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6-297화. 보호자를 죽이는 방법과 차기 반품 대상
296화. 보호자를 죽이는 방법
내 앞에 선 사내는 거울 속의 나보다 훨씬 더 지독한 세월을 정면으로 얻어맞은 기색이었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 우산은 주변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보였다. 빗물은 우산 끝을 타고 쉼 없이 흘러내렸지만, 바닥에 닿기도 전에 공중에서 잉크처럼 흩어졌다.
“20년 만인가, 강도윤.”
그가 내뱉은 목소리는 건조했다. 사막의 모래바람을 억지로 삼킨 뒤 뱉어내는 것 같은 거친 질감이었다. 나는 단검을 고쳐 쥐며 대꾸했다.
“미안한데 난 댁처럼 폭삭 늙은 친구는 둔 적 없거든. 우리 집안 내력에 노안은 없어서 말이야. 혹시 그쪽은 보험금 대신 세월을 담보로 잡혔나?”
농담이 삐져나왔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라졌다는 증거였다. 공포가 내 안의 안전장치를 건드릴 때마다 튀어나오는 이 방어기제는 여전히 눈치가 없었다.
사내는 내 농담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깊고 서늘한 눈으로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나는 네가 미래에서 온 존재도, 그렇다고 죽은 네 아비의 영혼도 아니다. 나는 네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잘라냈던 기능. 네가 ‘증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폐기했던 ‘보호자’라는 이름의 찌꺼기다.”
“찌꺼기 치고는 꽤 고상하게 차려입었네. 그 검은 우산은 장례식 조문용인가?”
“증인이 보호자를 죽여야 이 미로가 끝난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군.”
사내는 내 질문을 씹으며 한 걸음 다가왔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정지했던 시공간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천장에서 쏟아지던 번호표 칼날들이 다시금 생동감을 얻어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도윤 씨! 뒤예요!”
백연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그녀가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찰칵!
눈부신 플래시가 대기실을 수놓았고, 우리를 향해 쏟아지던 수천 장의 번호표들이 찰나의 순간 허공에 멈춰 섰다. 하지만 백연의 안색이 창백했다. 그녀가 쥐고 있는 구식 라이카 카메라에서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으윽, 필름이……!”
그녀의 손에서 인화된 사진들이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한 번에 한 순간만 고정할 수 있는 그녀의 능력에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시스템 자체가 백연의 간섭을 거부하며 그녀의 기록을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있었다.
“백연 씨, 무리하지 마요!”
나는 소리치며 단검을 휘둘러 가까스로 멈춰 선 번호표 조각들을 쳐냈다. 금속성 소음이 귀를 찔렀다.
그 틈을 타, ‘말소’라는 붉은 직인이 찍힌 노란 우비의 아이들이 기어오기 시작했다. 장화가 잉크 고인 바닥을 짓밟는 질척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아이들이 이목구비 없는 얼굴을 치켜든 채 우리를 포위했다.
“어머니, 제발……!”
윤서하가 비명처럼 읊조리며 손목에 감긴 흰 실을 풀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유품이자, 이 미친 공간에서 우리를 보호하던 유일한 경계선이었다. 실은 허공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며 몰려오는 아이들의 발목을 묶고 번호표 칼날들을 튕겨냈다.
하지만 실의 길이가 눈에 띄게 짧아지고 있었다. 실이 타들어 갈 때마다 서하의 눈에서 핏발이 섰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깎아 먹으며 어머니의 잔향을 강제로 소모하고 있었다.
“서하 씨, 그만둬! 그러다 당신이 먼저 죽어!”
“내가 안 막으면, 여기서 다 끝나요!”
서하의 외침 뒤로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놓인, 피가 뚝뚝 흐르는 펜 한 자루를 나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내 이름을 적어라. 그럼 계약상의 ‘보호자’ 직함은 말소된다. 그것만이 이 루프를 끊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단검을 쥔 채 사내의 눈을 쏘아봤다. 펜에서 흐르는 피가 바닥의 잉크와 섞여 기괴한 문양을 만들고 있었다.
말소.
보호자를 죽여야 끝난다.
언뜻 들으면 명쾌한 해결책 같았다. 하지만 내 ‘잔향청취’는 다른 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지직, 증언을 파괴하십시오. 기록의 일부를 도려내십시오. 증인은 오직 비어 있는 페이지만을 지켜야 합니다…….]
몰려오는 우비 입은 아이들. 그들의 몸에서 배어 나오는 소리는 적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누군가에게 버려지고 반품된 존재들이 세상에 남기고 싶어 했던 마지막 ‘증언’의 파편들이었다.
내가 만약 단검으로 이 아이들을 베어버린다면? 혹은 저 사내가 시키는 대로 그의 이름을 저 피 묻은 펜으로 적어 ‘보호자’를 말소시킨다면?
그 순간, 20년 전 이곳에서 일어났던 진실은 영원히 잉크 속에 잠길 것이다. 증인이 증언을 지우는 꼴이 되는 셈이다.
“강도윤, 어서! 시간이 없다. 네 동료들이 한계다.”
사내의 목소리가 재촉했다. 백연의 카메라는 이제 불길이 치솟고 있었고, 윤서하의 흰 실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우비 입은 아이들이 서하의 발목을 붙잡고 그녀의 ‘존재’를 잉크로 덮어쓰려 하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피 묻은 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사내의 입가에 미세한 뒤틀림이 생겼다. 안도감인가? 아니면 비웃음인가?
내 손가락이 펜대에 닿으려는 찰나, 나는 고개를 숙여 내 발치에 떨어진 물건들을 보았다. 백연이 떨어뜨린 타버린 사진 조각, 서하의 손목에서 떨어져 나온 종이 파편, 그리고 내 주머니 속의 [B-00] 번호표.
세 가지가 겹쳐진 순간, 내 뇌리를 스치는 문장이 있었다.
‘반품된 아이를 맡은 증인.’
만약 내가 보호자라면, 나는 나를 죽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보호자가 아니라 증인이다. 그리고 저 사내는…… 내가 버린 ‘보호 기능’이라고 했다.
“야, 늙은 나.”
나는 펜을 잡는 대신, 사내의 손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사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아까부터 자꾸 나보고 죽이라고 유도하더라? 보험사 직원이 고객한테 ‘이 버튼 누르면 전액 환급돼요’라고 친절하게 구는 거, 백 프로 사기거든. 그거 누르면 특약 해지되는 거잖아.”
“무슨 소리를……!”
“보호자는 죽이는 대상이 아니야.”
나는 ‘잔향청취’의 출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귀에서 피가 흐르는 느낌이 났지만 멈추지 않았다. 사내가 들고 있는 검은 우산, 그 손잡이에 묶인 아주 낡고 해진 이름표 끈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내 기억 속에는 없지만, 이 공간의 기록 속에는 존재하는 것.
“호출 취소 대상이지.”
나는 단검을 사내의 심장이 아닌, 우산 손잡이에 매달린 그 가느다란 이름표 끈을 향해 휘둘렀다.
서걱!
마치 생살을 베어내는 듯한 기분 나쁜 감각이 손날을 타고 전해졌다.
그 순간, 대기실을 가득 채웠던 빗소리가 뚝 끊겼다. 몰려오던 노란 우비의 아이들이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아.”
사내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정교하게 빚어진 밀랍 인형이 뜨거운 불 앞에 선 것처럼, 그의 얼굴은 녹아내리며 그 안의 진실을 드러냈다.
검은 우산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 그림자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형?”
대리인의 가짜 목소리가 아니었다. 잉크 냄새가 나지 않는, 체온이 느껴지는 진짜 목소리.
“형, 나…… 나 아직 안 죽었어. 여기가 어디야?”
무너져 내리는 사내의 형체 안에서 반가온이 비틀거리며 튀어나왔다. 그녀의 눈은 공포로 젖어 있었지만, 그 눈동자에는 명확한 생기가 돌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지려는 가온을 붙잡았다. 그녀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심장은 분명히 뛰고 있었다.
“알아, 인마. 너 죽었으면 내 미수금은 누가 갚냐.”
나는 짐짓 덤덤하게 말했지만, 손끝이 가늘게 떨리는 것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내가 사라진 자리, 바닥에 덩그러니 남겨진 검은 우산이 스스로 서서히 펼쳐졌다. 우산 안쪽의 칠흑 같은 천 위로, 잉크가 아닌 금색 글자들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새로운 계약서였다.
백연이 타버린 카메라를 든 채 비틀거리며 다가와 그 문구를 읽었다.
“도윤 씨, 저거…… 이름이 바뀌었어요.”
나는 굳은 표정으로 우산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적혀 있던 내 이름 대신, 날카로운 필체로 새로운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차기 반품 대상: 윤서하]
[보호자: 강도윤]
“……이런 씨발.”
욕설이 절로 튀어 나왔다.
내 옆에 서 있던 윤서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의 손목에 남아 있던 마지막 흰 실 조각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우산이 서하의 머리 위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마치 그녀를 이 세계의 일부로 수납하려는 것처럼.
미로는 끝나지 않았다. 시스템은 그저 ‘증인’인 나에게 새로운 ‘보호’의 굴레를 씌웠을 뿐이었다.
가온이를 구출하기 위해 내디딘 한 걸음이, 이번에는 서하의 목줄을 죄고 있었다.
“강도윤 씨.”
서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녀의 발밑으로 검은 잉크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단검을 꽉 쥐었다.
“걱정 마요, 서하 씨. 내가 말했지. 난 중복 보상 안 해주면 민원 넣는 사람이라고.”
나는 검은 우산의 대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놓지 않았다.
“이 보험, 아직 해지 안 했으니까.”
하지만 내 호기로운 선언과는 달리, 대기실 저편에서 수많은 민원인의 목소리가 겹쳐진 거대한 소음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B-04 민원실의 문이,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온 곳이 아닌, 더 깊은 어둠을 향한 쪽으로.
297화. 차기 반품 대상
검은 우산 안쪽에서 번들거리는 금색 글자들은 마치 굶주린 뱀처럼 꿈틀거렸다. [차기 반품 대상: 윤서하], 그리고 그 밑에 박힌 [보호자: 강도윤].
방금 전까지 내 목을 조르던 ‘늙은 나’의 환영보다 이 짧은 두 줄의 문장이 훨씬 더 치명적인 독니를 품고 있었다. 보험 계약서의 약관을 잘못 읽어 전 재산을 날려버린 계약자의 심정이 이럴까. 아니, 이건 재산 정도가 아니라 영혼의 소유권이 통째로 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상황이었다.
“……도윤 씨, 제 이름이 왜 저기…….”
윤서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녀의 손목을 감싸고 있던, 어머니의 유일한 흔적이었던 흰 실이 빠르게 검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순백의 실이 잉크에 젖어 드는 광경은 마치 깨끗한 눈밭에 폐유가 쏟아지는 것처럼 불쾌한 광경이었다.
콰아앙!
우리가 들어왔던 B-04 민원실의 철문이 비명 같은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퇴로는 차단되었다. 동시에 대기실 바닥의 잉크가 소용돌이치며 우리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꽉 잡아! 여기서 떨어지면 진짜 낙동강 오리알 되는 거야! 낙동강은커녕 시커먼 잉크강에 처박힐 거라고!”
나는 왼손으로 반가온을, 오른손으로 윤서하의 어깨를 낚아챘다.
반가온의 몸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내 손바닥등에 닿는 그녀의 피부 위로 기괴한 감각이 느껴졌다. 툭, 툭. 마치 거칠게 꿰맨 옷가지의 실밥이 터져 나오는 것 같았다. 곁눈질로 본 가온의 목덜미와 손목에는 검은 잉크로 된 실밥이 흉터처럼 돋아 있었고, 이마 한복판에는 희미하게 ‘검수 완료’라는 붉은 도장 자국이 남겨져 있었다.
지옥 같은 물류센터에서 억지로 끄집어내긴 했지만, 녀석은 아직 온전한 ‘사람’으로 분류되지 못한 모양이었다.
“……형, 나…… 아직 형 파트너 맞지?”
가온이 몽롱한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초점은 흐릿했지만, 나를 붙잡은 손아귀의 힘만은 필사적이었다.
“어, 맞다. 인마. 넌 내 파트너고, 난 네 사장이니까. 그러니까 제발 정신 좀 차려. 네가 기억 못 하면 내가 그동안 밀린 월급 다 떼먹을 거란 말이야.”
농담을 뱉었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우리를 삼킨 어둠이 걷히고 새롭게 나타난 공간은 이전의 지저분한 대기실과는 사뭇 달랐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양옆으로는 끝을 알 수 없는 서류 보관함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곳의 중심에 기괴한 창구가 하나 서 있었다.
[보호자 변경 접수 창구]
머리 위의 번호판이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돌아갔다. 그런데 숫자가 이상했다. B-00에서 시작해 B-01, B-02…… 숫자가 올라가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번호판에 뜨고 있었다.
[B-01: 백연(접수 대기)]
[B-02: 반가온(재검토)]
[B-03: 강도윤(보호자 확정)]
그리고 마지막, [B-04: 윤서하(반품 예정)].
“이거 순위표가 왜 이래? 보험 순위도 아니고, 누가 먼저 죽을지 번호표 뽑는 기분인데.”
나는 이를 갈며 검은 우산을 고쳐 쥐었다. 이 우산은 이제 내 ‘무기’가 아니라, 서하의 목숨을 담보로 잡은 ‘계약서’ 그 자체였다.
백연이 비틀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들고 있는 라이카 카메라는 이미 반쯤 타버려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녀의 안색은 종잇장보다 더 하얗게 질려 있었다.
“도윤 씨…… 필름이 거의 다 탔어요. 이제 딱 한 컷 남았는데…….”
백연이 떨리는 손으로 셔터 위를 더듬었다. 그녀의 능력은 찰나의 순간을 고정해 현실로 인화하는 것. 하지만 이 압도적인 시스템의 압박 속에서 남은 한 장은 최후의 보루였다. 가짜를 진짜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유일한 퇴로를 고정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서 그녀는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껴둬요, 백연 씨. 그 한 발은 이 시스템의 뒤통수를 갈길 때 써야 하니까.”
나는 우산 손잡이를 쥔 채 ‘잔향청취’를 극대화했다. 귀가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음이 뇌를 찔렀다.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폭주했다.
우산 안쪽, 금색 글자들 너머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잉크의 파도 소리 사이로 섞여 나오는, 누군가의 간절한 기도 같은 잔향.
[……내 딸만큼은…… 이 검은 기록에 남기지 않겠습니다…… 내가 ‘보호자’로 남는 한, 이 아이의 페이지는 넘길 수 없습니다…….]
글자들 밑바닥에 아주 미세하게, 이미 지워진 듯한 이름 하나가 보였다.
[이전 보호자: 한서윤]
윤서하가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엄마?”
“서하 씨, 알고 있었어?”
서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의 잉크 위로 흩어졌다.
“엄마는…… 그냥 절 지키려다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엄마가 계속 이 미친 계약을 붙들고 계셨던 거예요? 저 대신…… 반품 대상이 되어서?”
진실은 언제나 보험 약관의 작은 글씨처럼 잔인했다. 서하의 어머니, 한서윤은 딸에게 갈 ‘반품’ 통보를 막기 위해 스스로 보호자라는 이름의 방패가 되어 시스템에 먹혔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방패가 수명을 다하자, 시스템은 ‘차기 보호자’로 나를 지목했다.
내가 이 보호자 직함을 수락하면, 서하는 일단 살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서하의 사망 플래그를 공식적으로 관리하는 집행관이 된다. 서하가 죽어야 할 때 내가 직접 그녀를 이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야 한다는 뜻이다.
거절하면? 서하는 즉시 ‘불량품’으로 판정되어 저 잉크의 바다로 반품된다.
“강도윤 씨, 저…… 이번에는 제가 증거가 되면 돼요? 엄마처럼, 제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기록으로 남으면 되는 건가요?”
서하가 결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겁에 질린 소녀는 어디 가고, 제 어머니를 닮은 단단한 눈빛이 나를 향했다.
“헛소리하지 마요. 난 보험 사기라면 질색이지만, 이런 악질 계약은 더 질색이니까. 내 사전에 ‘자기희생’ 같은 고상한 단어는 없거든. 난 고객도 살리고 나도 살아서 보너스 챙기는 쪽이야.”
나는 검은 우산을 창구 바닥에 쾅 소리 나게 내리찍었다.
그때였다. 창구 안쪽의 어둠이 일렁이더니, 한 남자의 형체가 서서히 드러났다.
정장 차림에 단정한 머리칼. 하지만 얼굴은 이목구비가 문드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소름 끼치도록 익숙했다. 얼마 전 우리 팀을 배신하고 사라졌던, 아니, 이 미로의 일부가 되었던 문태식의 목소리였다.
“강도윤 보호자님.”
창구 너머의 ‘문태식’이 무표정하게, 하지만 아주 사무적인 톤으로 나를 불렀다.
“윤서하 대상자의 유효 기간이 만료되었습니다. 보호자로서, 반품 절차를 진행해 주십시오.”
그가 하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눈부시도록 하얀 종이. 이 시커먼 잉크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물건이었다.
“여기 반품 사유를 직접 작성해 주십시오. 보호자의 직인이 찍히는 순간, 해당 대상자는 시스템에서 말소되며 당신의 계약 기간은 연장됩니다.”
나는 서류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첫 줄을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곳에는 이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인쇄된 문구가 아니었다. 삐뚤빼뚤하지만, 분명히 나 자신의 필체였다. 미래의 내가 썼는지, 아니면 이 시스템이 내 무의식을 긁어냈는지 알 수 없는 문장.
[반품 사유: 윤서하는 살아 있으면 안 된다.]
“……뭐?”
내 손이 떨렸다. 내가 적었다고? 내가 서하를 죽여야 한다고 적어놨단 말인가?
“작성해 주십시오, 보호자님. 시간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현재 창구 대기 번호 B-04, 윤서하 님의 세션이 종료되기 30초 전입니다.”
창구 위의 번호판이 붉은빛을 내뿜으며 점멸하기 시작했다. 30, 29, 28…….
윤서하의 발밑에서 잉크가 분수처럼 솟구쳐 그녀의 무릎을 감쌌다. 가온이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내뱉으며 쓰러졌고, 백연은 마지막 필름을 지키기 위해 부르튼 손가락으로 카메라를 쥐어짜고 있었다.
“강도윤 씨, 그냥 적으세요!”
서하가 소리쳤다.
“당신이라도 살아야 가온 씨를 데리고 나갈 수 있잖아요! 난 이미…… 이미 엄마 때 끝났어야 하는 기록이니까!”
나는 펜을 꽉 쥐었다. 피가 묻은 그 기분 나쁜 펜이 내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내 필체로 적힌 [윤서하는 살아 있으면 안 된다]는 문구가 조롱하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창구 안쪽의 문태식을, 아니 문태식의 껍데기를 쓴 시스템을 노려봤다.
“야, 너희 보험사가 왜 맨날 망하는 줄 알아?”
내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공포가 임계점을 넘어서자, 뇌 안의 안전장치가 완전히 박살 나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고객의 요구 사항을 전혀 안 듣거든.”
나는 펜을 들어, [안 된다]라는 글자 위에 강하게 가로줄을 그었다. 그리고 그 옆에 새로운 단어를 짓이기듯 써넣었다.
“이 보험, 내가 설계자거든. 약관 수정 들어간다.”
종이가 찢어질 듯한 기세로 내가 써 내려간 문장은, 창구 직원의 목소리를 단번에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번호판의 숫자가 ‘0’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