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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6-287화. 보호자가 들어온다와 반납된 이름표 일러스트

286-287화. 보호자가 들어온다와 반납된 이름표

286화. 보호자가 들어온다

드르륵, 낡은 편의점 셔터가 비명을 지르며 말려 올라갔다.

밖은 여전히 장대비가 쏟아지는 지옥이었지만, 셔터 너머의 풍경은 이상할 만큼 정지되어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것은 비린 빗물 냄새가 아니었다. 오래된 형광등이 지직거리며 타는 냄새, 먼지 앉은 종이 뭉치, 그리고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눅눅한 과자 봉지에서 날 법한 고약한 단내가 뒤섞인 공기였다.

“들어오라는 건가 보네. 아주 친절하기도 하시지.”

나는 우산살에 걸린 공중전화 수화기를 고쳐 쥐었다. 수화기 줄은 분명 한계가 있을 텐데, 내가 편의점 안으로 발을 들이자 마치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지며 나를 따라왔다. 보이지 않는 통화선이 이 빗속의 공중전화 부스와 이 편의점 내부를 억지로 이어 붙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선이 끊어지는 순간, 혹은 내가 우산을 접는 순간, 백연의 이름 옆에 붙은 ‘사망 예정’이라는 낙인은 확정으로 바뀔 터였다.

“도윤 씨, 정신 차려요. 여기 정상이 아니에요.”

윤서하가 내 옷소매를 붙잡으며 경고했다. 그녀의 안색은 창백했다. 증인 권한을 유지하느라 깎여 나가는 정신력이 한계에 달했을 텐데도, 그녀의 눈은 여전히 매섭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정상인 곳이었으면 애초에 오지도 않았겠죠. 백연 씨, 괜찮아요?”

내 물음에 백연은 대답 대신 자신의 카메라 렌즈를 조였다. 그녀의 오른쪽 팔목부터 시작된 검은 현상액 같은 얼룩은 이미 팔꿈치 너머까지 번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도 셔터를 누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필름이… 자꾸 타요. B-04라는 숫자만 계속 찍히고 있어요.”

그녀가 보여준 인화지 조각들에는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배경 위로 ‘B-04’라는 백색 숫자가 마치 낙인처럼 반복적으로 감광되어 있었다. 기록자로서의 그녀의 감각이 이곳이 그 ‘보관실’과 연결되어 있음을 본능적으로 읽어내고 있었다.

편의점 내부로 완전히 들어서자, 선반 위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분명 컵라면과 과자 봉지였던 것들이, 가까이 다가가자 누렇게 변색된 서류 뭉치와 낡은 이름표, 그리고 녹슨 열쇠 꾸러미들로 바뀌어 있었다.

‘편의점이 아니라, 거대한 쓰레기통이군. 협회가 버린 것들이 모인.’

나는 매대 사이를 지나며 선반에 붙은 가격표를 살폈다. 거기엔 숫자가 적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문구들이 박혀 있었다.

[실종 처리 비용: 기억 300일]

[사건 은폐 가격: 증인 한 명의 침묵]

가장 구석진 곳, 아이스크림 냉동고 위에는 작은 이름표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긁힌 자국이 가득한 표면 위로 ‘보호자 부재’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그런데 그 문구가 갑자기 일렁이더니, 내 발치에 드리워진 그림자 쪽으로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와 붙었다.

“도윤 씨, 조심해요!”

윤서하가 내 앞을 막아섰다.

“그 문구, 당신 그림자에 붙었어요. 이건… 당신을 보호자가 없는 상태로 규정하겠다는 뜻이에요. 아니면, 당신을 누군가의 대리인으로 삼으려 하거나.”

“내가 누구 보호자 노릇 할 성격은 아닌데 말이죠.”

나는 짐짓 농담조로 대꾸했지만,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림자에 붙은 글자가 마치 족쇄처럼 무거워졌다.

그때, 계산대 위에 놓인 낡은 스피커에서 치익거리는 잡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스피커뿐만이 아니었다. 영수증 프린터가 드르륵거리며 종이를 뱉는 소리, 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낮은 진동음이 섞여 하나의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보호자가 오면 다 해결된다고 했어.

아이의 목소리였다. 원망보다는 깊은 체념과 서러움이 섞여,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지는 그런 목소리.

근데 보호자는 늘 서명만 하고 갔어. 나를 보는 게 아니라, 종이만 보고 갔어.

“그 보호자가 누구지? 문태식인가?”

내 질문에 목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산대의 영수증 프린터가 미친 듯이 종이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진 영수증이 뱀처럼 바닥을 기어 내 발등을 덮었다.

[항목: 증인 권한 1회] [금액: 윤서하의 흉터]

[항목: 기억 휘발] [금액: 백연의 기록물 일체]

[항목: 사망 예정자 지연] [금액: 강도윤의 심박수]

[항목: 보호자 서명 대리] [금액: ●●●]

금액란에 적힌 이름들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징하게 울렸다. 거래 명세서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악질이었다. 누군가를 살리고, 누군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지불해야 했던 희생의 목록이었다.

“도윤 씨, 뒤쪽!”

백연의 외침과 동시에 선반 사이의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팔이 튀어나왔다.

전부 똑같은 회색빛 감식반 장갑을 낀 손들이었다. 그 손들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백연의 카메라를 낚아채려 들었고, 동시에 윤서하의 팔목에 감긴 팔찌를 향해 뻗어 왔다.

장갑 손등에는 익숙한 문양이 찍혀 있었다. 협회 감식반의 인장. 하지만 그 인장은 마치 누군가에게 강제로 눌린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이것들이 진짜… 퇴근 좀 하자고!”

나는 수화기를 쥔 채 우산 손잡이를 휘둘러 접근하는 손 하나를 쳐냈다. 묵직한 타격감이 느껴졌지만, 팔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오직 장갑 낀 손들만이 허공을 헤엄치듯 우리를 압박해 왔다.

“서하 씨, 지금이에요!”

윤서하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눈동자가 금색으로 빛나며 ‘증인’의 권한을 강제로 개방했다.

“내가 보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아! 기록되지 않은 손들은 물러나!”

그녀의 외침과 함께 뻗어 오던 팔들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지며 방향을 잃었다. 존재의 근거를 부정당한 유령들이 비틀거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백연이 자신의 타버린 필름 뭉치를 한꺼번에 터뜨렸다.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강렬한 섬광이 편의점 내부를 가득 채웠다. 기록자의 마지막 발악과도 같은 그 불꽃은, 실체 없는 팔들 중 가장 앞선 하나를 강제로 현실에 고정시켰다.

그 팔목 안쪽, 낡은 흉터 하나가 보였다. 오래전 화상을 입었다가 서투르게 수선한 듯한 자국. 내가 아는 누군가의 습관적인 흉터와 닮아 있었지만, 그것이 문태식의 것인지, 아니면 그를 모방한 누군가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서명… 서명해.”

목소리가 이번엔 내 귓가에서 들렸다. 계산대 스캐너 위에 붉은 광선이 깜빡이며 나를 유혹했다.

‘보호자 서명 대리’ 항목에 내 이름을 적거나, 혹은 누군가의 이름을 대신 적으라는 무언의 압박. 만약 내가 여기서 백연의 이름을 지우기 위해 다른 이름을 적는다면, 이 지독한 연쇄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반드시 ‘보호자 부재’ 상태로 밀려나 희생될 테니까.

“미안하지만, 난 서류 작업은 질색이라서 말이야.”

나는 주머니에서 아까 주운 낡은 협회 출입증을 꺼냈다. 그리고 백연의 손에서 타버린 필름 조각을 낚아채 스캐너 위에 동시에 올렸다.

“반납하러 왔다. 주인을 잘못 찾아간 물건들이 많아서 말이지.”

스캐너의 붉은 빛이 출입증과 필름을 훑었다. 기계적인 비프음이 들리고, 계산대 모니터에 글자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B-04 보관실 최종 반납자: 문태식]

그 아래, 치직거리며 새로운 줄이 생겨났다.

[반납 물품: 강도윤]

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물품? 내가?

문태식이 보관실에 마지막으로 반납한 것이 열쇠도, 서류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고? 기록은 내 이름을 명확히 지목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화면은 노이즈로 뒤덮이며 ‘강도윤’이라는 세 글자를 ‘반가온’이라는 이름과 교차시켰다.

마치 시스템 자체가 이 존재가 누구인지 정의하지 못해 충돌을 일으키는 것처럼.

“도윤 씨, 저기 문이!”

윤서하가 가리킨 곳은 편의점 안쪽의 ‘직원 전용’ 문이었다.

방금 전까지 ‘보호자 전용’이라고 적혀 있던 표지판은 어느새 ‘B-04 보관실 - 반납 확인 완료’로 바뀌어 있었다.

철문이 무겁게 열렸다. 그 틈새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편의점의 먼지 냄새가 아니었다. 뼈를 깎는 듯한 지하의 냉기와, 수십 년간 묵혀둔 소독약 냄새, 그리고… 익숙한 비 냄새였다.

우리는 홀린 듯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곳은 창고가 아니었다. 수천 개의 서랍이 벽면을 가득 채운 협회의 비밀 보관실이었다. 그리고 보관실 중앙, 단 하나의 조명을 받고 있는 받침대 위에는 젖은 검은 우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내 손에 들린 것보다 훨씬 작고 낡은, 아이용 우산.

그 우산 손잡이에는 빛바랜 이름표가 대롱거리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 이름표를 뒤집었다.

[강도윤]

하지만 내가 그 이름을 읽는 순간, 이름표의 글자가 피처럼 번지더니 다른 이름을 내뱉었다.

[반가온]

두 이름이 마치 서로를 밀어내듯, 혹은 하나로 합쳐지려는 듯 격렬하게 깜빡였다. 그때, 보관실 깊은 곳에서 구두 굽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무거운, 누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한 발소리였다.

“보호자가… 왔네.”

백연이 숨을 죽이며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형체는 우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에는, 내가 방금 스캔했던 것과 똑같은 낡은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나는 수화기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당신이 반납한 게, 정말 나야? 아니면 반가온이야?”

어둠 속의 인영이 멈춰 섰다. 그리고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보관실의 모든 서랍이 동시에 덜컹거리며 열리기 시작했다.

287화. 반납된 이름표

수천 개의 서랍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철재 서랍이 마찰하며 내는 날카로운 소음이 좁은 보관실 안을 가득 메웠다. 거대한 기계 장치가 한꺼번에 숨을 들이켜고, 오래 닫혀 있던 입들이 동시에 소리를 지르는 듯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등 뒤에는 이미 굳게 닫힌 ‘직원 전용’ 문뿐이었다. 아니, 이제는 ‘B-04 보관실 - 반납 확인 완료’라는 문구가 낙인처럼 박힌 문이었다.

열린 서랍들 사이로 내용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그것들은 값비싼 마석이나 헌터의 장비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게 다 뭐야…….”

내 입에서 허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서랍마다 가득 찬 것은 행정적인 무관심의 잔해들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아이들의 이름표, 살이 부러져 앙상한 작은 우산 조각들, 유효기간이 지나 폐기 처분 도장이 찍힌 헌터 등록증, 그리고 주인을 잃고 딱딱하게 굳은 병원 종이 팔찌들.

공포보다는 차가운 한기가 먼저 느껴졌다. 마치 영하의 냉동고에 들어온 것처럼, 건조하고 딱딱한 행정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이곳은 죽음을 애도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처리되지 못한 서류들을 분류하고, 쓸모없어진 이름을 소거하는 거대한 파쇄기 내부였다.

보관실 중앙, 구두 굽 소리를 내며 다가온 인영이 멈춰 섰다. 흰색 감식반 방진복을 입고 장갑을 낀 형체.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헬멧의 실드 너머로는 보관실의 형광등 불빛만 반사될 뿐이었다. 그 모습이 문태식과 너무나 흡사해 순간 ‘아저씨?’라고 부를 뻔했지만, 나는 혀를 깨물며 참았다.

그의 목소리는 한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여러 겹의 테이프를 동시에 틀어놓은 듯한, 지지직거리는 기계음과 잔향이 섞인 목소리였다.

[반납은 완료됐다.]

그가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보호자는 서명했을 뿐이다. 절차에 따른 반납이다. 이의 제기 기간은 15년 전에 종료되었다.]

“절차? 반납?”

나는 끓어오르는 욕설을 간신히 억눌렀다. 억울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내 이름이 왜 저딴 스캐너 화면에서 깜빡거려야 하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누가 마음대로 내 이름을 반납해? 내가 여기 있는데, 내가 살아 있는데!”

분노에 찬 내 외침에도 인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고장 난 안내 로봇처럼 똑같은 말만 반복할 기세였다.

그때, 내 귀가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잔향청취. 강화된 감각이 제멋대로 폭주하며 열린 서랍 속의 물건들을 훑었다. 보관실 안의 모든 사물이 각자의 ‘사정’을 떠들기 시작했다.

— 나 접힌 적 없는데 폐기 처리라니 억울합니다. 비 한 방울 안 맞혀줄 거면 왜 샀어?

— 환자명이 매번 바뀌는데 제 탓은 아니잖아요. 저는 그냥 손목에 감겨 있었을 뿐이라고요. 억울해! 잉크가 번진 건 내 잘못이 아냐!

— 헌터 등록? 그거 먹는 건가요? 내 주인은 던전 입구도 못 가보고 이름표부터 뺏겼는데.

물건들의 말투는 웃기게 비뚤어져 있었지만, 그 뒤에 깔린 온도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름표들은 누군가의 신분을 증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를 지우기 위해 붙여진 딱지였다.

[알림: B-04 보관실의 운영 규칙을 확인합니다.]

내 귓가에 시스템 메시지 같은 환청이 들렸다.

[보호자 없는 능력자 혹은 헌터 후보군의 이름은 임시 보관됩니다. 해당 이름은 필요에 따라 다른 기록의 대체명으로 반납 및 재활용될 수 있습니다.]

“……재활용?”

나는 소름이 끼쳤다. 이름이 이름으로 쓰이지 않고, 구멍 난 장부의 숫자를 메우는 소모품으로 쓰였다는 뜻이다.

“도윤 씨, 정신 차려요!”

윤서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환청을 뚫고 들어왔다. 그녀는 내 그림자에 달라붙으려는 ‘보호자 부재’라는 글자를 자신의 권한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보관실 안의 서류 더미를 빠르게 훑었다.

“기록의 결이 이상해요. 도윤 씨한테 보호자가 없었던 게 아니에요. 누군가 도윤 씨에게 붙어 있어야 할 보호자 기록을 강제로 떼어냈어요. 그리고 그걸…… 다른 아이에게 붙였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내 보호자를 훔쳐 갔다고요?”

“확신할 순 없지만, 이 보관실 자체가 그런 ‘교환’이 일어나는 장소예요. 기록상으로 당신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요.”

옆에서 백연이 카메라를 고쳐 잡았다. 그녀의 하얀 뺨에는 검은 얼룩이 이제 목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녀는 타버린 필름의 잔상을 렌즈 앞에 덧씌우며 보관실 중앙의 받침대를 조준했다.

“고정할게요. 지금 저기…… 이름표가 두 개 보여요.”

백연의 셔터가 터졌다. 플래시가 터지는 찰나, 받침대 위에 놓인 젖은 검은 우산 위로 두 개의 환영이 겹쳤다.

하나는 [강도윤]. 또 하나는 [반가온].

두 이름표가 미친 듯이 점멸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바닥에 비친 그림자는 단 하나뿐이었다. 이름은 둘인데, 존재는 하나라는 듯이.

그 순간, 서랍에서 튀어나온 수천 개의 이름표들이 나방 떼처럼 날아올랐다. 그것들은 목표를 정한 듯 내 코트와 손목, 심지어 내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윽!”

이름표 하나가 내 손등에 달라붙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낯선 기억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차가운 복도, 누군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울던 감각, ‘이름은 이제 잊어버리렴’이라고 말하던 낮은 목소리. 내 것이 아닌 기억이 내 뇌세포를 갉아먹으며 원래 있던 추억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덮어쓰기였다. 이 이름표들에 담긴 ‘폐기된 아이들’의 운명이 나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도윤 씨!”

윤서하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의 팔찌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왔다.

“증인 권한 발동! 이 사람은 현재 ‘강도윤’으로 호명되며, 그 외의 모든 호칭은 거짓이다! 기록되지 않은 자들의 침입을 거부한다!”

그녀의 선언이 방어막처럼 내 몸을 감쌌다. 동시에 백연이 내 발치에 고여 있던 그림자를 향해 다시 한 번 셔터를 눌렀다.

“그림자를 찍었어요! 이름표들이 섞이지 않게 고정해 뒀으니까, 진짜를 찾으세요!”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내 몸에 달라붙은 수십 개의 이름표 중 가장 먼저 붙었던,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하나를 움켜쥐었다. 잔향청취가 그 이름표의 속삭임을 포착했다.

— 형, 내 이름은 이거야. 잊으면 안 돼.

그것은 반가온의 이름표였다.

나는 이 이름표를 떼어내 바닥에 버리려다 멈칫했다.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이곳의 규칙대로라면 버려진 이름은 다시 ‘반납’되어 폐기되거나 다른 누군가의 가짜 이름으로 재활용될 것이다. 그건 죽음보다 더한 모욕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받침대 위에 놓인, 주인을 잃은 작은 검은 우산이 보였다. 나는 비틀거리며 다가가 우산 손잡이에 달려 있던 낡은 고리를 열었다. 그리고 내 손바닥을 태울 듯이 뜨거웠던 ‘반가온’의 이름표를 그 고리에 단단히 걸었다.

사람의 몸이 아니라, 물건에. 증거물에. 이 이름이 더 이상 떠돌지 않도록, 이곳의 행정 시스템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영구 보존 물품’의 일부로 귀속시킨 것이다.

달칵.

이름표가 우산에 걸리는 순간, 보관실을 가득 메웠던 소음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공중에 날아다니던 수천 개의 이름표들이 힘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중앙에 서 있던 장갑 낀 인영의 형체가 흔들렸다.

“어……?”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인영의 팔목, 방진복 소매 사이로 보였던 흉터가 일그러지며 여러 겹으로 겹쳐 보였다. 그것은 문태식 한 사람의 손이 아니었다. 수십 명, 아니 수백 명의 손이 하나의 잔상처럼 겹쳐져 있었다.

그들은 감식반이었고, 서무였으며, 기록관이었다. 문태식이라는 개인이 아니라, 협회라는 거대한 조직이 ‘보호자’라는 직함을 돌려가며 사용한 흔적이었다. 문태식은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인가? 아니면 그들을 대표하는 방패였나?

인영이 서서히 흐릿해지며 보관실의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마지막까지 들린 것은 기계적인 안내음이었다.

[항목: 반가온. 상태: 보존 처리 전환. 보호자 서명 확인 중…….]

나는 우산 손잡이에 매달린 이름표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름표의 뒷면, 아주 작은 글씨로 인쇄된 문구를 발견하고 숨을 들이켰다.

[최초 보호 요청자: 강도윤]

내 손등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었나? 나는 보호를 받아야 했던 대상이 아니라, 누군가를 보호해달라고 이 지옥 같은 시스템에 요청했던 쪽이었단 말인가?

그때, 내 코트 주머니 속에서 길게 늘어져 따라왔던 공중전화 수화기에서 지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수화기를 귀에 대지 않아도 선명하게 들리는, 아주 어린 아이의 목소리였다.

— 형.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이번엔 내 이름 버리지 마.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울먹이고 있었다. 나는 우산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보관실의 형광등이 깜빡이며 꺼지기 시작했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한 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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