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27화. 두 번째 사망신고서와 마지막 농담
제목: 26화. 내가 쓴 두 번째 사망신고서
“두 번째 사망신고서는 네가 직접 썼어.”
7번 보관함, 그 어둡고 좁은 틈새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내 목소리였다. 정확히는 내 성대를 빌려 쓴, 하지만 내가 낸 적 없는 톤의 목소리.
그 순간, 내 심장은 갈비뼈를 뚫고 나올 기세로 쿵쾅거렸다. 아드레날린이 혈관을 타고 폭발했다.
“미친 소리….”
나는 본능적으로 부정했다. 내가 나를 죽였다고? 그것도 서류를 작성해서? 이건 코믹 메이플스토리 시나리오보다 더 황당한 소리였다. 하지만 내 시선은 이미 그 낡은 전자문서 하단, 두 번째 승인자 칸에 고정되어 있었다.
필체는 배신하지 않는다.
나는 악필이다. 특히 격식을 차려야 하는 서류에 이름을 적을 때는 이상하게 끝 획이 오른쪽 아래로 미끄러지는 버릇이 있다. ‘윤’ 자의 ‘ㄴ’ 받침이 필요 이상으로 길게 늘어져 마치 부적의 꼬리처럼 보이는 그 흉물스러운 습관.
그 꼬리가, 지금 내 눈앞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손끝이 저릿했다. 단순히 피가 안 통해서가 아니었다. 펜을 꽉 쥐었을 때의 그 묵직한 압박감, 액정 위를 미끄러지는 스타일러스 펜의 미세한 진동, 마지막 획을 긋고 난 뒤의 기묘한 해방감.
그 감각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 서명 위에 오른손 검지를 갖다 댔다. [잔향청취].
지지직-
종이 질감과 전자문서의 노이즈가 뒤섞인, 불쾌한 소음이 고막을 찔렀다. 뒤이어 튀어나온 것은 구체적인 기억이 아니었다. 단지 ‘서명하는 손의 감각’뿐이었다.
그 손은 내 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팔목에 차인 가죽 태그는 보이지 않았고, 손목 태그는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결정적인 건 소매였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헌터용 방탄 코트가 아니었다. 낡고 헤진, 여기저기 얼룩이 진 감식반 지급 점퍼 소매였다.
내가… 감식반 시절에 내 사망신고서에 서명을 했다고?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대기실 내부에 붉은 경보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시스템 무단 침입 및 데이터 무결성 훼손 감지. 승인자 대조 절차를 시작합니다.
천장의 카메라 렌즈가 조리개를 조이며 나를 조준했다. 바닥의 타일 틈새에서 파란색 스캐너 광선이 올라와 내 발을 묶었다. 팔목의 KDY 태그가 발열하기 시작했다. 뜨거웠다. 살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동 방호 유닛, 그 쇳덩어리 새끼들이 보관함 열을 부수며 다가왔다. 이번엔 단순히 길을 막는 수준이 아니었다. 열 개의 금속 손가락이 기괴하게 꺾이며 내 목소리, 내 잔향 패턴, 그리고 이 문서의 서명 필체를 다중 대조하려 들었다.
“강도윤 씨, 지금 멍때릴 시간 없어요!”
한지율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복부에 입은 부상 때문에 안색이 창백했고 숨을 헐떡였지만, 움직임은 놀라울 정도로 과감했다.
“이쪽이에요!”
그녀가 나를 이끈 곳은 보관함 7번과 8번 사이, 얼핏 보면 벽처럼 보이는 좁은 틈새였다. 그녀가 특정 패널을 세 번 두드리자, 소리 없이 비밀 통로가 열렸다.
비상 정비 통로. 먼지가 뽀얗게 쌓인, 케이블과 배관이 엉킨 복도였다.
나는 그녀에게 끌려가면서도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당신, 이 구조를 어떻게 알지? 여긴 관리자급 아니면 모르는 곳일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해요? 살고 봐야죠!”
한지율은 대답을 회피하며 나를 통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는 뒤따라 들어오며 패널을 닫았다. 밖에서 자동 방호 유닛이 벽을 긁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쾅! 쾅! 승인자 대조 실패. 강제 진입 시도.
숨을 헐떡이며 통로 깊숙이 들어갔다. 그곳엔 폐기된 장비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오래된 명찰 보관 박스, 액정이 깨진 태그 스캐너, 주인 잃은 감식반 가방들.
물건들이 아우성쳤다. 잔향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두 번째 신고서는 첫 번째보다 늦다….’ 낡은 명찰 하나가 속삭였다. 문태식이 쓴 게 첫 번째, 내가 쓴 게 두 번째라는 소리다.
‘본인이 쓴 신고서는 취소가 아니라 유예다….’ 고장 난 스캐너가 지직거리며 말했다. 내가 나를 죽음으로 처리함으로써 얻은 시간. 그건 영원한 탈출이 아니라 한시적인 유예였다.
‘KDY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절차명으로도 쓰였다….’ 낡은 감식반 가방의 지퍼가 덜덜 떨리며 증언했다. KDY. 그건 내 이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무언가를 숨기거나 보관하기 위한 프로젝트 코드명이기도 했다.
‘서명자는 살아 있어야 한다….’ 가장 무거운 잔향이었다. 내가 두 번째 신고서에 서명했을 때, 나는 분명 살아 있었다.
정보가 쏟아질수록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앞서가는 한지율의 어깨를 잡아 돌렸다. 벽에 그녀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말해. HJY가 누구야? 한지율, 당신 정체가 뭐야? 왜 윤서하랑 같은 눈을 하고, 왜 여기 구조를 손바닥 보듯 꿰고 있는 거지?”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내 얼굴을 비췄다. 방호 유닛의 스캐너 불빛처럼 차가우면서도, 그 깊은 곳에는 깊은 슬픔과 죄책감이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입을 여는 순간, 통로 벽이 뜯겨 나갔다.
콰앙!
자동 방호 유닛의 금속 손이 통로 안으로 뻗어 들어왔다. 예리하게 갈린 손가락이 내 얼굴 옆 5센티미터 지점의 벽을 뚫었다.
“젠장!”
나는 한지율을 밀치고 바닥을 굴렀다. 놈들은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승인자 대조가 완료될 때까지, 혹은 침입자를 배제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 팔목의 KDY 태그가 요동쳤다. 이놈의 태그는 내 신분을 증명하는 게 아니라, 놈들에게 내 위치를 알려주는 비콘 같았다.
그때 내 눈에 폐기된 태그 스캐너 더미가 들어왔다. 그중 하나, 액정은 깨졌지만 전원 램프가 미세하게 깜빡이는 놈이 있었다.
아이디어가 머리를 스쳤다. 이건 도박이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비싼 가짜 서명 위조가 폐품 스캐너로 이루어질 판이었다.
나는 뻗어오는 금속 손을 피해 스캐너 더미로 다가갔다. 고장 난 스캐너를 집어 들고, 내 KDY 태그를 갖다 댔다. 그리고 [잔향청취]를 최대 출력으로 가동했다.
내가 청취한 것은 스캐너의 고장 기록이 아니었다. 이 스캐너가 마지막으로 정상 작동했을 때, 승인했던 누군가의 잔향 패턴이었다.
치이익- 데이터를 복제합니다.
내 손끝을 통해 KDY 태그의 신호와 고장 난 스캐너 속의 낡은 승인자 잔향이 뒤섞였다. 나는 그 뒤죽박죽된 신호를 방호 유닛의 금속 손가락에 강제로 주입했다.
지직! 지지직!
방호 유닛이 경련했다.
시스템 오류. 승인자 권한 충돌. KDY-02와 관리자 잔향 동시 감지. 재부팅을 시도합니다.
놈의 관절에서 불꽃이 튀며 움직임이 멈췄다. 3분. 그게 내가 번 시간이었다. 놈은 격파된 게 아니라 잠시 오작동 상태에 빠진 것뿐이다. 3분이 지나면 다시 우리를 죽이려 들 것이다.
“가요! 저 끝에!”
한지율이 쩔뚝거리며 통로 끝을 가리켰다. 그곳엔 벽면에 매립된 낡은 단말기가 하나 보였다. 감식반 전용 기록 단말기였다.
우리는 미친 듯이 달렸다. 3분이 3초처럼 느껴졌다. 단말기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단말기 화면은 먼지로 덮여 있었지만, 내 KDY 태그가 접근하자 자동으로 켜졌다.
[관리자 구역 감식반 기록 단말기]
[열람 권한: 사망자 본인(KDY) 또는 승인자(MTS, KDY-02)]
그 밑으로 목록이 쭉 떴다. 대부분은 암호화되어 있었지만, 유독 하나가 눈에 띄었다.
[KDY-02 사망신고서: 원본 데이터]
이거다. 문태식이 숨겨둔 원본, 그리고 내가 두 번째로 서명한 그 문서의 진짜 내용.
나는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터치했다. 내 팔목의 태그가 단말기와 반응했다.
[신원 확인: KDY-02 (유예 상태)]
[열람을 위해서는 추가 인증이 필요합니다.]
추가 인증? 지문? 홍채? 아니었다. 단말기는 예상치 못한 요구를 해왔다.
[문태식 팀장의 마지막 농담을 입력하십시오.]
“뭐? 마지막 농담?”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문태식, 이 영감탱이는 죽어서도 나를 엿먹이는구나. 그 영감의 농담은 늘 썰렁했고, 언제나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해서 ‘그러니까 너희들이 안 되는 거야’로 끝나는, 농담을 빙자한 훈계였다.
그의 마지막 농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죽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닌데.
3분이 끝나가고 있었다. 벽 너머에서 방호 유닛이 다시 가동되는 위잉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강도윤 씨, 빨리! 기억 안 나요? 문 팀장님이 자주 하던 말!”
한지율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내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렸다. 마지막 농담이라니, 그런 게 기억날 리가….
그때였다. 통로 천장에 매달린 낡은 인터콤 스피커에서,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하하… 거봐, 내가 뭐랬어. 이 새끼 이거, 평소에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들었구먼.”
7번 보관함에서 들었던, 그 내 목소리였다. 보관함 안쪽의 또 다른 내가 웃고 있었다.
“문 팀장의 마지막 농담? 그거 별거 아냐. 그 영감이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내 귀에 대고 속삭였거든.”
스피커 속의 나는, 통로 너머로 방호 유닛의 쇳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순간에도 여유로웠다.
“그 농담은 바로….”
스피커 속의 내 목소리가 문장을 시작하는 순간, 단말기 화면에 초록색 글자가 떴다.
[정답 처리.]
[데이터 로딩 중….]
보관함 안쪽의 KDY는, 문태식의 마지막 농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단말기는 열리고 있었다.
작가의 말: 영감님 농담 수준이 좀 처참하긴 했죠.
제목: 27화. 문태식의 마지막 농담
‘딸깍.’
그건 기계적인 스위치 소리가 아니었다. 내 머릿속 어딘가, 단단히 잠겨 있던 이성의 빗장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단말기 화면에 뜬 [정답 처리]라는 네 글자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붉은색 바탕에 흰 글씨. 시뻘건 피 위에 하얀 소금이 뿌려진 것 같다. 눈이 시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통로 입구 쪽, 7번 보관함을 바라봤다.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는 그 안쪽에서, 아까 전의 그 ‘나’는 웃음을 멈추고 입을 다물고 있을 것이다. 문태식 팀장의 마지막 농담. 그 빌어먹을 암호를, 보관함 안의 목소리는 알고 있었다.
나는 모르는 것을, 저놈은 안다.
속이 뒤집혔다. 위산이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느낌.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질투, 배신감, 그리고 압도적인 소외감. 내가 진짜 강도윤이라면, 문태식의 마지막을 지킨 건 내가 아니었다. 저 보관함 속에 처박힌, 얼굴 없는 무언가가 진짜 문태식의 제자였고, 나는 그냥 껍데기만 남은 가짜라는 소리 같았다.
심장이 늑골을 걷어찼다. 쿵, 쿵, 쿵. 불규칙한 박동이 관자놀이를 때렸다.
"어떻게… 저 자식이 저걸 알아…."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목소리는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낯설고 갈라져 있었다. 한지율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단말기 화면을, 아니, 그 너머의 무언가를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말기 화면의 피바다가 걷히고, 거친 노이즈와 함께 텍스트들이 한 줄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KDY-02 사망신고서: 원본 데이터 로딩]
전체 데이터는 열리지 않았다. 화면 대부분은 검은색 모자이크로 가려져 있었고, 오직 몇 가지 항목만이 빛을 내고 있었다.
▶ 대상: KDY-02
▶ 상태: 생존 유예
▶ 작성 사유: 원본 KDY 보호 실패
▶ 작성자: KDY
원본 KDY 보호 실패.
문장이 뇌리에 박히는 순간, 머릿속에서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KDY-02가 나라면, 나는 원본 KDY를 보호하는 데 실패해서 ‘생존 유예’라는 기괴한 처분을 받은 존재란 말인가? 그럼 원본 KDY는 누구지? 보관함 안의 그놈? 아니면 제3의 인물?
질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다음 줄이 떠올랐다.
▶ 참조: MTS 최종 농담 로그
MTS. 문태식. 그의 이니셜이었다.
단말기의 낡은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는 잡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익숙하지만 지독하게 낯선 잔향이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 씨발. 존나 아프네.’
문태식 팀장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평소의 그 가벼운 톤이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며, 피를 토해내는 듯한 쇳소리가 섞여 있었다. 주변에서는 금속이 긁히는 소리,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들렸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심각한 부상, 아니,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야, 도윤아. 거기 있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었다. 이건 과거의 잔향이니까. 하지만 내 몸은 이미 반응하고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형이… 콜록!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자. …사망신고서도, 야근 수당 나오냐?’
농담이었다. 팀장이 입에 달고 살던 그 시시하고 지루한, 야근에 찌든 감식반원의 비애를 담은 헛소리. 하지만 그 순간, 그 목소리에는 그 어떤 위대한 철학보다 더 무거운 빚과 분노, 그리고 그리움이 뒤섞여 있었다.
내 안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고 싶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헛웃음을 쏟아냈다. 으흐흑, 흐흐, 하. 그것은 오열에 가까운 기괴한 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 오감은 과거의 그날로 강제 소환되었다. 믹스커피의 그 들큰하면서도 씁쓸한 냄새. 팀장의 낡아서 소매가 다 해진 감식반 지급 점퍼의 감촉. 볼펜을 돌릴 때마다 나던 미세한 마찰음. 결재 서류에 도장을 쾅, 하고 찍을 때의 그 둔탁한 소리.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나를 집어삼켰다. 나는 문태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목소리, 이 농담의 순간은 내 기억에 없었다.
"흐윽…."
옆에서 억눌린 오열 소리가 들렸다. 한지율이었다.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단말기 밑 바닥을 짚고 있었다. 상처가 터져 피가 흐르는데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날… 내가, 내가 문을 닫았어."
그녀가 웅얼거렸다.
"내가 조금만 더 빨랐어도, 그 문을 닫지만 않았어도… 팀장님은…."
그녀가 닫았다는 문이 무엇인지, 어디에 늦었다는 것인지, 그녀의 죄책감의 실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문태식의 죽음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HJY. 한지율. 그녀는 문태식 팀장을 ‘팀장님’이라 불렀다.
치직거리는 스피커 너머로, 팀장의 마지막 숨소리가 들려왔다.
‘…도윤아. 기억해라. 7번 보관함, 비밀번호는… 니새끼… 생… 우욱! …일… 이다. 하하. 존나… 시시하지…?’
농담의 뒤편, 희미하게 이어지는 숨소리 속에 인증 키가 숨겨져 있었다. 그의 목소리의 특정 주파수와 억양, 그리고 농담 속에 섞인 비속어들의 조합. 그것이 이 단말기의 인증 키였다.
나는 그 농담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보관함 안의 KDY는 알았다.
문태식 팀장이 마지막 순간까지 소통했던 것은, 내가 아니었다. 보관함 안의 그놈이었다.
배신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팀장의 애제자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대체품, 혹은 실패한 원본을 지키기 위한 소모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때였다. 단말기의 검은색 모자이크 화면, 그 어두운 반사면 위로 희미한 형상이 비쳤다.
검은 눈.
그것은 한지율의 것도, 내 것도 아니었다. 단말기 화면 속, 어둠 속에 숨은 누군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윤서하. 그녀와 닮았지만, 훨씬 더 차갑고 무거운 눈빛.
‘기록을 믿지 마요.’
화면 속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입모양은 확실하게 내 뇌리에 꽂혔다.
‘기록은, 산 사람을 가장 편하게 죽이는 칼이니까.’
그녀의 형상은 금세 사라졌다. 환각이었는지, 아니면 이 단말기에 스며든 또 다른 잔향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은 내 마음에 또 다른 의문의 씨앗을 뿌렸다.
이 사망신고서의 기록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말인가?
‘쿵! 쿵! 쿵!’
통로 뒤편, 7번 보관함 쪽에서 다시 기괴한 금속 관절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3분의 오작동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자동 방호 유닛이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놈들이 이 좁은 통로로 밀고 들어오면, 우리는 독 안의 쥐였다.
단말기 화면이 다시 점멸하며 새로운 메시지를 띄웠다.
[데이터 열람을 위해 추가 인증이 필요합니다]
[조건: 열람자는 본인의 ‘사망 유예’ 사유를 인정해야 합니다]
[Y / N]
미친 시스템. 데이터를 보려면 내가 지금 정상이 아니라는 걸, 사망한 것과 다름없는 상태라는 걸 인정하라는 소리였다.
살면서 ‘약관 동의’ 버튼이 이렇게 무서운 건 처음이었다. 보통은 개인정보만 털리지, 내 존재 여부까지 털리진 않는다. 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나는 시스템상으로 영원히 ‘사망 유예자’라는 기괴한 카테고리에 묶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진짜 강도윤으로서의 삶을 영원히 되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누르지 않으면? 방호 유닛에게 붙잡혀 이 지하 3층의 잔향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이 진실은 영원히 묻힐 것이다.
시간이 없었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금속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스캐너의 붉은 광선이 통로 벽을 핥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겁이 났다. 죽는 것보다, 내가 가짜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 더 두려웠다.
하지만 문태식의 목소리가, 그의 마지막 농담이 내 귓가에 맴돌았다.
‘야, 도윤아. 쫄지 마. 인생 뭐 있어? 그냥 지르는 거지.’
그의 평소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 것 같았다. 그래, 팀장님이라면 여기서 쫄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떨리는 손을 인정(Y) 버튼 위에 올렸다.
하지만 그냥 누르지는 않았다. 그건 강도윤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문태식 팀장의 마지막 농담 잔향을 떠올렸다. 그의 목소리 속에 숨겨진 인증 키. 그리고 내 왼쪽 손목의 KDY 태그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생활 잔향을 덧붙였다.
하루에 믹스커피를 다섯 잔씩 마시는, 야근을 밥 먹듯이 하는, 빚에 시달리지만 언젠가는 로또가 터질 거라고 믿는, 시시하고 하찮은 강도윤의 잔향.
그것을 인증 키의 끝에 슬쩍 끼워 넣었다. ‘조건부 인정’.
나는 여전히 사망 유예자일지 모르지만, 나는 나만의 방식대로 살아있다는 증거를 시스템에 쑤셔 넣은 것이다.
‘딸깍.’
나는 버튼을 눌렀다.
단말기가 짧은 비명 같은 노이즈를 내뱉었다. 화면의 모자이크가 순식간에 걷히며, 가려져 있던 데이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한 문장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 비고: KDY-01은 사망하지 않았다. 회수 실패 후 ‘검은 우산’으로 이관.
KDY-01은 사망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다시 하얗게 점멸했다. 그럼 보관함 안의 그놈은 KDY-01인가? 아니면 내가 KDY-01이고 저놈이 KDY-02인가? 누가 진짜고 누가 가짜인가? 원본 KDY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질문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순간, 단말기 화면 하단에 새로운 로그가 뜨기 시작했다.
[다음 잔향 재생 대상 예약]
▶ 대상: 윤서하
▶ 위치: 지하 4층 사망자 대기실
동시에 한지율이 단말기 화면을 보며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거긴 안 돼! 거긴… 살아 있는 사람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이라고!"
방호 유닛의 금속 관절음이,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작가의 말: 야근 수당은 안 나오지만, 진실은 나옵니다. 아마도요.
✦ 작가의 말
두 번째 사망신고서와 문태식의 마지막 농담. 도윤이 진짜 자기 이름을 확인할수록, 기록은 더 깊은 지하로 끌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