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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135화. 퇴근 카드의 잔향과 B-0층 처리실 일러스트

134-135화. 퇴근 카드의 잔향과 B-0층 처리실

제목: 134화. 퇴근 카드의 잔향

바닥에 떨어진 사원증은 무거웠다. 물리적인 무게가 아니라, 그 위에 얹힌 이름 석 자가 주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대리 감사관: 강도원]. 15년 전 사라진 형의 이름이 피 섞인 글자로 박혀 있었다.

손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드는 순간, 손가락 끝에서부터 소름 끼치는 진동이 타고 올라왔다.

“도윤 씨, 잡지 마요!”

이현우의 외침이 들렸지만 이미 늦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스킬 ‘잔향청취’가 강제로 개방됐다. 시스템의 경고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경고: 허가되지 않은 ‘인수인계’가 시작됩니다.]

[대리 감사관의 잔향이 주변 환경을 재구성합니다.]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현대적인 감사실의 하얀 벽면이 마치 낡은 벽지를 뜯어내듯 벗겨져 나갔다. 그 틈새로 15년 전 격리 병동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들이쳤고, 동시에 빗물에 젖지 않은 검은 우산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기괴한 사무실의 잔상이 겹쳐졌다.

현재와 과거, 그리고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행정 공간’이 한데 뒤섞인 카오스였다.

“이게 뭐야….”

반가온이 코를 킁킁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녀석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피 냄새가 아니야. 이건… 영수증 잉크 냄새랑, 젖지 않은 우산 천 냄새. 그리고 소독약. 아저씨, 이 소독약 냄새, 아저씨한테서 났던 거랑 똑같아. 아주 어릴 때 나던….”

가온의 말은 정답이었다. 내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그 냄새. 15년 전 병동에서 나를 감싸던 그 서늘한 향기다. 그리고 그 향기는 지금 내 옆에 선 윤서하, 아니 ‘백설’에게서도 미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장소에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때, 내 손바닥 안의 사원증이 바르르 떨리며 기괴한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잔향청취로 들려오는 것은 단순한 음성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물에 깃든 원념이자, 직장인의 비명이 섞인 시스템의 잔재였다.

퇴근 도장을 찍었는데 왜 출근 게이트에 또 찍히는 거야….

인수인계서 없이 퇴사하면 법적으로 귀신이 된다고 했잖아.

미수령된 사망 플래그를 처리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이 문을 나갈 수 없다.

“이 사원증, 미쳤는데.”

나는 헛웃음을 삼켰다. 이 상황에서도 유머를 찾는 건 내 오랜 방어기제였다.

“현우 씨, 이거 봐요. 사원증이 인수인계 안 하고 도망가면 귀신 된다고 투덜대는데. 요즘 귀신들은 노동법도 따지나 보죠?”

“도윤 씨, 농담할 때가 아니에요!”

이현우가 다급하게 단말기를 두드렸다.

“로그가 이상해요. 이 사원증, ‘퇴근 완료’랑 ‘근무 중’이 동시에 찍혀 있어요. 양자역학적 출근부도 아니고 이게 뭡니까? 시스템에 치명적인 버그가 걸렸거나, 아니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백도어예요.”

그때, 일그러진 공간의 중심에서 형의 형상이 떠올랐다. 아니, 그건 형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투명하고 차가운 무언가였다. ‘대리 감사관’이라는 직함이 형의 얼굴 위로 기괴한 가면처럼 덧씌워져 있었다.

형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직접 긁어내렸다.

도윤아.

그건 녹음된 메시지도, 생생한 생존자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물건에 남은 기억과 최초 점장이 남긴 계약의 문구가 뒤섞인 조각들이었다.

내가 네 이름을 지웠다.

형의 고백에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15년 전, 그날의 진실.

하지만 도윤아, 오해하지 마라. 나는 네 이름을 지웠을 뿐, 네 죽음 자체를 지운 건 아니야. 죽음은 누군가 대신 받아 가야만 하는 거였지.

형의 형상이 고개를 돌려 윤서하를 향했다. 서하는 미동도 하지 않고 그 환영을 응시했다. ‘백설’이라는 코드명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사원증의 권한 구조를 뜯어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였나요?”

서하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도윤 씨의 죽음을 대리 수령하고, 합산 관리되는 소모품. 그게 ‘백설’의 역할이었냐고 묻는 거야, 강도원.”

형의 환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원증의 잔향이 관계를 뒤집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백설을 찾으라고 한 적 없다. 백설이 너를 먼저 찾은 거다. 도윤아, 너는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어.

그 순간, 사원증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감사실 바닥에 푸르스름한 홀로그램 지도가 투사되었다. 그것은 협회 지하 도면이었지만,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달랐다.

지하 5층, 그 아래. 공식 도면에는 존재하지 않는 층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B-0층…?”

서하가 그곳을 가리켰다.

“폐점 기록 보관소. 혹은 ‘퇴근 처리실’. 모든 서류상의 죽음이 실제로 집행되는 곳이야.”

이현우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거긴 관리자 권한 없이는 진입조차 불가능한 곳인데… 이 사원증이 키였군요. 대리 감사관의 권한으로 내부 감사실의 잠금을 강제로 풀고 있어요.”

사원증이 투사하는 홀로그램 하단에 붉은색 텍스트들이 빠르게 나열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처리 대기 명단이었다.

[인수인계 목적지: B-0층 퇴근 처리실]

[대상 명단 확인 중…]

목록의 맨 아래, 내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문구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대리 감사관 강도원: 처리 예정 (잔업 미이행)

피보호자 강도윤: 동행 필수 (인수인계 대상자)

보호자 0번 윤서하: 원본 반환 대기

“원본 반환?”

내가 그 단어를 읊조리는 순간, 발밑의 바닥이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듯 갈라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추락하는 듯한 굉음이 들렸다. 감사실의 벽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15년 동안 닫혀 있던 검은 지옥의 입구가 우리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나는 옆에 선 윤서하의 손을 꽉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결코 놓칠 수 없었다.

지하 0층. 그곳에 형이 있고, 우리의 조작된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홀로그램의 마지막 줄이 점멸하며 우리에게 선고를 내렸다.

[주의: 해당 구역은 ‘퇴근’하지 못한 자들의 구역입니다. 생존 시간 합산 수치가 0에 도달하기 전까지 로그아웃이 금지됩니다.]

제목: 135화. B-0층 퇴근 처리실

발밑이 꺼지는 감각은 익숙하다. 헌터 생활을 하다 보면 게이트가 닫히거나 바닥이 무너지는 일쯤은 일상 다반사니까.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건 추락이 아니었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위로 밀어내고 있었다.

띠링-.

[지각입니다. 사유서를 작성하십시오.]

[미태그 외출은 급여 삭감 대상입니다.]

[즐거운 퇴근길 되세요! 내일도 지옥 같은 업무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귀가 먹먹해지는 소음과 함께 환청 같은 시스템 안내음이 쏟아졌다. 엘리베이터 안내음이라기엔 지나치게 비인간적이고, 출근용 게이트의 비프음이라기엔 지나치게 감성적인 목소리였다.

마치 거대한 출근 게이트를 거꾸로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영혼까지 바코드가 찍혀 낱낱이 읽히는 기분 나쁜 소름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으윽, 이거 멀미 나는데….”

이현우가 신음하며 바닥을 짚었다. 나 역시 헛구역질을 참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간이 바뀌어 있었다.

분명 우리는 협회 지하 감사실에 있었지만,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곳은 규정할 수 없는 기괴한 장소였다. 천장에는 수명을 다해 파르르 떨리는 형광등이 줄지어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로는 폐점한 편의점의 매대와 병동의 철제 침대, 그리고 협회 기록 보관소의 거대한 캐비닛들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었다.

“B-0층….”

반가온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지하 1층보다 깊지만, 숫자는 0이다.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공간, 혹은 모든 것이 시작되기 전의 '무(無)'의 상태.

공간 한가운데에는 텅 빈 편의점 계산대가 놓여 있었고, 그 옆에는 젖지 않은 검은 우산들이 꽂힌 우산 꽂이가 마치 비석처럼 늘어서 있었다. 공기 중에는 소독약 냄새와 낡은 종이 냄새, 그리고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삼각김밥의 쉰내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윤 대리님, 괜찮아요?”

나는 곁에 선 윤서하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아까부터 사원증에 적힌 문구, [보호자 0번 윤서하: 원본 반환 대기]라는 글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형광등 불빛을 받아 차갑게 가라앉았다.

“도윤 씨, 저 문구 말이에요.”

“예.”

“‘원본 반환’이라는 건, 지금의 제가 원본이 아니라는 뜻이겠죠.”

윤서하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치게 냉정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녀는 자신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펴며 덧붙였다.

“기억의 일부가 등록명 ‘윤서하’라는 껍데기에 갇혀 있고, 진짜 알맹이는 이곳에 저당 잡혀 있다는 가설이 성립해요. 시스템이 저를 물건 취급하고 있네요. 반환해야 할 물품 정도로.”

“물건은 무슨.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하면 제 손에 죽을 줄 알라고 하세요.”

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내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곳에 감도는 압도적인 ‘정리’의 기운 때문이었다.

그때, 이현우가 단말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아니, 이게 뭐야? 접속이 되긴 하는데….”

“뭐가 뜹니까?”

“권한 없음이 아니라 이상한 메시지가 떠요. [방문자 권한 없음: 단, 퇴근 예정자 동행자 할인 대상입니다. 처리 비용 50% 감면]. 도윤 씨, 우리 지금 타임 세일이라도 하는 거야?”

이현우의 농담에는 짙은 긴장감이 배어 있었다. 시스템이 우리 일행 전체를 강도원의 ‘퇴근 처리’에 묶인 부속품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할인이라는 말은 결국, 우리도 같이 처리해주겠다는 비릿한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도윤아, 여기.”

반가온이 계산대 위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오래된 영수증 더미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가온이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백설… 아니, 서하 언니 어릴 때 냄새가 나. 그리고 네 냄새도.”

영수증 더미 위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끝이 누렇게 변색된 감열지에 닿는 순간, 억눌러왔던 잔향청취가 폭발하듯 머릿속을 헤집었다.

오빠, 이쪽이야.

아이의 목소리였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15년 전의 잔상이 겹쳐졌다.

어린 백설이 어린 도윤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지만, 백설의 눈만큼은 형형하게 빛났다. 그녀는 익숙한 듯 출근 게이트의 센서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내가 먼저 갈게. 오빠는 내 뒤만 따라와. 여기만 지나면 퇴근할 수 있어.

아이들이 게이트를 통과한다. 하지만 게이트 너머는 자유가 아니라, 더 깊은 어둠이었다. 백설은 자신을 희생해서 나를 밖으로 내보낸 게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끌고 더 깊은 곳으로, 이 '처리실'의 심장부로 들어왔던 것이다.

“…백설이 나를 먼저 찾았다는 게 이런 뜻이었나.”

나는 비틀거리며 계산대 뒤편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낡은 CCTV 모니터 여러 대가 노이즈를 뿜어내며 켜져 있었다.

화면 속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강도원.

그는 대리 감사관의 복장을 한 채, 지난 15년 동안 이 미친 공간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캐비닛에서 서류를 꺼내 다른 곳으로 옮기고, '처리 예정'이라고 적힌 명단 위에 덧칠을 해서 글자를 지웠다.

그는 시스템의 눈을 속이고 있었다.

[처리 예정자: 강도윤]이라는 글자가 보이면, 그는 재빨리 그 서류를 '반납 불가 물품'이라고 적힌 캐비닛에 쑤셔 넣었다. [윤서하]의 기록이 나타나면 '분실물' 함으로 던져버렸다.

그는 감사관이 아니라, 기록을 조작하는 은밀한 세탁업자였다. 동생의 죽음을 지우기 위해, 그리고 동생이 사랑하는 여자의 파멸을 늦추기 위해 그는 이 폐쇄된 지하에서 홀로 시스템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화면의 마지막, 강도원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서류를 들고 잠시 멈춰 섰다. 그는 망설임 없이 자신의 서류를 [직원 전용 폐기함]에 밀어 넣었다.

“형….”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이 바보 같은 인간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우리 형, 진짜 정리 정돈 못 한다니까. 아니, 이건 그냥 쓰레기를 숨겨놓은 거잖아.”

나는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낄낄거렸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그러면 정말로 형의 희생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 같아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뭐야, 반납 불가 물품이라니. 내가 무슨 명품 가방이라도 되는 줄 아나.”

“도윤 씨, 손 떨려요.”

윤서하가 내 손을 가만히 잡아왔다. 그녀의 온기가 닿자 억지로 버티던 냉소의 벽에 금이 갔다.

그녀는 모니터를 응시하며 낮게 말했다.

“도원 선배는 시간을 벌고 있었던 거예요. 시스템이 우리를 찾아내지 못하도록 오분류된 함에 숨겨두고, 본인은 폐기 처분되는 길을 택하면서까지.”

그때였다.

철커덕-.

정적을 깨고 구석에 있던 검은 우산 꽂이 중 하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우산이 튀어나올 줄 알았으나, 그 안에서 들려온 것은 기계음이었다.

지지직, 지직-.

낡은 영수증 프린터가 돌아가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공간을 메웠다. 흰색 종이 띠가 혓바닥처럼 길게 뽑혀 나왔다. 한 장, 두 장, 그리고 세 장.

프린터는 무자비한 속도로 세 사람의 ‘운명’을 인쇄해냈다.

나는 홀린 듯 다가가 첫 번째 종이를 낚아챘다.

[1. 강도윤 - 반납 불가 물품 회수 절차 개시]

두 번째 종이를 집어 든 윤서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2. 윤서하 - 원본 반환 및 개체 통합 실시]

그리고 마지막, 바닥에 떨어진 세 번째 종이를 이현우가 주워 올렸다. 종이를 확인한 그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도윤아… 이거….”

나 역시 그 종이에 적힌 문구를 보았다.

[3. 강도원 - 대리 감사관 해고 처리 확정]

종이 하단, 붉은색으로 점멸하는 글자가 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해고 예정 시각: 현재]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직원 전용 폐기함'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형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파쇄기가 돌아가는 듯한, 끔찍한 금속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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