있는 게 보였다.
‘아, 망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럴 때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멋진 작전이면 좋겠지만, 나는 F급이다. F급의 뇌는 위기 상황에서 대개 세 가지 중 하나를 한다. 도망칠까, 죽을까, 월세는 누가 내지.
복도 바깥에서 구둣발 소리가 멈췄다.
“출력물 회수.”
BG-04 요원의 목소리였다. 낮고 건조했다.
“공용 단말기 봉인. 민간인 노출 차단. 2층 관계자 전원 대피 구역으로 이동시켜.”
난폭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싫었다. 차라리 욕을 하고 총을 들이대면 ‘아, 악당이구나’ 하고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이놈들은 늘 매뉴얼을 읽듯 사람을 죽이려 했다. 정중한 살인미수. 협회답다. 고객 만족도 조사지만 항목이 전부 사망 원인인 느낌.
검은 장갑 낀 손들이 복도 바닥에 흩어진 출력물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내가 미친 듯이 뽑아 던진 로그 기록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임시 복구 태그], [대리 입력], [사망판정 갱신 요청] 같은 글자들이 요원들의 투명 파일 안으로 삼켜졌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소방대원 한 명이 젖은 장화로 복도 끝에 떨어진 종이 한 장을 밟고 지나갔다. 종이는 물기에 젖어 미끄러지더니 고장 난 커피 자판기 밑으로 쏙 들어갔다. 건물 관리자는 “아이고, 여기 물 새면 안 되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청소 도구함을 발로 밀었고, 그 밑으로 또 다른 출력물이 접혀 들어갔다.
나는 속으로 작게 환호했다.
좋아. F급의 위대한 작전명, ‘아무 데나 뿌리면 몇 장은 살아남는다’가 성공했다.
그때였다.
지율 씨가 숨을 삼켰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분실물 보관함 틈새, 지율 씨가 아까 밀어 넣은 신분증 복사본 하나가 축축한 먼지 위로 천천히 밀려 나오고 있었다. 낡은 보관함이 물기를 먹고 비틀어진 탓인지, 틈이 벌어지면서 종이가 아래로 떨어지려 했다.
그 복사본 가장자리에는 숫자가 있었다.
BG-TEMP-04-A-KDY-1124.
걸리면 끝이었다.
지율 씨가 손을 뻗으려 했다. 나는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움직이면 들킨다. 그녀는 살아 있는 사람이고, BG-04의 눈에는 너무 잘 보이는 사람이다.
“제가…”
그녀가 입술만 움직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할게.’
입 밖으로 낸 말인지, 머릿속에서만 한 말인지 나도 몰랐다. 요즘 내 목소리는 내 몸보다 더 늦게 도착했다. 말이 먼저 나가고 내가 따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한참 전에 겁먹은 뒤에야 목소리가 허공에서 지각 출근을 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끝이 흐려졌다.
처음에는 손톱 끝만 그랬다. 그다음엔 손가락 마디가, 손등이, 손목까지. 내 손은 분명 복사본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데, 복도 형광등 아래에서는 투명 비닐처럼 반쯤 비쳐 보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내 손이 종이를 통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야, 강도윤. 네 인생에서 손에 잡히는 게 월급 말고도 드물긴 했지만, 종이쪼가리까지 놓치면 좀 그렇잖아.’
나는 이를 악물었다.
손끝이 복사본 모서리에 닿았다.
닿았다기보다는, 물속에 손을 넣어 떠내는 느낌이었다. 종이의 감촉이 한 박자 늦게 손끝으로 올라왔다. 나는 그것을 겨우 집어 틈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손목까지 차갑게 비었다. 내 그림자가 바닥에서 떨어져, 젖은 먼지 위에 제대로 붙지 못하고 흔들렸다.
한지율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만은 선명했다. 뜨겁고, 아프고, 현실적이었다.
“도윤 씨, 손이….”
“괜찮아요.”
나는 웃으려 했다. 입꼬리가 제대로 올라갔는지는 자신 없었다.
“원래 F급은 존재감이 없어요. 이제 와서 시스템이 공식 인증해주는 것뿐이지.”
지율 씨는 웃지 않았다. 농담 실패. 별점 한 개. 하지만 그녀는 울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이를 악물고 보관함 안쪽을 더듬어 복사본 뭉치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근처에 있던 낡은 우산 하나를 끌어와 틈을 가렸다. 검은 우산이 아니라, 편의점에서 파는 싸구려 남색 우산이었다. 그래도 우산이라는 단어만 봐도 요즘은 위가 쓰렸다.
BG-04 요원이 바로 앞까지 왔다.
우리는 숨을 멈췄다.
검은 구두가 보관함 앞에서 멈췄다. 요원은 손전등으로 보관함 아래를 훑었다. 빛이 내 무릎을 지나갔다. 아니, 정확히는 내 무릎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나갔다.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지율 씨의 운동화 끝에 빛이 닿는 순간, 그녀의 어깨가 굳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 회색 몸이 그녀의 발끝을 가렸다.
빛이 잠깐 흔들렸다.
요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 시야가 비어 보이는데.”
내 심장이 없는 곳에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요원이 말했다.
“보류 대상 간섭 가능성. 직접 접촉 금지. 로그 먼저 회수합니다.”
보류 대상.
나를 말하는 거다. 이름도, 사람도 아니고 대상. 협회는 언제나 사람을 명사에서 빼는 데 능했다. 계약직, 실종자, 사망자, 보류 대상. 다음 단계는 아마 ‘기타’겠지. 나는 기타가 되기엔 노래도 못한다.
요원들은 더 깊이 들여다보지 않았다. 대신 공용 단말기에 붉은 봉인 테이프를 붙이고, 케이블을 뽑아 봉투에 넣었다. 한 명은 복도 끝 CCTV를 향해 손을 들어 화면을 가렸다. 또 다른 한 명은 건물 관리자에게 차갑게 말했다.
“협회 감식 절차입니다. 이 층은 오늘부터 임시 통제 구역입니다. 사진 촬영 금지. 질문 금지.”
“아니, 내 건물에서 물이 새는데 질문도 못 해요?”
관리자가 투덜댔다.
나는 그 투덜거림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세상은 가끔 정의감보다 누수 걱정으로 굴러간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우리 편이었다.
요원들이 복도 끝으로 이동하는 사이, 지율 씨가 내 귀 가까이에 속삭였다.
“정면 계단은 막혔어요. 비상계단도요.”
“그럼 남은 건 창문으로 뛰어내리기?”
“2층이에요.”
“F급은 2층도 높아요.”
“농담할 힘 있으면 따라와요.”
지율 씨는 보관함 뒤에서 먼저 빠져나왔다. 나는 그녀를 따라 움직이려다 잠깐 멈칫했다. 내 발이 바닥을 제대로 밟지 못했다. 발바닥 감각이 늦게 왔다. 몸이 한 박자씩 밀리는 기분. 내가 여기 있는지, 방금 전에 여기 있었는지, 곧 여기서 사라질 예정인지 구분이 안 됐다.
지율 씨가 복도 옆의 청소도구실 문을 열었다. 삐걱,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그녀는 바로 손잡이를 붙잡아 소리를 눌렀다. 눈치가 빨랐다. 겁에 질린 사람은 대개 몸부터 굳는데, 지율 씨는 겁먹은 채로도 손이 움직였다.
청소도구실 안에는 녹슨 양동이, 부러진 대걸레, 오래된 열쇠함이 있었다. 열쇠함은 자물쇠가 반쯤 부서져 있었고, 안쪽에 작은 금속 태그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가, 손끝이 다시 흐려지는 걸 보고 멈췄다.
“지율 씨가 봐요. 나는 지금… 터치가 불량이라.”
“사람한테 터치 불량이라고 하지 마요.”
그녀가 낮게 쏘아붙였지만, 손은 이미 열쇠들을 뒤지고 있었다. `B1 보일러실`, `옥상`, `공용 계량기`, `환기 점검구`. 그녀는 마지막 태그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열쇠고리에서 잔향이 튀었다.
─아이고, 또 지하야? 인간들은 꼭 숨기고 싶은 걸 아래에 둔다니까. 위에 두면 허리도 안 아프고 얼마나 좋아.─
늙은 경비원 같은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감았다. 잔향이 이어졌다.
─B-04는 폐기함이 아니야. 이름이 폐기지. 안에는 태그, 파손 장비, 회수품, 그리고 못 버린 것들이 들어가지. 죽은 놈 장비를 바로 버리면 보험이 시끄럽거든. 임시 복구 태그로 묶어두고, 확인 끝나면 진짜 폐기. 절차는 늘 사람보다 오래 살아.─
나는 목 안쪽이 바짝 말랐다.
“폐기 장비함 B-04.”
“네?”
“그냥 창고가 아니에요. 죽은 헌터 장비를 폐기하기 전에 신분 태그랑 같이 묶어두는 임시 보관함이에요.”
지율 씨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누가 그걸 이용해서… 산 사람을 죽은 사람처럼 처리한 거예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열쇠고리가 한 번 더 딸랑거렸다.
─B는 보류. 04는 회수 등급. 우연히 닮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은 편하지. 근데 세상에 편한 우연은 대개 함정이야.─
B-04.
BG-04.
머릿속에서 두 코드가 나란히 붙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질 나쁜 농담이었다. 그리고 나는 요즘 질 나쁜 농담을 들으면 대개 피를 흘렸다.
지율 씨가 환기 점검구 열쇠를 꽂았다. 낡은 철문이 작게 열렸다. 안쪽에서는 먼지와 뜨거운 공기, 그리고 지하에서 올라오는 기름 냄새가 밀려왔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지하 수리실 뒤편 환기 통로랑 이어질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아요?”
“D-17 이후로 도망칠 길부터 보는 버릇이 생겼어요.”
짧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도망칠 길부터 보는 사람. 살아남은 사람의 직업병. 나는 가볍게 대꾸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농담으로 덮기에는 너무 얇은 상처였다.
우리는 환기 점검구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통로는 좁았다. 먼지가 혀끝에 달라붙었다. 금속 벽면은 차갑고, 군데군데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지율 씨가 앞에서 열쇠를 쥐고 기어갔고, 나는 뒤에서 내 몸이 통로 사이로 새어나가지 않게 애쓰며 따라갔다. 이런 표현이 비유가 아니라는 점이 정말 싫었다.
나는 품속을 확인했다.
문태식의 녹음기. 투명 우산의 0원 영수증. 지율 씨가 일부 숨기고 남겨둔 복사본. 그리고 내 회색 신분증.
녹음기가 갑자기 치직거렸다.
[...B-04는... 버리는 함이 아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되살리는 함이다. 누가 먼저 태그를 잡느냐에 따라... 사람은 폐기품도 되고, 증거도 된다. 치직...]
“팀장님?”
내가 속삭였다.
녹음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낡은 테이프 감기는 소리만 짧게 났다. 문태식이 살아 있는지, 죽은 자의 잔향이 남은 건지, 아니면 협회 장비가 나를 놀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셋 중 뭐든 기분 나쁜 건 같았다.
지하로 가까워질수록 내 몸은 더 가벼워졌다. 좋은 의미가 아니었다. 가벼움은 자유가 아니라 삭제에 가까웠다. 누군가 내 이름을 아래에서 잡아당기는 느낌. 폐기 장비함 B-04 안쪽에서 내 이름표 원본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아니, 부르는 게 아니다.
비우고 있었다.
환기구 아래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지율 씨가 손을 들어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리는 납작 엎드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하 폐기실이었다.
수리점 뒤편의 좁은 공간. 벽에는 파손된 헌터 장비들이 비닐에 싸인 채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피인지 녹인지 모를 갈색 얼룩이 말라붙어 있었다. 한쪽 벽면에 금속 함들이 줄지어 있었다. A-01, A-02, B-03.
그리고 B-04.
그 함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어깨가 좁고, 젖지 않은 검은 우산을 접어 들고 있는 실루엣.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불빛이 일부러 그 사람만 피해 가는 것처럼 어둠이 들러붙어 있었다.
B-04 함의 손잡이 옆에는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0원 영수증.
투명 우산의 여자가 내게 건넨 것과 같은 형식이었다. 그리고 함 표식 아래, 지워진 듯 흐릿한 코드들이 보였다.
KDY.
그 옆에, 긁힌 글씨처럼 남은 세 글자.
MTS.
문태식.
나는 환기구 안에서 숨을 삼켰다.
그 순간 검은 우산의 실루엣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치 내가 거기 있다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작가의 말: 버린다고 적힌 함일수록, 안에는 아직 버리면 안 되는 이름이 들어 있습니다.
제목: 15화. 버리지 못한 이름표
환기구 안에서 내려다본 지하 폐기실은 사람을 불쾌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어둡고, 좁고, 낮았다. 천장 형광등은 반쯤 죽은 벌레처럼 깜빡거렸고, 바닥에는 마른 물자국인지 피자국인지 모를 갈색 얼룩이 눌어붙어 있었다. 벽에는 파손된 헌터 장비들이 비닐에 싸인 채 걸려 있었다. 찢어진 보호복, 금 간 고글, 손잡이만 남은 진동 나이프. 전부 한때는 누군가의 목숨값이었을 물건들이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폐기 장비함 B-04가 있었다.
그 앞에 검은 우산을 접어 든 실루엣이 서 있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한지율도 내 옆에서 몸을 납작하게 붙였다. 환기구 철판이 내 팔꿈치 밑에서 아주 작게 삐걱였다. 그 소리가 내 귀에는 대형 던전 붕괴 경보처럼 크게 울렸다. 사람은 겁먹으면 청력이 좋아진다. 문제는 판단력도 같이 좋아져야 하는데, 내 판단력은 보통 편의점 삼각김밥 유통기한만큼 짧았다.
“움직이지 마요.”
지율 씨가 입술만 움직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제대로 끄덕여졌는지는 모르겠다. 회색 상태의 내 몸은 점점 내 의사보다 시스템의 눈치를 더 보는 것 같았다.
검은 우산의 실루엣은 B-04 함을 열지 않았다.
그는, 혹은 그녀는, 함 옆에 붙어 있던 0원 영수증을 천천히 떼어냈다. 손끝이 길고 말랐다. 장갑을 꼈는지, 손가락 자체가 어둠인지 구분이 안 됐다. 영수증을 뗀 자리에 하얀 접착 자국이 남았다. 실루엣은 그것을 잠깐 바라보다가 주머니에서 다른 종이를 꺼냈다.
새 영수증이었다.
그것을 같은 자리에 붙였다.
나는 눈을 찡그렸다. 증거를 지우러 온 사람이라면 종이를 떼어 가고 끝냈을 것이다. 그런데 저건 바꿔 붙였다. 누군가 보라고.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보라고.
‘친절한 흑막 서비스인가. 별점은 나중에 주겠다. 살아 있으면.’
실루엣이 고개를 아주 조금 들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다고 느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시선만은 분명했다.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내 이름이 비어 있는 자리를 보고 있었다.
그때 지하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BG-04였다. 규칙적이고, 서두르지 않는 발소리. 사람을 잡으러 오는 발소리라기보다, 서류철을 보관함에 꽂으러 오는 발소리 같았다. 그래서 더 소름 끼쳤다.
검은 우산의 실루엣은 발소리를 듣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접은 우산 끝으로 B-04 함의 바닥을 한 번 톡, 두드렸다.
딱.
그 소리가 폐기실 전체에 번졌다. 나는 그 순간 잔향청취가 튀어나올까 봐 이를 악물었다. 다행히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침묵이 더 불길했다.
실루엣은 벽 그림자 사이로 미끄러지듯 사라졌다. 문을 열지도, 발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정말 사람이 맞긴 한가. 요즘 내 인생에는 ‘사람 맞나?’ 싶은 존재가 너무 많다. 월세 독촉 문자도 사람 같지 않긴 한데, 적어도 그쪽은 정체가 확실하다.
“내려가야 해요.”
지율 씨가 말했다.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요.”
“좋은 생각 찾다가 도윤 씨가 먼저 없어져요.”
그녀의 말은 짧았다. 그리고 정확했다. 그게 제일 아팠다.
우리는 환기구 덮개를 조심스럽게 밀었다. 녹슨 나사가 하나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지만, 지율 씨가 거의 반사적으로 잡아챘다. 그녀는 정말 이상한 재능이 있었다. 겁에 질린 상태에서도 손이 먼저 살 길을 찾았다.
내가 먼저 내려가려 했지만, 발끝이 철제 선반을 통과할 뻔했다.
“아, 잠깐.”
나는 몸을 뒤로 뺐다.
“지금 제 물리 엔진이 불안정합니다.”
“그게 농담할 상황이에요?”
“농담 아니면 울어요.”
지율 씨가 먼저 내려갔다. 그녀는 파손 장비 선반을 밟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착지 소리가 생각보다 작았다. 그다음 그녀가 양손을 들어 나를 받치려 했다.
“잡아요.”
“제가 통과하면요?”
“그럼 다시 잡을게요.”
이상하게 그 말이 믿겼다.
나는 몸을 내렸다. 순간 발이 허공을 밟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지율 씨의 손이 내 팔을 붙잡았다. 뜨거운 감각이 팔꿈치에서 어깨까지 번졌다. 그제야 내 몸이 바닥 쪽으로 무게를 되찾았다.
나는 비틀거리며 착지했다.
폐기실 공기는 환기구 안보다 더 끔찍했다. 탄 플라스틱 냄새, 오래된 피 냄새, 소독약 냄새, 그리고 젖지 않은 종이 냄새. 마지막 냄새에서 나는 투명 우산을 떠올렸다. 속이 뒤집혔다.
B-04 함은 사람 허리 높이만 한 금속 상자였다. 표면에는 낡은 흰색 페인트로 `B-04`가 찍혀 있었고, 그 아래에 여러 번 덧붙였다 떼어낸 라벨 자국이 남아 있었다. 가장 최근 라벨에는 흐릿한 글자가 보였다.
KDY.
그리고 긁혀 나간 자리 아래, 아주 작게.
MTS.
문태식.
나는 손을 뻗었다가 멈췄다. 손잡이에 닿기도 전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저 안에 내 이름이 있다. 내 이름표 원본. 나를 다시 시스템에 붙일 수 있는 앵커. 동시에 나를 완전히 폐기품으로 확정할 수도 있는 물건.
“잠깐만요.”
지율 씨가 내 앞을 막았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수리 공구함을 열었다. 작은 드라이버, 녹슨 핀셋, 절연 테이프, 얇은 철사. 그녀는 그것들을 놀랍도록 빠르게 골랐다.
“해본 적 있어요?”
“D-17 이후로 잠긴 문은 믿지 않기로 했어요.”
대답이 너무 담담해서 더 아팠다.
그녀가 잠금장치에 철사를 밀어 넣었다. 딸깍, 하는 소리가 났지만 함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손잡이에서 잔향이 튀었다.
─야, 살살 해. 나도 나이가 있어. 폐기함이라고 막 대하지 마. 여기 들어왔다 나간 이름들이 너희 월급명세서보다 많아. 물론 월급명세서는 대부분 슬프지.─
손잡이 목소리는 낡은 창고지기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더 들었다.
─폐기? 웃기고 있네. 폐기는 마지막 도장이지. 그전까지는 보류야. 신분 태그, 파손 장비, 사망 확인 전 임시 복구 앵커. 이름이 시스템에서 떨어지면 여기 있는 태그로 다시 붙인다. 반대로, 여기 있는 태그를 잘못 잡으면 죽은 사람 판정까지 같이 딸려와. 산 놈에게 죽은 놈 그림자가 붙는 거지. 아주 찝찝해. 세탁 안 된 우비처럼.─
나는 침을 삼켰다.
“이거… 복구 앵커예요.”
“앵커요?”
“이름이 시스템에서 떨어졌을 때 다시 붙이는 거. 근데 잘못 만지면 다른 사망 판정도 같이 딸려올 수 있대요.”
지율 씨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러면 MTS는….”
“말하지 마요.”
내가 먼저 끊었다.
말하면 사실이 될 것 같았다. 문태식 팀장의 이름을 여기서 꺼내면, 그가 정말 ‘폐기 예정’이라는 도장이 찍힐 것 같았다.
딸깍.
잠금장치가 풀렸다.
지율 씨가 숨을 들이켰다. 나는 함 문을 잡았다. 이번에는 손이 통과하지 않았다. 차가운 금속 감각이 손바닥에 제대로 박혔다. 그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뻔했다. 인간은 참 우습다. 손잡이 하나 제대로 잡는 것만으로도 살아 있다고 착각한다.
함 안에는 파손된 장비들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금이 간 협회 단말기, 검게 탄 신분증 케이스, 피가 말라붙은 장갑 한 짝, 번호표가 붙은 태그 조각들. 그 사이에 작은 금속 태그 하나가 붉은 봉인끈에 묶여 있었다.
KDY-TEMP-04-A-1124.
내 이름표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쾅.
세상이 순간적으로 다시 무거워졌다.
소리가 돌아왔다. 형광등이 윙윙대는 소리, 지율 씨 숨소리, 지하 계단에서 가까워지는 BG-04의 발소리, 내 심장 소리. 손끝의 감각이 돌아왔다. 회색으로 빠져나가던 몸이 잠깐 진해지는 느낌이었다.
살았다.
아니, 완전히는 아니다. 그래도 방금까지 낭떠러지에 발가락만 걸치고 있던 상태에서 한 발 뒤로 물러난 느낌이었다.
그 순간, 옆에 있던 MTS 태그 조각이 떨렸다.
치직.
내 품속 녹음기가 같이 울었다.
[...같이 꺼내지 마라.]
문태식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너무 비슷해서, 나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먼저 네 이름부터 붙여. 내 건... 아직 아니다. 잘못 잡으면 둘 다 끌려간다. 치직... 도윤아, 욕심내지 마라. 증거는 살아 있는 놈이 들고 나가야 증거다.]
“팀장님….”
나는 MTS 조각을 바라보았다. 작고 검게 탄 금속 조각. 저걸 두고 가면 문태식을 버리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나를 귀찮아하면서도 늘 마지막에는 살 길을 알려줬다. 계약직 시절, 내가 던전 토사물 치우다 쓰러졌을 때도 “죽을 거면 퇴근 찍고 죽어라” 하면서 내 멱살을 잡아끌었다. 인간미가 개판이었지만, 그래도 사람이었다.
지율 씨가 내 손목을 잡았다.
“안 돼요.”
“하지만…”
“위치 봤어요. 코드도 봤고요. 지금 꺼내면 도윤 씨까지 같이 끌려간다면서요.”
“그렇다고 두고 가요?”
“살아서 다시 와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래도 눈은 피하지 않았다.
“죽어서 같이 폐기되는 건 구조가 아니에요.”
그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못 했다.
지하 폐기실 문 밖에서 무전 소리가 들렸다.
“B구역 진입. 폐기함 확인.”
BG-04가 바로 앞이었다.
나는 KDY 태그를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MTS 조각의 위치를 눈에 새겼다. 오른쪽 뒤편, 탄 장갑 아래, 금이 간 단말기 옆. 나는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지율 씨가 함 문을 닫았다.
철컥.
그 순간, 함 안쪽에서 작은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위잉.
“설마.”
나는 욕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삼켰다. 함 하단의 좁은 배출구에서 새 라벨 한 장이 밀려 나왔다. 지율 씨가 그것을 낚아챘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는 라벨을 빼앗듯 받아 들었다.
[다음 폐기 예정]
윤서하 / YSH-7711-2034
나는 숨을 잊었다.
YSH-7711-2034.
지하 주차장 입차 기록에 찍혀 있던 윤서하의 코드. 내가 알고 있던 진짜 윤서하의 식별코드와 한 자리가 달랐던 그 번호. 가짜인지, 복제인지, 혹은 이미 폐기 예정으로 올라간 누군가의 이름인지 알 수 없는 코드.
폐기실 문 손잡이가 돌아갔다.
BG-04가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KDY 태그를 쥔 주먹에 힘을 줬다. 방금 되찾은 내 이름이 손바닥을 아프게 눌렀다. 그리고 그 아픔이, 이상하게도 나를 안심시켰다.
아직 아프다.
그러니까 아직 살아 있다.
작가의 말: 이름표 하나를 되찾았더니, 다음으로 버려질 이름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 작가의 말
버린다고 적힌 함에서 이름표 하나를 되찾았더니, 다음 폐기 예정 이름이 따라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