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7화. 재분류된 이름표
16-17화. 재분류된 이름표
제목: 16화. 다음 폐기 예정은 윤서하
철컥.
폐기실 문손잡이가 돌아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두 손을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왼손에는 KDY 태그, 오른손에는 방금 B-04가 토해낸 따끈한 라벨. 인간은 죽을 것 같을 때 중요한 물건을 품에 넣는다고 한다. 나는 지금 중요한 물건 두 개와 한지율 한 명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팔이 두 개뿐이었다. F급의 한계는 늘 물리적으로 온다.
라벨은 아직 열이 식지 않았다.
[다음 폐기 예정]
윤서하 / YSH-7711-2034
그 숫자 하나가 목젖에 걸렸다. 지하 주차장 입차 기록에 찍혀 있던 윤서하의 코드. 내가 알고 있던 윤서하의 식별코드와 한 자리 다른 번호. 한 자리. 주민등록번호 틀리면 은행 앱도 안 열리는데, 협회 시스템에서는 사람 하나가 폐기 예정으로 밀려나는 모양이었다.
“버려요.”
한지율이 속삭였다.
말은 낮았지만 손은 빨랐다. 그녀는 이미 바닥에 굴러다니던 절연 테이프와 찢어진 보호복, 금 간 고글을 끌어모으고 있었다. 눈은 문을 보고, 손은 도망칠 시간을 만들고 있었다.
“추적 라벨일 수 있어요. 방금 나온 거잖아요. 도윤 씨 손에 있는 순간 위치 찍힐 수도 있다고요.”
“못 버려요.”
“또 그 말.”
“저도 제가 싫어요.”
나는 라벨을 접어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종이가 피부에 닿자 소름이 일었다. 따뜻해서가 아니었다. 종이 냄새가 너무 깨끗했다. 이 지하 폐기실에서 깨끗한 건 대개 사람이 만지면 안 되는 것들이었다.
문틈이 벌어졌다.
한지율이 보호복 뭉치를 문 앞에 차 넣고, 봉인 테이프를 선반 다리에 두 번 감았다. 당장 막을 수 있는 바리케이드라기보다 ‘넘어지면 귀찮은 쓰레기 더미’에 가까웠다. 하지만 세상은 종종 귀찮음 때문에 늦어진다. 협회도 예외는 아니길 빌었다.
철문이 밀렸다.
테이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끈적한 소리를 냈다. 파손 장비들이 우르르 무너졌다. 금 간 고글 하나가 문틈으로 튀어 올라 BG-04 요원의 부츠 앞에 떨어졌다.
“B-04 출력 라벨 회수.”
방독면 뒤의 목소리가 말했다.
사람이 아니라 절차가 말하는 것 같았다. 화도 없고, 흥분도 없고, ‘좋은 하루 되세요’와 같은 온도로 사람을 정리하는 목소리.
“보류 대상 흔적 확인.”
두 번째 요원이 탐지기 같은 물건을 들어 올렸다.
“민간 협조자 분리. 접촉 최소화. 신분 기록 오염 방지.”
세 번째 요원의 시선이 한지율에게 꽂혔다.
그 순간 지율 씨의 어깨가 굳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바닥에 남은 봉인 테이프 끝을 잡아당겨 선반 하나를 더 쓰러뜨렸다.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폐기실 안을 찢었다.
“뒤요.”
그녀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장비 반출구. 저쪽.”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봤다. B-04 뒤편, 벽과 선반 사이에 낮은 철제 덮개가 있었다. 오래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파손 장비 반출 전용`. 인간은 반출 금지라는 말은 잘 지키지 않지만, 반출 전용이라는 말에는 이상하게 희망을 품는다.
왼손의 KDY 태그가 그때 달아올랐다.
“윽.”
손바닥 안쪽을 인두로 누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태그 표면의 작은 글자들이 피부 안으로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강도윤. 사망 판정 보류. 임시 복구 대기. 체납 없음. 체납 없음? 야, 이건 오류 아니냐? 월세 냄새가 나는데?─
잔향이 튀었다.
반가워야 했다. 내 능력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데 이번 잔향은 웃기면서도 너무 차가웠다. 내 이름 옆에 붙은 ‘사망’이라는 단어가, 농담 뒤에 숨어 칼처럼 반짝였다.
─앵커 잡았으면 붙어. 근데 조심해라. 네 이름만 붙는 게 아니야. 여기 스친 죽음들이 다 손가락 걸고 따라오려고 한다. 단체 예약 손님처럼. 민폐지. 죽어서도 민폐야.─
손바닥이 쿡쿡 뛰었다. 나는 잠깐 진해졌다. 내 그림자가 바닥에 제대로 붙었다. 동시에 귀 뒤쪽에서 낯선 숨소리들이 겹쳤다. 파손된 보호복의 주인, 금 간 고글의 주인, 탄 신분증 케이스의 주인. B-04를 지나간 이름들이 내 이름 끄트머리에 손을 얹는 느낌이었다.
복구 앵커.
살려주는 밧줄이면서, 잘못 잡으면 시체들이 같이 매달리는 밧줄.
“도윤 씨.”
한지율이 내 손등을 세게 눌렀다.
“지금 쓰러지면 제가 들고 못 가요. 솔직히 말해서 좀 무거워 보여요.”
“사람이 위기일 때 할 말이에요?”
“살아 있으면 나중에 상처받아요.”
좋은 말이었다. 지금 상처받을 여유가 있다는 건 아직 죽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우리는 반출구 쪽으로 움직였다. 지율 씨가 덮개 옆의 녹슨 핀을 뽑으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드라이버를 틈에 박아 넣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딱, 하고 핀이 튀었다. 덮개가 아래로 떨어지며 먼지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먼저 들어가요.”
“제가요?”
“태그 들고 있는 사람부터요.”
“제가 통로에 끼면요?”
“그럼 밀어요.”
“되게 담백하게 말하네요.”
“지금 감성적인 구조 멘트 할 시간이 없어요.”
맞는 말이었다. 나는 낮은 통로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문제는 내 몸이 다시 흐려지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어깨는 벽을 통과할 듯 가벼운데, KDY 태그가 든 왼손만 돌덩이처럼 무거웠다. 세상에서 제일 이상한 체중계가 있다면 지금 내 상태를 보고 ‘존재감 37킬로, 죄책감 82킬로’쯤 찍었을 것이다.
“아, 잠깐. 나 지금 반투명인데 한 군데만 고체예요.”
“어디가요?”
“자존심 빼고 전부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허리가 통로 가장자리에 걸렸다. 흐려진 몸은 빠져나가려 하고, KDY 태그를 쥔 손은 뒤쪽 세계에 못 박힌 것처럼 끌려갔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아팠다. 정말 아팠다. 그 통증이 웃길 정도로 반가웠다.
아직 아프다.
그러니까 아직 여기에 있다.
뒤에서 BG-04 요원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보류 대상 확인.”
탐지기에서 낮은 삐 소리가 났다.
“대상명 갱신.”
나는 숨을 멈췄다.
“강도윤.”
처음이었다. 그들이 나를 ‘보류 대상’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렀다.
구조처럼 들리지 않았다. 사형수가 마지막으로 본명을 확인받는 절차 같았다. 이름을 되찾는다는 게 이렇게 무서울 줄은 몰랐다. 사람은 이름으로 살아나기도 하지만, 이름으로 정확히 죽기도 한다.
한지율이 내 발목을 잡아당겼다.
“힘 빼요!”
“힘 빼면 제가 어디로 빠질지 몰라요!”
“그럼 힘 주지 말고 버텨요!”
“그게 무슨 철학이에요!”
그녀는 대답 대신 내 발목을 비틀어 통로 각도에 맞췄다. 고통이 허리에서 목덜미까지 올라왔다. 나는 거의 기어이듯 앞으로 빠져나갔다. 뒤이어 지율 씨가 반출구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요원의 장갑 낀 손이 덮개 틈으로 들어왔다.
한지율은 망설이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아까 챙긴 절연 테이프 뭉치를 꺼내 덮개 안쪽 톱니에 밀어 넣었다. 손이 거의 잡힐 뻔했다. 장갑 낀 손가락이 그녀의 소매 끝을 스쳤다.
“민간 협조자 확보.”
요원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울렸다.
지율 씨가 이를 악물고 몸을 뒤로 뺐다. 소매가 찢어졌다. 테이프가 톱니에 엉키며 반출구 덮개가 반쯤 닫혔다. 요원의 손이 빠져나갔다. 쇠가 긁히는 소리가 뒤를 막았다.
우리는 어둡고 낮은 통로를 기어갔다. 바닥은 기름때로 미끄러웠고, 벽에는 오래된 스티커 조각들이 말라붙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폐기실의 악취가 멀어지고, 대신 지하 기계실의 뜨거운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한참을 기어 나온 뒤에야 통로가 끝났다.
우리는 낡은 보일러 뒤편으로 굴러떨어졌다. 나는 바닥에 엎어진 채 헐떡였다. KDY 태그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아까처럼 나를 태우지는 않았다. 내 손은 선명했다. 손톱 밑의 먼지도, 손바닥에 눌린 태그 자국도 보였다.
“살았네요.”
내가 말했다.
“아직요.”
한지율은 바로 내 안주머니를 가리켰다.
“라벨 봐요. 추적이면 지금 버려야 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라벨을 꺼냈다. 앞면의 윤서하 이름은 그대로였다. 종이는 이상하게 식어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라벨을 뒤집었다.
뒷면 아래쪽,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글씨가 있었다.
`대리 입력자: MTS`
나는 숨을 삼켰다.
문태식.
B-04 안에 두고 온 탄 태그 조각. 같이 꺼내지 말라고 했던 목소리. 살아 있는지, 죽은 건지, 아니면 시스템에 이름만 남아 누군가의 손가락처럼 움직이는 건지 알 수 없는 사람.
윤서하를 폐기 예정으로 올린 게 문태식이라는 뜻일까.
아니면 문태식이 우리에게 보라고 일부러 남긴 마지막 경고일까.
라벨이 손끝에서 아주 작게 바스락거렸다.
─대리 입력자는 책임자가 아니야. 도장 찍은 손가락이지. 근데 손가락도 피는 묻어. 영수증도 그 정도는 안다, 인간아.─
나는 라벨을 접지 못했다.
한지율이 내 얼굴을 보더니 낮게 물었다.
“문태식 팀장님 이름이에요?”
나는 대답 대신 KDY 태그를 더 세게 쥐었다. 방금 되찾은 내 이름이 손바닥을 눌렀다. 안정된 건 잠깐이었다. 이제 내 이름 옆에 윤서하의 가짜인지 진짜인지 모를 코드와, 문태식의 대리 입력 기록이 붙었다.
살아난 기분이 아니라, 더 정확한 표적이 된 기분이었다.
그때 보일러실 낡은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하 B구역 임시 봉인. 보류 대상 강도윤, 재분류 절차 개시.]
내 이름이 건물 전체에 울렸다.
나는 웃음도 욕도 아닌 숨을 뱉었다.
“좋네요. 드디어 협회가 제 이름을 기억해줬어요.”
한지율이 나를 보았다.
“기뻐할 일이 아니죠?”
“네.”
나는 라벨 뒷면의 세 글자를 다시 보았다.
MTS.
“근데 원래 제 인생에서 이름이 불리는 순간은 대개 야근 시작이었거든요.”
보일러실 밖 복도에서 경보등이 붉게 돌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이름을 되찾았더니, 이번에는 그 이름으로 사냥이 시작됐습니다.
제목: 17화. 재분류 절차 개시
건물 스피커가 내 이름을 불렀다.
[지하 B구역 임시 봉인. 보류 대상 강도윤, 재분류 절차 개시.]
이름을 되찾자마자 건물 전체에 수배 방송이 깔렸다. 인생이란 참 친절하다. 잃어버렸을 때는 아무도 안 찾아주더니, 다시 주워오자마자 반납하라고 난리다.
보일러실 천장의 경보등이 붉게 돌았다. 불빛이 낡은 배관 위를 핥고, 기름때 낀 바닥을 지나, 내 손바닥에 눌린 KDY 태그 위에서 멈칫거렸다. 태그는 아직 뜨거웠다. 사람 이름표가 손난로 기능까지 지원하는 건 처음 알았다. 별로 고맙진 않았다.
한지율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녀는 내 안주머니에서 윤서하 라벨을 꺼내 자기 점퍼 안쪽에 밀어 넣었다. 손놀림이 너무 빨라서 소매치기에게 사과해야 할 수준이었다.
“이건 제가 들고 있을게요.”
“제가 방금 목숨 걸고 챙긴 건데요.”
“그래서 뺏는 거예요. 도윤 씨는 목숨 걸고 챙긴 걸 다시 목숨 걸고 떨어뜨리는 타입이라서.”
반박하고 싶었지만, 지난 몇 시간의 내 행적이 증거 자료로 너무 빵빵했다.
지율 씨는 보일러실 한쪽을 가리켰다. 먼지가 두껍게 앉은 철제 책상 위에 낡은 단말이 있었다. 협회 로고가 반쯤 벗겨져 있었고, 슬롯 옆에는 작은 글씨로 `폐기망 보조 인증`이라고 적혀 있었다.
“저기에 KDY 태그를 꽂아야 해요.”
“좋은 소식처럼 말하지 말아줄래요?”
“안 꽂으면 도윤 씨는 다시 흐려져요. 방금 태그를 잡아서 버틴 거지, 아직 시스템에 붙은 게 아니니까.”
“꽂으면요?”
“위치가 뜨겠죠. 협회 폐기망에 직접 물려 있으니까.”
선택지가 단순했다. 안 꽂으면 내가 사라지고, 꽂으면 내가 잡힌다. 고르라면 둘 다 싫다. 인간은 보통 메뉴판에서 싫은 걸 빼고 고르는데, 협회는 왜 늘 싫은 것만 세트로 파는지 모르겠다.
보일러실 문 밖에서 금속음이 났다.
철컥. 철컥.
BG-04가 봉인 장치를 거는 소리였다.
“안에 있는 보류 대상 강도윤, 민간 협조자 한지율. 청취 확인.”
문 너머의 목소리는 스피커보다 가까웠고, 사람보다 차가웠다.
“지하 B구역은 봉인됐다. 외부 출입구와 통신망은 차단 중이다. 단말 회수 및 재분류 절차에 협조하라. 민간 협조자는 지금 분리되면 정상 참작 가능.”
정상 참작.
그 말이 제일 기분 나빴다. 사람을 분리해놓고 나중에 서류에 ‘협조적이었음’ 같은 칸을 체크하겠다는 뜻이다. 협회는 늘 그렇게 사람을 작게 접었다. 접고, 분류하고, 파일에 넣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녹슨 배관, 바늘이 떨리는 압력계, 온도계, 빛바랜 경고 스티커. 보일러실은 오래된 기계들의 장례식장 같았다. 그런데 내 귀에는 그 장례식장이 시끄러웠다.
─야, 왼쪽 밸브 좀 보라고. 나 3년째 과로야. 고압 주의 스티커 붙이면 뭐 해. 주의만 하고 수리는 안 하는데.─
─압력 빼. 지금 안 빼면 터진다. 물론 터지는 건 내 일이 아니긴 한데, 터지고 나면 다들 내 탓 하더라. 인간들 특기지.─
─재분류? 오랜만에 듣네. 그거 체포 아니야. 체포는 그래도 사람한테 하는 거고. 재분류는 보류된 놈을 생존자, 폐기품, 증거물 중 하나로 박아 넣는 거야. 생존자면 복구, 폐기품이면 소각, 증거물이면 봉인. 셋 다 서류상으로는 깔끔하지. 당하는 쪽 기분은 모르겠고.─
메인 보일러의 잔향은 퇴직 앞둔 공무원처럼 말했다. 나는 목이 말라졌다.
“증거물도 선택지래요.”
내가 말했다.
한지율의 얼굴이 굳었다.
“영구 봉인 쪽이겠네요.”
“지율 씨는 왜 그런 말을 그렇게 빨리 알아들어요?”
“살아남으려면 나쁜 말부터 빨리 알아들어야 해서요.”
그녀는 보일러실 배관을 훑었다. 눈이 문, 단말, 압력계, 스팀 배출 밸브를 차례로 지나갔다. 그리고 결정했다. 정말 결정하는 소리가 들리는 사람처럼, 숨을 한 번 끊고 나를 봤다.
“농담 그만하고 태그 꽂아요.”
“위치 뜬다면서요.”
“시야는 제가 막아요. 위치는 어차피 떴어요. 지금은 도윤 씨가 사라지지 않는 게 먼저예요.”
“그 말 되게 감동적인데, 끝이 ‘사라지지 않는 게 먼저’라서 장례식장 문구 같아요.”
“꽂아요.”
네. 무서운 사람 말은 잘 들어야 한다.
나는 단말 앞으로 갔다. KDY 태그를 슬롯 앞에 대자 손바닥이 다시 타들어 갔다. 태그가 나를 붙잡는 건지, 내가 태그를 붙잡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숨을 참고 밀어 넣었다.
딸깍.
그 순간 한지율이 스팀 배출 밸브를 돌렸다.
치이이이익!
하얀 증기가 보일러실을 삼켰다. 뜨거운 김이 얼굴을 때렸다. 경보등의 붉은빛이 증기 속에서 번져 피 묻은 안개처럼 흔들렸다. 문 밖에서 BG-04 요원들이 동시에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시야 차단. 내부 압력 상승.”
“민간 협조자 밸브 조작 확인.”
“봉인 유지. 단말 우선 회수.”
그들은 놀라지도 않았다. 사람이 당황해야 할 순간에도 저놈들은 절차를 읽었다. 그게 제일 무서웠다.
단말이 낮게 울었다.
내 머릿속에 화면 같은 것이 열렸다. 실제 화면은 먼지 낀 녹색 글자 몇 줄뿐이었겠지만, 내 잔향청취는 그것을 목소리로 바꿔 들려줬다.
─KDY 원본 태그 확인. 데이터 손상률 45%. 생존자 인증 코드 누락. 재분류 대기.─
심장이 내려앉았다.
─강도윤. 선택 대기. 생존자. 폐기품. 증거물.─
“야, 선택지가 왜 다 협회 취향이냐.”
나는 이를 악물었다. 태그가 손가락을 타고 팔뚝까지 뜨겁게 올라왔다. 내 몸은 잠깐 선명해졌다. 대신 목덜미 뒤쪽으로 얼음 같은 감각이 붙었다. ‘증거물’이라는 단어가 등 뒤에서 냉동고 문처럼 열렸다.
그때 한지율의 주머니 속에서 윤서하 라벨이 바스락거렸다.
작은 종이가 내 능력에 걸렸다.
─YSH-7711-2034. 대리 슬롯. 이름은 윤서하. 대상은 공란. 공란은 편하지. 아무거나 넣을 수 있거든. 쓰레기봉투도 이름표 붙이면 사유재산이 되는 세상인데, 사람은 오죽하겠어.─
나는 숨을 삼켰다.
윤서하가 폐기 확정이라는 뜻이 아닐 수 있다. 누군가 윤서하의 이름을 덮어씌워, 다른 대상을 폐기하려고 만든 빈 칸. 아니면 반대로, 진짜 윤서하를 숨기기 위해 가짜 폐기 예정자를 세워둔 장치.
확정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었다.
이 라벨은 버리면 안 된다.
단말이 다시 울었다.
─생존자 인증을 진행하면 비인가 라벨 데이터는 소각됩니다. 재분류 충돌 방지. 아주 깔끔하지? 깔끔한 건 대개 누군가를 지운 뒤에 생겨.─
“하.”
웃음이 나왔다. 진짜 웃겨서가 아니라, 웃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내 완전 복구를 먼저 하면 윤서하 라벨의 뒷면 데이터가 날아간다. 라벨 데이터를 복사하면 내 재분류는 밀리고, 증거물로 굳을 수 있다.
내 이름이냐, 윤서하의 단서냐.
정답은 쉬웠다. 당연히 내 이름이다. 나는 성자도 아니고, S급도 아니고, 보험료 밀린 F급이다. 사람은 일단 살아야 한다. 살아야 후회도 하고, 월세도 내고, 치킨도 시킨다.
그런데 손이 말을 안 들었다.
“지율 씨, 복사할 수 있어요?”
한지율이 나를 쳐다봤다. 증기 때문에 얼굴이 흐렸지만, 눈만은 선명했다.
“도윤 씨 복구가 밀릴 거예요.”
“알아요.”
“증거물로 잡힐 수도 있고요.”
“그 말은 모르는 척하고 싶었는데요.”
그녀는 욕을 삼킨 얼굴로 주머니에서 작은 복사 장치를 꺼냈다. 휴대폰처럼 생긴 낡은 장비였다. D-17 이후로 잠긴 문을 믿지 않게 됐다는 사람이 들고 다니기 딱 좋은 물건.
“반만 해요.”
“반만 살아 있는 건 이미 제 전문이에요.”
나는 KDY 태그를 슬롯에서 아주 조금 빼냈다. 단말의 울림이 흔들렸다. 머릿속에서 ‘생존자’ 글자가 멀어지고, ‘증거물’이라는 단어가 가까워졌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한지율이 복사 장치를 보조 포트에 꽂았다.
“지금.”
나는 윤서하 라벨의 잔향을 붙잡았다. 종이의 냄새, 잉크의 열, 뒷면에 찍힌 MTS 세 글자의 압력. 그것들을 억지로 끌어내 복사 장치 쪽으로 밀었다. 말이 밀었다지, 느낌은 내 이빨을 하나씩 뽑아 USB에 저장하는 쪽에 가까웠다.
─경고. 사용자 강도윤 재분류 지연. 증거물 확률 상승.─
“그 확률 좀 입 다물라고 해요.”
“말하지 말고 버텨요.”
문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BG-04가 봉인을 해제하고 들어오려는 중이었다. 스팀 속에서 손전등 불빛들이 길게 갈라졌다.
─복사 31%. 48%. 62%.─
내 시야가 검게 좁아졌다. KDY 태그를 반쯤 뺀 탓인지 몸이 다시 흐려졌다. 손가락 끝이 투명해지고, 발바닥 감각이 늦게 따라왔다. 그래도 복사 장치의 작은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79%. 91%.─
“조금만 더.”
한지율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그녀도 떨고 있었다.
쾅!
보일러실 문이 안쪽으로 밀렸다. 증기 사이로 검은 방독면들이 나타났다.
“단말 접속 확인.”
“보류 대상 강도윤, 증거물 분류 전환 가능성 상승.”
“민간 협조자 확보.”
마지막 말과 동시에 요원 하나가 지율 씨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KDY 태그를 다시 슬롯에 밀어 넣었다.
딸깍.
전기가 끊기는 소리가 났다. 단말 화면이 꺼지고, 보일러실 조명이 한 번에 죽었다. 경보등만 붉게 돌았다. 내 몸은 바닥으로 무겁게 떨어졌다. 완전 복구는 아니었다. 그래도 사라지지는 않았다.
복사 장치가 짧게 삐 울었다.
한지율이 그것을 낚아채 내 손에 쥐여줬다.
“됐어요.”
나는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봤다. 글자가 깨져 있었지만 마지막 줄은 선명했다.
[YSH 원본 위치: S급 수사협조관 대기실]
숨이 멎었다.
윤서하의 진짜 태그가 그녀 본인에게 있는 게 아니다. 현장에도, 지하 주차장 기록에도, 폐기함에도 없다. 협회 내부, S급 수사협조관 대기실. 윤서하가 일하는 바로 그곳. 아니, 윤서하가 ‘윤서하’로 인정받아야 하는 곳.
손전등 불빛이 내 얼굴을 비췄다.
“보류 대상 강도윤.”
BG-04 요원이 말했다.
“확보.”
나는 복사 장치를 주먹 안에 숨겼다. KDY 태그는 여전히 뜨거웠고, 내 이름은 아직 반쯤만 붙어 있었다. 하지만 윤서하의 원본 위치가 손안에 있었다.
살아난 건 아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지워지기 전에 먼저 훔쳤다.
작가의 말: 복구를 반쯤 포기한 대신, 윤서하의 이름이 갇힌 방의 주소를 얻었습니다.
✦ 작가의 말
이름을 되찾는 순간, 사냥은 더 정확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