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81화. 제갈후의 이름과 사망 예정자 회의
제목: 80화. 제갈후의 이름으로
가슴팍에 붙은 것은 단순한 종이 쪼가리가 아니었다.
손톱을 세워 모서리를 긁어보았지만, 그것은 마치 원래부터 내 흉골의 일부였던 것처럼 끈질기게 달라붙어 있었다. 떼어내려 힘을 줄수록 살점이 뜯겨 나가는 듯한 생생한 통증이 상체를 타고 올라왔다.
“아으으, 야, 이거 안 떨어져.”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 제갈후 ]라는 세 글자가 박힌 낡은 이름표는 내 심장박동에 맞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누가 보면 원래 내 이름이 제갈후인 줄 알겠군. 아니, 그보다 남의 명의 도용이 이렇게 피부 친화적이면 곤란한 거 아닌가? 이 정도면 주민등록법 위반이 아니라 생물학적 침공 수준이다.
“강도윤 씨, 손 대지 마세요.”
윤서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본 그 어느 때보다 창백한 얼굴로 내 가슴에 붙은 이름표를 응시했다. 평소의 냉정함은 어디론가 증발하고, 눈동자에는 명백한 공포와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 이름으로 대답하지 마세요. 누가 불러도, 어떤 목소리가 들려도 절대로 대답하면 안 돼요.”
“이게 그렇게 대단한 이름이야? 제갈후라는 인간, 당신이 알던 사람이지?”
내 질문에 윤서하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렸다. 긍정도 부정도 아니었지만, 그녀의 반응 자체가 가장 확실한 대답이었다.
“...지금은 탈출이 먼저예요. 제발, 제 말 들으세요.”
그때, 보관실 바깥쪽의 소음이 잦아들었다. 아니, 잦아든 게 아니라 ‘정지’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피 칠갑이 된 채 복도 끝에 기대어 있던 이현우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검은 우산의 병정들이, 그리고 이름을 훔치려 달려들던 그 기괴한 기록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좌우로 갈라섰다.
“형... 대체 뭘 한 거야? 애들이 갑자기 예의 발라졌는데.”
이현우가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우산 병정들은 마치 모시는 주군을 맞이하듯 고개를 숙이고 길을 내주고 있었다. 내 가슴에 붙은 [ 제갈후 ]라는 이름표가 이 공간의 지배권이라도 상징하는 모양이었다.
[대환 대출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이 이 계좌의 주인입니다.]
공중에 울려 퍼지는 민원실 직원의 목소리는 더 이상 기계적이지 않았다. 거기엔 기묘한 경외심과 비굴함이 섞여 있었다. 내가 ‘계좌 주인’으로 인식되는 순간, 이 지옥 같은 보관실의 시스템은 나를 침입자가 아닌 관리자로 분류한 것이다.
“대여자...님?”
한지율이 멍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잃어버렸던 기억이, 돌아오지 말았어야 할 단서들이 그녀의 뇌리를 헤집고 있는 게 분명했다.
“기억났어요... 전부 다는 아니지만, 그날의 병원이...”
“한지율 씨, 괜찮아요?”
“아니요, 안 괜찮아요. 14년 전이 아니었어요. 10년 전이었어.”
한지율이 내 소매를 붙잡으며 덜덜 떨었다.
“병원이었어요. 하얀 우비... 아니, 얼굴이 없는 우비 인물이 있었고. 그 옆에 아주 어린 도윤 씨가 서 있었어요. 그리고 젊은 제갈후 씨도... 그 사람은 웃고 있었는데, 눈은 울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 방엔 침대가 하나 더 있었어요. 이름표에 ‘윤서하’라고 적힌, 하지만 아무도 누워 있지 않은 빈 침상이...”
윤서하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나는 한지율의 말을 끊고 가슴팍의 이름표를 꾹 눌렀다. 통증이 전신을 훑었지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 공간은 2004년의 병실과 민원실이 뒤섞인 기괴한 중첩 상태다. 시스템이 나를 ‘제갈후’로 인식하고 있다면, 이 행정적 오류를 역으로 이용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품 안에서 박철수의 사망신고서와 그 기괴한 사진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마치 진상 민원인이 구청 창구에서 깽판이라도 치듯, 최대한 당당하고 뻔뻔하게.
“야! 거기 담당자 나와!”
허공에서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발생했다.
“방금 대환 대출 완료됐다고 했지? 근데 이거 서류가 엉망이잖아! 제갈후 서명이 왜 원본이 아니라 사본이야? 인감증명서 대조는 해봤어? 이거 명백한 행정 절차 위반 아냐?”
[...본 대출은 적법한 절차에 의해...]
“적법은 개뿔! 채무자 기재 사항도 틀렸어. 한지율은 기억의 주인이 아니라 단순 보관자라고 명시되어야 맞지. 그리고 여기 사망신고서 봐. 박철수 씨 서명이랑 원본 대조 안 됐잖아. 이거 감사원에 찌르면 너희 보관실 통째로 폐쇄되는 거 몰라? 당장 한지율 계좌 동결해!”
내 억지에 가까운 외침에 공간이 진동했다. 논리적인 공격은 아니었지만, 이 공간을 지배하는 ‘기록의 규칙’을 건드린 것이 유효했다. 기록은 완결성을 생명으로 한다. ‘사본’과 ‘오기재’라는 단어가 시스템의 논리 회로에 과부하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확인 중... 기록의 정합성 검토를 시작합니다. 서명 데이터 불일치 확인. 채무자 지위 재검토... 수동 심사 단계로 전환합니다.]
한지율을 짓누르던 투명한 압박감이 일순간 사라졌다. 그녀의 코에서 흐르던 피가 멈췄고, 흐릿하던 눈동자가 완전히 생기를 되찾았다.
“...멈췄어요. 사라지는 느낌이 안 들어요.”
“완전 해결은 아니지만 일단 시간을 벌었어. ‘수동 심사’로 돌려놨으니까, 당분간은 저들도 함부로 기억을 못 빼갈 거야.”
나는 내친김에 시스템을 더 몰아붙였다.
“심사 기간 동안 열람권은 보장되는 거지? 하급 헌터 실종 명단이랑 보험 사기 관련 장부 전부 내놔. 안 그러면 이 사망신고서 확 찢어버리고 데이터 꼬이게 만들 테니까!”
공중에 몇 장의 종이가 허공에서 인쇄되듯 나타났다. 실종된 하급 헌터들의 명단이었다. 그런데 그 명단을 훑어보던 내 눈이 어느 한 지점에서 멈췄다.
사망 처리된 것으로 알려진 몇몇 헌터들의 이름 옆에, 붉은색 글씨로 기묘한 날짜가 적혀 있었다.
[미래 접수 예정일: 6월 3일]
오늘이 몇 일이었지? 5월 말이다. 며칠 남지 않았다. 이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특정 날짜에 ‘사망할 예정’으로 예약된 상태였다. 보험 사기의 진상은 단순한 대출이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한 거대한 기록의 거래였던 것이다.
“도윤 씨, 이제 나가야 해요. 보관실 폐쇄가 시작됐어요.”
윤서하가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내 가슴의 이름표를 보며 다시 한번 엄하게 경고했다.
“그 이름표, 절대 남에게 보이지 마세요. 저한테도... 당분간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지 마시고요. 약속하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워 이름표를 가렸다. 그녀의 눈빛에는 안도와 함께 깊은 불신이 서려 있었다. 나를 구하고 싶어 하면서도, 내 가슴에 붙은 그 이름을 증오하는 듯한 이중적인 감정.
우리는 무너져 내리는 0번 보관실의 잔해를 뚫고 달렸다. 우산 병정들은 길을 내주었고, 이현우를 부축한 채 겨우 지상으로 연결된 비상구를 찾았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뒤를 돌아보자, 헌터 협회 지하의 낡은 보관실 입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범한 철문으로 돌아가 있었다.
품 안에는 보관실에서 챙겨온 실종자 장부 일부가 들어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장부의 첫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엔 피해자 명단이 아닌, 이 거대한 사기극의 ‘핵심 관리 대상’ 세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관리 대상 리스트]
강도윤: 신체 미반납 (상태: 대여 중)
윤서하: 이름 미회수 (상태: 추적 중)
제갈후: 원본 대리 보관자 (상태: 권한 위임 완료)
“신체 미반납...?”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소린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제갈후가 내 이름을 대신 쓰고 있었던 게 아니라, 내가 제갈후의 권한을 ‘대환 대출’ 받은 꼴이었다.
“형, 일단 병원부터 가자. 나 진짜 죽을 거 같아...”
이현우가 내 어깨에 기대어 헐떡였다. 윤서하는 아무 말 없이 멀어지는 협회 건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지율은 되찾은 기억의 무게 때문인지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일단은 살았다. 하급 헌터 실종 사건의 실마리도 잡았고, 한지율도 지켜냈다. 이제 이 장부를 근거로 협회 내부의 부패 세력을 들이받으면 될 일이었다.
안도감이 밀려오며 긴장이 풀리려던 찰나.
징-.
주머니 속 헌터 단말기가 비명처럼 울렸다.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었다. 협회 공식 시스템에서 발송되는 최고 등급의 ‘긴급 행정 알림’이었다. 나는 홀린 듯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에 뜬 붉은색 팝업창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긴급 알림]
발신: 헌터 협회 중앙 기록국
내용: 사망신고 접수 완료
[6월 3일 00:00부로 제갈후 명의의 사망신고가 정상 접수되었습니다.]
그 아래, 심장이 내려앉는 문구가 이어졌다.
[대상자: 강도윤]
[사유: 이름 및 신체 대여 기간 만료에 따른 강제 회수]
단말기 시계를 확인했다.
6월 1일.
나에게 남은 시간은 단 이틀뿐이었다.
제목: 81화. 사망 예정자 회의
스마트폰 진동이 이토록 살벌하게 느껴진 건 헌터 면허증을 땄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협회 공식 앱에서 날아온 푸시 알림. 보통은 게이트 발생 경보나 미지급 수당 입금 안내가 떠야 할 자리에, 내 인생의 종료 버튼 같은 문장이 박혀 있었다.
[6월 3일 00:00부로 제갈후 명의의 사망신고가 정상 접수되었습니다.]
[대상자: 강도윤]
[사유: 이름 및 신체 대여 기간 만료에 따른 강제 회수]
“와, 씨…….”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21세기 대한민국 헌터는 죽는 날짜도 앱으로 통보받는구나. 참 편리한 세상이다. 장례식장 예약도 자동으로 해줄 기세였다.
웃음으로 넘기려 했지만, 화면을 쥔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가슴팍에 문신처럼 박혀버린 ‘제갈후’라는 이름표가, 마치 내 심장 박동을 대신 조절하듯 기분 나쁜 박동을 전해오고 있었다.
“웃지 마. 도윤아.”
윤서하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는 내 단말기를 낚아채더니 전원을 강제로 꺼버렸다.
“이름표가 네 반응을 먹고 자라고 있어. 감정을 죽여. 지금 당장.”
“아니, 내 사망신고가 배달 음식 도착 알림처럼 오는데 안 떨리겠냐고. 서비스가 너무 과하잖아.”
“도망쳐야 해. 여기서 로그 남기면 중앙 기록국에서 바로 추적 들어와.”
그녀의 말대로 우린 서둘러 움직였다. 0번 보관실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이었지만, 협회 복도는 이미 평소와 다른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정장을 입은 사무직원들의 시선이 미세하게 내 가슴팍을 훑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지하 4층, 폐쇄된 현장 감식실이었다. 오래전 증거물 오염 사건으로 폐쇄된 이후 아무도 찾지 않는, 곰팡이 냄새와 포르말린 향이 뒤섞인 ‘맹점’ 같은 장소였다.
“아이고, 나 죽네…….”
이현우가 부서진 어깨를 감싸 쥐며 수술용 간이침대에 주저앉았다. 온몸이 엉망진창이면서도 녀석은 특유의 눈치 없는 예리함을 발휘했다.
“형, 아까 그 보관실에서 우산 쓴 놈들 말이야. 걔네가 부르던 이름들, 내가 아는 이름이 몇 개 있었어.”
“뭐? 죽은 헌터들이겠지.”
“그게 아니니까 문제지. ‘김철수’는 작년에 게이트에서 전사한 게 맞는데, ‘이민수’ 그 새끼는 지금 랭킹 50위권에서 떵떵거리고 살고 있단 말이야. 근데 왜 그 종이 인형 놈들이 산 사람 이름을 부르면서 형한테 머리를 조아리냐고.”
이현우의 말에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무너진 이름표들. 그게 저 보관실의 실체였다.
한지율은 구석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떨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온 후부터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지율 씨, 괜찮아요?”
“도윤 씨…… 저 봤어요. 10년 전 그 병원 침대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면서요. ‘강도윤’이라고.”
“아니요…….”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 침대 옆 차트에 이름 대신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대여 중’. 그리고 그 옆 칸에는 ‘윤서하: 이름 미회수’라고…….”
나는 윤서하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10년 전부터 내 몸은 빌린 물건이었고, 윤서하는 이름을 돌려주지 않은 도망자였다는 소리다. 이쯤 되면 우리 중 진짜 제 이름을 가진 사람이 누구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일단 이거부터 봐.”
반가온이 감식실 구석에서 튀어나오며 내가 챙겨온 장부를 가리켰다. 그는 이미 장부의 사본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름표와 장부를 감정하려던 그가 내 가슴팍의 ‘제갈후’ 이름표에 손을 대려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뺐다.
“건드리지 마! 이거 물건 아냐. 이건 채무 관계 그 자체라고.”
“채무?”
“너 지금 제갈후라는 인간의 업보를 담보로 잡힌 거야. 이거 억지로 뜯어내는 순간, 너라는 존재의 ‘원본’이 파쇄돼. 절대 손대지 마라.”
반가온은 떨리는 손으로 장부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6월 3일, 내 사망신고가 처리되는 그날의 ‘접수 예정자’ 명단이었다.
“여기 봐라. 명단이 가관이야.”
최성국 (S급 헌터팀 ‘지구수호’ 전략가)
김미영 (협회 중앙 기록국 7급 대리)
박영진 (신림동 XX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생)
“S급 내부자부터 평범한 알바생까지? 기준이 뭐야?”
“기준 같은 건 없어. 그냥 ‘회수’할 때가 된 거지.”
윤서하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벽에 기대어 어두운 천장을 응시했다.
“제갈후는 협회 초창기, ‘원본 감식관’이었어. 사람의 영혼과 몸이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직책이지. 하지만 그는 어느 순간부터 그 기록을 비틀기 시작했어. 죽어야 할 사람의 이름을 살려두고, 살아야 할 사람의 몸을 대여해주는 식으로.”
“그걸 왜 서하 씨가 알고 있죠?”
“……내가 그 첫 번째 ‘부정 수급자’였으니까.”
그녀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후회와 증오가 서려 있었다.
이제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6월 3일, 내 사망신고가 정식으로 접수되는 그 ‘현장’으로 뛰어드는 것. 시스템이 나를 제갈후로 인식하고 있을 때, 그 왜곡된 회수 절차의 심장부를 타격해야 했다.
“제갈후의 권한으로 기록국 심부까지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위험해요.”
윤서하가 경고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도윤 씨는 더 완벽하게 제갈후로 오인당할 거야. 마지막엔 당신 자신이 강도윤이라는 사실조차 잊어버릴지도 몰라.”
“죽는 것보단 낫지. 적어도 내 이름표 값은 하고 죽어야겠어.”
나는 가슴팍의 이름표를 툭툭 쳤다. 기분 나쁜 고동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졌다. 제갈후, 그 정체 모를 인간의 그림자가 내 안으로 점점 스며들고 있었다.
그때였다.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감식실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구식 팩스기가 혼자 작동하기 시작했다. 전원선도 뽑혀 있는 기계였다.
치익, 치익.
마치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를 내며 종이 한 장이 천천히 밀려 나왔다. 우리 넷의 시선이 일제히 그 종이에 꽂혔다.
“……이게 뭐야?”
이현우가 조심스럽게 종이를 집어 들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종이 상단에는 굵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망 예정자 회의 참석자 명단]
그 아래로 익숙한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강도윤 (확정)
윤서하 (추적 중)
이현우 (예비)
한지율 (보관 중)
그리고 마지막 줄, 지금 이 방에는 절대 있을 수 없는, 하지만 이 모든 사태의 시작점인 이름이 박혀 있었다.
제갈후 (진행자)
끼익—
감식실의 낡은 스피커에서 누군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주 낮은, 중년 남성의 음성이 잡음 사이로 흘러나왔다.
[회의를 시작하지. 내 이름을 빌려 간 친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