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9화. 지하 4층 사망자 대기실과 담당자 윤서하
제목: 28화. 지하 4층 사망자 대기실
서보 모터가 비명을 질렀다. 끼익, 쾅!
감식반 기록실의 낡은 철문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놈의 거대한 금속 손가락이 문틀을 부수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유압 실린더가 수축하는 소리, 방호 유닛의 광학 센서가 붉게 점멸하며 기록실 내부를 훑었다. 놈의 시선이 내 손등에 찍힌 폐기 태그와 단말기 화면을 번갈아 확인했다.
[침입자 식별: KDY-02 / 상태: 폐기 대상]
단말기 화면에는 아직도 [다음 잔향 재생 대상 예약] 대상: 윤서하 / 위치: 지하 4층 사망자 대기실이라는 푸른 글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등 뒤는 막다른 벽. 앞은 전투용으로 개조된 3미터짜리 금속 덩어리. 그리고 발밑에는 죽어서도 야근 수당을 챙기려던 문태식 팀장의 흔적이 믹스커피 잔향으로 남아 있었다.
퇴근 시간은 벌써 4시간이 지났다. 추가 수당은커녕 목숨 수당도 못 받게 생겼다.
“강도윤 씨, 저거 못 이겨요! 도망쳐야 해요!”
한지율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눈빛만은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탈출구를 찾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방호 유닛 너머, 구석에 자리 잡은 낡은 정비용 리프트였다.
“저기로 가야 해요. 하지만 저 유닛이 버티고 있어서….”
“지하 4층이라며.”
나는 짧게 숨을 내쉬며, 주머니 속에서 KDY 태그를 만지작거렸다. 단말기가 요구했던 ‘사망 유예 사유’의 인정. 나는 그걸 문 팀장의 농담과 내 생활 잔향으로 비틀어 승인했다. 시스템은 그걸 ‘조건부 인정’으로 처리했고, 그 결과로 KDY-01은 사망하지 않았다는 데이터가 떴다.
그렇다면, 이 미친 시스템은 지금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을까?
“한지율 씨, 내가 길을 열 테니까 무조건 리프트로 뛰어.”
“네? 하지만 어떻게….”
나는 대답 대신 KDY 태그를 단말기의 폐기 태그 스캐너 위에 거칠게 문질렀다. 찌릿한 전류와 함께 단말기가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시스템 오류: 이중 등록 감지 / KDY-02 & KDY-태그 소지자]
동시에 나는 문태식 팀장의 유품인, 잉크가 말라붙은 볼펜을 꺼내 단말기의 ‘조건부 인정’ 버튼 위에 꾹 눌렀다. 볼펜 끝에 남아 있던, 수만 번의 결재 도장을 찍으며 쌓인 문 팀장의 ‘업무 승인’ 잔향이 단말기 회로 속으로 스며들었다.
[잔향 인증 시도: MTS (문태식) - 최종 권한 위임 확인]
[상태 업데이트: KDY-02의 사망 사유 인정 완료 / 잔향 기반 인증 성공]
거대한 금속 손가락이 내 코앞 10센티미터 앞에서 멈췄다. 붉게 빛나던 광학 센서가 노란색으로 바뀌며 빠르게 점멸했다. 놈의 스피커에서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알림: 대상 KDY-02의 신분이 ‘폐기 대상’에서 ‘사망 확정 및 이송 대기자’로 변경되었습니다.]
[지침: 사망자의 원활한 저승 야근을 위해, 협회 규정 304조에 의거하여 지하 4층 사망자 대기실로 이송 절차를 시작합니다.]
[협회 안내: 죽어서도 협회 소속입니다. 사후 세계에서도 성실한 업무를 부탁드립니다. 길을 비킵니다.]
방호 유닛은 쿵쾅거리는 소리를 내며 거대한 몸집을 옆으로 비켰다. 놈의 유압 실린더가 서서히 수축하며 대기 모드로 전환되었다. 마치 죽은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말단 사원처럼.
나는 실소했다. 죽어서도 번호표를 뽑아야 하는 이 미친 협회 시스템은, 사후 세계보다 더 악랄한 것이 분명했다.
“지금이야! 뛰어!”
우리는 멈칫거리는 방호 유닛의 옆을 지나 정비용 리프트로 몸을 날렸다. 한지율이 리프트의 낡은 레버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리프트의 철문이 닫혔다. 놈의 노란 광학 센서가 우리를 배웅하듯 멀어졌다.
리프트 내부는 정비용이라기보단 시체 이송용에 가까웠다.
바닥에는 낡은 들것을 고정하던 레일이 녹슨 채 박혀 있었고, 구석에는 검은 비닐 커버가 찢어진 채 뒹굴고 있었다. 코를 찌르는 건 낡은 기름 냄새가 아니라, 시체를 부패하지 않게 하려는 싸구려 방부제 냄새였다.
한지율은 리프트 한구석에 기대어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도윤 씨, 지하 4층이 어떤 곳인지 알아요?”
“죽은 헌터들이 대기하는 곳이라며. 뭐, 영안실 같은 거 아니야?”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이런 곳에서 담배를 피웠다간, 죽은 헌터들이 담배 한 대만 달라고 일어날 것 같았다.
“그냥 영안실이 아니에요.”
그녀가 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거긴… 산 사람의 체온이 감지되면 안 되는 곳이에요. 만약 체온이 감지되면, 대기실 시스템이 그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사망 사유’를 자동 배정한다고 들었어요. 우리가 거기 들어가면, 우리도 ‘죽은 사람’으로 처리될 수도 있다고요.”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그 지식이 어디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협회 데이터베이스에도 없는 정보를, 그녀는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알고 있었다.
KDY-01은 사망하지 않았다. 회수 실패 후 검은 우산으로 이관.
단말기에서 봤던 그 문장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KDY-01은 누구고, KDY-02는 누구인가.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누군가의 잔향을 쫓아 여기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윤서하는, 그 검은 우산의 일부인가, 아니면 그저 이용당한 희생자인가.
그녀의 잔향이 지하 4층에 예약되었다는 건, 그녀가 정말 죽었다는 뜻일까. 아니면 누군가 그녀를 죽음으로 위장하려는 것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이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순간 우리는 그 진실과 직접 마주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덜컹, 덜컹.
리프트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온도계의 숫자가 빠르게 내려갔다. 영하 5도. 영하 10도.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한지율의 하얀 숨결이 허공에 흩어졌다.
마침내 리프트가 멈추고, 낡은 철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차가운 냉기와 함께, 기괴한 풍경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그곳은 병원 영안실과 협회 민원실이 기묘하게 섞인 공간이었다. 천장에는 수명이 다해가는 차가운 형광등이 깜빡이며 불규칙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정면에는 ‘접수 창구’라고 적힌 아크릴판이 있었고, 그 앞에는 헌터 협회 로비에서나 볼 법한 낡은 의자들이 퀭하니 놓여 있었다.
창구 옆에는 번호표 기계가 서 있었고, 그 너머로 수천 개의 금속 서랍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시체 보관용 서랍들이었다.
“이게… 사망자 대기실?”
한지율이 목소리를 낮췄다. 냉기가 몸을 휘감았다. 방부제 냄새는 더욱 짙어졌고, 그 사이로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악취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괴한 건, 그 차가운 타일 바닥 위에 찍힌, 수많은 검은 우산 자국들이었다. 물기는 없었다. 하지만 바닥의 왁스가 그 우산 자국만 피해 굳어 있어서, 마치 누군가 검은 잉크로 우산 자국을 새겨놓은 것처럼 선명했다.
그 자국들은 리프트 입구에서 시작되어 접수 창구 안쪽으로 어지럽게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한 발짝 내딛는 순간, 잔향청취가 폭주했다.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내 귀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죽은 자들이 남긴, 마지막 민원이었다.
[…이봐, 내 게이트 보상금은 어떻게 된 거야? 왜 아직도 입금이 안 돼?]
[…협회장 개새끼… 내가 죽으면 가족들한테 연금 준다며… 다 거짓말이었어…]
[…죽어서도 번호표를 뽑아야 한다니… 이 미친 협회 민원 시스템은 사후세계보다 악랄해…]
그중 하나의 잔향이 유독 크고 또렷하게 들렸다.
[…저기, 제 번호표는 누가 대신 뽑아줬나요? 저는 아직 민원 신청 안 했는데요…?]
윤서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여기에 ‘접수’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윤서하의 번호표는 누가 대신 뽑은 것일까.
나는 한지율을 이끌고 검은 우산 자국을 따라 접수 창구로 향했다. 창구 안쪽은 캄캄했다. 하지만 우산 자국은 그 어둠 속으로, 마치 바닥을 파먹듯이 이어져 있었다.
나는 침을 삼키며, 들리지 않는 윤서하의 잔향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의 웃음소리를, 그녀가 내뱉었던 마지막 숨결을.
하지만 들리는 건 그녀 본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대상: 윤서하 / 신분 확인 완료 / 사망 사유: 이관 중 사고 / 담당자: 지정 대기 중]
그것은 창구 안쪽,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윤서하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누군가의 접수 멘트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 그것은 마치 기계 같기도 하고, 죽은 자의 영혼 같기도 했다.
나는 숨을 죽이고 KDY 태그를 손바닥 안쪽으로 고쳐 쥐었다. 한지율은 내 뒤에서 숨을 죽인 채, 나의 행동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띵동.
정적이 흐르던 대기실에, 낡은 번호표 기계의 전자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번호표 기계가 혼자 작동하더니, 스르륵, 종이 한 장을 뱉어냈다.
나는 홀린 듯 그 기계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기계가 뱉어낸 번호표를 집어 들었다.
종이 위에는 차가운 잉크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번호: 404]
[대상: KDY-02]
[사망 사유: 본인 확인 실패]
[담당자: 윤서하]
내 사망 사유가 ‘본인 확인 실패’라니. 그리고 담당자가 윤서하라고?
혼란에 빠진 내 머릿속을 헤집고, 접수 창구 안쪽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윤서하와 똑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계적인 멘트가 아니었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그것은, 분명 나를 부르는, 나를 알고 있는 누군가의 초대였다.
나는 번호표를 손에 꽉 쥔 채, 윤서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어둠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퇴근 시간은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났지만, 오늘의 진짜 야근은 이제 막 시작된 것 같았다.
작가의 말: 지하 4층, 협회 민원실보다 더 지독한 곳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도윤 씨의 사후 야근 수당은 누가 챙겨줄까요? 다음 화에서 확인하세요!
제목: 29화. 담당자 윤서하
번호표는 차가웠다. 그냥 종이 쪼가리 주제에 5밀리리터짜리 마나 포션 병을 쥐었을 때보다 더 묵직한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번호: 404] [대상: KDY-02] [사망 사유: 본인 확인 실패] [담당자: 윤서하]. 이 그지같은 종이 한 장이 내 남은 퇴근길을 지옥행 편도로 끊어버린 기분이었다.
“강도윤 씨! 들어가면 안 돼요! 그거 놔요!”
한지율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시야 가장자리에 걸렸다. 나도 놓고 싶다. 퇴근하고 맥주 한 캔 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 굳이 영안실 민원실로 기어들어 가고 싶겠냐고.
하지만 손가락에 붙은 번호표는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내 피부의 일부가 된 것처럼, 억지로 떼어내려 하자 살점이 뜯겨나가는 듯한 화끈거림이 느껴졌다. 단순히 풀로 붙인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시스템이 나를 ‘접수’했다는 물리적인 낙인이었다.
“안 떨어져. 이 빌어먹을 게.”
접수 창구 안쪽,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울렸다.
“다음 분, 들어오세요.”
윤서하의 목소리. 하지만 그 안에는 매일 아침 커피를 마시며 나누던 가벼운 농담도, 업무에 시달린 피곤함도 없었다. 오직 기계적인 냉소만이 가득했다. 나는 한지율의 손을 뿌리치고 창구 옆, ‘면담실’이라고 적힌 어두운 통로로 발을 디뎠다.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다. 번호표가, 이 지하 4층의 시스템이 나를 잡아끄는 것 같았다.
통로를 지나 나타난 방은 민원실 뒤편의 사무 공간이 아니었다. 좁고 사방이 꽉 막힌 취조실, 혹은 면담실이었다.
중앙에는 차가운 금속 책상이 놓여 있었고, 그 좌우로 녹이 슨 철제 의자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다. 천장 구석에는 빨간 불빛이 깜빡이는 녹화 카메라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벽면 가득 지저분하게 붙은 종이들에는 ‘사망 사유 분류표’라는 제목 아래 온갖 기괴한 죽음의 방식들이 코드화되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책상 위, 누군가 마시다 만 믹스커피 종이컵이 놓여 있었다. 미지근한 온기가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방금 전까지 누군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나는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았다. 살아서도 협회 민원실이라면 치를 떨었는데, 죽어서 사망 접수 면담까지 받아야 한다니. 이게 말로만 듣던 한국형 지옥의 완성판인가. 퇴근길에 헌터 사냥꾼한테 쫓기고, 괴물한테 쫓기고, 이젠 죽은 직장 동료(혹은 동료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무언가)와 면담이라니.
책상 맞은편, 어둠 속에 윤서하처럼 보이는 형체가 앉아 있었다.
천장의 형광등이 지직거리며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빛이 터질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언뜻 보였지만, 곧이어 반사되는 빛과 그림자에 섞여 정체를 확정할 수 없었다. 윤서하의 단정한 단발머리 같기도 했고, 그저 검은 연기가 뭉쳐 있는 것 같기도 했다.
“KDY-02 접수자님. 면담을 시작합니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KDY-02’라는 코드네임에 ‘접수자’라는 직함이 붙은 존재일 뿐이었다.
“출입 권한 확인. 본인 확인 절차를 진행합니다. 세 가지 질문에 답변해 주십시오. 거짓은 기록되지 않습니다.”
말투는 딱딱했고, 감정이 메말라 있었다. 이건 면담이 아니었다. 심문이거나, 아니면 시스템의 인증 게임이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이 질문에 그냥 대답하면 안 된다는 직감이 본능적으로 강하게 들었다. 대답하는 순간, 나는 이 시스템이 규정한 ‘사망자’로 고정될 것이다. 꼼짝없이 이 지하 4층의 금속 서랍 속에 갇히게 될 터였다.
잔향청취를 끌어올렸다. 귀가 찢어질 듯한 이명이 다시 시작됐지만, 나는 이 방의 정보를 긁어모아야 했다.
먼저 책상 위의 믹스커피 종이컵.
[...이거, 서하가 타주는 게 제일 맛있는데... 쯧, 왜 또 호출이야...]
문태식의 목소리였다.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했다. 그는 이 방에 왔었다. 이 미지근한 커피를 남기고 갈 정도로 최근에. 살아서 왔는지, 아니면 죽어서 여기까지 끌려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잔향은 공포로 절어 있었다.
다음은 천장의 녹화 카메라.
[시스템 기록: YSH 권한 출입 확인. 영상 기록 없음. 사유: 보안 승인 레벨 초과.]
카메라의 마지막 정상 기록. 윤서하라는 ‘사람’이 들어온 게 아니었다. ‘윤서하의 출입 권한’만이 이 방에 들어왔다. 몸뚱이 없이 권한만 움직일 수 있는 건가? 아니면 누군가 그녀의 권한을 훔쳐서?
마지막으로 벽면의 사망 사유 분류표.
내 번호표에 적힌 ‘본인 확인 실패’라는 코드를 찾았다. [코드 404: 신원 분리 절차 시작. 원본과의 동기화 끊김. 폐기 대기.]
죽음의 원인이 아니었다. 이건 나를 ‘강도윤’이라는 원본에서 분리해 폐기하는 절차의 시작 코드였다.
“첫 번째 질문입니다.”
어둠 속의 담당자가 말했다. 형광등이 지직거렸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정답을 모른다. 시스템이 원하는 답은 ‘KDY-02’일 수도,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 ‘강도윤’이라고 대답하면? ‘본인 확인 실패’ 코드가 더 확실해질 뿐이다.
쾅! 쾅! 쾅!
면담실 유리창 너머로 한지율이 주먹으로 유리를 두드리는 모습이 보였다. 입을 벙끗거리며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녀의 움직임이 아주 느리게 보였다. 마치 이곳과 창구 밖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처럼.
“두 번째 질문입니다.”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가 계속했다.
“당신의 사망 사유는 무엇입니까?”
이것도 모른다. 나는 아직 안 죽었으니까. 하지만 이 시스템은 나를 사망자로 처리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
“세 번째 질문입니다.”
목소리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는 것 같았다. 아주 짧게, 그 무미건조한 말투 사이로 다급함 같은 게 스쳤다.
“당신이 보호하지 못한 원본은 누구입니까?”
원본? KDY-01을 말하는 건가? 내가? 보호하지 못했다고? 나는 KDY-01이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카피라는 사실조차 오늘 처음 알았다. 이 그지같은 질문들에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대답해야 했다. 시스템의 방식이 아니라, 내 방식으로.
“모르는 걸 안다고 쓰는 게 기록을 죽이는 방식이라고 배웠는데.”
나는 번호표를 쥔 손을 책상 위에 올리며 어둠 속의 그녀를 노려봤다. 검은 눈의 인물이 했던 경고가 떠올랐다. 기록을 믿지 말라고. 시스템이 내게 요구하는 답을 주는 건, 스스로를 시스템의 기록 속에 박제하는 꼴이었다.
“내 이름은 강도윤. 사망 사유는 아직 미정. 내가 보호하지 못한 원본? 그딴 건 몰라.”
나는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그리고 당신, 윤서하 아니지?”
내 답변이 끝나자마자, 천장의 형광등이 미친 듯이 깜빡거렸다. 방 안의 냉기가 한순간에 걷히는 것 같았다.
“역시...”
어둠 속에서, 민원 담당자의 딱딱한 말투가 깨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짧게, 하지만 분명했다. 그건 매일 아침 “도윤 씨, 또 지각이야?”라며 웃던, 진짜 윤서하의 목소리였다.
“늦었네요, 강도윤 씨.”
그게 끝이었다. 형광등이 완전히 켜지자, 맞은편 의자는 비어 있었다. 믹스커피 종이컵만 여전히 미지근한 온기를 품은 채 놓여 있을 뿐이었다.
손바닥에 붙어 있던 번호표가 스르르 떨어졌다. 종이 위, [사망 사유: 본인 확인 실패]라는 글자가 흐릿해지더니 [본인 확인 보류]로 바뀌어 있었다. 시스템이 나를 사망자로 확정하는 걸 실패했다. 즉시 죽음으로 고정되는 위기는 넘긴 셈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 순간, 벽면에 가득 붙어 있던 ‘사망 사유 분류표’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종이들이 찢어지며 그 뒤에 숨겨져 있던 벽면이 서랍처럼 열렸다.
낡고 녹슨 금속 서랍 안에는, 다른 헌터들의 태그처럼 보이지만 훨씬 더 오래되고 닳아빠진 헌터 태그 하나가 덩그라니 놓여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 태그를 집어 들었다.
차갑고 묵직한 태그 뒷면에는 ‘KDY-01’이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YSH-00 / 사망 미접수]
그때, 텅 빈 맞은편 의자 방향에서, 다시 한번 윤서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면담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하는 경고처럼.
“윤서하 씨는 아직 죽지 않았어요. 그런데 방금 누군가 당신 대신, 그녀의 사망을 접수했죠.”
작가의 말: 출근보다 힘든 게 사망 접수라니, 한국형 지옥은 역시 대단합니다. 도윤이 주운 태그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다음 화에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 작가의 말
지하 4층 사망자 대기실과 담당자 윤서하. 도윤은 죽음으로 확정되는 대신, 더 위험한 보류 상태에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