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3화. 투명 우산과 내 이름표
제목: 12화. 투명 우산의 주인
요란한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지하 주차장에서 터진 스프링클러 덕분에 지상 출입구 부근은 매캐한 연기와 섞인 눅눅한 물 냄새로 가득 찼다. 대피하는 사람들의 비명과 웅성거림, 소방관들의 고함소리가 한데 뒤섞여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그 아수라장의 한복판, 나는 멍하니 서서 내 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윤서하.
분명 윤서하의 얼굴이었다. 칼로 잰 듯한 단발머리, 오만한 눈빛, 심지어 코끝에 걸린 작은 점까지. 목소리마저 똑같았다. 하지만 그녀가 들고 있는 것은 젖지 않는 검은 우산이 아니었다. 비가 오지도 않는데, 그녀의 손에는 종이처럼 마른 소리를 내는 투명 우산이 단단히 쥐여 있었다.
"강도윤 씨, 아직 회색이네요. 다행이다."
그녀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 미소는 윤서하의 것보다 훨씬, 아주 훨씬 더 기괴했다.
"…누구십니까?"
내 목소리가 떨렸다. 이건 겁에 질려서가 아니다. 그냥, 음, 에어컨 바람이 너무 강해서 그런 거다. 그래,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찬바람이 불어서.
"저를 보고도 그런 질문을 하시다니, 서운하네요."
여자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또각, 하고 울렸다. 윤서하의 그것보다 반 박자 빠른, 경쾌하지만 신경을 긁는 소리였다.
"윤서하… 팀장님?"
내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을 때, 여자는 대답 대신 우산 끝으로 땅바닥을 툭툭 쳤다.
"지금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게 편하죠."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자기가 윤서하라는 건지, 아니면 그냥 윤서하 코스프레를 하고 있다는 건지. 모호한 대답은 미스터리물의 전형적인 클리셰지만, 막상 당해보니 짜증만 솟구쳤다.
"도윤 씨, 이 여자… 이상해요. 가요, 얼른!"
옆에 있던 한지율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지율은 여자의 투명 우산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우산… D-17 때 났던 그 냄새가 나요. 바싹 마른 종이 냄새."
지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D-17. 그 단어가 나오자 한지율의 손이 더 차가워졌다. 나는 쉽게 발을 뗄 수 없었다. 이 여자는 내 이름이 '회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머, 지율 씨도 참. 겁이 많으시네."
여자는 비웃는 듯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강도윤 씨, 겁먹지 마세요. 전 당신을 해치러 온 게 아니니까."
"그럼요? 팬클럽 창단식이라도 하러 오셨나?"
나는 빈정거렸다. 공포를 버티는 나만의 방식이었다. 농담이라도 안 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울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여자는 내 농담을 가볍게 무시하고 손에 든 투명 우산을 요리조리 살폈다.
"이 우산, 참 예쁘지 않아요? 투명해서 세상이 다 보이죠."
나는 그녀가 우산을 만지작거리는 순간, 본능적으로 잔향청취 능력을 가동했다. 저 우산, 분명 예사 물건이 아니다.
사각… 사각…
우산 손잡이에서 기분 나쁜 종이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내 귓가를 때렸다.
검은 우산은 젖지 않는다. 투명 우산은 젖은 척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냥 존재할 뿐, 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우산 주제에 철학적인 척은.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지만 잔향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첫 호출자는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니라, 이름을 비우는 사람.
…이름을 비우는 사람? 문태식의 녹음기에서 들었던 '첫 호출자'라는 단어와 연결되는 실마리였다. 내 이름을 협회 서버에서 '비운' 놈, 그놈이 바로 첫 호출자라는 뜻인가?
"시간이 별로 없네요."
여자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당신을 회수하러 온 게 아니에요. 아직 '흰색'이 되지 않게, 잠깐 시간을 벌어주러 온 거죠."
"시간을 벌어줘요? 왜요? 제가 너무 잘생겨서 차마 죽이기 아까웠나요?"
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말투는 선의인지 협박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착각하지 마세요. 당신이 완전히 지워지면, 협회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먼저 찾아올 테니까. 그게 귀찮거든요."
'다른 곳'이라니. 협회 말고 또 다른 세력이 있다는 건가? 미스터리 요소를 자꾸 추가하지 마, 이 여자야! 내 뇌 용량은 F급이라고!
그때, 지하 출입구 쪽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BG-04 팀원들이었다. 그들은 스프링클러 물에 젖어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눈빛만은 살기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쏟아져 나오는 시민들과 소방대원들 때문에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절차와 규정을 중시하는 놈들이니, 이 아수라장 속에서 대놓고 나를 체포하긴 무리일 터였다.
그들은 단말기를 두드리며 나를 찾으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버젓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를 보지 못하는 듯했다. 내 이름이 회색이라서, 투명 인간 취급을 받고 있는 건가?
이 회색 상태가 은신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다. 이 군중 속을 틈타 도망치면, 저놈들도 나를 쉽게 찾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한지율이었다. 그녀는 회색이 아니다. 내가 그녀를 놓고 도망치면, 그녀만 놈들에게 잡힐 것이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나 혼자 살 것인가, 아니면 지율을 데리고 같이 도망칠 것인가.
"도윤 씨… 어떡해요?"
지율이 내 팔을 꽉 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F급 헌터 주제에, 무슨 영웅주의냐고. 하지만 억울하게 잡혀갈 그녀를 모른 척할 순 없었다. 나는 겁쟁이지만, 나쁜 놈은 아니니까.
"걱정 마, 지율 씨. 이 F급 헌터님이 지켜줄 테니까."
나는 지율에게 억지 윙크를 날렸다. 지율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조금은 안심한 듯했다.
"자, 이건 선물이에요."
투명 우산의 여자가 내게 작은 종이 영수증 같은 것을 내밀었다. 평범한 편의점 영수증처럼 보였다. 나는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들었다.
"이게 뭡니까? 설마 제 목숨값 영수증은 아니겠죠?"
나는 영수증을 훑어보았다. 결제 품목 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사망판정 보류 10분 - 0원
…웃기지도 않는 장난이다. 사망판정 보류라니, 무슨 게임 아이템도 아니고. 하지만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 여자는 정말로 내 사망 판정을 지연시킬 능력이 있는 건가?
영수증 하단에는 더욱 충격적인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호출자: 청옥 장비 수리점 2층 공용 단말기
…!
내 이름을 처음 호출한 곳, 그곳이 바로 방금 도망친 수리점 건물의 2층 공용 단말기였다. 수리점 지하가 아니라, 2층.
즉, 우리가 지하에서 BG-04를 피해 도망치고 있을 때, 누군가 위층에서 내 이름을 먼저 '비운' 것이다.
나는 영수증을 꽉 쥐었다. 이 여자는 대체 정체가 뭘까. 그리고 누가 내 이름을 지우려 하는 걸까.
"자, 이제 가보세요. 10분, 생각보다 짧거든요."
여자는 윙크를 날리며 유유히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또각, 또각, 점점 멀어져 갔다.
나는 지율을 바라보았다.
"지율 씨, 저 골목길로 먼저 가 있어. 안전한 곳에 숨어."
"도윤 씨는요?"
"나는 환불받으러 가야 해."
"네? 환불이라뇨?"
"내 이름 지운 놈이 영수증을 끊었으면, 환불은 받아야지."
나는 영수증을 주머니에 넣으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지율은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지만, 내 눈빛에서 단호함을 읽었는지 꿀꺽 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요, 꼭."
지율은 나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몸을 돌려 골목길로 뛰어갔다.
나는 그녀가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청옥 장비 수리점 건물 쪽을 바라보았다. 2층 공용 단말기. 그곳에 내 이름을 지운 범인의 흔적이 남아있을 것이다.
나는 주머니에서 영수증을 다시 꺼냈다. 그런데 영수증을 뒤집자, 뒷면에 방금 전까지 없던 문장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2층 공용 단말기 사용자: 강도윤
…뭐?
내가 직접 하지 않은 호출 기록에, 내 이름이 찍혀 있었다.
나는 얼어붙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내가 나를 호출했다니?
소방차 사이렌 소리가 더욱 요란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내 눈은 오직 영수증에 적힌 내 이름 석 자, '강도윤'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점점 더 스케일이 커지는 것 같은데. F급 헌터 강도윤, 이번에는 자아분열 미스터리물에 도전하는 건가?
비가 오지 않는 하늘, 투명 우산의 주인이 남긴 영수증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작가의 말: 이름을 지운 범인을 찾으러 갔더니, 영수증에는 제 이름이 계산되어 있었습니다.
제목: 13화. 내가 나를 호출했다
손바닥 위에 놓인 영수증 뒷면, 잉크가 덜 마른 듯 축축하게 번져가는 문장이 내 시야를 난도질했다.
2층 공용 단말기 사용자: 강도윤.
머릿속이 텅 비었다가, 이내 깡통 차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렇다. 나는 지금 F급 현장 정리 헌터 강도윤이고, 지하에서 죽을 뻔하다가 기어 나왔으며, 방금 전 정체불명의 여자에게서 사망 판정 보류 영수증을 받았다. 그런데 그 영수증의 호출자가 나란다.
내가 나를 호출했다.
이게 무슨 개가 짖다 못해 탭댄스를 추는 소린가. 내가 언제 저 칙칙한 수리점 건물 2층에 올라가서, 공용 단말기를 두들겨 나를 살려달라고, 혹은 죽여달라고 호출했단 말인가. 타임머신이라도 탔나? 아니면 내가 사실은 이중인격이라서 내 안의 또 다른 도윤이가 “아이고, 본체 놈아, 정신 좀 차려라!” 하면서 버튼을 눌렀나?
“하, 하하….”
헛웃음이 터졌다. 공포심을 억누르려 뱉은 웃음은 비명보다 더 기괴하게 찢어졌다. 농담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손끝의 감각이 한 겹 더 얇아지는 게 느껴졌다. 영수증을 쥔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분명 내 손인데, 내 손처럼 보이지 않았다. 흑백 사진 속에 나만 컬러로 인쇄되었다가, 누가 지우개로 벅벅 문지른 것처럼 경계가 흐릿했다.
‘사망판정 보류’라는 상태가, 나를 이 세상의 구성원에서 슬쩍 제외하고 있었다.
주변의 소음이 멀어졌다. 지상 대피 인파의 비명과 소방차 사이렌 소리는 여전했지만, 나를 비껴갔다. 사람들이 나를 피해 가는 게 아니라,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려는 아저씨의 시선이 내 머리 위 허공을 건너뛰어 다른 곳에 꽂혔다. 나는 지금,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은, 회색의 유령이었다.
그때, 누군가 내 팔목을 꽉 움켜쥐었다.
“도윤 씨!”
한지율이었다. 골목으로 먼저 보냈던 그녀가, 숨을 헐떡이며 내 앞에 서 있었다. 얼굴은 땀과 먼지로 엉망이었고, 눈동자는 겁에 질려 떨리고 있었지만, 그녀만은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왜… 왜 안 가고?”
내 목소리가 물속에서 울리는 것처럼 멍청하게 들렸다.
“혼자 두면, 정말 사라질 것 같아서요.”
지율이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저… 이거 본 적 있어요.”
그녀가 내 손에 들린 영수증, 정확히는 뒷면의 이름을 가리켰다.
“D-17 게이트 사고 때…. 폐쇄된 섹터 기록에 제 이름으로 출입이 찍혀 있었어요. 저는 분명 그 시각에 다른 곳에 있었는데. 단말기에는, 제 ID로… 로그인이 되어 있었거든요.”
지율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건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 같은 근원적인 불쾌함이었다. 그녀의 짧은 고백이, 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얄팍한 현실감을 덧씌웠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다. 이게 무슨 시스템 오류든, 누군가의 흉계든, 전례가 있다는 뜻이다.
“일단… 올라가 봐요.”
나는 침을 삼키며 수리점 건물을 쳐다봤다. 정문은 이미 BG-04 요원들과 소방대원, 그리고 대피하는 시민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이다. 그리로 들어가는 건 “나 여기 있소!” 하고 자수하는 꼴이다.
우리는 건물의 외벽을 따라 돌았다. 다행히 낡은 건물이라 녹슨 철제 비상계단이 2층으로 이어져 있었다. 내가 앞장섰다. 회색 상태의 내 몸은 비상계단을 오를 때조차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마치 그림자가 계단을 밟는 것 같았다. 지율은 내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오면서, 혹시라도 내가 BG-04에게 들킬까 봐 연신 주위를 경계했다.
내 잔향청취 능력이 그녀를 향한 시선 차단막이 되어주진 못했지만, 대신 내가 느끼는 주위의 시선을 조금 흐릿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도시의 소음과 BG-04의 눈을 피해 2층 비상구 문을 열었다.
2층은 예상대로 지저분하고 낡은 공용 공간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복도는 어두컴컴했고, 천장의 형광등 하나가 깜빡거리며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고 있었다. 양옆으로는 작은 임대 사무실이나 창고로 쓰이는 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대부분 문걸어 잠겨 있었다.
복도 중앙에는 낡아빠진 공용 단말기가, 마치 고대 유물처럼 먼지를 덮어쓰고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는 녹슨 무인 택배함과 분실물 보관함이, 그리고 복도 끝에는 작동하는지 의심스러운 CCTV가 우두커니 달려 있었다. 고장 난 커피 자판기 한 대가 벽에 기대어 동전 투입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일상적이고, 지저분하고, 그래서 더 불쾌한 장소. 이곳에서 내가 나를 호출했다는 말이지.
나는 공용 단말기로 다가갔다. 낡은 플라스틱 키보드와 카드 리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잔향청취, 온.’
손을 천천히 카드 리더기에 갖다 댔다.
─드르륵! 아우, 썅, 긁지 마! 긁지 말고 태그 하라고! 에잇, 요즘 애들은 태그도 몰라?─
단말기의 비명이 뇌리에 꽂혔다. 목소리는 늙고 앙칼진 노파의 그것이었다. 투덜거림 속에 핵심이 있었다. 손가락으로 아이디를 치거나 카드를 긁은 게 아니다. 태그.
─이름표가 먼저 들어왔잖아! 이름표가! 왜 자꾸 손을들이대! 어? 내 몸에 손대지 마!─
빙고. 사용자는 손가락으로 로그인하지 않았다. 내 실제 몸이나 지문, 혹은 ID 카드가 아니라, 누군가 강도윤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임시 신분 태그, 혹은 복사된 기록으로 이 단말기에 접속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단말기의 오래된 화면을 터치했다. 화면은 누렇게 변색해 있었지만, 마지막으로 수행된 작업의 로그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로그인 방식: 임시 복구 태그]
[사용자: 강도윤]
[위치: 2층 공용 단말기]
[작업명: 사망판정 갱신 요청]
[작업 시간: 11:24]
11시 24분.
그 시간, 나는 한지율과 함께 지하 환기통을 기어 다니며 문태식의 사망 판정을 어떻게든 미뤄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BG-04가 지하를 봉쇄하고, 우리가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던 그 순간에, 누군가 여기서 내 이름표로 로그인해서, 내 사망 판정을 갱신, 즉 나를 죽었다고 확정하려 했다는 뜻이다.
처리자는 강도윤으로 찍혀 있었지만, 비고란의 하단에 아주 작고 희미하게, 마치 누가 일부러 지우려 한 것처럼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리 입력...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가 나를 부른 게 아니다. 누군가 내 이름표를 훔쳐서, 나를 대신해 나를 죽이려 했다.
“지율 씨.”
나는 품속에서 아까 방재실에서 복사했던 신분증 복사본 뭉치를 꺼냈다. BG-04에게 걸렸을 때, 그녀가 기지를 발휘해 복사본을 챙겼던 게 기억났다.
“이것 좀 확인해 줄래요? 복사본 가장자리나 뒷면에, 혹시 이상한 숫자나 바코드 같은 거 없어요?”
내 손은 지금 너무 흐릿해서, 섬세한 걸 확인할 수가 없었다. 지율이 복사본을 받아 들고 꼼꼼히 살폈다.
“음… 앞면은 깨끗하고, 뒷면도…. 아! 여기요!”
그녀가 복사본 한 장의 하단 모퉁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인쇄된 작은 숫자열이 있었다.
BG-TEMP-04-A-KDY-1124
“이거… 아까 단말기 로그에 있던 숫자랑 비슷해요.”
그녀가 단말기 화면의 임시 복구 태그 ID와 복사본의 숫자를 대조했다. KDY는 내 이름 이니셜, 1124는 아까의 작업 시간. 이 복사본, 방재실에서 대충 복사한 신분증 복사본 가장자리에, 내 사망 판정 갱신에 쓰인 ‘임시 복구 태그’의 숫자가 숨어 있었다.
이전 회차에서 BG-04를 따돌리려 했던 작은 성취가, 이제는 내 목을 죄는 새 단서가 되어 돌아왔다.
‘누구야. 누가 내 신분증 복사본에 저런 짓을 한 거지?’
그때, 벽에 기대어 있던 고장 난 커피 자판기에서 튀어 오르는 잔향이 내 신경을 건드렸다.
─아메리카노 800원, 사망판정 대리입력 0원은 메뉴에 없습니다, 호갱님!─
자판기는 기계음 섞인 코믹한 목소리로 투덜대고 있었다.
─0원짜리 메뉴는 저기, 검은 우산 쓴 분한테 가보세요. 저희는 유료 서비스만 제공합니다. 덜컹, 덜컹─
검은 우산.
나는 황급히 자판기의 투명 플라스틱 문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먼지 쌓인 커피 컵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리고 그 유리에, 흐릿하지만 사람의 실루엣이 비쳤다.
윤서하는 아니었다. 키가 크고 슬림한, 우산을 접은 듯한 형태의 그림자. 하지만 그 그림자는 너무 모호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사람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림자는 이내 사라졌고, 자판기의 투명 플라스틱에는 다시 먼지 앉은 컵들만 남았다.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 이 자판기 앞에서 내 사망 판정 대리 입력을 목격했거나, 혹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때, 복도 끝 계단 쪽에서 쿵쾅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BG-04였다.
“2층 수색해. 로그 기록 회수한다.”
그들의 목소리는 난폭하지 않았지만, 규정과 증거 회수에 미친 기계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우리는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나를 직접 보진 못하겠지만, 이 단말기의 로그를 회수하면 내 상태가 ‘보류’에서 ‘사망 확정’으로 바뀔 게 뻔했다. 게다가 지율 씨는 그들의 눈에 보인다.
“도윤 씨, 이거….”
지율이 내 품에서 신분증 복사본 뭉치를 다시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녹슨 분실물 보관함의 벌어진 틈새로 복사본 일부를 거칠게 쑤셔 넣었다.
“다 가져갈 순 없어도, 일부는 숨겨야 해요.”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면서도 단단해졌다. 단순히 따라오기만 하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살기 위해, 그리고 나를 살리기 위해 직접 증거를 숨기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행동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다.
단말기 화면의 ‘인쇄’ 버튼이 눈에 들어왔다. 로그 기록을 뽑는 버튼.
‘에라, 모르겠다.’
나는 흐릿한 손으로 인쇄 버튼을 미친 듯이 연타했다.
─위잉! 덜컥! 위잉!─
낡은 단말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인쇄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한 장, 두 장, 세 장…. 나는 출력되는 로그 기록들을 닥치는 대로 낚아채서 복도 여기저기에 흩뿌렸다.
깨끗하게 회수하게 둘 순 없다. 시민이나 소방대원, 혹은 건물 관리자가 이 낡은 건물에 들어왔다가 이 종이들을 발견하게 해야 한다. 그럼 BG-04도 은폐하기가 훨씬 어려워질 테니까.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우리는 분실물 보관함 뒤, 좁은 틈새로 몸을 숨겼다. 지율 씨가 나를 꽉 안았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내 등에 쿵쿵거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하나는 알았다. 내가 나를 부른 게 아니었다. 누군가 ‘강도윤 이름표’를 사용해 내 사망 판정을 대리 입력했다. 그리고 그 숫자는 내 신분증 복사본 가장자리에 숨어 있었다.
문제는 원본이었다. 그 이름표가 어디서 왔는지, 누가 내 이름으로 그 짓을 했는지는 아직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단말기의 인쇄 소리가 멈추었다. BG-04 요원들이 복도로 들어서는 순간, 단말기에서 마지막으로 한 장이 더 출력되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 지율 씨의 품에서 살짝 눈을 들어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쳐다보았다.
[임시 복구 태그 원본 보관 위치]
청옥 장비 수리점 지하 1층, 폐기 장비함 B-04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청옥 장비 수리점 지하 1층. 폐기 장비함 B-04.
우리가 방금 목숨 걸고 도망친 곳. BG-04가 이미 장악하고, 문태식의 시신이, 혹은 살아있는 문태식이 있을지도 모르는 그 지하 수리점 안에.
내 이름표의 원본, 내 존재를 증명할, 혹은 나를 영원히 지워버릴 그 원본이, 가장 위험한 곳에 남겨져 있었다.
작가의 말: 이름표 원본은 늘 제일 꺼내기 싫은 함에 들어 있습니다.
✦ 작가의 말
투명 우산이 준 영수증 끝에는 결국 제 이름표 보관함이 찍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