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5화. 보관함 안의 첫 사망신고서
제목: 24화. 보관함 안의 강도윤
“거기, 누구야? 내... 내 이름을 돌려줘.”
좁고 낡은 7번 보관함, 그 녹슨 경첩 틈새에서 흘러나온 건 낯설지 않은 목소리였다.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통화할 때, 혹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봉투 필요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 내뱉던, 지극히 평범하고 지루한 내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는 내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억울함과 공포, 그리고 기묘한 지침이 섞여 있었다. 마치 수십 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썩어가던 목소리 같았다.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황당함이 공포를 이긴 순간이었다.
“뭐라는 거야, 이 미친 보관함이. 내 이름은 여기 멀쩡히 붙어 있거든?”
나는 왼팔을 들어 올려 [KDY - 대체명 승인 대기]라고 뜨는, 아직은 ‘강도윤’으로 고정된 태그를 보란 듯이 흔들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요지부동이었다.
“거짓말하지 마. 네가 내 이름을 가져갔잖아. 네가... 네가 날 여기 가두고, 밖에서 내 행세를 하고 있잖아!”
철제 보관함 문이 덜커덩거렸다. 안에서 누군가 주먹으로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났다.
코믹하네, 정말. 내 이름 소유권 분쟁을 내 목소리랑 해야 한다니. 이거 소송 걸면 변호사는 누구를 변호해야 하는 거야?
“강도윤 씨.”
한지율이 내 소매를 붙잡았다. 부러진 어깨를 감싼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보관함의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 눈빛은, 이 상황을 예상했다기보다는, 올 것이 왔다는 절망에 가까웠다.
“이 목소리... 들려요?”
“내 목소리잖아. 안 들리겠어? 보관함이 미쳐서 내 성대모사를 하나 본데, 아주 질 나쁜 장난이야.”
나는 짐짓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보관함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려 했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잡이는 차갑게 식어 있었고, 녹슨 고철 냄새와 함께 아주 오래된 먼지 냄새가 훅 끼쳐왔다.
동시에, 내 머릿속의 잔향청취 감각이 비명을 질렀다.
보관함은 물리적으로는 기껏해야 점퍼 두 벌 들어가면 꽉 찰 크기였다. 하지만 그 안쪽은, 어둠이 끝없이 펼쳐진, 아주 깊은 지하 저장소처럼 보였다. 그 심연 속에서 무언가가 떠다니고 있었다.
낡고 빛바랜 KDY 라벨, 모서리가 깨진 구형 사원증 조각, 그리고 마치 불에 탄 것처럼 그을린, ‘폐기 예정’ 도장이 찍힌 태그 조각들이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부유했다.
그것들이 내뱉는 잔향은, 내 기억과는 전혀 다른, 하지만 기묘하게 익숙한 슬픔을 품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떠다니는 사원증 조각을 잡으려 했다. 손가락 끝에 낡은 플라스틱의 질감이 느껴지는 순간, 보관함의 녹슨 경첩이 삐이익, 하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목소리가 되어 내 뇌리에 박혔다.
――KDY는 회수 실패. 보관함 7번으로 이송.――
――승인자는 원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절차는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과거의 절차가 남긴 잔향이었다. 보관함 7번. 이곳은 애초에 윤서하를 위한 곳이 아니었다. 나, 강도윤을 위한, 혹은 ‘강도윤’이었던 무언가를 위한 감옥이자 기록 보관소였다.
“...이게 뭐야.”
내 목소리가 메말랐다. 내 이름이, 이 좁고 더러운 보관함 안에 갇혀 있었다고? 그럼 지금 밖에서 숨 쉬고, 밥 먹고, 월세 걱정하는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말했잖아. 네가 내 이름을 돌려주지 않아서, 내가 여기 갇혀 있는 거라고.”
보관함 안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덜커덩거리는 소리 없이, 아주 차분하고, 그래서 더 소름 끼치게 내 말투와 닮아 있었다. 아니, 내 말투라기보다는, 내가 인생에 완전히 지쳐버렸을 때 낼 법한, 그런 목소리였다.
“넌 늦게 도착한 잔향일 뿐이야. 혹은, 나를 대체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잡한 가짜거나. 밖의 공기는 어때? 편의점 도시락 맛은 여전해?”
놈은 나를 ‘늦게 도착한 잔향’ 취급했다.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 상황은 코믹 하드보일드가 아니라, 그냥 하드보일드였다. 그것도 아주 질척거리는.
“닥쳐.”
나는 보관함 문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대기실을 울렸다.
“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네가 어떻게 알아? 네가 진짜 강도윤이라면, 증명해봐.”
나는 놈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만이 아는, 아주 구질구질하고 사소해서 남들에게는 말할 수도 없는, 그런 생활의 기억들을.
“지난주 수요일, 퇴근할 때 지하철역 앞 편의점에서 산 영수증 품목, 다 말해봐. 1원 단위까지.”
“...매운 떡볶이 도시락 하나, 수입 맥주 네 캔 만 원 행사, 그리고 0.5밀리리터짜리 젤 펜 하나. 총합 14,800원. 영수증은 가방 앞주머니에 구겨 넣었잖아.”
놈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소름이 돋았다. 그건 정말 나밖에 모르는 일이었다.
“...좋아. 그럼, 퇴근 카드 찍을 때, 단말기에서 나던 소리는? ‘삑’ 소리 말고, 그 뒤에 나던 미세한 잡음.”
“노후화된 스피커가 찢어지는 듯한, 아주 짧은 ‘치직’ 소리. 그리고 단말기 몸체가 벽에 부딪히며 나던 둔탁한 덜컹거림. 넌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네 인생도 그렇게 찢어지고 덜컹거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
놈은 내 내면의 감정까지 읊조렸다. 마치 내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문태식 팀장이 몰래 준 믹스커피, 그 양반 취향은?”
“설탕 두 스푼, 프림 세 스푼. 아주 달고 텁텁한, 싸구려 맛. 하지만 넌 그 맛이 싫지 않았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양반이 너에게 쏟는 미약한 관심이 느껴졌으니까.”
놈은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을. 내 구질구질한 일상, 내 수치심, 내 작은 위안까지도.
나는 놈이 진짜 강도윤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그럼 나는? 나는 대체 누구지? 나는 놈의 기억을 훔친, 이름 없는 잔향에 불과한가?
“...강도윤 씨.”
한지율이 다시 내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미안함이, 이번에는 숨겨지지 않았다.
“미안해요... 이건 원래 윤서하 언니에게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 아니었어. 그런데... 그런데 절차가 꼬이면서...”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이름, HJY의 전체 정체는 밝히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은 확실했다. 이 모든 난장판의 배후에, 혹은 이 절차의 설계에 그녀가 관여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지금 다친 몸으로,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내 이름이, KDY 태그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그녀의 미약한 잔향으로 붙잡아 주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마지막 검증 질문을 떠올렸다. 이건,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그래서 가장 또렷한 기억이었다.
“마지막 질문이다. ...내 첫 현장, ‘구로구 빌라 붕괴 사고’. 거기서 죽은 헌터의 마지막 농담을 듣고도, 내가 도망치지 못했던 이유. ...말해봐.”
보관함 안이 잠시 침묵에 잠겼다. 덜커덩거리는 소리도, 속삭임도 멈췄다.
그리고 이윽고,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무서워서. 다리가 얼어붙어서 움직일 수 없었잖아. 그 헌터의 피가 내 신발을 적시는 걸 보면서, 나도 저렇게 죽을까 봐, 그 공포에 질려서... 한 발짝도 떼지 못했어. 그게 이유잖아.”
놈의 목소리에는, 합리적인 공포와 비겁함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아주 당연한 이유였다.
하지만 나는, 내 수치심의 원천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놈에게 말하지 않은, 진짜 이유를 기억했다. 나는 공포에 질려서 도망치지 못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 헌터의 죽음을 보며, ‘아, 나도 저렇게 죽으면, 이 지긋지긋한 삶을 끝낼 수 있겠구나’라는, 찰나의 안도감을 느꼈다. 그 안도감에, 그 끔찍한 부채감에,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선택 비용이자, 수치심이었다. 놈은, 내 기억의 껍데기는 알고 있었지만, 그 알맹이, 그 감정의 깊이는 알지 못했다.
“...틀렸어.”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안도감과 함께, 기묘한 승리감이 피어올랐다.
“넌 가짜야. 진짜 강도윤은, 그렇게 합리적으로 비겁하지 않아. 훨씬 더 구질구질하고, 훨씬 더 끔찍한 놈이거든.”
보관함 안의 목소리가 당황한 듯 갈라졌다.
“뭐...? 아니야! 내가 진짜야! 내가...!”
동시에, 뒤쪽에서 자동 방호 유닛들의 구동음이 가까워졌다. 대기실 바닥과 벽의 조명이 붉게 물들며, 거대한 카운트다운 숫자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대체명 승인 완료까지 30초.――
――S급 대기실 격리 절차 진행 중.――
시간이 없었다. 나는 보관함을 열어야 했다. 안에 갇힌 KDY 잔향을 되찾아야 했다.
하지만, 직감이 경고했다. 이 보관함을 여는 순간, 안에 갇힌, 내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지만 감정은 거세된, 저 ‘강도윤’의 잔향이 밖의 나를 덮어쓰기 할 것이다. 나는 내 몸을 놈에게 빼앗기고, 이 좁은 보관함 안에 갇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닫으면, 내 이름을 되찾을 단서도, 이 미스터리를 풀 열쇠도 잃는다.
열 수도, 닫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
나는 왼팔을 보관함 문손잡이에 갖다 댔다. [KDY - 대체명 승인 대기] 태그가 보관함 문틈의 녹슨 틈새와 맞닿았다.
그 순간, 나는 미친 짓을 저질렀다.
보관함을 여는 대신, 내 왼팔의 KDY 태그를 보관함 문틈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내 몸의 잔향을, 내 ‘강도윤’의 정체성을, 보관함 안으로 역류시켰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한지율이 비명을 질렀다. 보관함 안의 목소리도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내 태그에서 뻗어 나간 잔향은, 보관함 안의 어둠을 뚫고, 그 심연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내 구질구질한 일상, 내 수치심, 내 안도감, 그 모든 감정이 섞인 잔향이, 보관함 안의 ‘가짜 강도윤’을 덮쳤다.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멈췄다. 내 목소리의 비명도 멈췄다.
그리고, 보관함 깊은 곳에서,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내 목소리도, 한지율의 목소리도, 윤서하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건, 텁텁한 믹스커피 냄새와 함께, 아주 익숙하고, 그래서 더 믿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강도윤, 네 첫 사망신고서는 내가 썼다.”
문태식 팀장이었다.
작가의 말: 내 목소리가 나를 가짜라고 부르면, 일단 월세 영수증부터 확인합시다.
제목: 25화. 첫 사망신고서
"강도윤, 네 첫 사망신고서는 내가 썼다."
낡은 철제 보관함 문틈으로 새어 나온 것은, 분명 문태식 팀장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뭔가 툭 끊겼다. 뭐라고? 사망신고서? 억울하게 죽은 척연하는 연기라면, 그 뚱뚱한 몸을 이끌고 편의점 앞 파라솔 의자에 앉아 믹스커피 두 개를 털어 넣으며 탕비실 비품 횡령을 걱정하던 그 능글맞은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 영감탱이가, 내가 살아 있는데 내 죽음을 서류로 조작했다는 사실을, 심지어 내 목소리를 흉내 내는 정체불명의 잔향을 통해 듣게 되다니.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찰나, 내 감각이 뇌보다 먼저 움직였다.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실시간 통화가 아니라는 뜻이다.
내 청각 잔향 능력이 보관함 주변의 미세한 파동을 잡아냈다. 목소리는 아주 낡고 메마른, 종이와 잉크 냄새가 섞인 잔향이었다. 그것은 과거에 기록된, 혹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과거의 흔적이었다.
목소리와 함께 코끝을 스치는 것은 지독한 믹스커피 냄새였다. 문 팀장이 즐겨 마시던, 설탕 덩어리가 90%인 싸구려 커피 향. 그리고 서걱거리는 소리. 낡은 볼펜이 종이 위를 긁는 소리였다. 이어지는, 꽝! 하고 단단한 결재 도장이 찍히는 소리. 그 소리들이 환청처럼 내 고막을 두드렸다.
보관함 안쪽, 아득한 어둠 속에서 아주 낡고 빛바랜 전자문서 형태의 잔향이 천천히 떠올랐다. 완벽한 형태는 아니었다. 마치 찢어지거나 훼손된 듯, 문서의 가장자리는 흐릿하게 흩어져 있었고, 일부 문구는 까맣게 그을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확실하게 보이는 몇몇 단어들이 내 심장을 멈추게 했다.
사망자: 강도윤
처리 사유: 보호 격리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망 처리일이 보였다. 20XX년 X월 X일.
그 날짜를 보는 순간, 내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그날은, 내가 첫 현장에서 그 지독한 공포와 마주하기, 아니, 내가 헌터가 되기로 결심하기도 훨씬 전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첫 현장보다, 내가 아직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시절보다도 더 앞선 날짜였다.
"뭐...? 잠깐. 이 날짜, 말이 안 되잖아."
나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순간, 내 귀에 또 다른 잔향의 단서가 걸려들었다. 사망신고서, 문태식이 쥐고 있던 낡은 펜, 결재 도장, 그리고 내 손목의 태그 스캐너 중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살아 있는 사람을 먼저 죽은 것으로 등록했다...]
[...사망신고는 보호 절차였다...]
[...원본 KDY를 숨기려면 사망 처리가 필요했다...]
[...승인자는 두 명이었다...]
단서는 떨어졌는데, 그림은 더 지저분해졌다. 살아 있는 나를 죽은 사람으로? 그게 보호였다고? 원본 KDY를 숨기기 위해? 그리고 승인자가 두 명?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문 팀장이 내 죽음을 조작한 게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고? 그 능글맞고 속내를 알 수 없던 영감탱이가? 아니,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 그는 나를 이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잔향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옆에 있던 한지율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문태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다.
"팀장님...? 그럴 리가... 팀장님이..."
그녀는 마치 문 팀장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처럼, 혹은 그가 이런 일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도윤 씨... 팀장님은... 전부는 악인이 아니었어요. 당신을... 당신을 정말 걱정하셨..."
"걱정? 이 서류를 보고도 그 소리가 나옵니까?"
나는 그녀의 말을 가차 없이 끊어냈다.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가 무엇을 알고 있든, 이 서류는 나를 기만한 증거였다.
"전부는 몰랐어요..."
한지율은 고개를 숙이며 개미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는 몰랐다고? 그녀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그녀의 정체, HJY라는 이니셜이 자꾸만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그때, 대기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기계적인 관절음, 그리고 천장에서 덜컹거리는 레일 소리. 바닥에서 올라오는 묵직한 격벽 소리. 자동 방호 유닛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대기실을 봉쇄하려는 것이다. 태그 스캐너의 붉은 빛이 더욱 급박하게 깜빡였다.
[대체명 승인 대기 중...]
[잔향 역류 발생: KDY (원본) / KDY (보관함) / 미확정 대체명]
[...승인 절차 진행...]
내 손목의 태그는 세 개의 잔향 사이에서 격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나라는 존재의 정의가 이 세 가지 사이에서 결판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그때, 저 멀리서 또 다른 움직임이 느껴졌다.
검은 눈의 윤서하, 그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내게 그 문서 찢으면 편해져요라고 말했던, 그 오싹한 미소를 지으며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단순히 지켜보고만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보관함 안에서 떠오른 사망신고서 잔향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 하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도와주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서류를 빼앗아 나를 영원히 '사망' 처리하려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깊은 심연처럼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보관함 안쪽, 문태식의 잔향을 향해 소리쳤다.
"문태식 팀장! 당신, 왜 내 사망신고서를 썼어? 왜 나는 지금 살아 있는데, 왜 당신은 내가 죽었다는 서류를 남긴 거야?"
내 물음에 문태식의 잔향은 완전한 답을 주지 않았다. 서걱거리는 볼펜 소리와 함께 메마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네가 살아남으려면... 네가 죽었다는 기록이 필요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살아남기 위해 죽었다는 기록이라니.
나는 한지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부상 때문에 휘청이면서도, 내 손목의 태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미안함과 고뇌가 가득 차 있었다.
"한지율 씨, 당신도 알고 있었지? 이 서류, 그리고 문 팀장의 계획, 전부 다!"
내 몰아붙임에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떨리는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전부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내가 모른다고 해서, 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죠. 강도윤 씨, 정말... 미안해요."
그 미안함은 진짜처럼 보였다. 하지만 HJY가 무엇인지, 그녀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태그를 붙잡은 손에 힘을 주며, 대체명 승인 절차를 지연시키려 했다.
나는 한지율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그녀를 믿지는 않지만, 지금은 그녀가 필요했다. 나는 사망신고서를 찢거나 지우지 않았다. 대신, 내 안에 남아 있는 또 다른 잔향을 끌어냈다.
내 생활 잔향. 싸구려 캔커피 냄새, 월세 독촉 문자, 퇴근 카드 찍는 소리. 그리고 첫 현장에서 느꼈던 그 수치심과 공포, 삶을 포기하려 했던 찰나의 안도감. 그 지독한 기억들을 사망신고서 여백에 덧쓰기 시작했다.
[...사망자: 강도윤]
[덧쓰기: 하지만 그는 매일 아침 월세 독촉 문자에 시달린다.]
[덧쓰기: 그는 싸구려 캔커피를 마시며 퇴근 카드를 찍는다.]
[덧쓰기: 그는 첫 현장에서 도망치지 않았다. 아니, 도망칠 힘조차 없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증거, 그리고 내가 겪었던 수치심과 공포까지. 그 모든 것을 서류 위에 덮어씌웠다.
그러자, 태그 스캐너의 깜빡임이 조금씩 느려졌다.
[...사망 처리된 KDY와 지금 숨 쉬는 강도윤의 잔향 임시 결합.]
[대체명 승인 절차 지연 발생...]
임시방편일 뿐이었지만, 당장의 봉쇄는 막았다. 자동 방호 유닛의 기계음이 조금 멀어졌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망신고서를 다시 바라보았다. 흐릿한 서류의 하단, 승인자 서명란에 두 번째 승인자의 서명이 아주 잠깐 드러났다.
그것은 문태식의 서명도, YSH도, HJY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서명을 보는 순간, 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 필체는... 내가 아주 잘 아는, 심지어 매일 거울을 볼 때마다 마주하는 필체였다.
그것은 KDY, 나와 똑같은 필체였다.
그리고 보관함 안쪽 깊은 곳에서, 또 다른 내 목소리가, 원본이라고 주장하던 그 목소리가 소름 돋는 미소와 함께 속삭였다.
[강도윤. 착각하지 마. 네 첫 사망신고서는 문태식이 썼지만...]
[두 번째 사망신고서는 네가 직접 썼어.]
작가의 말: 사망신고서에 내 필체가 있으면, 일단 필적 감정보다 퇴근 기록부터 확인해야죠.
✦ 작가의 말
보관함 안의 내 목소리와 첫 사망신고서. 도윤이 이름을 되찾으려 할수록 서류가 더 무서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