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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171화. 냄새 없는 시신 목록과 산소마스크를 쓴 집행관 일러스트

170-171화. 냄새 없는 시신 목록과 산소마스크를 쓴 집행관

170-171화. 냄새 없는 시신 목록과 산소마스크를 쓴 집행관

170화. 냄새 없는 시신 목록

원장의 종이 질감이 변했다. 습기를 머금어 눅눅하던 이전 페이지와 달리, 새로 펼쳐진 면은 소름 끼칠 정도로 매끄럽고 차가웠다. 마치 갓 부검을 마친 시신의 피부처럼.

그 하얀 지면 위로 붉은색 활자가 낙인처럼 박혔다.

[다음 안건: 폐기 승인권자 반가온 / 냄새 없는 시신 목록]

“……어?”

가온이의 손에 들린 감정용 돋보기가 가늘게 떨렸다. 렌즈 너머로 투영된 그녀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돋보기의 금속 테두리가 원장의 차가운 기운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그 빛은 가온이의 얼굴을 시체처럼 창백하게 만들었다.

원장 하단에 나열된 이름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피해자: B-04 무명 헌터 / 판정: 원본 훼손 / 처분: 폐기 완료]

[피해자: 사망 미접수자 405 / 판정: 잔향 소멸 / 처분: 폐기 완료]

[피해자: 투명 우산 회수자 / 판정: 보호자 후보 탈락 / 처분: 폐기 완료]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가온이가 '감정'했던 사건들의 피해자들이었다.

“아니야. 난 그냥…… 난 그냥 냄새를 맡았을 뿐이에요. 이 사람이 진짜인지, 가짜 잔향인지 말해달라고 해서…….”

가온이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녀가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원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괴한 향기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것은 냄새였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비린내도, 부패취도 아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기록이 지워진 종이의 탄내'에 가까웠다. 존재의 본질이 가위질당해 나간 자리에 남는 공백의 냄새.

“가온아, 정신 차려. 네 잘못이 아니야.”

내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지만, 내 손보다 먼저 움직인 것은 윤서하의 검끝이었다.

서하가 내민 검은 허공을 갈라 가온이와 원장 사이에 날카로운 선을 그었다. 그 선은 공격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가온이가 내린 '감정'이라는 판정이 '폐기'라는 결론으로 직결되지 않도록 막아서는 격리선이었다.

“강도윤 씨, 가온이의 호흡이 불안정해요. 원장이 가온이의 감각을 강제로 동기화시키고 있어요.”

서하의 말대로였다. 원장은 가온이가 과거에 맡았던 현장들의 냄새를 하나씩 재생하고 있었다.

폐기 장비함 B-04에서 발견된 이름 모를 헌터의 찢어진 옷가지 냄새.

비 오는 날 골목에 버려졌던 주인 없는 투명 우산의 마른 비린내.

사망 접수조차 되지 못한 채 증발해버린 405번 담당자의 서류 냄새.

그 모든 것들이 가온이의 코끝을 후벼 팠다.

“이 사람들은…… 냄새가 없었어요.”

가온이가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죽었는데, 죽은 냄새가 안 났어.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잔향이 통째로 잘려 나가서…….”

나는 목록을 훑었다. 냄새 없는 시신들.

그것은 단순히 무취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시스템의 관점에서 '원본 판정'에서 탈락한 이들. 혹은 검은 우산의 남자가 '보호자 후보'로 점찍었다가 회수해버린 찌꺼기들.

그 명단의 맨 마지막 줄이 서서히 번지며 내 이름을 그려냈다.

[차기 폐기 대상: 강도윤(잔향)]

명단이 사람보다 성실한 세상은 망한 거다. 나는 입안의 쓴 침을 삼켰다.

“강도원.”

내가 허공을 향해 낮게 뱉었다. 그림자 속에서 서류를 넘기는 듯한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이게 네 방식인가? 가온이한테 죄책감을 씌워서 승인 도장으로 쓰는 거.”

[도구와 책임을 구분하는 것은 행정의 영역이 아니란다, 도윤아.]

강도원의 목소리가 원장의 지면을 타고 울렸다. 직접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선이 우리를 해부하듯 핥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판정은 곧 결과지. 감정사가 '가짜'라고 말하는 순간, 시스템은 그것을 '폐기물'로 분류한다. 서류가 복잡해지는 걸 원치 않는다면, 너도 그 단순한 논리를 받아들이는 게 좋을 텐데.]

“웃기지 마.”

나는 가온이의 손에서 돋보기를 빼앗듯 쥐었다. 그리고 원장의 목록 하단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가온이의 이름 옆에 찍힌 직인. 그것은 분명 반가온의 수인(手印)처럼 보였지만, 무언가 이질적이었다.

내 능력, 잔향청취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 서명에는 사람의 체온이 없었다.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도,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거, 가온이가 찍은 거 아니야.”

나는 확신하며 말했다.

“이건 '감정 결과 자동 전송값'이야. 가온이가 냄새를 맡고 판정을 내리면, 시스템이 그걸 가로채서 승인란에 복사해 넣은 거라고. 가온이는 도장을 찍은 게 아니라, 도장으로 쓰인 거야.”

서하의 검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가온이를 가로막은 격리선을 더 공고히 하며 물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죠? 결과적으로 폐기는 집행됐는데요.”

“책임의 소재가 달라지지. 승인자가 아니라 감정서라면, 이 서류는 '본인 의사'가 결여된 무효표가 될 가능성이 있어.”

내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발치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미등록…….”

“미기재…….”

“미결정…….”

KDW-0였다. 내 얼굴을 한 그 괴물은 냄새가 없어서 목록에 잡히지 않았다. 대신 그는 목록의 빈칸들 사이를 기어 다니며, 이름 없는 죽음들의 파편을 주워 먹고 있었다. 그는 나를 보며 입꼬리를 찢어지게 올렸다.

“냄새가…… 없어. 여기도, 저기도.”

KDW-0가 가리킨 곳은 원장의 바깥, 즉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의 경계였다.

그때였다. 가온이가 갑자기 내 손에서 돋보기를 낚아챘다. 그녀의 눈에 서려 있던 공포가 기이한 집념으로 바뀌어 있었다.

“도윤 아저씨 말이 맞아요. 나, 도장 찍은 적 없어요.”

가온이가 코피를 훔치며 원장의 빈칸에 돋보기를 들이댔다.

“그리고 이 목록…… 이상해요. 냄새가 없는 게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지웠어요. 아주 지독하고 역겨운 냄새로 덮어씌워서 아무것도 못 맡게 만든 거예요.”

가온이는 자신의 능력을 비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있는 냄새'를 맡아 진짜와 가짜를 구분했다면, 지금 그녀는 '냄새가 없는 냄새'를 역추적하고 있었다.

공백을 추적하는 감정.

그것은 가온이에게도 상당한 무리인 듯, 그녀의 안색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찾을 수 있겠어?”

내 물음에 가온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원장의 여백을 훑더니, 허공의 어느 한 지점을 향해 뻗었다.

“이 냄새…… 여기로 이어져요. 원장 속이 아니라, 저기…….”

가온이가 가리킨 곳은 검은 우산의 남자가 서 있는 쪽도, 강도원의 그림자가 드리운 쪽도 아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우리가 들어온 문의 틈새, 즉 현실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를 향하고 있었다.

동시에 내 귓가에 익숙한 리듬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툭, 툭툭, 툭.

문태식의 잔향 노크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생존을 호소하는 절박한 소리가 아니었다. 무언가 기계적인 박자,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는 진동.

“태식 형님……?”

내가 중얼거리는 순간, 가온이의 목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아저씨! 냄새가…… 문태식 아저씨의 산소마스크에서 나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온이가 역추적한 '냄새를 지운 범인'의 흔적이, 지금 병실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어야 할 문태식의 의료 장비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류와 현실을 분리하는 건 초보적인 실수지.]

강도원의 목소리가 즐거운 듯 낮게 깔렸다.

[태식이가 아직 숨을 쉬고 있다고 생각하니? 아니면, 누군가 그의 숨을 '대신'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

나는 고개를 돌려 현실의 문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증언 보전 중으로 묶어두었던 문태식의 맥박 그래프가 내 머릿속에서 위험하게 요동쳤다.

만약 문태식이 승인권자가 아니라, 시스템이 숨어들기 위한 '껍데기'로 이용되고 있는 거라면.

가온이가 맡은 그 '냄새 없는 냄새'의 주인이 문태식의 육체를 빌려 이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라면.

툭, 툭툭, 툭.

노크 소리가 멈췄다.

대신, 원장의 다음 페이지가 피에 젖은 채 스르르 넘어갔다.

거기에는 문태식의 이름이 없었다.

대신, '집행관'이라는 직함 아래에 공란으로 남겨진 서명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현실의 병실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이 내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렸다.

삐이이이이-.

누군가의 숨이 멈췄을 때 나는, 혹은 누군가 타인의 숨을 완전히 빼앗았을 때 나는 단절음이었다.

나는 가온이를 끌어안으며 소리쳤다.

“서하 씨, 선 그어! 현실이랑 여기, 통로 끊어버려!”

하지만 서하의 검끝은 이미 허공이 아닌, 내 등 뒤를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언제 왔는지 모를, 문태식의 환자복을 입은 형체가 투명한 우산을 쓴 채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가 쓴 산소마스크 안으로, 자욱한 종이 연기가 번져나가고 있을 뿐이었다.

171화. 산소마스크를 쓴 집행관

등 뒤에서 들리는 소리는 숨소리가 아니었다. 눅눅한 종이가 불꽃도 없이 타들어 가며 내뿜는, 매캐하고 건조한 연기 소리였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낡은 환자복 소매였다. 병원 소독약 냄새가 배어 있어야 할 천 조각에선 비릿한 쇠 냄새와 먼지 냄새만 났다. 그 위로 투명한 비닐 우산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었다. 우산 살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빗물이 아니라, 검게 죽은 글자들의 파편이었다.

그리고 산소마스크.

플라스틱 마스크 안쪽은 희뿌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연기 너머로 익숙한 얼굴의 윤곽이 보였다. 문태식. 나를 이 바닥으로 끌어들이고, 내 가짜 보호자 노릇을 자처하며, 지금은 중환자실에서 기계에 의지해 생명을 이어가고 있어야 할 사내.

“……팀장님?”

내 목소리가 떨렸다. 방어기제가 작동하기도 전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밀었다. 저건 문태식이 아니다. 하지만 내 잔향청취는 저 형체의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틱, 틱, 틱, 틱.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기계적인 소음. 심장 박동이라기엔 너무나도 정교하고 차가운 초침 소리였다.

형체가 입을 열었다. 산소마스크 안에서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일그러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강 대리…… 야근 중인가. 출근부 기록이…… 미비하군. 보충이 필요해.”

문태식 특유의 거친 가래 끓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문장 구조가 이상했다. 평소의 그라면 ‘이 새끼야, 아직도 안 자고 뭐 해?’라고 욕부터 박았을 텐데, 지금의 목소리는 마치 법조문을 낭독하는 기계처럼 딱딱하게 분절되어 있었다.

“환자복까지 입고 야근 나오시면 산재 신청은 누구한테 합니까. 원장님한테 합니까?”

나는 짐짓 농담조로 대꾸하며 뒷걸음질 쳤다. 손바닥에 식은땀이 고였다.

그때, 허공을 가르는 서늘한 검풍이 형체와 나 사이를 갈랐다. 윤서하였다. 그녀의 검끝이 네 번째 선을 그리며 바닥에 깊은 궤적을 남겼다.

“오지 마.”

서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녀의 검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침식된 이름의 여파가 여전한지, 그녀가 그어놓은 경계선이 마치 노이즈가 낀 화면처럼 지직거리며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럼에도 서하는 이를 악물고 현실의 병실과 이 기괴한 ‘원장’ 사이의 연결 통로를 부분적으로나마 차단해내고 있었다.

“도윤 씨, 저건…… 살아있는 사람의 잔향이 아니에요.”

가온이가 내 옷소매를 붙잡으며 속삭였다. 돋보기를 쥔 그녀의 손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냄새가 섞여 있어요. 병원 소독약, 오래된 서류 뭉치, 그리고…… 그 검은 우산 남자한테서 났던 그 마른 비 냄새까지요. 그런데 그 밑바닥에 팀장님 본인의 땀 냄새가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섞여서 타오르고 있어요.”

가온이의 말에 나는 다시 형체를 응시했다. 잔향청취를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소리의 층을 분리한다. 배경으로 깔린 원장의 종이 넘기는 소리를 지우고, 서하의 거친 숨소리를 밀어냈다. 오직 저 형체에게서만 나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틱, 틱, 틱 하는 기계음 밑에, 아주 작게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똑, 똑.

불규칙한 노크 소리. 문태식이 담배를 피우러 나가기 전 책상을 두드리던 그 버릇없는 리듬이었다.

진짜다. 저 안에는 진짜 문태식의 일부가 박제되어 있다.

“저 아저씨 안에 빈칸이 타고 있어.”

내 옆에 무심하게 서 있던 KDW-0가 무미건조하게 뱉었다. 아이는 환자복 형체의 가슴팍, 정확히는 산소마스크와 연결된 호스 부근을 가리키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게 아니라, 숨을 연료로 쓰고 있어. 빈칸을 채우려고.”

“빈칸?”

내가 되묻는 순간, 강도원의 차가운 목소리가 공간을 장악했다.

“훌륭한 관찰력이군.”

강도원은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펜을 굴리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어느새 새로운 서류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상단에는 집행관이라는 직함이 박혀 있었고, 그 옆의 성명란은 비어 있었다.

“문태식 팀장은 훌륭한 공직자였지. 하지만 지금은 그저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연명하는, 행정적으로 ‘유예된 죽음’일 뿐이다. 강도윤, 네가 저 서명란에 이름을 적는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강도원이 펜을 내밀었다.

“네가 집행관이 되어라. 그러면 저 목록에 적힌 ‘냄새 없는 시신’들의 처분권을 네가 갖게 된다. 그들의 남은 잔향을 추출해 문태식의 타버린 폐를 채울 수도 있겠지. 보호자를 살리고 싶지 않나?”

형체가 내게로 한 걸음 다가왔다. 투명 우산 끝에서 검은 잉크가 뚝뚝 떨어져 바닥의 격리선을 오염시켰다.

“서명해…… 강 대리. 이게…… 효율적인…… 절차다.”

형체의 산소마스크 안쪽에서 종이 연기가 격렬하게 솟구쳤다. 마치 대답을 재촉하는 것처럼.

유혹적인 제안이다. 내가 집행관이 된다면, 문태식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시스템의 일부가 되어 그 권능을 휘두를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강도원이 말하는 ‘효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목록에 적힌 다른 ‘무명 헌터’나 ‘사망 미접수자’들을 진짜로 지워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강도원이 내민 펜을 보는 대신, 형체의 목에 걸린 산소마스크 줄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 작은 라벨 하나가 붙어 있었다. 환자의 인적 사항이 적혀 있어야 할 병원 팔찌 조각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적힌 것은 이름이 아니었다.

[보호자 번호: 0000 (연체 중)]

순간, 저 멀리 어둠 속에 서 있던 검은 우산 남자의 손목에서 흰 고리가 번쩍였다. 형체의 라벨에 적힌 번호와 남자의 고리가 마치 같은 심장 공유하는 것처럼 동일한 리듬으로 깜빡였다.

저 마스크는 통로가 아니다. 문태식의 호흡을 빨아들여 저 검은 우산의 주인에게, 혹은 이 거대한 시스템에게 공납하는 ‘대리 호흡 장치’다.

“환자복 입은 사람한테 서류 작업 시키는 거 아닙니다, 원장님.”

나는 펜을 잡는 대신, 품 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형체의 산소마스크 줄을 낚아채듯 잡아당겼다. 형체가 휘청이며 내 쪽으로 쏠렸다.

“강도윤! 무슨 짓을!”

강도원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균열이 갔다.

나는 마스크 줄을 강제로 끌어당겨, 강도원 책상 위에 놓인 집행관 서명란의 공란에 툭 던지듯 걸쳐놓았다.

“서명은 본인이 직접 해야죠. 제 숨도 아닌데 왜 제가 서명을 합니까?”

마스크 줄이 서명란에 닿는 순간,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강렬한 스파크가 튀었다. 서명란의 빈칸이 형체로부터 흘러나온 종이 연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가온아, 지금이야!”

나의 외침에 가온이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두려움에 떨던 손을 뻗어 자신의 감정용 돋보기를 형체와 서류 사이에 들이댔다.

가온이의 눈빛이 변했다. 항상 타인의 판정 결과만 읽어내던 수동적인 감정사가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조작을 똑똑히 응시하고 있었다.

“이건…… 이건 가짜가 아니에요.”

가온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게 말했다. 그녀는 허공에 나타난 시스템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진짜도 아니에요. 이건…… 조작된 기록이에요!”

가온이가 허공의 판정 문구를 손가락으로 직접 긁어내기 시작했다. 폐기 승인이라고 적혀 있던 붉은 글자들이 그녀의 손끝에서 뭉개졌다. 가온이는 그 위에 새로운 문장을 새겨 넣었다. 아니, 그녀의 의지가 시스템의 강제 사항을 덮어쓰기 시작했다.

[판정 보류: 냄새 조작 흔적 있음]

그 순간, 원장실을 가득 채우고 있던 ‘냄새 없는 시신 목록’들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벽면을 가득 채웠던 이름 없는 종이들이 비명을 지르듯 펄럭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 건방진……!”

강도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뒤로 거대한 서류철들이 날개처럼 펼쳐지며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냈다.

하지만 가온이의 판정 수정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돋보기가 환자복 형체의 산소마스크를 정면으로 비췄다.

“이 호흡의 주인은 아직 죽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건 폐기 대상이 될 수 없어요!”

콰아앙!

원장실의 천장이 무너져 내릴 듯한 진동이 울렸다. 환자복 형체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연기가 흩어지며, 문태식의 창백한 얼굴이 아주 잠깐 드러났다. 그는 나를 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잔향청취는 그의 입 모양을 읽어냈다.

‘튀어, 이 새끼야.’

그와 동시에 현실의 병실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이 내 고막을 때렸다.

비이이이이-.

심정지를 알리는 플랫 라인 소리.

나는 가온이와 서하를 잡아당기며 뒤로 뛰었다. 강도원의 서류 날개들이 우리를 덮치려던 찰나, 바닥의 목록들이 일제히 뒤집히며 새로운 문구를 내뱉기 시작했다.

가온이의 판정 보류가 불러온 연쇄 반응이었다. 차기 폐기 대상: 강도윤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던 자리가 지워졌다. 나는 안도하며 숨을 내쉬려 했지만, 다음에 떠오른 문장을 본 순간 내 심장은 얼어붙고 말았다.

[처리 지연으로 인한 긴급 승인 절차 개시]

[집행관 후보: 강도윤]

[사용 가능한 호흡 권한: 문태식(잔향 점유율 88%)]

그리고 그 밑에, 핏빛으로 물든 마지막 문장이 박혔다.

[경고: 보호자의 심장이 멈추기 전까지 서명을 완료하십시오. 서명하지 않을 시, 점유된 잔향은 즉시 폐기됩니다.]

살리고 싶으면 내 이름을 써라.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문태식의 숨을 빼앗아 쓰는 ‘집행관’이 된다.

강도원의 웃음소리가 무너져 내리는 공간 속에 메아리쳤다.

“자, 강도윤. 이제 누구의 숨으로 연명할 테냐?”

나는 멈춰버린 기계음과 나를 옥죄어오는 시스템 메시지 사이에서, 떨리는 손으로 펜을 쥔 채 멈춰 섰다.

문태식의 산소마스크 안에서, 마지막 종이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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