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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4-295화. 첫 번째 보호자의 얼굴과 중복 보상은 없다 일러스트

294-295화. 첫 번째 보호자의 얼굴과 중복 보상은 없다

294화. 첫 번째 보호자의 얼굴

죽은 파트너가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반가움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내 가슴을 짓누르는 건 날카로운 금속성이 섞인 서늘한 감각이었다.

반가온.

내 옆에서 가장 시끄럽게 떠들고, 가장 맛없게 편의점 도시락을 비우던 녀석. 하지만 지금 내 눈앞의 가온이는 낯선 관공서 접수대 뒷면에 앉아 있는 정규직 공무원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악질적인 악성 민원인을 상대하는, 감정이 거세된 눈빛으로.

“형, 대답이 없네. 미납금 받으러 왔다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대기실의 정적을 깼다. 분명 가온이의 목소리였다. 특유의 끝을 살짝 올리는 비음까지 똑같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잔향청취’를 가동했다. 사물에 맺힌 감정의 찌꺼기를 읽어내는 내 저주이자 축복. 가온이의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찰나, 나는 그 음성 너머의 진동을 붙잡았다.

[……칙, 지직. 잉크 냄새. 젖은 종이가 마르는 소리. 14번 창구로 오십시오. 빗소리. 빗소리. 빗소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가온이의 목소리 사이사이로 스며든 것은 사람의 온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록 대리인의 접수대에서 풍기던 고약한 잉크 냄새였고, 대기실 밖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차가운 빗물 소리였다.

“……너, 가온이 맞냐?”

내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목 관절에서 나야 할 뼈 소리 대신, 잘 닦인 기계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 건 내 기분 탓일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 지금은 ‘첫 번째 보호자’의 임시 얼굴 노릇을 하는 중이거든. 대리인이 너무 여러 명의 얼굴을 쓰면 심사가 헷갈린다고 해서 말이야.”

그녀가 책상 위에 놓인 번호표 뭉치를 툭툭 쳤다.

“형도 알잖아. 이 바닥 시스템이 얼마나 빡빡한지. 서류 한 장, 도장 하나 때문에 사람 목숨이 영수증처럼 처리되는 곳이라고, 여기가.”

“그 입 닥쳐.”

윤서하가 차갑게 일갈했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어머니의 유해에서 뽑아낸 것 같은 흰 실이 쥐어져 있었다. 서하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죽은 줄 알았던 동료의 얼굴을 한 존재가 제 어머니의 죽음을 ‘채무 심사’라고 부르고 있으니,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들 터였다.

“서하 언니, 무섭게 그러지 마. 나 지금 일하는 중이야. 언니 어머니가 남긴 그 실, 사실은 형한테 가야 할 보증 서류였거든.”

가온—아니, 대리인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도윤 형. 형은 기억 안 나겠지만, 형은 이미 한 번 여기 왔었어. B-04 계약이 처음 체결되던 날. 그 눅눅하고 비린내 나는 날에 형이 직접 서명했잖아. ‘첫 번째 보호자’로 말이야.”

“무슨 소리야? 난 여길 오늘 처음…….”

“기록은 거짓말 안 해, 형.”

그때였다. 옆에서 묵묵히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던 백연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찰칵!

셔터 소리가 대기실의 공기를 찢었다. 백연의 능력은 ‘확정된 현재’를 고정하는 것. 그녀의 카메라에 찍힌 것은 곧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 된다.

“……강도윤 씨.”

백연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낮게 깔렸다. 그녀가 인화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지금의 반가온도, 분노한 윤서하도 없었다.

비 내리는 대기실 의자,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바로 그 자리에 낡은 노란 우비를 입은 어린아이가 앉아 있었다. 아이는 커다란 번호표를 꼭 쥔 채, 바닥에 닿지도 않는 다리를 휘저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아이의 얼굴은, 나였다. 아주 먼 옛날,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강도윤.

“사진은 거짓말을 못 해. 하지만 이건 ‘현재’를 찍은 거야.”

백연의 말에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지금 이 공간에서, 내 과거의 모습이 ‘현재’로서 공존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보호자가 보호를 받는 대상이 되기도 하는 법이지.”

대리인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 순간, 윤서하가 쥐고 있던 흰 실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깎아 만든 그 실이, 윤서하의 손을 빠져나와 내 손목을 향해 뱀처럼 날아들었다.

“도윤 씨!”

윤서하가 실을 붙잡으려 했지만, 실은 마치 자석에 끌리듯 내 왼쪽 손목을 휘감았다.

뜨거웠다.

낙인이 찍히는 것 같은 통증과 함께, 실이 내 피부 안으로 스며들었다. 서하의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유지가, 서하가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

[……서하에게 책임을 물리지 말 것. 이 계약의 보증인은 내가 아니라, ‘살아있는 첫 번째’다.]

그 문구가 내 뇌리를 직접 타격했다. 살아있는 첫 번째. 그건 윤서하가 아니라, 20년 전 B-04의 문을 열었던 나였다는 뜻인가?

치익, 치이익.

바닥에 떨어져 있던 문태식의 녹음기가 다시 거친 잡음을 냈다. 건전지도 다 된 기계가 억지로 돌아가는 소리였다.

- 가온이는…… 영수증이 아니다…….

녹음기 속 문태식의 목소리가 젖은 가래 끓는 소리를 냈다.

- 미납금도…… 아니야……. 놈은…… 열쇠다……. 도윤아, 서명하지 마라……. 열쇠를 돌리면…… 문이 열리는 게 아니라…… 무너지는 거다…….

“태식 아저씨는 여전히 말이 많네. 이미 퇴직금까지 정산받고 나간 양반이.”

대리인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녹음기가 순식간에 녹슨 쇳덩이로 변하며 바스러졌다.

대리인이 된 가온이가 책상 위로 몸을 내밀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수만 가지의 표정으로 일렁이다가, 다시 반가온의 얼굴로 고정되었다.

“형, 이제 선택해야 해. 심사관들이 기다리고 있거든. 형이 보증인으로서 책임을 지겠다고 하면, 시스템은 정상화될 거야.”

그녀가 내민 종이에는 두 가지 항목이 적혀 있었다.

[강도윤의 누락된 기억 복구]

[반가온의 사망 기록 말소 및 인간 형태 복원]

“기억을 찾고 싶어? 형이 왜 이 지옥 같은 민원실의 첫 번째 보호자가 됐는지, 왜 20년 동안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지. 아니면…….”

가온이가 슬프게 웃었다. 그 미소만큼은 내가 알던 그 녀석의 것과 너무도 닮아 있어서,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날 다시 사람으로 돌려놓을래? 형 파트너로, 같이 편의점 도시락 먹던 그때로.”

“……둘 다는 안 되는 거지?”

“보험 약관 안 읽어봤어? 중복 보상은 안 돼. 게다가 형이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는 영구 결손 처리돼. 기억을 고르면 난 영원히 이 접수대의 부속품이 될 거고, 날 고르면 형의 과거는 영원히 블랙박스에 갇히는 거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옆에서는 윤서하가 절망적인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 상황은 제 어머니의 희생을 헛되게 하느냐, 아니면 동료를 구하느냐의 문제였다. 백연은 카메라를 든 채 굳어 있었다. 그녀의 렌즈 너머로 보이는 미래가 결코 밝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기실 유리창 너머로 빗줄기가 굵어졌다. 툭, 툭, 천장에서 물이 새기 시작했다.

그 물방울이 내 손목에 감긴 흰 실에 닿자, 기괴한 환청이 들려왔다.

수천 명의 사람이 번호표를 쥔 채 흐느끼는 소리. 그리고 그 중심에 앉아 있는 노란 우비의 아이.

아이는 울고 있지 않았다. 아이는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아주 긴, 끝이 보이지 않는 영수증 뒷면에.

“자, 형. 번호표 순서 지났어. 빨리 골라.”

가온이가 내 손에 펜을 쥐여주었다.

펜촉에서 흘러나오는 잉크가 피처럼 검고 진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다. B-04라는 거대한 미궁이 내게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파트너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나를 포기하고 가짜 평화를 살 것인가.

지옥의 민원실은 대답을 재촉하듯, 차가운 빗물을 내 어깨 위로 쏟아부었다.

295화. 중복 보상은 없다

검은 잉크가 펜촉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종이 위로 떨어져 내 인생의 한 페이지를 시커멓게 오염시킬 것 같은 기세였다.

반가온의 얼굴을 한 대리인이 생긋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도 화사해서, 오히려 눅눅한 대기실의 곰팡이 냄새가 코끝을 더 강하게 찔렀다.

“자, 형. 선택해. 기억이야, 나야?”

그녀의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그 뒤에 숨겨진 의도는 식당에서 유통기한 지난 우유를 내밀며 ‘이거 먹으면 배는 부를 거야’라고 말하는 사기꾼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펜을 쥔 채로 헛웃음을 흘렸다.

“야, 가온아. 아니, 대리인 양반. 너 서비스 교육 어디서 받았냐? 원래 이런 중대한 계약에는 사은품도 좀 끼워주고, ‘오늘만 이 가격’ 같은 멘트도 날려줘야 하는 거 아니야?”

“형, 지금 농담할 기분 아닐 텐데.”

“농담 아니야. 진지해. 나 한국인이라고. 중복 보상이 안 되면 민원 넣는 게 우리 기본권인 거 몰라? 보험 약관도 이렇게 일방적이면 금융감독원에 신고당해.”

대리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가온이의 표정 근육을 빌려 쓰고 있어서 그런지, 짜증이 날 때 왼쪽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버릇까지 똑같았다. 나는 그 찰나의 공백을 놓치지 않고 ‘잔향청취’의 출력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내 손가락 끝이 펜대의 매끄러운 플라스틱 면에 닿았다.

[……지직, 직. 반복. 재생. 1999년 7월 14일의 기록을 재현합니다. 잉크는 마르지 않았습니다. 기록은 아직 쓰이지 않았습니다. 덮어쓰기를 준비하십시오…….]

머릿속에서 금속성의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소름이 돋았다.

이 펜은 서명을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과거의 특정 시점을 강제로 불러와 ‘현재’ 위에 덧칠하는 재생 장치였다. 즉, 내가 지금 이 종이에 서명하는 순간, 내가 고른 선택지가 실현되는 게 아니라 과거에 내가 했던 서명이 이 미친 시스템 속에서 다시 한번 ‘확정’되는 구조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이건 선택이 아니라 사기 계약이다.

“강도윤 씨, 이거 봐요.”

옆에서 백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인화된 사진 한 장을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방금 전 그녀가 찍은 ‘현재’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서 노란 우비를 입은 어린 나는 여전히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백연이 사진의 한 귀퉁이를 손톱으로 톡톡 쳤다. 그녀의 손끝이 닿은 곳이 마치 돋보기를 들이댄 것처럼 순식간에 확대되었다.

아이가 쥐고 있는 번호표 뒷면.

그곳에는 희미하게 흐릿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B-00]

B-04가 아니었다. 4번 구역이 아니라 0번. 시작조차 하기 전의 번호, 혹은 모든 것의 기원을 뜻하는 숫자.

“0번 보호자……?”

내 입술에서 나직한 의문이 흘러나왔다.

“아니, 도윤 씨. 그건 보호자라는 뜻이 아니에요.”

윤서하가 내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흰 실이 내 손목을 파고들며 뜨거운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서하의 눈동자는 분노로 이글거렸지만, 동시에 차가운 이성을 되찾고 있었다.

“내 어머니가 남긴 이 실, 당신을 묶으려던 게 아니야. 이건 일종의 ‘증거물 표시’였어.”

서하가 내 손목에 박힌 실끝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내 피부 속에 스며들었던 실들이 마치 낚싯줄에 걸린 물고기처럼 요동치며 밖으로 딸려 나왔다. 그런데 그 실의 끝에, 잉크가 묻은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20년 전, 내가 이곳에서 만졌을 무언가의 파편이었다.

대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가온이의 예쁜 얼굴이 마치 노이즈가 낀 모니터처럼 지지직거리며 일그러졌다.

“……안 돼. 그건 열어보면 안 되는 항목이야.”

대리인이 책상을 넘어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백연이 셔터를 눌렀다.

찰칵!

찰나의 시간이 정지했다. 대리인의 움직임이 허공에서 굳어버린 사이, 나는 윤서하가 끌어올린 그 종이 조각과 펜의 잔향을 하나로 묶어 읽어내려갔다.

갑자기 대기실의 풍경이 변했다. 비 내리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이 커졌고, 내 발밑에는 끝도 없이 긴 영수증 종이들이 카펫처럼 깔렸다. 어린 시절의 내가 그 영수증 뒷면에 미친 듯이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어깨너머로 그 문장을 읽었다.

[나는 보호자가 아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반품된 아이를 맡은 증인(Witness)이다.]

증인.

보호자가 아니라 증인이라고?

그 문장이 망막에 박히는 순간, 내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며 기괴한 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B-04 민원실은 보호자를 찾는 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폐기되어야 할 ‘반품된 존재’들을 기록하고, 그 처분 과정을 지켜볼 증인을 세우는 곳이었다. 시스템은 나를 증인으로 세워놓고는, 계약의 무게를 견디게 하기 위해 ‘보호자’라는 가짜 직함을 씌워 세뇌했던 것이다.

내가 보호해야 할 대상은 반가온이 아니라, 이 일그러진 계약의 실체 자체였다.

“……형.”

일그러진 노이즈 사이로, 가온이의 진짜 목소리가 아주 작게 새어 나왔다. 대리인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아닌, 겁에 질린 열아홉 살 소녀의 목소리였다.

“형…… 나 말고 영수증 뒷면을 봐. 빨리…….”

그녀의 눈에서 잉크처럼 검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내가 쥐고 있던 펜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펜이 박살 나며 검은 잉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잉크가 영수증 종이 위에 닿자, 보이지 않던 글자들이 형광색으로 빛나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경고: 증인의 인지 부조화 발생.]

[계약 위조 사실 노출.]

[관리 시스템 B-04, 긴급 프로토콜 가동.]

“도윤 씨, 조심해요!”

윤서하의 외침과 동시에 대기실 천장이 종잇장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벽면에 붙어 있던 수만 장의 번호표들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해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

대리인의 얼굴이 다시 무표정하게 변했다. 아니, 이제는 얼굴이라는 형태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수천 명의 민원인 표정이 겹쳐진 기괴한 형상이 되었다.

“증인 강도윤. 기록의 무결성을 훼손함. 말소 대상으로 전환합니다.”

대기실 여기저기에 서 있던 노란 우비를 입은 아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없었다. 오직 매끈한 살덩이 위에 ‘말소’라는 붉은 직인만 찍혀 있을 뿐이었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빗물에 젖은 장화 소리가 대기실을 가득 메웠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백연 씨, 서하 씨! 내 뒤로 붙어!”

나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방금 전까지 나를 옥죄던 공포는 어느새 기묘한 고양감으로 변해 있었다. 진실을 알았을 때 느끼는 불쾌한 해방감이었다.

공간이 무너져 내리고 잉크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와중에도, 내 눈은 단 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대기실 구석, 가장 어두운 그림자 속에 앉아 있는 노란 우비의 아이.

그 아이의 옆에,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또 다른 그림자가 서 있었다.

그 그림자는 노란 우비가 아니었다.

칠흑처럼 검은 우산을 쓰고, 아이에게 비가 맞지 않도록 조용히 우산을 기울여주고 있는 존재.

그 존재의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가 백연의 카메라 플래시 빛에 반사되어 선명하게 드러났다.

[강도윤 보호자]

그 옆에 적힌 이름은 반가온이 아니었다.

이름표의 주인은, 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도, 지금의 현실 속에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인물이었다.

“……설마.”

내 목소리가 떨렸다.

검은 우산을 쓴 그림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산 밑으로 드러난 것은, 방금 전까지 내 앞에서 대리인 노릇을 하던 가온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깊고 서늘한 눈매를 가진 사내였다.

그의 얼굴은, 거울 속에서 매일 보던 나의 모습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다만, 수십 년은 더 나이를 먹은 듯한 고독이 서려 있을 뿐.

나의 ‘보호자’가 나 자신이라고?

“20년 만인가, 강도윤.”

검은 우산을 든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무너져 내리던 대기실의 시공간이 마치 정지 화면처럼 멈춰 섰다.

“증인이 보호자를 죽여야 이 미로가 끝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군.”

남자가 우산을 접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고여 있던 검은 잉크들이 금빛으로 변하며 길을 열었다.

나는 단검을 쥐고 낮게 읊조렸다.

“보험 약관에 이런 내용은 없었는데.”

“원래 특약은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아주 작은 글씨로 적혀 있는 법이지.”

남자가 비릿하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 위에는, 아까 내가 부러뜨렸던 것과 똑같이 생긴, 하지만 잉크가 아닌 피가 흐르는 펜 한 자루가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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