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Top Banner Ad(reader-top)
242-243화. 퇴근하지 못하는 관리자와 결재권자의 유언 일러스트

242-243화. 퇴근하지 못하는 관리자와 결재권자의 유언

242화. 퇴근하지 못하는 관리자를 위한 변명

“관리자님, 첫 업무를 시작하십시오.”

눈앞의 정장 인영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이목구비가 지워진 허연 얼굴들이 나를 향해 쏟아지는데, 그 기세가 신입 사원을 환영하는 팀장들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내민 것은 붉은 인주가 뚝뚝 흐르는 도장, 그리고 한 장의 서류였다.

[사망 진단서]

대상: 윤서하 (현 등록명: 곽두팔)

사유: 관리자 권한 대행에 의한 존재 소거

서류의 모서리가 면도날처럼 날카롭게 세워져 있었다. 그 종이가 내 손가락 끝을 스치자마자 찌릿한 통증과 함께 붉은 선이 그어졌다. 종이는 내 피를 빨아들이며 기분 나쁘게 꿈틀거렸다. 마치 배고픈 짐승이 먹잇감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가 관리자라고? 야, 난 내 신용카드 결제일도 관리 못 해서 매달 연체 이자랑 싸우는 놈이야. 이런 중책은 좀 더 계획적인 놈한테 맡기지 그래? 예를 들면, 저기 저 무표정한 인형들이나.”

농담을 뱉었지만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손바닥에 묻은 피가 서류의 ‘결재’ 칸으로 자꾸만 미끄러지려 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내 오른손이, 아니, 내 몸속에 박힌 어떤 ‘권한’이 이 서류를 완성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관리자님, 서명하십시오. 그것이 당신이 ‘강도윤’으로서 유예받은 삶의 대가입니다.”

정장 인영의 목소리는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진 것처럼 기괴하게 울렸다.

그때, 등 뒤에서 거친 파공음이 들렸다.

“비켜, 이 종이 쪼가리들아!”

윤서하, 아니 지금은 ‘곽두팔’이라는 이름으로 시스템에 박제된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평소의 우아하고 정교한 검술이 아니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투박하고, 파괴적이며, 마치 공사 현장의 해머를 휘두르는 것처럼 난폭했다. ‘곽두팔’이라는 이름이 가진 야만적인 기운이 그녀의 마력을 강제로 변질시키고 있었다.

서하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은 채 붉게 번들거렸다. 그녀는 달려드는 정장 인영의 목을 베어 넘겼지만, 잘려 나간 목에서는 피 대신 검은 먹물이 튀어나와 그녀의 하얀 셔츠를 더럽혔다.

“서하야! 정신 차려!”

내 외침에 그녀가 멈칫했다. 하지만 곧바로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경고: 등록되지 않은 식별명을 사용 중입니다.]

[대상 ‘곽두팔’의 데이터 동기화율이 하락합니다. 강제 집행을 시작합니다.]

허공에서 거대한 활자체들이 쇠사슬처럼 내려와 서하의 팔다리를 묶었다. ‘성명’, ‘생년월일’, ‘직업’ 같은 글자들이 실체화되어 그녀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행정적인 폭력이란 이런 것인가. 칼보다 무서운 건 서류상으로 존재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도윤아, 부르면 안 돼!”

M-17이 내 어깨를 붙잡으며 다급하게 외쳤다.

“이름이 위험할 땐 역할을 불러야 해. 하지만 역할도 계약서가 되는 순간 끝장이야. 저들이 원하는 건 서하 씨를 ‘소모품’이라는 역할로 고정하는 거라고!”

“그럼 어떡하라는 거야? 이름을 불러도 안 되고, 헌터라고 불러도 안 되면!”

가온이가 내 바짓가랑이를 물어당기며 으르렁거렸다. 녀석의 시선은 바닥에 떨어진 낡은 카세트테이프에 고정되어 있었다. 검은 우산 천으로 감싸인 그 물건에서, 나는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가온이는 보고 있었다.

킁킁, 킁. 아빠... 아빠 냄새가 나. 근데, 나쁜 냄새도 섞여 있어. 우산 밑에 누가 숨어서 웃고 있어!

가온이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카세트테이프는 단순히 문태식 팀장의 목소리를 저장한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그 목소리를 편집하고, 봉인하고, 그 위에 자신의 의지를 덧씌웠다.

서하가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그녀의 입술이 달싹였다.

“강... 도윤... 나, 내가... 누구지?”

그녀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고였다가, 이내 검은 먹물로 변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름을 부르는 순간, 저 ‘사망 진단서’의 대상이 확정되어 버린다.

나는 주머니를 뒤졌다. 손 끝에 걸리는 건 꼬질꼬질한 영수증 몇 장과 편의점 스탬프 카드, 그리고 지난번 사건 때 서하가 내게 빌려줬던 검은 손수건이었다.

“야, 너 이거 기억나? 지난번에 나한테 빌려준 거. 세탁해서 돌려주기로 했는데, 내가 귀찮아서 그냥 갖고 있었거든.”

서하의 시선이 손수건에 머물렀다.

“그리고 우리 지난주에 마신 커피. 넌 디카페인 아니면 잠 못 잔다고 투덜거렸잖아. 2,500원짜리 싸구려 편의점 커피 마시면서 원두 산지가 어떠니 저쩌니 하던 그 까칠한 성격, 그거 ‘곽두팔’은 절대 못 해.”

서류상의 데이터가 아닌, 오직 우리만 공유하는 구체적이고 쓸데없는 기억들. 시스템이 수집할 수 없는 쓰레기 같은 일상의 조각들.

“넌 관리 대상이 아니야. 내 퇴근길 길동무지. 그러니까 그딴 종이 쪼가리에 적힌 이름 따위에 먹히지 마!”

서하의 눈동자에 잠시 생기가 돌아왔다. 하지만 시스템은 자비가 없었다. 정장 인영들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관리자님. 결재하십시오.”

내 오른손이 내 의지를 배신하고 도장을 향해 뻗어 나갔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꺾이는 고통이 느껴졌지만, 근육은 마치 타인이 조종하는 인형처럼 움직였다. Administrator-K의 권한이 내 육체를 잠식하고 있었다.

내 손가락이 인주를 찍고 사망 진단서 위로 떨어지려는 찰나, 나는 남은 왼손으로 내 오른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으아악!”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지만 멈추지 않았다. 나는 입으로 내 오른손등을 세게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가 입안에 퍼졌다. 그 피를 서류 위에 뱉어버리며, 나는 펜을 낚아채 서류의 빈 곳에 휘갈겨 썼다.

[반려 사유: 담당자 야근 과다로 인한 판단 능력 상실. 본 건은 향후 100년간 재상신 금지.]

“뭐 하는 겁니까!”

정장 인영들이 당황한 듯 소리쳤다. 나는 멈추지 않고 그 옆에 추가로 적어 넣었다.

[추가 사유: 결재권자의 심각한 카페인 부족으로 인한 인지 부조화. 퇴근권 침해로 인한 노사협의 필요. 야근 수당 미지급 시 전면 파업 불사.]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다. 하지만 이곳은 ‘서류’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서류에는 서류로 맞서야 한다. 논리가 아니라 행정적 절차의 맹점을 찔러야 했다.

“이 서류, 절차 위반이야. 관리자 선임 공고도 없었고, 본인 동의서도 안 받았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피 묻은 손으로 내 가슴팍을 가리켰다.

“나 아직 퇴근 도장 안 찍었거든. 업무 시간 외의 결재는 무효야, 이 자식들아!”

내 억지가 시스템의 논리와 충돌했다. 붉은 사망 진단서가 부르르 떨리더니, 검은 먹물과 붉은 피가 뒤섞여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정장 인영들의 몸이 종이처럼 구겨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때였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카세트테이프가 스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릴이 거칠게 회전하며 치익, 하는 소음 너머로 새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태식 팀장의 목소리도, 기계음도 아니었다.

훨씬 더 깊고, 차갑고, 동시에 끔찍하게 익숙한 목소리.

반려 사유를 확인합니다.

허공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가 황금색으로 빛났다. 지금까지 보았던 푸른색이나 붉은색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권위였다.

[반려 권한자 확인: 전임 관리자 강성훈]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강성훈. 십 년 전 죽었다고 믿었던, 아니, 시스템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믿었던 내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서늘하게 방 안을 채웠다.

도윤아.

그것은 녹음된 과거의 음성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은 생생한 현장감이었다.

네가 K가 되면 나를 죽일 수 있다. 내가 시작한 이 지옥 같은 서류 작업을 끝낼 수 있는 건 오직 너뿐이다.

서하를 묶고 있던 글자 사슬들이 유리처럼 깨져 나갔다. 하지만 안도할 틈은 없었다. 카세트테이프의 릴이 한 바퀴 더 돌자, 아버지의 목소리는 절박한 경고로 변했다.

그러니까 도윤아, 절대로 퇴근하지 마라. 네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Administrator-K는 네가 아니라 ‘그것’이 될 테니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오른손에 쥐여 있던 펜이 내 목을 향해 날카롭게 솟구쳤다. 내 손이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아니, 내 안에 깃든 ‘K’가 전임자의 개입에 분노하며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빠...?”

가온이가 허공을 향해 꼬리를 흔들며 멍멍 짖었다. 하지만 가온이가 보고 있는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검은 우산 하나가 스스로 펼쳐진 채, 텅 빈 공간을 가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우산 밑에서, 나는 보았다.

아버지가 아닌, 아버지의 가죽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나를 보며 기괴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것을.

243화. 결재권자의 유언

펜촉이 내 목울대를 향해 짓쳐들었다.

내 오른손인데, 이 녀석은 나보다 훨씬 성실한 모양이었다. 주인은 살고 싶어 죽겠는데, 손목에 박힌 시스템 권한은 ‘업무 완수’가 최우선이라며 내 경동맥에 잉크를 박아 넣으려 안달이었다.

“야, 이 미친 손아. 상여금도 안 주는데 왜 이렇게 열심히 해……!”

나는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손목을 붙잡고 뒤로 꺾었다. 뼈가 비명을 질렀지만, 펜촉은 공중에서 파들거리며 조금씩 내 살갗을 파고들려 했다. 잉크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니, 이건 잉크라기보다 오래된 혈흔이 서류 위에서 썩어갈 때 나는 비릿한 철분취에 가까웠다.

그때, 거칠고 투박한 검기가 펜과 내 목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챙!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볼펜심이 튕겨 나갔다. 윤서하였다. 아니, 정확히는 ‘곽두팔’이라는 괴상한 관리자 권한에 오염되어, 정교한 검술 대신 멧돼지 같은 완력을 휘두르는 그녀가 내 앞을 막아선 것이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시스템의 노이즈처럼 흐릿하게 점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목을 겨냥했던 오른손을 쳐낸 그녀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강도윤 씨.”

윤서하가 갈라진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은 우산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졌다.

“당신은…… K가 아니야.”

“알아. 나는 그냥 퇴근하고 싶은 강 대리라고. 근데 내 손은 이미 과장급으로 승진이라도 한 모양이야.”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오른손을 짓누르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유머는 내 마지막 방어기제다. 공포가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 농담이라도 내뱉지 않으면, 정말로 저 우산 밑에 있는 ‘그것’에게 잡아먹힐 것 같았으니까.

검은 우산 밑에서, 아버지를 닮은 인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강성훈.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항상 낡은 작업복에서 미지근한 캔커피 냄새와 눅눅한 비 냄새를 풍기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존재는 달랐다.

그것은 강성훈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강성훈의 목소리로 말했지만, 결정적인 것이 빠져 있었다.

“아빠 냄새가 아니야.”

내 품에 안겨 있던 가온이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의 코가 예민하게 움찔거렸다.

“아빠 냄새는…… 병원 냄새랑, 가끔 몰래 피우던 매운 담배 냄새랑, 씻고 나오면 나는 비누 냄새가 섞여 있어야 하는데. 저건 그냥…… 오래된 종이 냄새뿐이야. 아무것도 없는 가짜 냄새.”

가온이의 말이 맞았다. 저것은 아버지가 아니다. 아버지가 이 지옥 같은 서류 작업 속에 남겨둔 ‘기록의 찌꺼기’, 혹은 시스템이 관리자를 붙잡아두기 위해 만든 정교한 껍데기일 뿐이다.

치익, 치치직―.

바닥에 떨어진 카세트테이프에서 소름 끼치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검은 우산 천으로 칭칭 감겨 있던 테이프가 스스로 풀리더니, 뱀처럼 내 발목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네가…… K가 되면…… 나를…… 죽일 수 있다…….]

문태식의 목소리 위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아니,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잔향청취(殘響聽取).

내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지며 테이프 속에 숨겨진 ‘트랙’을 읽어내기 시작했다.

겉면에 녹음된 것은 문태식의 비겁한 유언이었다. 그 바로 안쪽 트랙에는 아버지가 남긴 경고가 박혀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 테이프의 물리적 자성체 안쪽에는 제3자의 웃음소리가 편집되어 박혀 있었다.

서류 인영들이 서 있을 때 나던 그 기분 나쁜 종이 마찰음과 닮은, 감정 없는 웃음소리.

“도윤아, 듣지 마!”

M-17이 소리치며 주머니에서 낡은 스티커 조각 하나를 꺼냈다. 붉은 글씨로 ‘검수 중’이라 적힌 회수 라벨이었다.

“이 테이프, 누군가 일부러 꼬아놨어! 기억을 낚시질하려고 미끼를 던진 거라고!”

M-17이 라벨을 테이프 릴에 붙이려 했지만, 테이프는 채찍처럼 휘둘러지며 그녀의 손을 쳐냈다. 녀석은 이제 내 목과 손목을 옭아매는 목줄이 되어 있었다.

“윽……!”

테이프가 조여질수록 머릿속으로 강렬한 이미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잔향청취가 강제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하얀 방이었다.

사방이 서류로 가득 찬, 창문 하나 없는 결재실.

그곳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전임 관리자, 강성훈.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서류 뭉치를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사망 진단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대상자의 이름은 흐릿해서 보이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그 서류에 서명하는 대신 자신의 오른손목을 책상 모서리에 찍어 눌렀다.

[내가…… 이 권한을 받아들인 건, 너를 살리기 위해서였어.]

환상 속의 아버지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놈들은 내 서명보다 내 ‘이름’ 자체를 담보로 원하더구나. 도윤아, 내가 거부한 이 결재는 언젠가 네게 돌아갈 거다. 내가 하지 못한 서명을 네가 마치는 순간, 이 시스템은 완성된다.]

그것은 희생이 아니었다. 이용당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되었지만, 시스템은 그 선의마저도 다음 관리자인 나를 낚기 위한 미끼로 가공해버렸다.

“강도윤 씨! 정신 차려요!”

윤서하의 외침이 귓가를 때렸다. 그녀가 내 어깨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테이프의 압박 때문에 시야가 붉게 물들어가는 와중에, 그녀의 눈동자가 보였다. 오염된 시스템 메시지 사이로, 예의 그 차갑고도 고집스러운 빛이 돌아와 있었다.

“당신은 관리자 따위가 아니야. 사망 진단서에 휘둘릴 사람도 아니고.”

그녀가 내 주머니를 뒤지더니 꼬깃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거 봐. 당신,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산 1+1 커피 영수증 아직도 안 버렸잖아. 적립금 50원 쌓이는 거에 목숨 거는 소시민이라고. 그런 사람이 무슨 존재를 소거하고 운명을 결정해? 당신은 그냥…… 같이 퇴근하기로 한 내 길동무일 뿐이야.”

영수증.

날짜도 가물가물한, 하지만 우리가 처음으로 ‘업무’가 아닌 ‘일상’을 공유했던 날의 기록.

그 사소하고 하찮은 현실의 조각이, 시스템이 밀어넣던 거창한 운명의 서사보다 훨씬 더 묵직하게 다가왔다.

내 오른손의 떨림이 멈췄다. 시스템의 강제 권한이 일시적으로 ‘오류’를 일으켰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집착이 데이터의 흐름을 방해한 것이다.

“……맞아. 나, 그 50원 아까워서 편의점도 골라 가거든.”

나는 테이프를 움켜쥐었다. 손바닥이 베여 피가 흘렀지만 상관없었다. 잔향청취를 역으로 이용해, 테이프 안쪽의 가장 깊은 트랙―그 제3자의 웃음소리가 숨겨진 곳을 향해 내 의식을 처박았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남의 가족사 편집해서 예능 찍지 마라. 시청률 안 나오니까.”

그 순간, 카세트테이프가 비명을 지르며 터져 나갔다. 검은 우산이 뒤집히고, 아버지를 흉내 내던 껍데기가 일그러지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은 없었다.

사라져가는 테이프의 파편들 사이로, 아버지가 남긴 최후의 트랙이 내 뇌리에 직접 박혔다. 그것은 목소리가 아니라, 일종의 각인에 가까웠다.

[도윤아, 내 마지막 실수를 기억해라.]

심장이 내려앉았다.

[결코 네 오른손을 믿지 마라. Administrator-K의 권한은 서명을 하는 손이 아니라, ‘죄’를 기록하는 손이다. 네가 처음으로 죽인 사람의 이름이…… 이미 그곳에 적혀 있다.]

“무슨…….”

말도 안 된다. 나는 헌터가 된 이후로 수많은 마수를 잡았지만, ‘사람’을 죽인 적은 없다. 아니, 적어도 내 기억 속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하지만 내 오른손등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인두로 지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잉크가 피부 밑에서 솟아오르듯 글자를 만들어냈다. 시스템의 메시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워지지 않는 흉터처럼, 혹은 평생을 따라다닐 낙인처럼 내 손등 위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내가 죽였다고 기록된,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단 한 번도 존재한 적 없는 이름.

[ 백연(白淵) ]

글자가 완성되는 순간, 검은 우산 밑의 존재가 입을 찢으며 웃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손등에 적힌 이름을 보며, 마치 기다렸던 결재 서류가 도착했다는 듯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게 누구야?”

나는 내 오른손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손등에 새겨진 이름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내 혈관을 타고 팔뚝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Advertisement
Bottom Banner Ad(reader-bottom)

댓글 (0)

댓글을 작성하려면 로그인해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