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137화. 직원 전용 폐기함과 냉장 폐기실의 백설
제목: 136-137화. 직원 전용 폐기함과 냉장 폐기실의 백설
제목: 136화. 직원 전용 폐기함
철컥, 기분 나쁜 기계음과 함께 바닥 한쪽에서 거대한 금속제 투입구가 입을 벌렸다. 사무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쇄기의 거대화 버전 같기도 했고, 식당 주방에 달린 음식물 쓰레기 처리기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았다. 쇠와 쇠가 맞물려 돌아가며 존재 자체를 잘게 써는 듯한 불길한 진동. 그게 ‘직원 전용 폐기함’의 정체였다.
[경고: 대리 감사관 ‘강도원’의 해고 절차가 개시되었습니다.]
[사유: 근태 불량 및 직무 유기(15년), 권한 남용, 데이터 조작.]
[현재 상태: 폐기 대기 중.]
“형!”
나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내 손에 잡힌 건 따스한 형의 체온이 아니라, 미친 듯이 휘날리는 종이 쪼가리들과 뿌연 먼지 같은 잔향뿐이었다. 형의 형상이 희미해지며 폐기함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서류 뭉치가 진공청소기 입구에 달라붙는 모양새였다.
“이게 무슨 해고야! 퇴직금도 안 주고 사람을 갈아버리는 게 어딨어!”
나는 폐기함 입구를 붙잡고 버텼다. 금속 날이 돌아가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손끝이 날카로운 금속 테두리에 긁혀 피가 맺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이 구멍으로 형이 사라지면, 15년 만에 겨우 찾아낸 내 ‘빽’이 영원히 파쇄된다는 공포가 더 컸다.
“윤서하! 이거 어떻게 좀 해봐! 당신 보호자라며!”
내 외침에 윤서하가 서둘러 단말기를 조작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시스템 창의 푸른 빛을 받아 차갑게 가라앉았다.
“보호자 0번 권한으로 강도원의 폐기 절차를 일시 정지합니다. 대상의 데이터 보호를 요청…!”
[거부되었습니다.]
[안내: 보호자 권한은 등록된 ‘피보호자(강도윤)’에게만 국한됩니다.]
[대리 감사관은 소모성 비품으로 분류되므로 보호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 미친 시스템이….”
윤서하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평소라면 기계보다 더 기계처럼 굴었을 그녀였지만, ‘원본 반환’이라는 메시지를 본 이후로 그녀의 평정심은 이미 박살 나 있었다.
그때, 구석에서 태블릿을 두드리던 이현우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도윤 형! 이거 이상해요! 형님이… 강도원 씨가 일부러 해고 시간을 늦춰놨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로그를 보니까, 이미 10년 전부터 해고 프로세스가 예약되어 있었는데, 강도원 씨가 시스템 루프를 돌려서 계속 ‘현재’로 미뤄왔다고요. 도윤 형이 여기까지 올 때까지, 그러니까 이 B-0층의 문이 열릴 때까지 시간을 벌고 있었던 거예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형은 15년 동안 이 어둡고 칙칙한 지하실에서, 언제 갈려 나갈지 모르는 파쇄기 입구에 발을 걸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내가 밖에서 ‘이번 달 월급은 왜 이 모양일까’ 고민하며 편의점 도시락이나 까먹고 있을 때, 형은 자기 존재가 지워지는 걸 막으며 버텼다.
“으윽, 냄새….”
가온이가 코바람을 킁킁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폐기함 입구 근처로 다가오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이거 우산 냄새가 아니에요. 피 냄새도 아니고요.”
“그럼 뭔데?”
“편의점 폐기 도시락 냄새요. 그것도 유통기한이 아주 한참 지나서, 안에서 뭐가 썩어 문드러진… 딱딱하게 굳은 플라스틱이랑 쉬어버린 밥알 냄새 같은 게 나요.”
가온이의 말은 이 공간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최초 점장이라는 놈에게 인간의 생명은 그저 팔리지 않아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그래서 폐기함에 던져 넣어야 할 ‘재고 상품’에 불과했다. 형은 그 유통기한을 억지로 늘리며 버틴 셈이었다.
[파쇄 공정 80% 진행 중.]
[잔여 기록 삭제를 시작합니다.]
“형! 강도원! 대답 좀 해봐!”
나는 폐기함 속으로 상반신을 들이밀다시피 했다. 잔향청취가 폭주하듯 활성화되었다. 소음 속에 섞인 형의 목소리를 찾아 귀를 기울였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너머로, 아주 멀고 희미하게, 하지만 지독하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강도윤. 너 아직도 그렇게 소리만 지르냐? 옆집에서 민원 들어온다.
형이었다. 죽기 직전에도 옆집 눈치를 보라고 타박하던, 그 재수 없는 형의 목소리.
퇴사 처리 한 번 하려는데 결재선이 왜 이렇게 많냐. 사직서 던지는 것도 능력이라더니, 난 영 재능이 없나 봐. 야, 울지 마. 인상 쓰면 주름 생긴다. 안 그래도 노안인데.
“누가 울어! 형, 지금 농담할 때야? 당장 나와! 나오라고!”
못 나가. 나 이미 서류상으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놈이야. 아까 보니까 너 ‘회수 절차’ 떴더라? 너까지 여기 들어오면 우리 집안 제사는 누가 지내냐. 나는 됐으니까 내 인수인계나 잘 받아.
“인수인계? 그딴 거 안 받아! 내 손 잡아!”
내 손이 폐기함 안쪽의 거대한 칼날 직전까지 닿았다. 형의 형체는 이미 종이 조각이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형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픽 웃는 듯한 잔향을 남겼다.
야, 그래도 형이 막판에 ‘복지’ 하나는 챙겨놨다. 원래 퇴사할 때 회사 기밀 하나쯤은 들고 나가는 게 국룰이잖아? 거기, 밑에 걸린 거 하나 잡아라. 내 마지막 연차 수당이다.
그 목소리를 끝으로, 거센 흡입력이 멈췄다.
쾅!
폐기함의 뚜껑이 닫혔다.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무심하게 떠올랐다.
[대리 감사관 ‘강도원’의 해고 및 폐기 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직원을 준비해 주십시오.]
“형….”
나는 닫힌 금속 뚜껑 위에 엎드려 숨을 헐떡였다. 손톱이 뒤집히고 손등이 쓸려 피가 철철 흘렀다. 허탈함과 분노가 뒤섞여 목구멍까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내 손끝에 무언가 딱딱한 것이 걸렸다. 폐기함 뚜껑 틈새에 끼어 미처 파쇄되지 않은, 검은색 가죽 폴더 하나였다. 형이 말한 ‘인수인계’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폴더를 낚아챘다. 폴더 겉면에는 휘갈겨 쓴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후임자를 위한 인수인계서 (열람 주의: 점장 몰래 볼 것)>
“도윤 형, 그거….”
이현우와 윤서하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거칠게 폴더를 펼쳤다. 그 안에는 형이 15년 동안 모아온 시스템의 허점과 기록들이 빽빽하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가장 첫 장, 붉은색 스탬프가 찍힌 보고서가 우리의 시선을 강탈했다.
[특이 사항: ‘보호자 0번’ 개체 분리 및 원본 보존 현황]
[대상명: 백설(원본)]
[상태: 저온 동결 상태로 보관 중]
[보관 위치: B-0층 냉장 폐기실]
내 옆에 서 있던 윤서하의 숨소리가 멎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윤서하가 ‘대리인’이라면, 진짜 ‘백설’은 이 층 어딘가 냉장고 안에 처박혀 있다는 소리였다.
달칵.
어디선가 기계적인 작동음이 들렸다.
우리는 고개를 돌려 방 한구석, 녹슨 기록 보관소 옆에 놓인 거대한 업소용 냉장고를 보았다. 평범한 식당에서 콜라나 소주를 넣어둘 법한, 유리문 너머가 보이지 않게 성에가 잔뜩 낀 그 냉장고였다.
똑, 똑똑.
안쪽에서 무언가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느리고, 힘겹게.
마치 15년 동안 갇혀 있던 누군가가 이제야 우리가 온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설마… 저기야?”
가온이가 내 옷자락을 꽉 쥐었다. 냉장고 안에서 나는 냄새는 더 이상 썩은 도시락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내가 잊고 지냈던 차가운 겨울비 냄새였다. 젖지 않은 검은 우산에서 나던, 서늘하고도 쓸쓸한 그 냄새가 냉장고 틈새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제목: 137화. 냉장 폐기실의 백설
업소용 냉장고는 보통 콜라나 맥주를 시원하게 보관하기 위해 존재한다. 가끔은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이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대기실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내 눈앞에 있는 이 낡은 스테인리스 냉장고는 그 이상의 무언가였다.
유리문 너머로 자욱한 성에가 끼어 있었다. 안쪽에서 누군가 손바닥으로 유리를 툭, 툭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고도 기분 나쁜 소리. 그 틈새로 비집고 나오는 건 차가운 냉기만이 아니었다.
겨울비의 냄새. 그리고 젖지 않은 검은 우산의 냄새.
내 형, 강도원이 남긴 마지막 흔적이 이 안에 무엇인가가 있다고 가리키고 있었다.
“……도윤 씨, 이거 그냥 냉장고가 아니에요.”
윤서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냉장고 손잡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소라면 누구보다 먼저 상황을 분석했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었다. ‘백설(원본)’이라는 글자가 그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침을 삼키며 형이 남긴 ‘인수인계서’를 꽉 쥐었다. 종이 끝이 구겨졌다. 형은 죽어서도 나에게 숙제를 남겼다. 그것도 아주 난해한 놈으로.
“알아. 편의점 냉장고가 이 정도로 크면 그건 이미 가전제품이 아니라 부동산이지.”
나는 짐짓 농담조로 중얼거리며 냉장고 문에 손을 올렸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냉기가 뼛속까지 시렸다. 형을 방금 잃은 내 속도 이 냉장고 안감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중이었지만, 내가 여기서 무너지면 옆에 서 있는 윤서하는 그대로 동사할 것 같았다.
[경고: 허가되지 않은 접근입니다.]
[해당 구역은 ‘최초 점장’의 직속 관리하에 있는 ‘냉장 폐기실’입니다.]
차가운 시스템 메시지가 망막을 때렸다. 동시에 냉장고 문이 자석이라도 붙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서하 씨, 뒤로 좀 물러나요. 이거 억지로 열다가 손톱 다 빠지겠네.”
내 말에 윤서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니요. 제가…… 제가 해야 해요. 여기 적힌 ‘백설’이 정말 나라면, 내 권한으로 열릴지도 몰라요.”
“서하 씨.”
“만약 내가 가짜라면, 최소한 진짜가 누구인지는 봐야겠어요. 그래야…… 그래야 내가 왜 여기 있는지 알 수 있잖아요.”
그녀는 실무적인 어조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목소리에 섞인 물기는 숨기지 못했다. 그녀가 냉장고 손잡이를 잡으려 할 때, 옆에서 로그를 훑고 있던 이현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만요! 그거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서하 씨 권한은 ‘보호자 0번’인데, 지금 시스템은 이 구역을 ‘폐기 예정 재고’로 분류하고 있어요. 재고는 권한자가 아니라 ‘점장’만이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쩌라고? 점장 불러와서 ‘여기 폐기물 좀 꺼내주쇼’ 하고 부탁이라도 할까?”
내가 쏘아붙이자 이현우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인수인계서의 뒷장을 가리켰다.
“방법이 있습니다. 형님이 남긴 메모를 보세요. ‘폐기 예정 재고’는 버릴 수 있지만, ‘회수 요청된 분실물’은 함부로 처리할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요. 시스템의 맹점입니다. 최초 점장은 규정에 집착하니까요.”
“분실물?”
“네. 누군가 이 안의 내용물을 ‘자신의 잃어버린 물건’으로 등록하면, 시스템은 소유권 확인 절차를 거치는 동안 폐기 절차를 중단해야 합니다.”
반가온이 냉장고 틈새에 코를 들이밀고 킁킁거렸다. 그러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기괴한 감상을 내놓았다.
“아…… 냄새 이상해. 이거, 첫눈을 비닐봉지에 꽉꽉 눌러 담아서 냉동실 구석에 한 10년쯤 처박아 둔 냄새야.”
“그게 뭔 개소리야.”
“진짜야, 아저씨. 차갑고 깨끗한데, 아주 오래돼서 플라스틱 냄새가 밴 그런 냄새. 살아있는 냄새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죽은 고기 냄새도 아니야.”
가온의 묘사는 이상하게도 가슴 한구석을 찔렀다. 잊힌 채 얼어붙은 시간의 냄새.
나는 이현우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그 분실물 등록은 누가 하는데?”
“그게 문제입니다. 등록하는 순간, 등록자의 이름이 시스템 로그에 영구적으로 박힙니다. ‘최초 점장’이 언제든 추적할 수 있는 좌표가 되는 거죠. 사실상 자기 목에 개목줄을 채우는 꼴입니다.”
윤서하가 입술을 깨물며 나섰다.
“제가 할게요. 어차피 제 이름은 이미 시스템에……”
“아니.”
나는 그녀를 제치고 냉장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서하 씨 이름은 이미 ‘보호자 0번’이니 뭐니 해서 스팸 메일함 수준으로 팔렸잖아. 이번엔 내 이름을 쓰지.”
“도윤 씨! 위험해요. 이건 시스템에게 대놓고 자기를 잡아가라고 광고하는 거예요.”
“내 이름이 할인 쿠폰처럼 여기저기 돌고 도는 꼴을 보느니, 그냥 내가 들고 있는 게 속 편해. 원래 주인공은 이름값이 비싼 법이잖아? 그리고 형이 나한테 이 종이를 건넨 건, 동생 이름 석 자 정도는 책임지라는 뜻이었을 거야.”
나는 망설임 없이 냉장고 옆에 부착된 키패드에 손을 올렸다.
[분실물 회수 신청을 진행하시겠습니까?]
[신청자 성명을 입력하십시오.]
나는 ‘강도윤’ 석 자를 타이핑했다.
[신청자: 강도윤 (지위: 대리 수령인)]
[대상을 ‘분실물’로 재분류합니다. 폐기 절차 일시 중단.]
[냉장 폐기실 개방합니다.]
치이익—
압력 차로 인해 뿌연 냉기가 쏟아져 나왔다. 냉장고 문이 열린 게 아니었다. 냉장고의 뒷벽이 무너지듯 뒤로 밀려나며, 그 너머에 감춰져 있던 ‘공간’이 드러났다.
그곳은 냉장고 속이 아니라, 별도의 독립된 병동 같았다.
천장에는 성에가 꽃처럼 피어 있었고, 바닥에는 차가운 금속 매대들이 끝도 없이 줄지어 있었다. 편의점의 냉장 매대와 병원의 영안실 거치대를 기괴하게 섞어놓은 듯한 풍경.
매대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실험체 402호 - 폐기 완료’
‘대리 수령자 B-12 - 손상’
우리는 그 서늘한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앞장섰다. 서하 씨는 자신의 이름이 적힌 매대를 발견할까 봐 두려운 듯 내 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가장 깊은 곳.
유독 푸른빛이 감도는 냉장 매대 하나가 있었다. 그 위에는 투명한 얼음 덩어리 같은 코어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 낡은 환자 팔찌 하나가 놓여 있었다.
[백설(원본)]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사람의 형상을 하기 전의 무엇인가였다. 아주 작은 아이의 손목에나 맞을 법한 플라스틱 팔찌. 그리고 그 팔찌 밑에는 형의 필체로 적힌 쪽지가 하나 더 있었다.
[도윤아, 이건 네가 흘리고 간 기억이다.]
“이게…… 나라고요?”
윤서하가 홀린 듯 팔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팔찌에 닿으려는 찰나, 내 머릿속에서 강렬한 이명이 발생했다.
‘잔향청취.’
내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능력이 폭주하듯 터져 나왔다. 낡은 팔찌에서 스며 나온 잔향이 차가운 겨울비의 냄새를 타고 내 고막을 긁었다.
— 오빠.
어린아이의 목소리였다. 가늘고, 떨리고,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 이번엔 나를 두고 가면 안 돼. 꼭, 같이 가기로 했잖아.
그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내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윽!”
옆에서 짧은 신음이 들렸다. 윤서하였다. 그녀의 손끝부터 하얀 성에가 끼기 시작하더니, 마치 냉동실에 방치된 고기처럼 그녀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서하 씨!”
내가 그녀를 붙잡았지만, 그녀의 피부는 이미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응시했다. 아니, 그녀는 허공이 아니라 내 뒤의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오…… 빠…….”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온 목소리는 방금 팔찌에서 들었던 그 아이의 목소리와 똑같았다.
[동기화율 급증: 원본과 대리 개체의 공명 발생.]
[시스템 경고: 냉장 폐기실의 온도가 급격히 하락합니다. 생존 가능 시간 120초.]
병동 침대 밑에서, 그리고 냉장 매대 사이사이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젖지 않은 검은 우산을 든 그림자들이 우리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형은 인수인계서에 한 줄을 빼먹은 모양이다.
분실물을 찾으러 오면, 그 분실물도 주인을 반가워할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