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83화. 진행자의 이름값과 기록 수선실 B2
제목: 82화. 진행자의 이름값
전원선이 뽑힌 낡은 팩스기에서 종이가 뱉어질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이 상황이 단순히 기괴한 심령 현상에서 그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치익, 치이익.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정중해서 오히려 불쾌했다. 그 목소리가 감식실 공기 속에 섞여들자, 공간의 밀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지하 4층의 눅눅한 먼지 냄새가 순식간에 휘발되고, 그 자리를 메운 건 코를 찌르는 사무용 토너 가루와 오래된 서류 뭉치의 퀴퀴한 냄새였다.
깜빡, 깜빡.
천장의 형광등이 미친 듯이 점멸하더니, 어느 순간 눈이 시릴 정도로 하얀 빛을 내뿜었다. 벽면에 붙어 있던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존재하지도 않는 복도의 풍경이 비쳤다. 산처럼 쌓인 서류 박스와 누군가 먹다 남긴 종이컵. 폐쇄된 현장 감식실이 순식간에 거대한 기록국 사무실의 일부로 편입된 것 같았다.
[회의를 시작하지. 내 이름을 빌려 간 친구들.]
목소리의 주인공, 제갈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팩스에서 출력된 명단 위의 글자들이 살아 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와, 이건 뭐, 강제 정규직 전환인가? 난 아직 입사 서류도 안 썼는데.”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려 대는 소리가 귓가까지 들렸지만, 입은 반사적으로 농담을 뱉어냈다. 긴장을 늦추면 그대로 이 기괴한 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내 연체된 이름. 아직도 그 가짜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 대여자여.]
스피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니, 정확히는 내 목덜미에 붙은 제갈후의 이름표를 꿰뚫어 보는 기분이었다. ‘대여자’라니. 졸지에 나는 내 몸을 불법 렌트한 연체자가 되어 있었다.
“저기요, 이름값은 나중에 계좌 이체로 해드릴 테니까 일단 이 조명부터 좀 꺼주시죠? 전기세 장난 아닐 텐데.”
“도윤 씨, 대답하지 마요!”
윤서하가 내 팔을 붙잡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윤서하. 아니, ‘0-14번 보관함’의 주인인가. 여전히 추적 중이군. 반납 기한이 십 년이나 지났는데 말이야.]
제갈후의 목소리에 윤서하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0-14번’. 그게 그녀의 원래 이름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녀가 버리고 싶었던 과거의 낙인일까. 평소 얼음장 같던 그녀가 이렇게 눈에 띄게 흔들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제 명단을 확인하지. 상태를 낭독하겠다.]
허공에 떠오른 글자들이 차례로 붉게 타올랐다.
[강도윤: 확정. 이름과 신체 간의 결합도가 한계치에 도달함. 회수 즉시 파쇄 가능.]
[윤서하: 추적 중. 데이터 일부 누락. 강제 회수 절차 진행 중.]
[이현우: 예비. 규격 미달이나 대용품으로 사용 가능.]
[한지율: 보관 중. 관리 번호 10-0221. 열람 권한 제한.]
“잠깐, 잠깐만요!”
한지율이 귀를 막으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녀의 안색이 종잇장처럼 창백했다.
“‘보관 중’……? 그 소리, 10년 전 그 병원에서 들었어. 하얀 커튼이 쳐져 있고, 약 냄새가 지독하던 3번 침상…….”
지율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녀의 기억이 동요하자, 감식실 벽면에 환상처럼 오래된 병실의 잔상이 겹쳐졌다.
“침상 옆 보관함 라벨에 이름이 적혀 있었어. 강도윤 씨가 아니라…… 그래, ‘박영진’. 아까 장부에서 봤던 그 편의점 알바생 이름!”
10년 전 병원, 이름의 대여, 지금의 사망 예정자 명단. 세 가지가 한 줄로 꿰였다. 마음 같아선 그 줄을 끊고 퇴근하고 싶었지만, 내 목덜미에 붙은 이름표가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
그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반가온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품 안에서 낡은 장부를 꺼내 탁, 하고 먼지 쌓인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이봐, 진행자 양반. 채무 관계에도 영수증은 있어야지. 이거 절차 무시하고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냐?”
감정사 특유의 독설적인 말투였다. 반가온은 제갈후의 위압감에 굴하지 않고 장부를 넘겼다.
“이의 신청 좀 하겠어. 여기 적힌 ‘이름 대여 기간’ 말이야. 계약서 원본 보여준 적 있어? 채무자가 내용을 모르는데 회수부터 하겠다는 건 명백한 약관 위반이지. 안 그래? 기록국의 법무팀이 보면 환장할 노릇이겠는데.”
[……감정사인가. 서류상의 오류는 사후에 수정한다.]
“사후에 수정하면 내 수수료는 누가 줄 건데? 난 영수증 없는 거래는 취급 안 해.”
반가온이 시간을 버는 동안, 이현우가 내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는 상처 부위를 움켜쥔 채 팩스 종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도윤 형님, 이거…… 순서가 이상해요.”
“순서?”
“아까 우산 병정들이 절 끌고 갈 때요. 놈들이 고개를 숙이던 순서가 있었거든요. 맨 앞의 큰 놈부터 시작해서 왼쪽으로 돌아가며……. 지금 이 명단에 적힌 이름 순서랑 똑같아요.”
이현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명확했다. 명단은 단순히 죽일 사람의 리스트가 아니었다. 이건 시스템이 가동되는 ‘공정 순서’였다.
나는 슬며시 손을 뻗어 아직도 따끈한 열기가 남아 있는 팩스 종이를 건드렸다. 그리고 속으로 읊조렸다.
‘잔향청취.’
머릿속이 징하게 울리며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 아, 뜨거워! 난 그냥 평범한 모조지였다고! 왜 내 몸에 이런 흉측한 살생부를 새기는 거야?
— 젠장, 잉크 냄새가 너무 지독해. 진행자 그 인간, 이름은 제갈후라면서 잉크는 싸구려 쓰나 보지?
— 야, 너희 들었어? 이번 회의, 사실은 여기서 하는 거 아니라며.
— 당연하지. 우린 그냥 중계기일 뿐이야. 진짜 회의장은 저 위층, ‘중앙 기록국 B2 기록 수선실’이라고. 거기서 신호를 쏘고 있는 거야.
종이들의 투덜거림 속에서 핵심 정보가 걸려 나왔다. 중앙 기록국 지하 2층, 기록 수선실. 그곳이 제갈후의 본거지이자 이 기괴한 회의의 송신지였다.
“대답해라, 강도윤.”
스피커 속 목소리가 다시 한번 나를 압박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졌다. 마치 내 귓가에 대고 직접 속삭이는 것처럼.
“너는 너의 이름을 반납할 준비가 되었는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를 띄웠다. 윤서하의 경고대로, 여기서 대답을 하는 순간 내 ‘원본’은 확정적으로 파쇄될 것이다.
“글쎄요. 제가 원래 물건을 좀 험하게 써서 반납하기엔 상태가 좀 안 좋은데. 세탁비라도 청구하시게요?”
침묵이 흘렀다.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는 잡음이 들리더니, 제갈후의 목소리가 아닌 다른 소리가 섞여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건 아주 평범하고, 지치고, 약간은 멍한 청년의 목소리였다.
[……저기, 들리세요?]
편의점 비닐봉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그리고 삑, 삑, 바코드를 찍는 기계음이 배경음으로 깔렸다.
[강도윤 씨 맞죠? 명단에서 봤어요. 전 박영진이라고 해요. 신림동 쪽에서 알바 하다가…… 정신 차려보니까 여기 와 있네요.]
내 등이 서늘해졌다. 이건 환청이 아니었다.
[회의장에 빈자리가 하나 있더라고요. 이름표 보니까 강도윤 씨 자리던데.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박영진이라 자칭한 목소리가 힘없이 웃으며 덧붙였다.
[어서 오세요. 여기엔 강도윤 씨 자리가 이미 준비돼 있어요. 아주 편안해 보이는 침상으로요.]
그 말을 끝으로 감식실의 형광등이 일제히 깨져나갔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내 목덜미에 붙은 제갈후의 이름표만이 시퍼런 빛을 내뿜으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목: 83화. 기록 수선실 B2
형광등이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갔다. 시야가 단번에 암전됐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눈이 적응하기도 전, 내 목덜미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니, 시퍼렇게 타올랐다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커헉……!”
목덜미에 누가 인장을 찍는 듯한 작열감이 전신을 훑었다. 제갈후의 이름표. 종이 조각 주제에 살을 파고드는 감각이 생생했다. 어둠 속에서 오직 그 이름표만이 불길한 청색광을 내뿜으며 내 목 주변을 휘감았다.
“강도윤 씨!”
윤서하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내 목덜미의 이름표를 낚아채려 했다. 동시에 반가온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안 돼, 손대지 마세요! 이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야. 대여자의 지분이 박힌 일종의 ‘담보’라고. 억지로 떼어내면 도윤 씨 영혼까지 뜯겨나갈 겁니다.”
“그럼 이대로 보라는 거야? 도윤 씨 피부가 타고 있잖아!”
윤서하의 목소리에 평소의 냉정함 대신 날카로운 긴박함이 섞였다. 나는 이를 악물며 그녀의 팔을 밀어냈다. 고통은 지독했지만, 동시에 머릿속이 묘하게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이름표가 타오르며 내 뇌에 직접 정보를 주입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아직은 견딜 만해. 이거, 통행증 같은 거야.”
그때, 끊어지기 직전의 라디오 주파수처럼 박영진의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며 감식실 안을 맴돌았다.
— ‘삑—.’
편의점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찍는 경쾌한 전자음. 그리고 뒤이어 들리는 ‘드르륵, 드르륵’ 하는 소리. 병원 침대 바퀴가 거친 복도 바닥을 구르는 소음이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소리가 기괴하게 겹쳐 들렸다.
— “B2…… 기록 수선실……. 초록색 출입증을 가진 김미영 대리를 찾으세요……. 그분이, 그분이 수선해주실 거예요. 당신의 연체된 시간을…….”
목소리는 멀어지는 파도처럼 사라졌다. 형광등 파편이 바닥에 흩어진 정적 속에서, 이현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B2? 기록국 지하 2층은 폐쇄 구역이잖아요. 공식 지도에도 없는 곳인데.”
“공식적으로 없으니까 비공식적인 짓을 하기 딱 좋겠지.”
나는 목덜미의 열기를 누르며 일어섰다. 제갈후의 이름표는 이제 은은한 미광을 내뿜으며 내 맥박에 맞춰 깜빡이고 있었다.
“정면 출입구는 이미 폐쇄됐을 거야. 로그가 남는 곳으로 갔다간 바로 배신자 낙인 찍히고 협회 전체랑 전면전이라고.”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네요.”
반가온이 장부를 품에 안으며 어둠 속에서 안경알을 번뜩였다.
“증거물 운반용 승강기. 10년 전 모델이라 전산망이랑 분리되어 있어요. 감식실 뒤편 창고랑 연결된 통로가 있을 겁니다.”
우리는 서둘러 움직였다. 부상으로 옆구리를 움켜쥔 이현우가 비틀거리자 윤서하가 그를 부축하려 했다. 하지만 이현우는 고집스럽게 벽을 짚고 일어섰다.
“나 두고 갈 생각 마요. 아까 팩스 명단, 그 병정들 고개 숙인 순서…… 나만 기억하고 있으니까. 내가 없으면 가서 비밀번호 하나도 못 풀걸요?”
“그렇게 중얼거릴 힘 있으면 빨리 걷기나 해. 짐 되기만 해봐, 바로 유기할 테니까.”
내 농담에 이현우가 “도윤 형님, 역시 인성 어디 안 가네.”라며 낄낄거렸다.
감식실 뒤편, 먼지 쌓인 캐비닛을 밀어내자 녹슨 철문이 나타났다. 수동식 레버를 당기자 끽끽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문서 이송용 소형 승강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넷이 들어가기엔 비좁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승강기가 하강하기 시작하자, 한지율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그녀는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바르르 떨었다.
“냄새가 나요……. 소독약 냄새.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
“지율 씨?”
“커튼이 보여요. 초록색 커튼이 사방에 쳐져 있고, 누군가 계속 제 이름을 불러요. ‘보관 중’이라고, 아직 나갈 때가 아니라고…….”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10년 전 병원의 기억이 이곳의 이질적인 기운과 공명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무너지듯 쓰러지려 할 때,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챘다.
“한지율 씨, 정신 차려. 여기 병원 아니야. 그리고 당신 보관 중인 거 맞아. 내 미결제 잔업 리스트에 보관 중이라고. 그거 다 처리하기 전까진 퇴근 못 하니까 헛것 볼 시간 없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지만, 한지율은 내 셔츠 자락을 꽉 쥐며 간신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옆에서 윤서하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면서도, 한지율의 차가운 손을 조용히 맞잡아주었다.
지하 2층. 문이 열리자마자 느껴진 것은 서늘한 냉기와 압도적인 ‘종이’의 압박이었다.
그곳은 사무실이라기보다 거대한 직조 공장에 가까웠다. 천장까지 닿은 선반에는 수만 개의 갈색 서류 봉투가 꽂혀 있었고, 중앙에는 구식 재봉틀 수십 대가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재봉틀이 박고 있는 것은 천이 아니었다.
찢어진 사망신고서, 반토막 난 이름표, 그리고 주인 잃은 유류품들.
무채색의 공무원 복장을 한 그림자들이 기계적으로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드르륵, 드르륵’ 소리가 아까 들었던 병원 침대 소리와 겹쳐 들렸다. 그들은 실밥이 터진 운명을 꿰매고, 훼손된 기록을 억지로 이어 붙이고 있었다.
“……기록 수선실. 여긴 죽은 자들의 행정 절차를 강제로 연장하는 곳이군요.”
반가온이 경악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때, 구석 책상에서 산더미 같은 서류에 파묻혀 있던 한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초록색 출입증을 목에 건, 피곤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어머, 손님인가요? 예약은…… 아, 제갈 진행자님이 직접 오셨구나.”
그녀가 내 목덜미의 빛나는 이름표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명찰에는 ‘기록국 7급 대리 김미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녀는 겁에 질린 듯 눈을 굴리면서도 손가락으로 장부를 넘겼다.
“김미영 대리님 맞습니까? 박영진 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내 말에 김 대리는 어깨를 움찔 떨며 주위를 살폈다.
“조용히 하세요! 박영진 씨는…… 이미 안쪽 침상에 가 계세요. ‘수선’이 거의 끝났거든요. 최성국 씨는 아직 안 오셨지만…… 곧 오시겠죠. 명단대로라면.”
“제갈후는 어디 있지?”
윤서하의 날카로운 질문에 김 대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제갈후 진행자님이요? 진행자님은 ‘어디’에 계신 게 아니에요. 그건 사람이 아니라 권한(Access)인걸요. 지금 도윤 씨 목에 붙은 그 이름표가 바로 진행자의 권한이에요. 그게 빛나고 있다면, 당신이 지금 이 구역의 주인이라는 뜻이죠.”
나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제갈후가 유령인지, 직책인지, 아니면 아무나 뒤집어쓸 수 있는 망할 권한인지 구분이 안 됐다.
“안쪽으로 가보세요. 도윤 씨 자리는 특별히 ‘진행자’ 전용으로 준비해뒀으니까요. 아주 편안할 거예요.”
김 대리가 가리킨 수선실 가장 깊은 곳, 반투명한 초록색 커튼이 처진 구역이 있었다.
우리는 커튼을 젖혔다. 그곳에는 두 대의 병원 침상이 놓여 있었다.
첫 번째 침상 위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10년 전 실종되었던, 아니 기록상으로만 존재하던 박영진이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처럼 고개를 들고 우리를 향해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의 목 아래로는 몸이 없었다. 수천 장의 이름표 실밥이 엉겨 붙어 인간의 형태를 억지로 유지하고 있는 기괴한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옆, 두 번째 침상.
그 위에는 정갈하게 다려진 환자복 한 벌이 놓여 있었다. 가슴팍에는 너무도 선명한 활자로 내 이름이 박혀 있었다.
[ 강도윤 / 상태: 대기 중 ]
침상 옆 테이블에는 텅 빈 슈트 한 벌이 주인을 기다리는 시체처럼 놓여 있었고, 박영진이 내 목덜미의 푸른 빛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오셨네요, 도윤 씨. 당신의 옷이 아주 잘 맞을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내 목덜미의 이름표가 살점을 뜯어낼 듯 격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