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85화. 강도윤의 빈 환자복과 0-14번 검증석
제목: 84화. 강도윤의 빈 환자복
목덜미에 붙은 ‘제갈후’의 이름표가 아궁이 속의 석탄처럼 시퍼렇게 달아올랐다. 단순히 뜨거운 게 아니라, 살점을 파고들어 신경줄을 낚시 채듯 잡아당기는 감각이었다. 그와 동시에 침상 위에 놓인 빈 환자복이 부풀어 올랐다.
“저기요, 대리님. 저건 사이즈가 좀 작은 것 같은데요. 제가 어깨가 좀 있는 편이라 엑스라지 아니면 안 입거든요.”
입술이 파르르 떨렸지만 농담부터 튀어 나갔다. 공포는 내 가장 오래된 방어기제였고, 지금 이 상황은 방어기제를 풀가동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빈 환자복의 소매가 스르르 들렸다. 안에는 팔도, 몸통도 없는데 누군가 투명 인간이라도 된 양 단추를 하나하나 채우기 시작했다. 투두둑, 실밥 터지는 소리와 함께 환자복이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니, 목덜미의 이름표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정렬’했다.
“도윤 씨, 오지 마요!”
윤서하가 내 팔을 낚아챘다. 평소의 냉정함은 어디 갔는지 그녀의 손끝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나를 붙잡는 순간, 수선실 바닥에 드리워진 거대한 재봉틀의 그림자들이 촉수처럼 서하의 발목을 향해 뻗어 왔다.
‘0-14번 보관함.’
서하의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꼬리표가 일렁이는 듯했다. 그녀의 상태창이 ‘추적 중’으로 점멸할 때마다, 수선실의 그림자들은 그녀를 이 기괴한 기록의 아카이브 속으로 끌어들이려 안달이 나 있었다.
“오셨네요, 도윤 씨. 당신의 옷이 아주 잘 맞을 것 같아요.”
옆 침상에서 실밥더미를 뒤집어쓴 박영진이 입을 열었다. 아니,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박힌 실밥들이 벙긋거렸다는 표현이 정확했다. 그는 적대감을 드러내기보다, 오래된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생존자처럼 보였다.
“박영진 씨? 당신 상태가 왜 이래요?”
“몸이 아니라… 이름을 먼저 잃었거든요.”
박영진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편의점 계산대, 마지막 손님이 물었죠. 내 이름표를 보면서… 그 이름, 정말 당신 거냐고. 그 질문을 받은 순간부터 제 기록은 뜯겨 나가기 시작했어요. 초록 커튼 너머 3번 침상. 거기가 제 끝인 줄 알았는데, 수선실은 저를 놓아주질 않네요.”
그의 말대로 박영진은 인간이라기보다 누더기로 기워진 기록의 잔해에 가까웠다.
“김미영 대리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입니까?”
내가 묻자, 옆에서 무표정하게 서 있던 김미영 대리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낭독하듯 읊조렸다.
“기록 수선 관리 규정 제14조 2항. 소유권이 불분명한 이름은 예비 외피를 통해 보관한다. 강도윤 씨, 그 환자복은 당신의 ‘대기 중’인 신분을 수용하기 위한 예비 외피입니다. 만약 당신이 저 옷을 입게 되면, 현재 강도윤으로서 가진 육체의 기록은 이곳 수선실의 정식 데이터로 편입될 겁니다. 즉, 퇴사 처리가 완료된다는 뜻이죠.”
“퇴사치고는 너무 영구적인 거 아닙니까? 산 채로 박제되는 거랑 뭐가 달라요.”
“규정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녀는 도와주는 듯하면서도 철저히 시스템의 부품처럼 굴었다. 신뢰하기엔 너무나 기계적인 태도였다.
그때, 장부를 훑어보던 반가온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잠깐, 이거 절차가 이상해. 대여자 회수 조항인데, 진행자의 권한만으로는 부족해. 여기 봐요. ‘원본 확인자’ 또는 ‘최종 증인’의 서명이 누락되어 있잖아. 이 수선실, 지금 무단으로 도윤 씨 이름을 가압류하려는 거야.”
“원본 확인자?”
내 물음에 답한 건 이현우였다. 그는 부상당한 옆구리를 움켜쥔 채, 수선실 안쪽의 침상 배치와 천장에 매달린 우산 병정들의 위치를 대조하고 있었다.
“형, 뭔가 이상해. 밖에서 봤던 우산 병정들의 고개 숙인 순서랑 이 침상들 배치가 안 맞아요. 명단에는 분명 최성국이 다음 순서라고 되어 있는데… 침상 번호가 하나 비어 있어요. 4번이 있어야 할 자리에 5번이 와 있어. 최성국의 침상이 통째로 사라졌거나, 아니면 애초에 명단에 없던 침상이 하나 더 숨겨져 있다는 뜻이야.”
그의 말에 한지율이 머리를 감싸 쥐며 비틀거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과거의 파편을 쫓기 시작했다.
“나… 기억나요. 10년 전, 병원 지하. 박영진 씨의 이름표가 붙은 침상 옆에… 아주 작은 물건이 있었어. 검은 우산의 손잡이 같은 건데, 그 옆 침상에는 이름이 없었어. 아니, ‘0번’이라고 적혀 있었어. 원본… 그래, 0번 원본.”
지율의 목소리가 떨림과 동시에 내 목덜미의 이름표가 살점을 뜯어낼 듯 요동쳤다. 더 이상은 농담으로 버틸 수 없는 통증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나를 향해 다가오던 빈 환자복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스킬: 잔향청취를 발동합니다.]
처음에는 웃음이 나올 법한 소리들이 들렸다.
― 아, 이거 드라이클리닝 안 했나? 락스 냄새 오지네.
― 이번엔 좀 튼튼한 놈으로 골라야 할 텐데.
하지만 소리는 곧 기괴한 불협화음으로 변하며 뇌를 긁어내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단 하나의 문장을 만들어냈다.
― 강도윤? 아니, 그건 너한테 어울리지 않아.
― 네 이름은 원래 그게 아니었잖아.
― 껍데기를 바꿔. 진짜 너를 기억해내.
소름 끼치는 오한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강도윤이라는 이름이 내 것이 아니라고? 그럼 지난 20년 넘게 내가 살아온 기록은 다 뭐란 말인가. 내 이름은 처음부터 강도윤이 아니었다는 식의 불길한 확신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 순간, 끼이익― 하는 귀를 찢는 소음과 함께 수선실의 모든 재봉틀이 동시에 멈췄다.
정적.
바늘이 멈춘 자리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초록색 커튼 너머, 아까까지는 비어 있던 안쪽 어둠 속에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미영 대리가 오지 않았다고 했던, 혹은 올 수 없다고 했던 누군가의 목소리.
“원본 확인자의 권한으로 호출한다.”
그것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관리번호 0-14, 윤서하. 검증석으로 입장해.”
서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나를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힘없이 풀렸다.
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규칙적이었고, 그 발소리에 맞춰 수선실의 전등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했다. 암전 속에서 오직 서하의 눈동자만이 공포로 번뜩이고 있었다.
제목: 85화. 0-14번 검증석
"원본 확인자의 권한으로 호출한다. 관리번호 0-14, 윤서하. 검증석으로 입장해."
초록 커튼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건조했다. 오래된 테이프를 역재생하는 것처럼 지직거리는 소음이 섞여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위압감만큼은 서슬 퍼런 칼날 같았다.
옆에 서 있던 윤서하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커튼 너머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 일렁였다. 발걸음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듯 앞으로 나아가는 게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잡았다.
"서하 씨."
내 목소리에 그녀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 퇴근 체크 안 했잖아요. 야근 수당 신청서, 내가 대신 써줄 테니까 정신 차려요. 그거 결재 안 나면 우리 이번 달 카드값 못 막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 살벌한 수선실에서 '카드값'이나 '야근 수당' 같은 세속적인 단어만큼 강력한 정신 승리법도 없다. 윤서하의 눈에 아주 잠깐 생기가 돌아왔다. 그녀가 내 손을 마주 잡으며 짧게 숨을 내뱉었다.
"……도윤 씨."
"걱정 마요. 내가 이 구역의 프로 퇴근러잖아. 가봅시다, 그 잘난 검증석인지 뭔지 하는 데로."
우리는 함께 초록 커튼을 젖혔다.
커튼 너머의 풍경은 기괴했다. 그곳은 병원의 수술대이면서, 협회의 징계 청문회 책상이었고, 동시에 이름 모를 던전의 피 칠갑 된 제단이었다.
공간 중앙에는 거대한 의자가 놓여 있었다. 아니, 의자라기보다는 거대한 우산살들이 거미 다리처럼 얽혀 만들어진 고문 장치에 가까웠다. 수십 개의 우산살이 갈비뼈처럼 휘어져 중앙의 좌석을 감싸고 있었고, 그 꼭대기에는 검은 우산 손잡이가 마치 누군가의 목줄을 쥐려는 손처럼 매달려 있었다.
좌석 맞은편, 불투명한 유리 칸막이 너머로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였다.
"원본 확인자……?"
내가 중얼거리자, 유리 너머의 그림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최성국의 체구와 비슷해 보였지만, 목소리는 달랐다. 아니,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섞어놓은 듯한 기묘한 변성음이었다.
"0-14. 보관함의 잔여물. 10년 전 병원에서 수거되지 못한 기록. 너는 왜 살아 있지?"
질문과 동시에 검증석 주변의 우산살들이 일제히 윤서하를 향해 뻗어 나왔다. 그것들은 허공에서 멈추더니, 영사기처럼 벽면에 영상을 쏘아 올렸다.
10년 전, 화재로 얼룩진 병원 복도였다.
초록 커튼이 찢어진 채 휘날리고, 그 사이로 작은 아이가 웅크리고 있었다. 아이의 발목에는 '0-14'라고 적힌 이름표가 묶여 있었다.
'살아 있어서는 안 되는 아이야. 이건 보관함으로 들어가야 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서하는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며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했다. 검증석의 우산살들이 그녀의 그림자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내 목덜미에 붙어 있던 '제갈후'의 이름표가 미친 듯이 뜨거워졌다.
[경고: 진행자 권한이 활성화됩니다.]
[수선실의 시스템이 당신을 '제갈후'로 오인합니다.]
내 시야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동시에 내 손에 보이지 않는 권한의 실타래가 쥐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가 이 심문의 사회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윤 씨, 질문의 형식이 중요해요!"
뒤에서 지켜보던 반가온이 다급하게 외쳤다.
"저 시스템은 '예/아니오'로 답이 정해지는 질문을 던져서 기록을 확정 지으려 할 거예요. 만약 서하 씨가 0-14라는 걸 확정해버리면, 수선실은 그녀를 '회수된 물품'으로 처리해서 소멸시킬 거예요. 질문을 우회해야 해요!"
원본 확인자의 실루엣이 입을 열었다.
"진행자 제갈후. 질문하라. 관리번호 0-14는 폐기 대상인가?"
독한 질문이었다. 폐기 대상이라고 답하면 서하 씨는 죽고, 아니라고 답해도 그녀의 정체가 0-14라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된다.
나는 머리를 굴렸다. 농담을 던질 때보다 더 빠르게.
"질문하기 전에 확인할 게 하나 있는데."
나는 윤서하 대신 검증석 아래를 가리켰다. 이현우가 옆에서 내 옷자락을 당기며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바닥에 깔린 격자무늬 타일과 침상의 배치 순서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현우 씨, 찾았어?"
"네, 도윤 형. 침상 배치가 이상해요. 1, 2, 3번은 저쪽에 있는데, 4번 침상…… 그러니까 최성국의 침상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어요. 대신 그 번호판이 지금 저 유리 너머, '원본 확인자'가 앉아 있는 관람석 의자 밑에 붙어 있습니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군. 심판자인 줄 알았더니, 당신도 그냥 증인석에 앉은 피고인 중 하나였나 보네?"
유리 너머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틈을 타 한지율이 눈을 감고 박영진의 환자복 소매를 꽉 쥐었다.
"박영진 씨가…… 말하고 있어요."
지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0-14는…… 죽은 아이의 번호가 아니라고. 그건 그 지옥 같은 병원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이'에게 부여된 번호였다고 해요. 회수할 물건이 아니라, 기록에서 삭제된 '생존자'의 번호라고!"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나는 제갈후의 권한을 이용해 시스템의 논리를 비틀었다.
"원본 확인자에게 묻는다. 관리번호 0-14의 기록이 '폐기'가 아닌 '생존'으로 분류되어 있다면, 이 검증은 무효 아닌가? 그리고 진짜 질문은 이거지. 당신이 확인하려는 원본이, 정말로 윤서하 하나뿐인가?"
나는 질문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윤서하의 유죄를 묻는 게 아니라, 시스템 자체의 오류를 지적하는 우회 질문이었다.
검증석의 우산살들이 굉음을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과부하에 걸린 듯 불꽃을 튀겼다.
"권한 충돌…… 기록 재확인……."
기계적인 음성이 들리더니, 벽면에 재생되던 윤서하의 과거 영상이 지직거리며 깨졌다. 그리고 그 노이즈 사이로 전혀 다른 영상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윤서하의 기록이 아니었다.
낡은 진료 기록표 한 장이 클로즈업되었다. 이름 칸은 비어 있었다. '이름 없는 아이'라고 적힌 그 기록표의 하단, 보호자 및 확인자 서명란이 보였다.
거기에는 굵고 선명한 필체로 이름 하나가 박혀 있었다.
[최성국]
그리고 그 옆에, 익숙한 문양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검은 우산 모양의 직인.
나는 멍하니 그 기록표를 바라보았다. 영상 속 아이의 손등에 선명한 흉터가 보였다. 지금 내 손등에 있는 것과 똑같은 위치, 똑같은 모양의 흉터가.
검증석 옆 빈 환자복이 바닥을 질질 끌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소매 끝에서 물방울 같은 푸른 빛이 떨어졌다. 그 빛은 바닥의 타일 틈으로 스며들더니, 오래된 병원 팔찌 모양으로 굳었다. 팔찌에는 이름이 없었다. 대신 작은 검은 우산 그림자만 눌어붙어 있었다.
"잠깐만. 내 과거가 병원 기록표면 보험 청구는 누구한테 해야 하는데."
목소리는 농담처럼 나왔지만, 혀끝이 마비된 것처럼 굳었다. 윤서하가 내 손목을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붙잡는 게 아니라, 그녀가 나를 현실 쪽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도윤 씨. 저거, 끝까지 보지 마요."
"이미 봤어요. 그리고 나 원래 하지 말라는 건 월세 독촉장 빼고 다 보는 성격이라."
"이게…… 내 기록이라고?"
유리 너머의 목소리가 비웃듯 낮게 깔렸다.
"원본 확인은 끝났다. 강도윤, 네 이름은 원래 그게 아니었지."
벽면의 기록표가 타들어가며 마지막 문구를 내뱉었다.
[관리번호 0-0. 원본 확인 완료.]
내 목덜미에 붙은 이름표가 살을 태울 듯 뜨거운 열기를 뿜어냈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시야가 검게 물드는 와중에도, 그 검은 우산 문양만은 망막에 낙인처럼 박혀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