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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1화. 사망 미접수자와 405번 담당자 일러스트

30-31화. 사망 미접수자와 405번 담당자

제목: 30화. 사망 미접수자

손바닥에 닿는 감촉은 지독하게 차가웠다.

마치 영하의 냉동고에 보관되어 있던 금속 조각을 집어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차가움 밑바닥에서, 나는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아주 미세했지만, 분명했다. 늘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탄내 섞인 저가 믹스커피 향과 코를 찌르는 싸구려 소독약 냄새.

윤서하.

내가 쥐고 있는 것은 그녀의 헌터 태그였다. 군용 인식표처럼 생긴, 낡고 흠집투성이인 티타늄 합금 조각. 그 위에는 각인된 문자 위로 붉은색 스탬프가 덧씌워져 있었다.

[YSH-00 / 사망 미접수]

‘KDY’가 아니다. ‘YSH’다.

머릿속이 쨍하게 울렸다. 미지근한 믹스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컵이 찌그러지며 커피가 손가락으로 울컥 쏟아졌지만, 뜨겁다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망…… 미접수?”

나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맞은편에 앉은, 윤서하의 얼굴을 한 존재를 노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죽지 않았다는 뜻인가?”

희망. 아주 얄팍하고 간사한 희망이 가슴 한구석에서 고개를 들었다. 윤서하는 살아 있다. 그녀는 죽지 않았고, 단지 이 지옥 같은 지하 4층 시스템에 착오가 생긴 것뿐이다.

하지만 내 질문에, 윤서하의 모조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입술이 기계적으로 달싹였다.

“단어 그대로 해석하십시오, KDY-02 접수자. ‘사망 미접수’는 생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럼 뭔데.”

“죽음의 기록이 정상적으로 시스템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행정적 공백 상태. 존재는 멈췄으나, 서류는 마감되지 않았습니다.”

설명충 등판인가 싶었는데, 이년은 친절한 설명자가 아니었다. 그저 입력된 값만 내뱉는 ARS 자동응답기 같았다. 정보는 단편적이었고, 그 단편적인 정보조차 내 희망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죽음이 정상 접수되지 않았다.

그 말은 즉,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다는 소리처럼 들렸다. 단지 이 미친 협회 전산망이 그녀의 죽음을 아직 ‘승인’하지 않았을 뿐.

“그녀의 사망을…… 누가 접수했다는 거지?”

나는 YSH-00 태그를 꽉 움켜쥐며 물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윤서하 씨의 권한으로 접속한 사용자가, 그녀의 사망 확인서에 디지털 서명을 마쳤습니다. 현재 승인 대기 상태입니다.”

공포가 습격했다. 희망보다 훨씬 무겁고, 훨씬 질척거리는 공포였다.

누군가 윤서하의 권한을 훔쳤다. 그리고 그녀를 ‘죽은 사람’으로 행정 처리하고 있다. 그녀가 진짜 죽었든, 아니면 살아있는데 죽은 것으로 위장하든, 결과는 같다. 이 시스템 안에서 그녀는 사라진다.

그때, 등 뒤의 유리창 너머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한지율이 보였다. 마치 슬로모션 비디오처럼, 극도로 느리게 움직이던 그녀의 시간이 갑자기 정상 속도로 되돌아왔다.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면담실 유리문을 쾅쾅 두드렸다.

“강도윤 씨! 도윤 씨! 들려요? 갑자기 문이……!”

그녀의 목소리는 방음이 완벽한 면담실 벽에 막혀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으로 알 수 있었다.

유리 너머로 다급하게 손을 흔드는 한지율을 보던 순간, 내 잔향청취 감각이 그녀의 손목을 스쳤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그녀의 매끄러운 손목 위로, 아주 흐릿한 검은색 잔상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도장을 찍었다가 덜 지워진 듯한 자국.

[HJY-??]

그건 태그의 잔상 같기도 했고, 검은 스탬프 자국 같기도 했다. 너무 짧게 지나가서 정확히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지만, 잔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한지율. 그녀 역시 이 시스템의 일부인가? 아니면 나와 같은…… ‘대상’인가?

그녀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피어오를 새도 없이, 면담실 안에 이상 징후가 발생했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륵.

사방의 금속 벽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마치 벽 자체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리더니, 벽에 박혀 있던 수많은 ‘사망 사유 분류표’ 칸들이 하나씩 서랍처럼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서랍들이 열릴 때마다, 그 안에는 헌터 태그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하나같이 낡고, 빛바랜 태그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태그의 오른쪽 귀퉁이에는, 예외 없이 기분 나쁜 표식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조잡하게 그려진, 검은 우산 자국.

“이게 다…… 뭐야.”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사방이 죽은 자들의 이름표로 가득 찼다.

“‘사망 미접수자’들의 대기 보관함입니다.”

맞은편의 담당자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튀어나온 서랍들을 향해 있었다.

“협회 행정 절차는 까다롭습니다. 죽었다고 다 같은 죽음이 아닙니다. 행정 착오, 서류 누락, 신원 불명, 그리고…… 누군가의 의도적인 개입. 이런 사유로 죽음이 승인되지 못한 자들은, 서류가 완비될 때까지 이곳에 보관됩니다.”

그녀의 말은 행정 공무원의 그것처럼 지루하고 딱딱했지만, 담고 있는 내용은 지독하게 섬뜩했다.

사망 미접수. 그건 죽음의 유예가 아니었다. 죽음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이 차가운 금속 서랍 속에 영원히 박제되는 형벌이었다.

“민원인이 너무 많아 처리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녀는 농담처럼 덧붙였지만,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기괴한 민원실 행정 농담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내 손에 쥔 YSH-00 태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차가운 금속 조각에 담긴 진실을 알아야 했다. 누가 그녀의 권한을 훔쳤는지. 누가 그녀를 이 차가운 서랍 속에 처박으려 하는지.

나는 잔향청취를 시도했다.

평소보다 훨씬 더 깊게, 더 집중해서 태그의 미세한 떨림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우웅──

고막을 찢을 듯한 이명이 터졌다. 눈앞의 면담실 풍경이 일그러지며, 어둡고 탁한 기억의 파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윤서하의 현재 위치를 원했다. 하지만 내 능력은 그녀의 현재를 보여주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 태그를, 자신의 권한을 사용했던 장소의 잔향이 재생되었다.

시야는 극도로 제한적이었다.

윤서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시점으로 추정되는 화면이, 끊어질 듯 이어졌다.

그녀의 하얀 손이 보였다. 출입증을 엘리베이터 리더기에 갖다 대는 장면.

삑.

화면이 흔들렸다. 그녀의 발치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비에 젖지 않은, 빳빳하게 마른 검은 우산의 그림자. 그 그림자가 그녀를 에워싸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

지하 2층.

그리고 버튼 옆에 붙어 있는 표지가 부분적으로 보였다. 텍스트가 깨져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핵심 단어만은 명확했다.

[민원……감사실]

화면이 미친 듯이 지직거렸다. 음성은 형편없이 뭉개져서 들렸다.

“도윤 씨가…… 오면…… 절대…… 접수하지 마세요.”

윤서하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목소리는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고, 대화 상대방의 목소리는 아예 들리지 않았다.

“……보류…… 하세요. 반드시.”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가 갈라지며 잔향이 뚝 끊겼다.

나는 숨을 헐떡이며 현실로 돌아왔다.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하 2층, 민원감사실. 그리고 검은 우산의 그림자.

그녀는 알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올 것을. 그리고 누군가에게 나를 ‘접수’하지 말고 ‘보류’하라고 지시했다.

그 누군가는 누구인가?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모조품인가? 아니면 시스템 그 자체인가?

그때, 내 앞의 담당자 존재가 일시적으로 흔들렸다.

그녀의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짧게, 당혹감과 흡사한 균열이 생겼다. 마치 입력되지 않은 데이터를 처리하려는 시스템의 오류 같았다.

그녀는 뭉개진 윤서하의 목소리를, 그 명령을 들은 것 같았다.

그녀가 윤서하의 명령 잔향에 반응했다는 것은, 그녀의 정체가 무엇이든 윤서하와 깊은 연관이 있다는 증거였다. 그녀는 윤서하의 잔상인가, 아니면 그녀의 명령을 따르도록 프로그래밍된 시스템인가?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위이이잉──!

면담실 천장에 달려 있던 적색 경보등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비명을 질렀다.

[경고. 인가되지 않은 사용자의 미접수 태그 무단 열람 감지.]

[보안 규정 제34조에 의거, 즉시 격리 조치를 시행합니다.]

사망자 대기실의 시스템이 작동했다.

철컥!

면담실 문이 완전히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 너머의 한지율이 놀란 얼굴로 문고리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벽면에 튀어나와 있던 차가운 금속 서랍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콰콰콰콰콰!

그건 물리적인 전투가 아니었다. 거대한 행정 시스템이, 규정이라는 이름의 둔기로 나를 압착하려는 느낌이었다. 서랍들이 내 몸을 사방에서 조여왔다. 헌터의 신체 능력으로도 버틸 수 없는, 압도적인 시스템의 무게였다.

숨이 막혔다. 갈비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덮쳤다.

‘이대로 압사당하는 건가.’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는 순간, 내 손에 들린 찌그러진 종이컵이 눈에 들어왔다. 문태식의 잔향이 남아 있는 믹스커피.

나는 미친 척하고 소리쳤다.

“협회 운영 규정 제112조! ‘보류’ 처리된 서류는 담당자 책상 위에서 즉시 반려할 수 없다!”

문태식이 생전에 입에 달고 살던, 협회식 궤변 중 하나였다. 보류는 보류일 뿐, 아직 최종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이므로 함부로 폐기하거나 반려할 수 없다는 말장난.

이 미친 시스템이 행정 규정에 미쳐 있다면, 이 말장난도 먹힐지 모른다.

“YSH-00 태그는 ‘보류’ 상태다! 나는 지금 민원 신청서를 작성 중이고, 담당자는 이를 수령할 의무가 있다! 규정 위반으로 감사실에 신고하기 전에, 이 압착 프로세스를 즉시 중단해!”

나는 억지를 부렸다. 내 목소리가 면담실 안에 쨍쨍하게 울렸다.

놀랍게도, 나를 압착하던 서랍들의 움직임이 피식, 하고 멈췄다.

[시스템 오류. 민원인의 이의 제기 접수.]

[규정 검토 중. 압착 프로세스 일시 중지.]

시스템의 경고음이 멈추고, 서랍들이 내 몸에서 몇 센티미터 떨어진 상태로 고정되었다.

먹혔다. 협회식 말장난이, 이 미친 시스템의 논리 구조를 뚫었다.

하지만 안심할 순 없었다. ‘검토 중’이라는 말은, 언제든지 다시 압착이 시작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간신히 몇 초, 길어야 몇 분 벌었을 뿐이다.

나는 서둘러 YSH-00 태그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 방을 나가야 했다.

유리창 너머를 보았다. 한지율이 당황한 얼굴로 문을 열 방법을 찾다가, 면담실 옆에 있는 번호표 기계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번호표 기계에 손을 갖다 대는 순간.

딩동.

[새로운 민원인이 접수되었습니다.]

기계에서 번호표가 뽑혀 나왔다.

나는 유리 너머로 그녀의 손을 주시했다. 그녀가 뽑아든 번호표에 새겨진 숫자.

[번호: 405]

내 번호표가 404였으니, 다음 번호였다. 하지만 대상명은 그녀의 손가락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담당자 존재를 노려보며, 멈춰선 서랍들 사이를 뚫고 면담실 문으로 향했다.

“비켜.”

내가 문 앞에 도달했을 때,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기계적인 음성이 아니었다. 윤서하의 목소리와 똑같은, 하지만 소름 끼치도록 또렷한 한 문장이었다.

“강도윤 씨. 잊지 마세요.”

나는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윤서하의 사망을 접수한 사람은, 윤서하의 권한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내 심장에 비수처럼 꽂혔다.

윤서하의 권한으로.

그 말은, 윤서하 본인이 자신의 사망을 접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왜?

나는 대답 대신 면담실 문고리를 잡고 힘껏 돌렸다. 시스템의 압착이 멈춘 덕분인지, 문은 거칠게 열렸다.

나는 한지율을 거칠게 낚아채며 면담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차가운 지하 4층 대기실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왔다.

그때, 대기실 천장에 매달린 대형 전광판이 번쩍이며 새로운 안내를 띄웠다.

딩동.

[405번 민원인, 접수 창구로 이동해 주십시오.]

[담당자: 강도윤]

내 이름이 담당자 칸에 떠 있었다.

나는 멍하니 전광판을 바라보다가, 한지율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405번 번호표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번호표 하단, [대상: ] 칸에 새겨진 문자.

먹지가 번진 것처럼 심하게 뭉개져 있어서, 그게 [HJY-01]인지, 아니면 [YSH-00]인지 헷갈릴 만큼 번져 있었다.

나는 침을 꿀컥 삼켰다.

내 손 주머니 속에는 윤서하의 태그가 있었고, 전광판에는 내 이름이 담당자로 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 서 있는 한지율의 번호표는, 누구의 죽음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었다.

퇴근 시간은 이미 한참 지났는데.

지옥의 민원 처리는, 이제 막 시작된 것 같았다.

작가의 말: 행정 처리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여러분. 제때제때 접수합시다.

제목: 31화. 405번 담당자

협회 로비의 전광판은 언제나 무심했다. 숫자가 바뀌고, 누군가의 이름이 뜨고, 또 다른 이름이 지워지는 과정이 기계적으로 반복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뜬 문구는 무심함을 넘어 황당함의 극치였다.

[405번 / 담당자: 강도윤]

“……이게 지금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입 밖으로 튀어나온 목소리는 쩍쩍 갈라져 있었다. 방금까지 나는 면담실 구석에서 금속 서랍에 깔려 죽을 뻔한 민원인이었다. 내 헌터 태그 [KDY-02]가 사망 미접수 태그들과 섞여서 ‘처리’되길 기다리던 처지였다고. 그런데 갑자기 담당자?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존재, 아니, 윤서하의 껍데기를 쓴 시스템의 대리인을 돌아봤다. 그것은 여전히 기괴하게 뒤틀린 자세로, 하지만 아까보다는 한결 안정된 형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번호표가 발행되었습니다. 담당자는 배정된 창구로 이동하여 업무를 처리해 주십시오.”

목소리는 다시 그 기계적인, 윤서하의 탈을 쓴 무감각한 톤으로 돌아와 있었다.

“내가? 405번을?”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내 시선의 끝, 한지율을 바라봤다. 그녀는 번호표 기계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방금 뽑힌 [번호: 405]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단순히 겁에 질린 떨림이 아니었다. 무언가 거대한 힘에 억눌린 듯,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거, 줘 봐.”

내가 손을 뻗자, 한지율은 반사적으로 번호표를 쥔 손을 뒤로 숨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속에는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안 돼요.”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그녀는 자기 번호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적어도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코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는 억지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번호표를 노려봤다. 먹지가 번진 듯 거뭇거뭇한 잉크 자국이 대상명 칸을 뒤덮고 있었다.

그 순간, 내 눈이 번뜩였다. 잔향청취의 후유증인지, 아니면 이 공간 자체가 왜곡된 탓인지, 그 번진 잉크 속에서 글자들이 겹쳐 보였다.

[대상: HJY-01]

그리고 그 위로, 혹은 아래로, 마치 이중 노출된 사진처럼 또 다른 코드가 어른거렸다.

[대상: YSH-00]

소름이 돋았다. 한지율과 윤서하. 두 사람의 태그 코드가 하나의 번호표 위에 공존하고 있었다. 둘 중 누구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이 겹쳐진 무언가인지 확정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이 405번 민원을 처리하는 순간 둘 중 누군가는, 혹은 둘 다는 치명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뿐이었다.

띵동.

청아한 알림음이 로비에 울려 퍼졌다. 전광판 아래, 굳게 닫혀 있던 접수 창구 중 하나가 스르르 열렸다.

“405번 민원인, 7번 창구로 오십시오. 담당자 강도윤 헌터는 즉시 창구로 이동하십시오.”

안내 방송이 나를 재촉했다. 나는 한지율을 한번, 그리고 열린 7번 창구를 한번 번갈아 봤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이 빌어먹을 시스템은 내가 이 민원을 처리할 때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기세였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7번 창구 안쪽으로 들어갔다.

창구 안은 아까의 세련되고 기괴했던 면담실과는 딴판이었다. 사방은 누렇게 변색된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고, 공기 중에는 묵은 먼지와 잉크 냄새, 그리고 결정적으로 문태식 부장이 즐겨 마시던 믹스커피 특유의 들큰하고 텁텁한 냄새가 깔려 있었다.

그곳엔 낡아빠진 목재 책상 하나와 비명을 지를 듯 삐걱거리는 의자가 전부였다. 책상 위에는 캐논 마크가 반쯤 지워진 고장 난 잉크젯 프린터, ‘수리 중’ 딱지가 붙은 채 먼지만 쌓여 있었다. 그 옆으로는 빛바랜 민원철들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고, 잉크가 굳어버린 도장 몇 개가 굴러다녔다. 책상 아래에는 ‘폐기함’이라고 적힌, 불에 그을린 자국이 선명한 금속 통이 놓여 있었다.

이건…… 마치 문태식 팀장의 전성기 시절 사무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지독하게 아날로그적인 공간이었다.

내가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는 순간, 오른쪽 손등이 화끈거렸다.

치익.

마치 달궈진 인장에 지져지는 듯한 통증과 함께, 내 손등에 검은색 도장 자국이 새겨졌다.

[협회 임시 담당자 권한 부여: KDY-02]

[권한 등급: C (임시)]

상태창이 눈앞에 떠올랐다. 권한을 얻었다는 성취감 따위는 없었다. 대신 묵직한 책임감이, 아니, 정확히는 언제든 나를 옭아맬 수 있는 족쇄가 채워진 기분이었다. 이 도장이 찍힌 이상, 405번 민원의 결과는 온전히 내 책임이 된다. 실패하면? 이 손등이 통째로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내 앞의 책상 유리에 갑자기 빛이 감돌더니, 투명한 디스플레이로 변했다.

[405번 민원인 사망 접수 서류]

[대상: [데이터 오염 - 판독 불가]]

[사망 사유를 선택하십시오 (필수)]

화면에는 네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신원 중첩 (Entity Duplication)

권한 대리 사용 (Unauthorized Authority Usage)

보류 명령 위반 (Violation of Hold Order)

원본 미확인 (Original Unverified)

선택지들은 하나같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섬뜩했다. 헌터의 사망 사유가 ‘원본 미확인’이라니. 이건 마치 우리를 인간이 아니라 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 취급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웃을 수 없었다. 이 네 가지 중 무엇을 고르든, 405번 민원인은 ‘사망’으로 확정된다. 한지율이든 윤서하든, 아니면 그 둘이 섞인 존재든, 이 시스템 상에서 완벽하게 폐기된다는 뜻이다.

그녀를 살리려면, 아니, 적어도 윤서하의 단서를 보호하려면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야 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화면을 무시하고 팔짱을 꼈다.

띠링.

[경고: 사망 사유가 선택되지 않았습니다.]

[경고: 30초 후, 405번 민원인은 ‘자동 폐기’ 절차에 들어갑니다.]

책상 위 폐기함에서 갑자기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금속 통 내부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자동 폐기란, 문자 그대로 이 로비에서 그녀의 존재 자체를 소각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창구 유리 너머, 한지율이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이번엔 유리 너머의 나에게 똑바로 말했다.

“제 번호표를 보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창구의 스피커를 통해 지직거리며 들려왔다.

“저를, 접수하지 마세요. 도윤 씨.”

그것은 간청이었을까, 아니면 경고였을까. 그녀가 나를 속여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려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건지, 도저히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의 잔향은 여전히 커피 향과 피 냄새,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뒤섞여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시간이 없었다. 20초.

나는 이 아날로그적인 책상 위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문태식 팀장이라면, 이 말도 안 되는 시스템의 맹점을 어떻게 파고들었을까.

나는 책상 위의 물건들에 손을 뻗었다. 잔향청취. 이 지독한 팀장의 흔적을 찾아야 했다.

먼저 고장 난 프린터에 손을 올렸다.

지지직…… 지직.

기계음 섞인 잔향이 들려왔다. 프린터는 과거에 검은 우산 문양이 찍힌 반려 사유서를 토해낸 적이 있었다. 반려 사유: 규정 외 대상. 누군가 시스템의 자동 처리를 거부하고 수동으로 반려를 시도했던 흔적이었다.

다음은 도장. 잉크가 굳은 도장을 집어 들었다.

쿵.

강력한 잔향이 뇌리를 때렸다. 문태식의 목소리였다.

‘이봐, 규정대로만 하면 우린 다 죽어. 꼼수를 써야지, 꼼수를. 서류를 반려할 수 없다면, 양식을 바꿔버려.’

그의 손이 도장을 집어 들고 서류 위에 쾅 찍었다. 그것은 ‘사망 확정’ 도장이 아니었다.

‘보류’.

하지만 지금 내 앞의 시스템은 보류를 허용하지 않는다. 사망 사유를 고르라고 강요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책상 아래의 폐기함. 열기가 느껴지는 금속 통에 손을 뻗었다.

화아악.

매캐한 탄내가 코를 찔렀다. 아주 오래전, 누군가 이곳에서 헌터 태그를 태운 냄새였다. 그 냄새는 윤서하의 커피 향과도, 내 피 냄새와도 달랐다. 지독하게 오래되고, 지독하게 강력한 헌터의 잔향.

나는 문태식의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사망 사유를 고르지 말고 접수 양식을 바꿔라’.

접수 양식을 바꾼다? 사망 접수 서류를 다른 걸로?

나는 내 손등에 찍힌 임시 담당자 도장을 바라봤다. [KDY-02 임시 접수 권한]. 그리고 책상 위의 민원철들을 훑었다. 빛바랜 서류들 사이로, 유독 깨끗한 종이 한 장이 보였다.

[민원 이관 신청서]

이거다. 문태식의 꼼수는 이것이었다. 사망으로 확정 짓는 게 아니라, 이 민원 자체를 다른 부서로 넘겨버리는 것.

문제는 어디로 넘기느냐였다.

나는 윤서하의 YSH-00 태그를 떠올렸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단서. 지하 2층 민원감사실.

나는 침을 꿀컥 삼키고, 책상 디스플레이의 ‘민원 이관’ 탭을 강제로 활성화했다. 시스템이 비명을 지르는 듯 창구가 흔들렸다.

[경고: 사망 접수 민원은 이관할 수 없습니다.]

나는 무시했다. 내 손등의 도장을 민원 이관 신청서 칸에 강제로 가져다 댔다.

이관 대상: 지하 2층 민원감사실

그 순간, 주머니 속에 있던 YSH-00 태그가 미친 듯이 달아올랐다. 허벅지가 타들어 갈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윽……!”

손등에서도 비명이 터졌다. 시스템은 내 조작을 막기 위해 담당자 도장을 내 손등 피부에서 강제로 뜯어내려는 듯한 통증을 줬다. 검은 잉크가 내 피와 섞여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권한을 쓰는 대가는, 언제나 내 몸으로 치러야 했다.

창구 밖의 한지율이 그 광경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눈에 처음으로 인간적인 감정이, 걱정과 두려움이 서렸다. 그녀는 짧게,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저는 지하 2층에서 올라왔어요.”

그것이 그녀의 진실인지, 아니면 또 다른 덫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지하 2층을 언급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방향은 확실해졌다.

나는 고통을 참으며, 마지막 힘을 짜내 디스플레이의 ‘확인’ 버튼을 눌렀다.

콰아앙!

로비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전광판의 불빛이 번쩍거렸다.

[405번 민원 처리 중……]

[처리 유형 변경: 사망 접수 -> 민원 이관]

[대상 부서: 지하 2층 민원감사실]

[상태: 이관 대기]

성공했다. 405번은 사망 확정되지 않았다. 자동 폐기 절차도 멈췄다. 책상 아래 폐기함의 열기가 서서히 식어갔다.

전광판이 일시적으로 암전되었다. 로비에는 기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망자 대기실 벽면, 면담실 문, 그리고 우리가 서 있는 7번 창구 앞바닥. 곳곳에 찍혀 있던 검은 우산 자국들이,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리며 이어졌다.

그것들은 하나의 거대한 화살표를 만들어냈다. 그 끝은 로비 한구석,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벽면과 교묘하게 겹쳐 있던 낡은 엘리베이터 문을 향하고 있었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 지하 2층.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등을 감싸 쥐었다. 피와 잉크로 엉망이 된 손등에는 아직도 KDY-02 도장이 선명했다.

그때였다.

책상 위, ‘수리 중’ 딱지가 붙어 있던 고장 난 프린터가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잉크가 다 말라붙었을 프린터 헤드가 좌우로 거칠게 움직이며 종이 한 장을 뱉어냈다.

나는 홀린 듯 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종이 위에는, 방금 전 시스템이 내린 결정과는 전혀 다른, 지독하게 수동적인 필체로 반려 사유가 딱 한 줄 적혀 있었다.

[반려 사유: 담당자 강도윤은 원본(Original)이 아닙니다.]

나는 종이를 쥔 채, 얼어붙었다.

내 손등의 도장, 주머니 속의 YSH-00 태그, 그리고 지하 2층으로 이어지는 검은 우산의 행렬. 이 모든 것이 거대한 함정처럼 느껴졌다.

내가 원본이 아니라면, 진짜 KDY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나는, 지금 누구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인가.

로비의 엘리베이터 문이 ‘딩동’ 소리를 내며 느리게 열렸다. 지하 2층에서 올라온 냉기가 로비를 덮쳤다.

작가의 말: 담당자가 됐다고 퇴근할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도윤 씨의 인사 발령은 오늘도 불법입니다.

작가의 말

지하 4층의 민원 처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은 지하 2층 민원감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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