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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3화. 원본이 아닌 담당자와 살아 있는 보관자 일러스트

32-33화. 원본이 아닌 담당자와 살아 있는 보관자

제목: 32화. 원본이 아닌 담당자

탁.

고장 난 프린터가 마지막으로 뱉어낸 종이 한 장이 접수 데스크 위로 떨어졌다.

검은 잉크가 번져나가는 소리가, 마치 내 심장이 뜯겨나가는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나는 굳어버린 손으로 그 사유서를 집어 들었다.

[반려 사유: 담당자 강도윤은 원본(Original)이 아닙니다.]

원본이 아니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왼손 손등이 터져나갈 듯 뜨거워졌다. 협회가 낙인찍은 [권한 등급: C (임시)] 도장이 살을 뚫고 뼈에 새겨지려는 듯 요동쳤다.

동시에, 그 아래 박혀 있던 YSH-00 태그가 미친 듯이 박동했다. 차가운 얼음 송곳이 손등을 찌르는 것 같았다. 서로 다른 두 개의 낙인이 내 손등 위에서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아."

작은 신음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한지율이 사유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렸다. 표정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직전,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숙여 감정을 숨겼지만, 떨리는 어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처음 본 문장이 아니다. 저 반응은, 저 사유서를, 저 '원본이 아니다'라는 문구를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자의 리액션이었다.

치익-.

등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건 승객용 엘리베이터의 매끄러운 소리가 아니었다. 쇳덩이가 긁히는 불쾌한 굉음.

돌아본 곳에는 낡은 문서 운반용 화물 엘리베이터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칠이 벗겨진 철제 벽면, 웅웅거리는 모터 소리, 그리고 바닥에 말라붙은 시커먼 잉크 자국들.

그 잉크 자국 사이로, 타다 만 협회 태그 조각들이 먼지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수놓은, 익숙한 검은 우산 물방울 모양의 자국들.

그것들이 엘리베이터 안쪽, 어두컴컴한 바닥을 향해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어서 들어오라는 듯이.

[안내: 405번 민원인 이관 절차를 진행합니다.]

[경고: 원본이 아닌 담당자(KDY-02)는 민원감사실 감사 대상입니다. 즉시 탑승하십시오.]

[경고: 이관 민원인은 감사 동행 권한이 없습니다. 대기 구역에서 자동 폐기 처리됩니다.]

시스템의 기계적인 목소리가 7번 창구를 때렸다.

선택의 시간이었다. 퇴근 시각은 이미 지났는데, 선택지의 난이도는 갈수록 가관이다.

나 혼자 이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면, 한지율은 여기서 '자동 폐기'된다. 신원 중첩이니 원본 미확인이니 하는 이유로 저 세상으로 사출당한다는 소리다.

그렇다고 한지율을 데리고 타면? '원본이 아닌 담당자'라는 판정을 받은 내가, 규정 위반으로 감사실에서 대가리가 깨질 터였다.

어느 쪽이든 죽음의 냄새가 났다. 엘리베이터에서 풍겨오는 낡은 종이 냄새와 섞인, 비릿한 피 냄새 같은 것.

나는 한지율을 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번호표를 쥔 손만 하얗게 질려 있었다.

시발, 문태식 팀장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 양반이라면 405번을 그냥 폐기함에 쳐넣고 퇴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양반은 내게 '접수 양식을 바꾸라'고 했다. 민원감사실로 꺼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405번은 단순히 처리해야 할 민원인이 아니다. 감사실로 가져가야 할 '증거물'이다.

나는 사유서를 데스크 위 민원철에 쾅 소리 나게 꽂았다. 그리고 떨고 있는 한지율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갑시다."

"……네?"

"혼자 가면 심심하잖아. 감사관 얼굴 구경이나 하러 갑시다."

나는 시스템 창을 허공에 띄웠다. 임시 담당자 권한을 쥐어짜 내어 입력창을 활성화했다.

[이관 민원인(405번) 상태 변경: 증빙 서류 원본 보관자]

[담당자 소견: 대상자 HJY-01은 본 민원의 핵심 증빙 서류인 '원본 신원'을 체현하고 있으므로, 원본 대조를 위해 감사실 동행이 필수적임.]

먹지를 짓이겨 쓰는 것처럼 손가락 끝에 묵직한 저항감이 느껴졌다. 시스템이 내 꼼수를 감지하고 거부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순간, 한지율이 쥐고 있던 405번 번호표와 내 손등의 YSH-00 태그가 동시에 발광했다. 시야가 지직거리며 깨졌다. 모니터 화면이 깨지듯 공간이 일그러졌다.

"안 돼요…!"

한지율이 내 손을 뿌리치려 했다. 비명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렇게 등록하면… 그렇게 등록하면, 제가 누구인지 다 열람돼요! 그러면 정말 끝장이라구요!"

그녀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을 그 무엇보다 무서워하고 있었다.

열람. 시스템이 그녀의 데이터베이스를 완전히 헤집어 놓는다는 뜻이다.

나는 멈칫했다. 그녀가 누구인지, 왜 YSH-00과 겹쳐 보이는지 알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그것이 곧 파멸임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면 그녀는 폐기다.

"열람, 안 하게 하면 되잖아."

나는 잇새로 피 맛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내 왼손 손등, 그 욱신거리는 [KDY-02] 임시 담당자 도장 위를 덮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 도장의 잔향을 쥐어짜 내 한지율이 쥔 번호표 위로 찍어 눌렀다.

[시스템 간섭: 담당자 권한을 이용한 증빙 서류 임시 봉인 (Temporary Seal)]

[효과: 감사관 도달 전까지 대상자의 상세 신원 열람 불가. 권한 등급 C(임시) 소모.]

우드득.

왼손 손등에서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났다. 임시 담당자 도장이 단순한 문신이 아니라 살을 파고드는 가시처럼 변했다. 검은 잉크가 내 피와 섞여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의 고통이었지만, 나는 405번 번호표를 꽉 움켜쥐었다.

시스템의 경고음이 비명처럼 울렸지만, 이내 멈췄다. 꼼수가 통했다. 완전한 열람이 아닌, 일부 신원만 묶어둔 채 '증빙 서류 보관자'로 등록하는 데 성공했다.

"가, 가요. 내 손 등뼈 부러지기 전에."

나는 한지율을 거의 반강제로 화물 엘리베이터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나도 뒤따라 올라탔다.

쿵.

철제 문이 닫혔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덜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낡은 모터 소리와 함께 층수 표시기가 깜빡였다. 그런데 표시되는 층수가 이상했다.

[B0 사망자 민원]

[B1 생존자 상담]

시간과 공간의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것 같았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기묘한 감각.

[B3 기억세척]

표시기가 B3를 가리키는 순간,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갑자기 진공 상태처럼 무거워졌다. 귀가 먹먹해졌다.

그 순간, 강제적으로 잔향청취가 발동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 엘리베이터 벽면에 묻은 검은 우산 자국들이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도윤 씨.

익숙한 목소리. 윤서하?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짧고, 다급하게 끊겼다.

감사실에 도착하면… 제 이름을 먼저 부르지 마세요. 절대로.

왜? 이유는 들리지 않았다. 잔향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대신 그 위로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늙고 지친, 하지만 뱀처럼 교활한 목소리. 문태식이었다.

도윤아, 명심해라. 놈들은 서류로 말하고 숫자로 먹고사는 족속들이야.

문태식의 잔향이 낄낄거리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원본인지 아닌지 묻는 놈한테 이름부터 대면 지는 거야. 이름은 권한의 시작이자 약점이다. 민원인은 이름보다 접수번호가 먼저다. 알았냐?

웃기지도 않은 단서였다. 하지만 지금 이 지옥 같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믿을 건 그 뒈진 양반의 꼼수밖에 없었다.

[B2 민원감사실]

덜컹.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리자, 지하 2층의 냉기가 덮쳐왔다.

내 상상 속의 민원감사실은 삭막한 수사실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달랐다.

그곳은 오래된 감사 기록 보관소와 법정 대기실이 기괴하게 섞인 공간이었다. 천장 높이까지 치솟은 철제 선반에는 먼지 쌓인 민원철들이 가득 찼고, 바닥에는 낡은 나무 의자들이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천장에는 수명을 다해가는 녹색 형광등이 지직거리며 불안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습기 찬 벽면 여기저기에는 부식된 철제 팻말들이 걸려 있었다.

[감사 대상]

[원본 대조]

[권한 회수]

그늘진 보관소 안쪽, 낡은 책상 뒤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형광등 불빛을 등지고 있어 실루엣만 보였다.

윤서하와 닮았다.

하지만 그녀보다 훨씬 더 차갑고,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은 듯 늙어 보이는 실루엣이었다. 진짜 윤서하인지, 그녀의 미래 모습인지, 아니면 시스템이 만들어낸 모조품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감사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나를 보지 않고, 어둠 속에서 서류를 뒤적이며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감정이 메마른 기계음 같았다.

"성명을 말하십시오."

올 게 왔다.

나는 침을 꿀깍 삼켰다. 윤서하의 경고, 그리고 문태식의 조언이 뇌리를 스쳤다. 이름을 말하면 권한이 회수된다. 이름 대신 번호다.

나는 피가 흘러내리는 왼손을 뒤로 감추고, 오른손으로 405번 민원철을 내밀었다.

"405번 이관 담당자 KDY-02입니다. 반려 사유 '원본 미확인'에 대한 원본 대조 이의 제기를 신청합니다."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강도윤'이 아니라 'KDY-02'라는 번호로 나를 지칭했다.

감사관의 움직임이 멈췄다.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형광등의 지직거리는 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툭.

그녀가 쥐고 있던 서류 한 장을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이름을 말하지 않았군. 쥐새끼 같은 법망 피하기는 여전해."

그녀의 목소리에 아주 미세한 감정이 실렸다. 조롱, 혹은 멸시.

"하지만 소용없다."

그녀가 내려놓은 서류가 형광등 불빛 아래 드러났다. 그것은 또 다른 반려 사유서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방금 전 7번 창구에서 본 것과는 달랐다.

그 종이에는, 믿을 수 없는 문장이 적혀 있었다.

[기록: 원본 KDY는 이미 한 번 이곳에서 감사를 통과했다.]

내가? 원본이? 이미 감사를 통과했다고?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하는 순간, 감사관의 시선이 내 뒤에 서 있던 한지율에게 향했다.

처음으로, 감사관의 무표정한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그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감사관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지율을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증빙 서류 원본 보관자 HJY-01."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기계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극심한 공포와 의아함이 섞인 비명이었다.

"당신이, 왜 아직 살아 있습니까?"

작가의 말: 퇴근길 엘리베이터가 지하로만 내려가면 무섭죠. 저만 그런가요?

제목: 33화. 왜 아직 살아 있습니까

지하 2층 민원감사실의 공기는 냉동고 안처럼 차가웠고, 낡은 종이 냄새와 타버린 토너 가루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천장에 매달린 녹색 형광등이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안하게 점멸할 때마다, 정면에 앉은 감사관의 실루엣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윤서하를 닮았지만, 훨씬 더 메마르고 늙어버린 존재. 그녀의 입에서 나온 문장은 공간의 온도를 몇 도는 더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증빙 서류 원본 보관자 HJY-01. 당신이, 왜 아직 살아 있습니까?”

내 옆에 서 있던 한지율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녀는 두 걸음도 채 물러나지 못하고 멈칫했다. 내가 그녀의 접수 번호표 위에 찍어 누른 ‘임시 봉인’ 도장 때문이었다. 손등에서 느껴지는 지독한 통증과 비례해, 그녀의 번호표는 보이지 않는 사슬이 되어 그녀의 발목을 감사실 바닥에 옭아매고 있었다. 한지율의 눈동자가 공포로 잘게 흔들렸다.

나는 침을 삼켰다. 목구멍이 바싹 말라붙어 쇳소리가 날 것 같았다.

‘살아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은 건가?’

감사관의 말투는 단순히 의아해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오류를 목격한 시스템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녀는 한지율을 ‘당신’이라고 부르면서도, 그 시선은 인격체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규격 봉투 밖으로 튀어나온, 당장 파쇄기에 집어넣어야 할 불량 서류를 보는 시선이었다.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사람을 앉혀놓고 서류 보관함 취급이라니.

“이봐요, 감사관님. 민원인은 물건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게 죄입니까?”

한마디 쏘아붙이려던 찰나, 엘리베이터에서 들었던 윤서하의 잔향이 뇌리를 스쳤다.

[절대로 제 이름을 먼저 부르지 마세요. 이름이 불리는 순간, 감사실은 당신의 존재 자체를 대조할 겁니다.]

그리고 문태식의 잔향도 겹쳤다.

[원본인지 아닌지 묻는 놈한테 이름부터 대면 지는 거야. 규정, 규정, 규정대로만 해.]

나는 혀를 깨물며 화를 삭였다. 여기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자살 행위다. 나는 내 손등의 [KDY-02] 도장을 어둠 속의 감사관에게 들어 보였다.

“담당자 KDY-02입니다. 저는 반려된 405번 민원에 대한 ‘원본 대조 이의 제기’를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민원인이 살아 있든 죽었든, 그것은 이의 제기 절차와 무관합니다.”

감사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실루엣뿐인 얼굴에서, 형광등 불빛을 받아 기괴하게 번뜩이는 눈동자가 느껴졌다. 그녀는 한지율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KDY-02. 당신은 여전히 ‘도윤’의 껍데기를 쓰고, 문태식의 얄팍한 꼼수를 부리는군요.”

그녀는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말하지 않았기에, 아직 내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대조’는 시작되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 위의 낡은 서류철을 덮으며 차갑게 말했다.

“좋습니다. 이의 제기 절차에 따르지요. 원본 미확인 사유를 해소하기 위해, 담당자 KDY-02의 ‘원본성(Originality)’을 증명해야 합니다. 세 가지 확인 절차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공중에 검은 잉크로 된 글자들이 떠올랐다.

성명 대조 (Name Verification)

태그 대조 (Tag Verification)

잔향 대조 (Resonance Verification)

글자만 봐도 식은땀이 흘렀다. 직감적으로 셋 다 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문태식이었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아마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가장 덜 아픈 쪽을 골랐겠지.

성명 대조. 윤서하의 경고를 생각하면, 이름을 대는 순간 내 존재 자체가 감사실 시스템에 흡수될 것 같았다. 태그 대조? 내 안의 YSH-00 태그가 노출되면, 이 미친 시스템이 윤서하까지 추적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다.

“잔향 대조로 하겠습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천장의 녹색 형광등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아래로 내려왔다. 마치 병원의 수술 조명처럼, 그것은 나와 한지율을 집중적으로 비췄다. 뜨거운 열기가 피부를 할퀴었다.

그와 동시에, 내 손등의 피와 검은 잉크가 섞인 액체가 뚝뚝 떨어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바닥에 그려진 기하학적인 무늬의 감사선(監査線)들이 그 액체를 빨아들이며 붉고 검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잔향 대조를 시작합니다. 대상자의 기억 영역을 강제 개방합니다.]

머릿속이 징- 하고 울렸다. 누군가 내 뇌를 스푼으로 갗아내는 듯한 불쾌한 감각. 눈앞의 감사실 풍경이 일그러지며 과거의 기억 조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아주 짧은 잔상이었다.

지금 서 있는 이 민원감사실이었다. 하지만 형광등은 녹색이 아니라 정상적인 백색이었고, 공기도 덜 차가웠다. 정면에 앉은 감사관은 지금의 실루엣이 아니라, 좀 더 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뒷모습만 보였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저게 ‘원본 KDY’다.

그 원본 KDY의 옆에는 문태식이 낡은 양복을 입고 혀를 차고 있었고, 그 뒤편 어둠 속에는 윤서하가 검은 우산을 지팡이처럼 짚고 서 있었다.

원본 KDY는 무언가 억울한 표정으로 감사관에게 항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지독한 노이즈로 뭉개져 들리지 않았다. 핵심적인 대사는 모두 훼손되어 있었다.

과거의 감사관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따라서, 담당자 KDY의 원본성은 인정됩니다. 그러나 부속된 증빙 서류 원본 보관자 HJY-01은 규정 위반으로 폐기 처리되었습니다.]

폐기. 그 단어가 내 가슴을 찔렀다.

장면 속 문태식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 순간, 어둠 속에 있던 윤서하가 움직였다.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의 서류에 쾅 하고 찍어 눌렀다.

도장이었다. 하지만 일반적인 직인이 아니었다.

펼쳐진 검은 우산 모양의 도장.

그 도장이 찍히는 순간, 감사관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고, 바닥에 흐르던 감사선들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기록이 꼬이고, 잔향이 뒤엉키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혼돈 속에서, 원본 KDY의 손목을 보았다. 옷소매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는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한지율의 손목에 있는 것과 똑같은, 검게 그을린 듯한 흔적이 있었다.

‘저건…!’

그것이 한지율 본인인지, 아니면 원본 보관자의 흔적인지, 아니면 누군가 복제한 표식인지 확정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흔적이 원본 KDY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장면이 뚝 끊겼다.

“우욱…!”

현실로 돌아온 나는 지독한 구토감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머릿속에서는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시스템: 잔향 대조 완료. 대상자의 기억 영역에서 무작위 데이터를 추출하여 영수증으로 출력합니다. 대가로 대상자의 기억 일부가 소실됩니다.]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감사관의 책상 위에 놓인 프린터에서 영수증 용지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나는 흐릿한 눈으로 내 영수증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5살 때 이불에 지도를 그렸던 기억, 초등학교 때 짝사랑하던 여자애 앞에서 코를 흘렸던 기억 같은, 사소하고 수치스러운 기억들이 코믹하게 적혀 있었다. 아, 젠장. 내 흑역사가 감사관에게 털리다니.

하지만 그 수치스러운 기억들 아래, 굵은 고딕체로 적힌 문장 하나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결과: KDY-02는 원본을 보호하기 위해 원본에서 분리된 증인(Witness)이다.]

증인? 내가?

그 문장을 보는 순간, 정면의 감사관이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의 실루엣이 흔들리며 손을 뻗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이 영수증은 즉시 회수하여 폐기해야 합니다!”

그녀의 권한이 영수증을 향해 뻗어오는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영수증을 움켜쥐었다. 이게 뭔지는 몰라도, 그녀가 폐기하려는 걸 보니 나에게 중요한 물건임이 틀림없었다.

“이건 내 기억의 대가로 나온 영수증입니다. 감사관이라도 함부로 가져갈 수 없어!”

하지만 감사관의 힘은 강력했다. 내 손에 쥔 영수증이 서서히 그녀의 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터질 듯 아팠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공포에 질려 있던 한지율이 갑자기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잡고, 다른 한 손으로 영수증의 아랫부분, 그 중요한 문장이 적힌 부분을 찢어냈다.

쩍-!

비명 같은 소리와 함께 영수증이 찢어졌다. 한지율은 찢어낸 종이 조각을 순식간에 자신의 입에 넣어 삼켜버렸다.

감사관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한지율에게 향했다. 노기로 가득 찬 시선이었다.

나도 놀라서 한지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꿀꺽 종이를 삼키고는,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보며 속삭였다.

“그 문장은… 아직 공개되면 안 돼요. 절대로.”

그녀의 눈빛은 아까의 공포와는 달랐다. 무언가 무거운 비밀을 짊어진, 결연한 눈빛이었다. 나는 그녀가 이 시스템의 비밀을, 그리고 내 정체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를 추궁할 시간이 없었다.

감사관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증빙 서류 원본 보관자 HJY-01. 당신은 시스템의 기록을 훼손했습니다. 이것은 민원감사법 제44조에 의거, 즉각적인 폐기 사유입니다.”

그녀는 책상 위의 벨을 눌렀다.

“이에, HJY-01의 생존 상태를 재검증하고, 폐기 절차를 집행합니다.”

콰르릉-!

감사실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철제 선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서류상자들 사이에서, 낡고 찌그러진 양철 보관함 하나가 미끄러져 나왔다. 보관함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그 보관함의 라벨을 보았다. 불에 타고 찢어져 있었지만, 간신히 글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HJY-01 / 폐기 완료 / 확인자: YSH]

YSH. 윤서하.

그녀가 한지율의 폐기를 확인했다는 뜻인가? 그녀가 정말 배신자였던 걸까? 아니면 이 기록조차 조작된 걸까? 머릿속이 터질 것 같았다.

감사관이 보관함을 향해 손짓했다.

“열어라. 그리고 진실을 확인하라.”

보관함의 뚜껑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나는 침을 삼키며 그 안을 응시했다. 시신이 들어 있을까? 아니면 파괴된 태그 조각들?

나는 한지율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 꼼수를 부려야 했다. 찢어지고 남은 영수증 윗부분을 꼬깃꼬깃 접었다. 그리고 그것을 내 손등의 [KDY-02] 도장 밑, 피가 흘러나오는 틈새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시스템: 경고! 담당자 권한 표식에 이물질이 삽입되었습니다. 권한 회수 절차가 일시 지연됩니다.]

손등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격통이 밀려왔다. 으드득, 이빨을 갈았다. 하지만 이 대가로 감사관의 회수 권한을 아주 잠깐 동안 막을 수 있었다.

“내 민원인… 아니, 내 증빙 서류 보관자는 아직 살아 있어. 저 상자 안에 뭐가 있든 상관없어!”

내가 소리쳤지만, 보관함의 뚜껑은 이미 완전히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것은 시신도, 태그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낡고 먼지 쌓인, 구식 음성 기록기였다.

감사관의 의아해하는 시선 속에서, 음성 기록기의 재생 버튼이 저절로 눌렸다.

치직-, 지직-.

지독한 노이즈 너머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놀랍게도, 지금 내 옆에 서 있는 한지율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지치고, 체념에 찬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감사실에 울려 퍼졌다.

[“강도윤 씨. 만약 당신이 이 녹음을 듣고 있다면, 그리고 여기까지 왔다면….”]

음성은 잠시 멈췄다가, 비수 같은 문장을 내꽂았다.

[“저는 이미 한 번 죽은 겁니다.”]

나는 한지율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이 미친 민원실의 지하 2층에서, 나는 내가 알고 있던 모든 진실이 뒤집히는 것을 느꼈다.

작가: 흑역사 영수증, 하나쯤은 다들 있잖아요? (도망)

작가의 말

감사실은 질문보다 접수번호를 먼저 요구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윤 씨는 이제 서류 꼼수에 익숙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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